중국 북경, 백두산, 두만강 역사탐방
김윤자
2006년 8월
천진, 북경, 연길, 백두산, 도문, 두만강, 용정
* 천진
한국의 인천과 같은 도시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큰 편이다. 천진 공항은 에어컨으로 시원했으나 바깥은 상당히 더운 날씨다. 북경 공항이 복잡하여 입국수속이 수월한 천진공항으로 와서 전용버스로 북경으로 이동 중이다. 천진에서 북경까지는 1시간 50분 소요된다. 공항의 사정으로 이런 코스를 정했지만, 나는 천진 공항에서 북경으로 이동하는 동안의 중국 풍경을 보는 것도 큰 관광이라 생각되어 직접 베이징 공항으로 가는 것보다 더 좋다. 이곳 천진 역시 맑은 날씨다.
* 북경 왕부정 거리
북경시 최대의 번화한 거리로서, 시 동편에 길게 늘어선 상점거리다. 약 1km 가량의 거리 왼편으로 약 100여 개의 각종 상점이 들어서 있는데, 우의 상점을 비롯한 신화서점 등 유명한 상점을 비롯해 우의빈관과 같은 호화 호텔도 자리하고 있다. 거리 서쪽에는 중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북경 백화점이 있으며 동쪽에는 신동안 시장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 황실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황실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왕부정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이곳은 아직도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상점과 빌딩이 많으며 우리의 명동, 압구정 거리 쯤으로 비교된다. 상업거리로는 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먹거리도 가득한 곳으로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간식거리가 있어서 역시 음식천국이라 불리는 중국을 실감케 한다. 특히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한 불빛으로 행인들을 유혹하는데, 이곳저곳 둘러보는 여유가 북경여행을 즐겁게 한다.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하루의 일정을 다 마치고 호텔에 가기 직전 들른 곳이다. 야경이 은은하다. 포장마차가 여러 종류지만 진열된 먹거리는 종류가 비슷하다. 지네, 메뚜기, 참새구이 등 기이한 것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부른다. 북경은 전기가 부족하여 어둡다. 그래도 왕부정 거리가 가장 밝다는데 한국의 번화가에 비하면 으슥한 뒷골목이다. 구정에서 대보름까지만 모든 네온 사인이 허락되어 다 켜고 그 외는 못 켜게 한다. 밤 10시 30분경 불이 모두 나가고 홍등이 흑등으로 바뀌어 더욱 어둡다. 전기절약이란 말에 뒤돌아서 가던 길을 돌아오며 상당히 넓은 대로변의 어둠을 우리 정서로 이해하기엔 힘든 대목이지만 역시 급부상하는 중국의 보이지 않는 저력이다. 그래도 여전히 화려한 거리다.
* 분지 도시 북경
명나라 때부터 ‘북경’ 이라 칭하게 된 북경은 분지 도시다. 여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지리적인 요인으로 지금의 체감 온도가 한국보다 훨씬 덥다. 중국은 넓어서 여름에도 눈이 있는 곳이 있는 반면, 두 번 농사 짓는 더운 곳도 있다. ‘소주’ 는 ‘하늘 아래 천당’ 으로 아름다운 곳인데 북경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곳에 도읍지를 정하면 황제가 오래오래 그 지위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해서, 둘째 흉노족 유목민과 만리장성 부근에서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셋째 옥돌 생산지가 북경에 있어서다. 우리는 지금 명13릉으로 가고 있다. 분지 도시인 한국의 대구가 떠오르기도 하고,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만리장성이 떠오른다. 바깥은 무척 더운데 에어컨을 튼 버스 안은 시원하다. 지리상으로 한국보다 위도가 높아 시원하리라는 예상은 맞지 않는 여름의 고온이다.
* 명 13릉
주원장이 묻힌 곳이다. 가난해서 머슴살이 하다가 절로 도망갔고, 스님이 큰 일을 해보라고 하여 농민봉기를 일으켜 39세때 황제에 올라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 총 42명의 자식을 둔 사람이다. 곳곳에 자식을 왕으로 두면 반란이 나지 않기에 그리 많이 두었다. 남경에 묻혔다가 네 번째 아들 성조 영락제 주체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12살 때 이곳 천수산으로 무덤을 옮겼다. 이곳은 명 13대 황제만 묻힌 곳으로 정릉이다. 금 800냥 들여서 6년간 지은, 10만명이 평생 먹을 돈을 들인 것이라는, 신종 만력 황제 주익균의 무덤을 보았다.
신종 황제는 궁녀 아들은 인정하지 않음으로 본부인과의 알력으로 59세에 사망했다. 그는 24년 동안은 정치상에서 치적을 남겼으나, 25년 동안은 치적이 없어 무비를 세웠다. 본인은 치적이 많아서 무비라 하는데 사실은 아니다. 중국 황제는 만 20세부터 자기 무덤을 만드는 일이 가능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후 자신이 들어갈 궁궐을 짓는 일에 혈세를 들일 때 사회 혼란과 백성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신종 황제의 무덤은 손자가 이곳으로 옮겼는데, 지하 무덤 벽면에 철물을 녹여 부어서 오랜 보존이 가능하다.
지하 무덤은 스산했다. 붉은 관은 신종 황제와 부인의 보물함으로 아주 컸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그날의 유품이 덩그러니 관을 지킨다.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장명등 옥좌도 있고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밖에서 멀리 장릉도 보았다. 아직 발굴 중으로 개방되지 않은 능이다. 무덤 외벽에는 수공 벽돌을 만들 때 자신의 이름을 새겨둔 흔적이 있다. 정릉 입구 16장의 돌조각에 새겨진 글자로 발견된 무덤이다.
야외 정원에는 북경나무로 불리는 용발톱 나무가 곳곳에 아름다운 형상으로 서 있다. 측백나무도 많고, 한국의 잔디도 심겨져 있다. 얕으막한 산 언덕이 아름답다. 명 13릉 주변은 땅이 좋아서 모두 과수원이다. 배, 복숭아, 포도, 감, 사과 등 생산지다. 이렇게 좋은 곳에 정릉을 지은 것이다. 문 입구에는 야광 나무가 양변으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의 기생충을 죽이려고, 운전 기사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애처롭다. 나무에 지장이 없는 생석회를 바른 것이라지만, 저 나무들의 다리목이 얼마나 답답할까. 명 13릉으로 가는 길목의 야광 나무는 굵은 몸통이어서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띈다.
* 만리장성
북방 흉노족 침입 방지용으로 쌓은 만리장성은 내장성과 외장성이 있다. 진나라 때 6,350m로 12,500여리이던 것이 이어서 보수하여 총길이가 5만 4천 km로 10만 8천리다. 3년을 도보로 걸어야 다 본다. 네 군데 입성문이 있는데 팔달령문이 제일 좋다. 명나라 때 8차례 보수했는데 낙타에 돌을 실어 날랐다. 13세에 황제가 되어 54세에 사망한 진시황은 나라를 통일하고, 화폐를 통일한 위인이다. 사후 자기 무덤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두었다. 더위와 햇살이 덩달아 장엄하다. 아랑곳없이 모여든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데만도 수십분을 기다렸다. 가파른 길로 정상까지 올랐다. 멀리 뽀얗게 보이는 장성이 대단한 위용이다. 외적으로 보이는 형상도 위대하지만 내적으로 잠재된 중국의 위대한 저력의 한 도막이다.
* 용경협
강택민이 명령하여 10년간 물을 가두어 만든 인공 협곡이다. 평균 수심이 60m, 깊은 곳은 80m다. 작은 계림으로 불리운다. 이곳에서 왕복 50분 정도 소요되는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비경을 보는데 입구의 행정 구역은 창평현이고, 용경협은 연경현이어서, 두 지역간을 연결시키는 빵차가 우리를 이동시켰다. 왜 이름이 ‘빵차’일까, 의아했는데 ‘빵처럼 동근 차’ 라서 그렇게 부른단다. 빵차 1대에 8인씩 타고 10분 정도 질주하여 협곡 가까이 들어간다. 만리장성이 속한 창평현에서 용경협이 있는 연경현에 진입한 것이다. 들어갈 때 빵차 번호가 10번이면 나올 때도 반드시 10번 차를 타고 나와야 차비를 2중으로 내지 않는다. 좁은 산길을 무섭게 달려들어간다.
빵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용형상의 에스컬레이터가 산 절벽을 타고 걸터오른다. 용의 입으로 들어가 꼬리까지 수없이 많은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타고 올라가 용의 꼬리문으로 나가니 용경협의 비경 앞에 다다른다. 협곡의 본 형태는 자연이어도 가두어놓은 짙푸른 물은 인공인데 대단한 절경이다. 유람선을 타고 본 용경협은 물빛과 산풍경이 탄성을 자아낸다. 위로는 케이블카가 왔다갔다 하고, 솟아오른 산봉우리에 번지점프대도 있고, 하늘 줄 위에서는 자전거 곡예를 하는 자도 있다.
천연 자연 자원을 이용해 10년 동안 가두어 둔 물로 후손이 먹고 살고 있으니 이 기막힌 행복, 내내 부러운 것은 내 조국 어느 산곡 하나, 저런 아름다움 서리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산의 협곡도 대단하고 햇살과 만나 각도에 따라 변하는 녹색, 청색의 물빛이 장관이다.
다시 끝점에서 돌아 물길을 따라 왔던 길로 나온다. 하선하여 동굴을 타고 내려와서 아까 탔던 빵차를 찾아 타고 나왔다. 한국의 봉고차격인 다마스 헌차는 언덕길을 시동을 켜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내려간다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평지에 와서야 시동을 건다. 용경협 지역민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운영되는 차다. 기발한 지혜다.
장가계와 보봉 호수의 비경과는 다른 차원의 용경협은 중국의 큰 관광 자원이다. 폭은 좁지만 긴 협곡이 인상적이다. 곳곳에 ‘강택민’을 새긴 것도 인상적이다.
* 이화원
청나라 건륭 황제가 어머니 생일 선물로 지어준 여름 별장, 피서별장이다. 처음에는 자연 호수였으나 차츰 확장시켜 전체 면적의 3/4이 인공호수다. 서태후가 금 200만냥을 들여 해군을 동원하여 이룬 작업이다. ‘이화원’ 이란 이름도 서태후가 다시 고친 것이다. 그의 친여동생 남편 이름인 ‘청의원’ 이던 것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다시 지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고, 맨 처음 전기가 들어온 아름다운 뜨락이다. 입구에서부터 관람 인파로 장사진이다. 서태후 집무실 인수전 앞에 놓인 거대한 장수석, 사방이 막힌 곳에 광서제가 갇혔던 방, 광서제가 부인을 만나러 나가던 문을 막은 벽, 청나라 도서관, 서태후가 사용하던 시계, 모양 낸 유리창 등등 그날의 역사가 오롯하다.
가장 눈부신 것은 곤명호, 여전히 넓고 고요한데 그녀는 간곳 없고, 주인 잃은 물이 연꽃을 피웠으니 서태후의 환생일까, 광서제의 눈물일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웃음과 눈물이 교차한다. 호수 저 멀리 서태후가 찾기 쉽도록 세운 금문이 높이 솟아 있다. 연회장도 웅장하게 숲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다. 버드나무 휘어진 그늘 아래 호숫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화원의 정취에 젖는다. 곤명호 중앙에 섬을 만들어 연결한 19공교 다리가 길게 놓여 있고 한가로이 떠다니는 유람선에 세인의 흥겨운 표정이 실려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흔적은 여전히 남아 숯한 전설을 낳는 이화원, 그토록 오래 살고 싶어 온갖 행태를 부렸던 서태후, 그녀의 숨결이 곳곳에 서린 정원이다.
* 천안문
맨 처음 부르던 이름은 승천문이다. 여러 차례 전쟁으로 훼손되어 보수하며 ‘천하가 안전’ 하다는 천안문으로 개명되었다. 남북 880m 길이로 100만 명 수용이 가능한 광장이다. 명 14, 청 10, 총 24명의 황제가 거주한 600년 역사를 지닌 이곳은 15년 동안 지어 완공되었다.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 6.4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다. 자금성의 관문이며 집회의 대장소인 천안문 주변 대로에 신호등이 없다. 전에 처음 볼 때도 놀라고, 지금도 나는 놀라고 있다. 차와 사람 인파가 뒤섞이어 위태로운데도 순조롭게 교행되는 교통체계를 보면 중국의 정치, 중국의 잠재력을 떠올리게 한다. 무서운 힘이다.
모택동 기념비가 완공되어 우뚝 서 있다. 다행히 햇볕이 나지 않아 더워도 견딜 수 있어 좋다. TV에서 나오는 중국 타이틀 명소다. 모택동은 갔어도 위인의 사진은 여전히 그곳에서 외인을 반긴다. 그 앞을 질주하는 차량들이 현실을 인식시킬 뿐이다. 지하철 입구의 지하도를 따라 대로를 건너 천안문에 들어섰다. 자금성에 입성하기 위해서다. 좌우에 걸린 모택동 구호가 커다란 한문 글씨로 중국의 단합을 외치고 있다.
* 자금성
날씨가 더운 탓인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다. 태화전은 올림픽을 대비하여 보수 공사 중이어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 붉은 기와 지붕 물결이 양쪽으로 장관이다. 800여채 건물에 쪽방까지 9,999개의 방으로 지어진 자금성은 명, 청대 황제들이 살던 곳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황궁이다. 하늘 ‘자’, 출입금지 ‘자’를 쓴 것은 하늘에 이르는 성,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성으로 해석되며, 방 숫자를 1만 개로 채우지 않은 것도 하늘보다 작도록 한 것이란다.
왕이 거주하는 곳만 청기와고, 나머지는 모두 적기와다. 씨족사회 때는 황하강에 거주하여 황제만 황색기와였다. 2만명이 거주하던 성에 화장실이 없다. 지난 번 여행시에는 황제를 해치려는 도적이 숨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냄새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는 도자기에 비단을 깔고 누고, 하녀는 화로에 나무를 깔고 누면 내다 버렸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둘러서서 열기로 온도를 높였고, 손화로, 발화로를 사용하던 곳이다.
거대한 성은 9개의 문을 거쳐야 나간다. 15년 동안 지어졌고, 관람객들은 양쪽으로 뻗쳐지은 궁궐은 눈으로만 보고 주요 문으로 연결된 중앙의 직선 도로를 따라 걸으며 본다. 그 길만도 길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한참을 걸어서 신무문으로 나왔다. 벽돌 1장에 쌀 10가마 값, 가로 세로 15장씩 쌓아 외적이 못 들어오게 했던 자금성을 관통하여 지나온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 명소를 보며 한편으로는 부럽다. 선대가 지어 놓은 유산으로 후대가 먹고 살지 않는가. 보기 드물게 서양인 관광객이 줄지어 지나간다. 세계 그 어느 관광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다. 우리나라도 기존 문화 유산을 잘 관리하고 세계에 홍보하여 동.서양의 외객을 불러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 밖 도로를 달리며 보아도 끝없이 이어지는 자금성, 그 사위를 휘도는 물길, 담장 벽 눈부신 풍경이다.
* 연길
시골 고향 향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연길과 연변의 차이는 연길은 도시명이고 연변은 조선족 자치족이 사는 지역의 총칭이다.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듯 연변의 수도가 연길이다. 소수민족 보호 차원으로 반드시 상호에 한글 기재를 강요한 탓에 창 밖의 건물 상가에는 영어는 없고 한문과 한글을 겸하여 상호를 내걸고 있다. 참으로 반갑고, 내 조국 어느 한 지역에 온 느낌이다. 연길의 생활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해마다 한국에서, 또 다른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온다. 거리에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주로 술집, 노래방, 맛사지방 등 유홍업소다. 돈을 벌기 위해 몸부림치는 조선족들의 생활상이다.
이곳이 옛 고구려 땅, 내 조국이라는 상념이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한다. 한반도의 맨 꼭대기 내 나라 땅인데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유감이다. 1950년부터 연변 조선족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연길 시가지는 한국의 읍소재지 정도의 발전상이고 크기는 더 넓어 보인다. 건물도 많고, 새로이 짓는 공사장도 보인다. 자가용은 적고 오토바이가 많다. 자가용에 ‘吉H7516’,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유소도 ‘中國石油’ 라고 되어 있다. 석화라는 말 대신 한국식으로 석유라고 쓴 표기가 돋보인다. 곳곳 상점의 간판 글씨는 반드시 한글과 한자가 병행으로 씌여있다. 한글 사용이 의무라는 점에서 동포애를 느낀다. 우리나라도 외국인의 마을을 더 조성해주고 그들의 언어로 거리와 상가를 꾸며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은 중국, 러시아, 북한 이렇게 세 나라의 접경이다. ‘미인 송’ 이라는 백두산 소나무가 붉은 다리로, 아름다운 모양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위로 자라며 저절로 구부러 고운 자태다. 백두산 가는 길은 이미 연길에서부터지만 이제는 백두산 자락의 산중 길에 접어든 것이다. 나무 사이로 철도가 보인다. 일제 때 약탈해 가기 위해 세운 철도인데 현재는 물자 수송과 여객 운반용으로 베이징까지 이어져 있다. 비행기 길을 심양을 거쳐 장시간 소요되는 기차를 이용해서도 올 수 있다. 10대 명경 중, 중국 6대 명경에 들어가는 백두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의 시조에 나오는 태산이 바로 백두산이다.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에는 민족기상의 발원지인 천지가 있다. 그 천지까지 오르는 길은 연길에서 5시간, 백두산 버스로 20분, 짚차로 20분, 도보로 10분이다. 백두산 권역은 연길 버스가 못 들어가므로, 장백산 버스로 바꿔타고 짚차 타는 곳까지 들어간다. 장백산 관문을 통과하여 조금 걸어 오르니 짚차 타는 곳이 보인다. 짚차와 사람들이 장사진이다.
* 백두산 짚차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 위해 줄 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기한 짚차들이 백두산 자락 한 도막 깎아 만든 광장에 한 가득이다. 멀리 산봉우리 나무 사이로 천지의 오롯한 천문봉 높은 산정이 가뭇가뭇 시야에 들어온다. 11km의 산길을 짚차로 20분간 올라간다. 튼튼한 몸체의 유럽 짚차는 6명 정원이다. 몇 구비 줄을 돌고 돌아, 오랜 시간 기다려 6인이 한 조가 되어 짚차 한 대에 동석했다. 짚차가 백두산에 들어설 때 그 관문에는 중국식 이름으로 ‘장백산’ 이라고 씌여 있다. 운전 기사도 중국인, 이름도 중국식, 옛 고구려 우리 땅인데 서러운 장면들이다. 시간을 다투어 운행해야 돈벌이가 된다는 짚차는 깎아지른 백두산 절벽의 산길을 다람쥐처럼 올라간다. ㄹ자로 휘어진 도로를 잘도 회전하여 오른다. 가끔은 무서운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이것이 생업인 이곳 연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같이 오르내린다. 이미 장백산 권역 버스로 백두산 가까이 왔고, 정말 가파른 오르막 마지막 백두산 길을 지금 짚차에 몸을 싣고 오르고 있다.
* 짚차가 오르는 가파른 길
천지에 오르는 산 길은 여러 갈래다. 외지의 객이 빠른 시간에 왕복 오르내리는 코스가 짚차 운송이고, 기찻길, 도보 길도 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산벽에 철로가 고고한 자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며 인간의 위대한 지혜를 본다. 떨어지지 않도록 톱니 모양으로 나무목이 고여 있다. 짚차가 가는 종착지는 천문봉이다. 천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며 오르는 길도 수월하여 대부분 중국을 통해 천지에 온 외객은 이 길을 따라 짚차로 오른다. 앞 좌석에 기사 외 2명, 뒷좌석에 4명이 승차하였는데 의자 등받이나 창문 손잡이를 잡지 않고는 몸통이 좌우로 쏠려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그만큼 길도 험악하고, 운전법도 거칠다. 그런 위험에 대한 보상은 대단하다. 전후 좌우, 그 어느 곳을 보아도 비경이다. 짚차의 빠른 속도에 비명을 지르고, 백두산 비경에 비명을 지른다.
* 백두산 데드라인
백두산 산정이 보일 때 추운 바람이 사는 그곳은 데드라인이 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래와 자갈만이 뒹굴며 산봉우리를 지킨다. 살기 위해 작은 키로 몸을 낮추고 생의 지혜로 꽃을 피워 올리던 초지의 연두빛 식물들이 이곳에서는 목숨을 놓는다. 기막힌 현장이다. 로키산맥을 달리며 보았던 설봉의 데드라인과는 조금 다르지만, 분명 이곳은 내 나라 최북녘 최고봉 하늘 가까운 곳의 생명 한계선이다. 지금 계절이 한여름 8월 초순인데 풀 한 포기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 드높은 영봉의 신비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용암이 분출할 때 흘러내린 구멍 숭숭 뚫린 돌덩이와 검은 재의 형상으로 나뒹구는 흙, 그 백두산 데드라인에 지금 내가 서 있다. 관리 사무소와 기념품 상가가 생명의 푯대로 시야에 들어올 뿐 휘황한 땅, 칼바람이 분무하는 소슬한 영역이다. 산정을 향해 보면 하늘과 맞닿은 용기가, 산 아래를 보면 대륙을 품고 앉은 용기가 데드라인, 그 무서운 힘만큼 용감하다.
* 백두산 천문봉
짚차에서 내려 천문봉으로 오를 때 산소 부족과 기압 차이로 조금 힘들거라는 조선족 교포의 말은 정확했다. 젊은이들은 잘 올라가는데 나이든 어른들은 답답해 한다. 나도 한 동안 이상한 증상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힘들어 몸이 무거워졌다. 물을 마시고 두 손을 힘차게 움직이며 한발 두발 서서히 오르니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해발 2760m, 한라산보다 1천 미터 정도 더 높이 올랐으니 당연한 현상이리라. 나는 내 조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말하리라. ‘빨리 백두산에 다녀오라’ 고. 세계의 명소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두산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특급 명소라고. 그리고 나이가 들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하늘 가까운 높고 차가운 영토라고.
* 백두산 천지
언제쯤 천지가 보일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천문봉 그 거친 등짝을 오를 때 갑자기 바위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그때까지도 기압 차이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저 호수가 ‘천지’ 라고 예감하며 기쁨의 탄성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평온해졌다. 처음 보인 그곳이 천지의 전부인 줄 알고 눈과 발을 떼지 못한 채 엎드려서 보고, 앉아서 보고, 서서 보고 그랬는데 그것은 천지의 서곡이었다. 천문봉에 다 오르지도 않은 한쪽 날개 끝 작은 비경이었다. 꿈 같은 시간이다. 두려움보다 목숨 같은 소중한 보물을 보는 느낌이다. 천지는 조금씩 오를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좁게, 넓게 바위에 맞물려 빼어난 경관이다. 바위들 형상이 화산 폭발하며 기묘하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휴화산인 천지, 언제 또 장엄한 진통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은 사회산이지만 백두산 천지는 휴화산이다. 화산 폭발로 이루어 놓은 분화구까지는 이해되는데 저토록 짙푸른 물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의문이다. 제일 깊은 곳 수심이 373m이고 물의 평균 온도는 5도다. 저수온에 산다는 산천어가 살고 있다는데 김일성은 이 물고기만 회로 요리하여 먹었단다. 그리하여도 그는 칠십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고, 수많은 세월이 쌓여도 불변인 것은 오직 저 광활한 호수, 하늘 연못 천지(天池) 뿐이다. 30분 정도 머물며 돌아본 천지는 장엄했다. 짚차에서 내려 겨우 5분 정도 걸어오른 곳에서 만난 천지는 TV 속에서, 사진 속에서 본 모습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위용이다. 수많은 백두산 산봉우리에 싸여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드넓고, 하늘의 구름덩이와 맞닿아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어디까지가 호수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천지를 에워싼 맨살의 뽀얀 바위림 또한 절경이다.
맞은 편에는 북한 영토가 보인다. 산을 타고 내려온 뽀얀 길이 선명하다. 그 아래 천지 호수변에 집도 보인다. 낮은 지대에는 작은 풀이 파릇하다. 가까운 곳에 우리의 조국이 있다. 분명 내 조국의 땅인데 빙 돌아 타국을 거쳐서야 오른 백두산 천지다. 천지의 물은 청남빛, 푸르다가 푸르다가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농익은 저 푸르름이여. 사진 한 장에 다 담지 못하는 광폭한 천지, 하늘과 맞닿았으니 이곳이 우리 조국의 지붕, 조국의 머리가 아닌가. 거대한 지붕, 거대한 머리다. ‘천지(天池)’ 라는 비석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줄로 위험선을 표시해 두었는데 한번 발을 헛디디면 수심 200m 이상의 깊은 저 천지연에 추락한다. 아슬한 언덕, 비석 앞에서 천지 돌비를 만져보고, 안아보고, 빙빙 돌며 앞과 뒤 모습을 보고, 못내 아쉬움을 접지 못하여 서성였다. 이제 떠나야 하는 끝선에 이르렀는데, 멈추어선 그 곳의 비경은 모두 명작 수채화로 시선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으니 내 어찌 돌아서랴.
그래 네 영혼을 품어가리라. 네 목숨을 담아 가리라. 내 가슴에, 내 두뇌에 너를 한 가득 채워 가리라. 내 목숨을 놓는 그 순간까지 너를 기억하며 살리라. 오늘의 저 장엄한 백두산 천지 그 모습을.
* 장백 폭포
백두산이 중국 지명으로 장백산이라는 것도, 천지에서 백두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가 장백 폭포라는 것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언젠가 장백산 더덕을 한 바구니 선물로 받아 굵고 하얀 진액이 나오는 더덕을 보약처럼 먹은 적이 있는데 나는 지금 그 더덕을 키워준 장백산에 와 있다. 짚차로 내려온 그곳에서 장백산 버스로 환승하여 장백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갔다.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오르는데 가는 길에 온천수 뜨거운 물에 삶아내는 계란도 보고 적은 양이지만 수증기가 모락모락 나오는 것도 보았다. 뉴질랜드 로또루아 지열지대에 온 느낌이다.
천지 물이 넘쳐서 산곡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의 물이 넓은 시내를 이루고 오른다. 철계단을 오르고, 다리를 건너고,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걷고 수없이 걸어오른 산곡, 그곳에서 장백 폭포를 만났다. 휘어진 산 구비로 보이지 않던 폭포가 하얀 명주실 타래처럼 쏟아져 내린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산 그늘이 짙어간다. 장백폭포 앞까지는 이곳에서도 한참을 가야 함에 원경으로만 보았다. 높이 68m의 장엄한 폭포 줄기는 천지를 에워싼 백두산 낮은 봉우리에서 떨어지며 지축을 흔든다. 하얀 물, 순수의 물, 백두산 물, 시리도록 차가운 물도 만져보고 한 웅큼 쥐어 하늘로 던져도 보고 신비로운 땅, 신비로운 영역이다. 저토록 흘러내리는데도 천지의 물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어 줄지 않는다 하니 축복의 산, 축복의 연못이다.
* 백두산 온천수
산자락 아래에 온천욕장이 있다. 길가에서는 계란을 삶아서 판다. 구멍에서 나오는 온천수에 손을 대보니 데일만큼 뜨겁다. 길가 갈라튼 틈새에서도 온천수가 흘러 나온다. 온천수가 지천이다. 정녕 백두산은 명물이다. 온갖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백두산을 바라보며 맑고 투명한 심호흡으로 휴식을 취했다. 뼈 속까지 맑아지는 느낌의 천연의 산향내가 영혼을 적신다. 온천수에 육신을 담그는 일도 행복하겠지만 백두산 드넓은 품자락에서 심호흡하는 일도 참으로 행복하다. 어둠이 스며들어 산그늘이 내려앉을 때 하산했다. 백두산을 두고 떠나는 걸음이 아쉽다.
* 두만강 가는 길
들녘에는 옥수수, 콩 농사가 많다. 소를 방목하는 목장도 많다. 침엽수림이 많이 보인다. 연길에서 중식 후 도문으로 이동하여 두만강에 간다. 40분 정도 가면 된다. ‘두만강’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난다. 영문도 모르고 불렀던 어린 시절의 그 강에 지금 가까이 다가간다. 벌써 두만강 줄기가 보인다. 두만강은 천리 두만강인데 지금 보이는 것은 북강이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강 풍경이 두만강이라는 것을 금새 알게 한다. 깊은 강, 산 사이로 들녘 사이로 평화롭게 흐르고 있다. 그 줄기를 따라 지금 달리고 있다.
* 도문시
우리는 지금 중국 땅을 달리며 두만강을 보고 있다. 저 강 건너가 도문시다. 북강 700리와 남강 300리를 합하여 천리 두만강인데 도문시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두만강을 본다. 도문시는 연변의 한 도시로 두만강변에 있다. 북한과 접경 도시다. 저 멀리 산이 북한의 민둥산이다. 땔감으로 다 베어 나무가 없다. 도문시 가로수인 비술 나무가 명물이다. 늘어진 모양이 장관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까지 천리인데 유일하게 도문시에만 중국과 북한을 잇는 철교가 있다. 기차가 다닌다. 북한으로 가는 다리가 길게 놓여 있다. 강변에는 기름진 땅에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풍요로운 들녘이다.
* 두만강
도문 시내를 가로질러 맞닿은 곳에 두만강이 있었다. 긴 둑을 걸으며 걷다가 아래로 내려가서 두만강을 만났다. 기가 막힌 강이다. 절반은 중국 소유, 절반은 북한 소유다. 뗏목 관광은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 뗏목에 앉아 두만강을 오르내린다. 바짝 다가가 물을 보니 오염되어 누렇다. ‘두만강 푸른 물에~’로 시작하는 두만강은 옛 이야기다. 함경북도에서 철광이 세워지면서 저렇게 오염되었다. 하구에는 풀이 가득 자란다. 물줄기가 약한 곳에는 자갈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발원강은 쉼없이 흐르고 있다.
* 강 건너 북한 땅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두 지역의 생활은 엄청난 차이다. 내가 선 곳은 연변의 도문시, 풍요로운 땅이고 두만강 건너는 북한의 남양시, 빈곤한 땅이다. 민가도 보이고 농사를 짓는 채전밭도 보인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산이란 산은 모두 벌거숭이다. 그래서 애련하게 알몸으로 드러난다. 가장 최단의 거리에서 보는 북한이다. 내 조국의 국토인데 바라만 볼뿐 갈 수 없음이 애석하다.
* 북한의 민둥산
중국의 산은 울창한데 북한의 산은 모두 민둥산이다. 그 이유는 첫째 땔감으로 베어서 그렇고, 둘째 중국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돈벌이로 나무를 벤다는 것도, 중국인의 거동을 살피기 위해서라는 것도 민둥산을 이해하기에는 낮은 의식 수준이다. 민둥산 아래에는 민가가 있고, 정적이 흐른다. 저 강을 건너가는 탈북자들을 북한에서는 한쪽 눈 감아준다. 중국으로 도강하는 넘어간다. 민둥산의 깎아지른 구릉들이 애처롭다. 살기좋은 북한이 되어 저 산에 푸른 나무 가득이길 빈다.
* 산에 새긴 김정일 찬양 구호
두만강에서 40분간 달리면 용정이다. 그곳으로 가면서 북한의 산을 계속 보게 된다. 안내원이 저 멀리 하얀 글씨를 읽어 보란다. 북한 민둥산 중턱에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커다란 하얀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나무가 있어야 할 곳에 찬양 구호가 새겨 있다. 가슴이 시려오는 대목이다. 70년대만 해도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가서 놀았다고, 해질녘에 강 건너서 헤어졌다고 조선족은 회상의 말을 들려준다. 지금은 왕래가 불가능한 땅, 삼엄한 경계다. 묻고 싶다. 진정 21세기의 태양이 김정일 장군이냐고. 김정일 장군이 태양이라면 북녘 땅은 따스해야 하지 않는가. 왜 헐벗고 가난할까. 저 오롯하게 산을 빛내는 찬양 구호가 헛되지 않기를 염원한다.
* 용정 대성 중학교
민족 시인 윤동주님의 모교이며 삶이 깃든 학교다. 교문에는 룡정 중학교라고 새겨져 있다. 들어서니 드넓은 마당이 있고 교사 현관 앞 정원 잔디 밭에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시 〈서시〉다. 실내로 들어가서 2층에 전시된 사진 자료를 보며 설명을 들었다. 민족 운동가들의 사진과 그 당시 활동 모습이 담겨 있다. 문익환 목사도 정일권 전 총리도 이 중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선인들은 떠났어도 이곳 교정에는 1200명의 학생이 있다. 컴퓨터, 음악, 미술 등 종합 학교다. 현재는 용정 제일 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관 맞은 편에 길게 지은 교실 건물에서 다양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학교처럼 꾸밈새는 없어도 단단한 외향이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활약하던 땅, 용정에서 올곧은 함성으로 우뚝 선 대성 중학교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 해란강과 일송정
해란강을 건너며 저 멀리 산정에 선 일송정을 보았다. 원래의 일송정은 일본인이 솔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고춧가루를 넣어 봄함으로 말라 죽었다. 독립 운동가들이 그 소나무 밑에서 항일 의지를 모으자 이를 미워하여 죽인 것이다. 일송정이 있던 비암산에는 현재 그 소나무가 아니고 후에 심은 작은 소나무가 있다. 1980년 중국 당국에서 ‘일송정’ 이라는 정자를 건립했다. 멀리 정자만 보인다. 멀어서 그 산까지는 못 가고 용정 건너 저 멀리 산 줄기 위에 오롯한 곳에 살고 있을 일송정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가곡 ‘선구자’ 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을 지금 지나고 있다.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은 용정을 흐르는 넓은 강이다. 물과 바위와 자갈이 다른 강자락과 다를 바 없는데 선구자의 용감한 함성이 스며 흐르는 듯, 우리에게는 뜨거운 강이다. 드넓은 용정 들녘은 벼가 자라고 있다. 말 발굽 소리 잠 들고 이제는 풍요가 넘실거리는 기름진 땅이다. 해란강 다리를 건너며 본 일송정 조망은 가슴 벅찬 순간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간도지방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이 들판이다. 그 중심 젖줄이 바로 이 해란강이었기에 일송정과 해란강이 선구자로 언급되는 것이다.
* 연길 진달래 공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동안 탐방했다. 사람들이 모여 흥겹게 노래하며 춤을 춘다. 연길의 조선족 동포와 하나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진달래 꽃모양의 조각품이 높이 솟아 올라 아름다운 조명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섬세한 진달래 꽃잎에서 보랏빛 실체와 가까운 색을 보며 사람들은 조국의 동산을 그리워하리라. 진달래 정자도 있다. 기와 지붕 조각이 진달래 모양이다. 놀이 기구, 잔디 광장, 포장마차 등 잘 갖추어진 공원이다. 강아지를 끌고 온 가족도 있다. 예의바르고 질서를 지키는 시민의식이다. 밤이라서 잘 보이진 않지만 서울의 어느 한 공원에 머문 느낌이다. 우리 말이 통하고, 진달래가 솟아 있고, 우리의 노래가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연길 사람들은 이곳을 사랑한다. 노래 마당 앞에 모두 앉아 호흡을 하나로 맞춘다. 조선족과 함께 앉아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공원이 커서 다는 못 돌았지만 진달래 꽃탑 주변을 돌며 덩달아 조국에 대한 향수에 젖기도 했다. 연길의 아름다운 마지막 밤이다. 고운 추억 간직하고 돌아가리라.
* 북경 천단공원
북경 천단 공원은 명, 청대 황제가 하늘에 풍년을 빌었던 공원이다. 중국에는 이것 말고도 땅에게 비는 지단 공원, 해에게 비는 일단 공원, 달에게 비는 월단공원, 농사신에게 비는 농단공원이 있는데 그 중 천단 공원이 대표로 가장 좋은 공원이다. 황제가 와서 직접 하늘에 비가 오도록, 그래서 풍년이 들도록, 그런 때마다 하늘에 빌던 의미있는 곳이다. 아편, 술, 여자를 못 대하는 정절인들이 보름날에 와서 빌기도 했다. 영락 15년 동안 자금성이 완공될 무렵,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자금성이 73㎡, 천단 공원이 273㎡, 천단 공원이 자금성의 4배 크기다. 건축물이 북쪽은 하늘 상징으로 둥글고, 남쪽은 땅 상징으로 네모졌다. 하늘을 상징하는 기년전 본당은 대표 건물이다. 녹색은 백성, 황색은 황제, 청색은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청색으로 보수했다. 기년전의 기둥이 24개인데 안쪽 12개는 1년 12달, 앞쪽 12개는 12시간을 뜻한다.
이곳에는 또 회음벽이 있다. 소리가 되돌아오는 담벼락이다. 청 건륭황제가 비오라고 제사지내려 천단공원에 와서 잠시 담벽에 누워 있는데 개구리 울음에 잠을 깼다. 신하에게 그 개구리를 잡아오라 하여 따라가 보니 담벽에 개구리가 있는데 뱀이 그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우리가 뭐하러 잡느냐, 곧 뱀이 잡아먹을 것을’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황제가 다 듣고 있었다. 대신들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비니, 황제는 괜찮다고, 너희들 때문에 이 담벽의 신비를 알게 되었다 했다. 그때부터 회음벽이 된 것이다. 또한 원심석도 있다. 동그란 돌판 위에 올라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땀으로 온몸을 적시는데도 원심석에 오르기 위해 장사진이다. 담겨있는 소중한 의미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천단공원은 그러나 옛날의 공원이 아니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퇴직자, 여유있는 자, 집 몇 채 가진 자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운동, 기공 운동, 춤, 노래, 오락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재미있는 공원이다. 녹음기를 틀어 놓고 두 사람씩 춤추는 사람들도 있고 붓글씨 쓰는 자, 무술 연습자 등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실버 세대가 모여 생을 즐겁게 엮고 있다. 보기 좋다. 측백나무만 심겨진 정원에 푸른 잔디가 상쾌함을 더해준다. 하늘 신이 걷던 길과 황제가 걷던 길을 따라 나오며 황제인 양, 황후인 양 위엄을 갖추고 한 발 한 발 옮겼다. 8월 더위가 대단해도 이순간 나는 황후다.
* 황제 부의 본부인 생가
다시 인력거를 타고 간 곳은 마지막 중국 황제 애신각라 부의, 청나라 12대 마지막 선통 황제의 본부인 생가다. 조금 넓은 골목에는 민속품을 파는 가게가 몇 군데 줄지어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관리하고 있는 집의 대문이 열려 있다. 이곳이 부의의 처가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통의 민가다. 수세미가 주렁주렁 달린 터널을 지나 실내로 들어갔다. 북경의 사람이 월 27만 5천원씩 내고 살고 있다. 훌륭한 지방 사람이 퇴직한 후 이 집을 사들여 운영하고 있다. 사탕과 차를 주며 외객을 맞는다. 북경 원주민은 먹는 것에만 신경쓴다. 옷과 치장에는 관심이 없다. 과일 사탕이 알차게 맛있다. 1300평의 대지를 안고 있는 이 집을 비롯하여 주변 땅값이 비싸다. 거지같은 부자가 사는 곳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풍경인데 부의 본부인 생가로 인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도 아주 벽촌에서나 보는 옴팍한 집의 구조다.
이 집을 끝점으로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간다. 북경의 병원은 개인이 못하게 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데 비싼 대로변에는 없고 뒷골목에 있다. 연변에서는 개인의 병원 운영을 허락한다. 베이징 병원이 보이지 않던 연유를 인력거 투어로 알게 되고, 직접 병원 앞을 지나왔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규모는 상당히 크다. 인력거 투어로 인해서 중국의 이면까지 들여다보고 간다. 인력거 주차장에는 수많은 인력거가 대기하고 있다. 손님을 받기 위해서다. 이방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선들이 떠나가는 우리를 배웅하고 있다.
첫댓글 그 동안 서유럽 8개국에 대하여
2018년 9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시로 본 세계>란에 시를 게재했습니다.
탐방한 국가도 많고 시도 많이 써서 분량이 많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중국 북경, 백두산, 두만강 역사탐방에 대하여
위 본문에 맞춰서
<시로 본 세계>란에 시를 연속하여 게재합니다.
항상 졸시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윤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