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10: 김동천(金東天, 男, 1922年 6月4日生 충북 영동군 영동읍) | |
*최초증언일: 1995. 10. 5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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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5천명 가량은 죽었다! 땅속으로 굴을 파고 폭탄을 저장하는 일을 하였다.- |
징용영장이 나왔을 때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일본경찰들의 치밀한 추격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영동역에서 기차로 부산역으로 끌려가 영도에서 예방주사를 맞고 연락선으로 일본까지 실려 갔다. 미사와비행장으로 끌려가 죽도록 일만 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5일 동안은 제식훈련을 시키더니 군대식으로 1분대에 17명 정도로 나누어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먹을 거래야 국 한 그릇에 밥을 주는데 양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식사량이 아니었다. 모두들 배가 고파 바닷가에 나가 까마귀물고시를 캐먹고 설사병이 나서 다들 고생하기도 했다.
주한일본대사관을 항의방문한 생종자분들. 오른쪽 두번째가 김동천씨.
아오모리현에 있는 미사와비행장은 홋카이도 바로 아래 지역이라서 음력 4월인데도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비행기를 숨기려는 위장격납고를 만들었는데 일 자체가 모두 인력으로만 해야 했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새벽 6시에 조회하고 12시에 점심을 먹었으며 저녁 6시가 돼서야 일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간다. 첫해에는 비행기를 숨기는 격납고를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땅속으로 굴을 파고 폭탄을 저장하는 일을 하였다. 눈이 내리면 활주로 제설작업을 했고, 몇 푼 받은 돈으로 외출해서 먹을 것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다 광복을 맞자 고향에 보내준다고 군함에 태웠다. 아오모리현에 있는 한국 사람들 모두 다 탔는데 7천5백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배가 무척 컸는데 배의 위아래 할 것 없이 꽉 들어찼었다. 당초에는 송환할 한국인을 원산항에 내려놓을 것이라던 배가 돌연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때 꼭대기 층에 있었다. 아마 배가 7층 정도는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맨 위층 구명보트가 놓인 옆에 있었는데 해군이 한국 사람들은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 내려갔으나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해군들은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몹시 긴장하고 있던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배의 아래쪽에 있는 기관사들에게 회의가 있으니 위층으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다가 얼마쯤인가 마이즈루만 안으로 들어가 멈춰섰는데 갑자기 배 아래층에서 쿵!∼쾅!〜 하는 폭발소리가 났다. 그 때 손성출이라는 사람이 맨 위 갑판에 앉아 있었는데 폭음과 함께 튕겨나갔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우리들 보고 물로 들어가라고 일본 해군이 고함을 쳤다. 그러나 육지까지는 멀었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 엉켜서 죽어갔다. 두 동강이 난 배는 수심이 깊지 않아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뱃머리는 물 위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도 조금은 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끝까지 선체에서 바다로 늘어진 밧줄을 잡고 버텼다. 30분쯤 지나자 일본군이 나팔을 불어댔다. 그래서인지 육지에서 작은 배를 타고 우리를 구조하려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겨우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와서는 아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모두들 서로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으나 쉬지 않았다. 헤엄쳐 나가려고 옷을 벗었기에 벌거벗은 채 봉우재 사람 전세돌을 만났다. 둘이서 또 누가 살았는지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장태원이를 찾았는데 그는 숨만 헐떡이며 다 죽어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장태원 뿐이 아니었다. 그 때 사고로 헤아릴 수 없을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승선했던 7천5백명 가운데 몇 백 명은 살았겠지만 하여튼 5천 명 가량은 죽었다. 수용소에 가보니 당시 맥아더가 군복과 무기를 모두 반납하라고 했기 때문에 벌거벗은 우리에게 군복이 있어도 못 준다고 하였다. 겨우 담요를 한쪽씩 받아 치마처럼 두르고 다니다가 나중에서야 헌 군복을 내놓기에 받아 입었다. 그 뒤 귀국하는 기간에 태풍과 폭우가 심하여 집이 떠내려가고 도로와 철도가 훼손되어 며칠을 머물다가 겨우 배타는 곳에 이르렀다. 먹을 것도 없고 여름이라지만 입은 옷이 없으니 밤이면 추워 저마다 견디기 어려웠다. 일본으로 끌려갈 때는 옷이라도 입었었는데 돌아올 때는 속옷 하나도 제대로 못 입었다. 그런 것마저 왜놈들한테 다 뺏겼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숱한 고생을 하다가 추석이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