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으로 읽는 동시
동시의 리듬과 시 형식의 문제
김종헌(裕玄)
작가의 탄생
최근(2010년 이후) 우리 동시문단은 부단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언어유희 동시에서 짧은 동시로 이어진 형식의 다양성이 그렇고 교훈적인 메시지와 진지함에서 벗어나 재미를 추구하는 내용으로의 변화가 그렇다. 또 아동문학이 지닌 고유한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동시와 시의 경계마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형식이 다채로워진 것에 비해 어린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은 부족하고 또 여전히 낡은 동심에 갇힌 창작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이룬 작가적 명성과 고정관념을 고수하면서 동심을 끌어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묵은 동심을 벗어나 새로운 동심으로 신화를 이루려하고 있다. 어느 편이 더 문학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가를 토론하기 보다는 누가 더 문단의 중심으로 편입되는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스스로 고수하고 있는 영역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독자층을 견인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의 태도가 갖는 한계는 아동의 삶을 풍부하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생활동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미학도 메시지도 불분명한 창작이 이어지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재미와 놀이에 빠진 채 어린이들의 삶을 담지 못하고 있다. 동심에 대한 잘못된 혹은 고정된 관념을 ‘그렇게’ 알고 있는 작가들이나 그것을 부풀리며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후학들도 문제이지만, 무조건 그것을 던져버리면서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굴절시키는 것도 문제이다. 갓 창작을 시작하는 작가나 동시문학의 독자는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하여 ‘그렇다고’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문학사회학에서 볼 때 작가란 한 개인의 천재성이나 재능에 따라 타고 난다기보다 문학 제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다. 작가는 문화 생산, 유통 제도 안의 역할 수행자인 셈이다.1) 이는 문학을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베스트셀러의 생산과 다른 것이며 또한 문학의 정치참여를 기준으로 순수문학과 저항문학의 차원과도 다른 것이다. 작가의 위상과 장르 개척(혹은 새로운 장르), 나아가서는 문학의 질(작품성) 등을 둘러싼 상징적 투쟁을 일컫는다. 즉 작가 집단과 그 소속 조건을 한정함으로써 문학의 질서를 한정(보호 또는 기존 질서의 파괴)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이로써 문학 행위자(작가-평론가-후원하는 독자)들 간에 집단적 신념을 형성하여 저명작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다시 문학의 장 안에서 저명작가와 신인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차등적인 힘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 아동문단에서 횡행되고 있는 동시의 문학성을 위한 노력은 동시라는 문학 본연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잡지를 중심으로 혹은 특정 출판사의 명성을 등에 업고 이루어지는 자기대로의 제도를 만드는 과정이다. 저명작가가 신인을 승인하고 반대로 신인은 그를 거장 또는 학파의 대부로 승인하는(현택수) 과정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새롭고 참신한 유형의 동시는 문학사회 집단의 구속에서 이룬 아동문학가 집단의 전략적 결과이다.
굳이 동시문학의 층위를 구분 짓는다면 낯선 상상력이 아닌 아동의 일상을 낱낱이묘사하고 재현한 생활동시와 앳된 아동의 동심을 순수라는 이름으로 추체험한 작품이 아래층에 놓이고 그 위에 미학을 바탕으로 한 동시가 놓인다. 우리 아동문학사에서는 이런 진화(혹은 발전)를 위한 노력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장난 동시와 짧은 동시는 지난시절에도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유희동시와 짝짜꿍 동시에 대한 비판도 따지고 보면 아동문학 사회의 문학제도와 전통 간의 상징적 투쟁의 산물이다. 1970년대 이원수를 앞세우면서 불의에 저항하고 민족주의 아동문학을 옹호하던 이오덕은 소위 리얼리즘 아동문학의 계보를 만들면서 ‘짝짜꿍 동요’를 거부하였다. 이후 아동문단은 순식간에 이것이 해답인 것처럼 쏠림현상이 나타났다. 출판사-비평가-새로운 작가-문학상으로 이어지는 문학의 장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경계를 정의 내림으로써 이 새로운 작가의 반열에 들지 않으면 몰개성-보수-무능의 오명을 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동시문학 장의 형성은 2000년 중반에 나타난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에서도 입증된다. 시인이었던 그는 짝짜꿍 동요를 말놀이 동요로 재정의 하면서 언어유희를 재미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시적전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출판사는 말놀이의 재미와 일반시인 최승호의 상징자산을 근간으로 동시문학의 장을 펼치는데 일조하였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라이프 스타일과 맥을 같이 하면서 성공적으로 비춰졌고 이를 추종하는 아류작품이 쏟아졌다. 동시문학에서 고질적인 병폐인 교훈과 관념적 동심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1970년대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대립적인 장에 있었고 2000년대에 와서는 재미를 둘러싼 가벼움의 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로서의 자질을 그 형식은 가볍더라도 그 문학성은 가져야 하며 또한 문학의 의미는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너무 쉽게 지우고 새로 썼다.
재미에 빼앗긴 서정
한동안 아동문학이 문학성에 주눅 든 상태로 움츠렸던 동시문단은 ‘말놀이 동시’ 이후에 새 길을 찾은 듯 무비판적으로 아류작을 생산하였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 이후 수많은 동시작가들이 비 온 뒤 대순 솟아나듯 뒤를 이었다. 그것이 가지는 문학성이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말장난 동시가 문학성의 시비를 우회하면서 말의 재미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였다는 점과 ‘해묵은 동시를 던져버리자’는 슬로건이 그것을 추동하였다. 이렇게 이 시기는 일반시인이 창작한 동시와 특정 잡지가 기획한 길을 따라 너도나도 스스럼없이 걸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관념과 추상에 사로잡힌 동시(혹은 동심)를 탈바꿈하려는 그 모색과 시도는 좋았고 성과 또한 많았다. 관념적 동시를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자는 비평에 대한 대안처럼 ‘일하는 아이들’로 대변되는 현실주의에 빠졌던 동시를 놀이와 재미로 승화시켜냈다. 이는 우리 동시문학사에 새로운 선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서 동시의 문학성과 동시의 주체를 세우는 노력은 등한시 한 채 겉모양만 따르려는 작가의 행태를 문제시 하는 것이다. ‘일하는 아이들’의 동시는 지금의 ‘놀이와 재미’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작품이다. 그것은 당대 환상적(판타지와 다른 추상된 동심)인 동시를 탈피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현실주의(리얼리즘) 아동문학을 주창한 것이 아니라 아동의 삶을 담아내자는 것이었다. 어른(시인)-아이로 구분 지은 후 어른의 시각으로 아이에게 들려주는 문학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시인)-시적화자-아이로 분류하여 동시의 영역에서 시인의 의지를 빼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시적화자의 주체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즉 시인의 추체험으로 상상한 어린이가 아닌 현실의 아동을 시적 대상으로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난시절 우리는 이를 오인하였다. 1970~80년대를 지나오면서 민족과 민주 그리고 민중의 이데올로기에 알게 모르게 젖었고 그것이 기존 동시(관념적 동심에 의한 동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처럼 추수하였다. 서정동시가 문제였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교훈을 담은 메시지 형태의 동시, 고정불변의 관념으로 초월적인 동심, 떨어지는 미학이 문제였다는 지적을 현실주의 동시로 위안을 삼으며 교훈의 자리에 메시지(이념)를 바꿔 넣었다. 대표적으로 농촌 아이들의 가난과 도시 빈민의 삶을 표상하는 구멍 난 양말이나 폐지 줍는 노인 등을 시적 소재로 한 작품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미학의 문제는 따지지 않고 현실주의 자장에 머물렀다. 한동안 이 자장 안에 머물던 동시는 ‘재미’ 앞에서 ‘묵은 동시’가 되었다. 교훈도 메시지도 모두 빼고 언어 자체가 가진 재미와 어린이들의 생활 속성인 놀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마당(場)이 펼쳐졌다.
이오덕이 그렇게 비판했던 언어유희 동시가 마치 새로운 장르의 동시인양 열광했다.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특별할 것도 없던 유형의 동시였다. 특히 그것은 김영일(金英一)이 주장한 단형동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동안 동시문단은 마치 그것이 새로운 대안인양 매료되어 너나없이 추수하였다. 그러는 사이 동시문학은 서정과 미학을 놀이에 빼앗긴 채 짧은 시형의 말장난 동시로 이어졌다. 순간적인 재치를 담은 짧은 동시나 언어유희 동시는 생각하는 힘을 빼고 찰나의 즐거움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 이렇게 이어오던 짧은 동시를 최근에 유강희 시인은 ‘손바닥동시’라는 이름으로 정형화를 시도하였다. 아예 그는 『손바닥 동시』(창비, 2018)라는 작품집을 냈고 지금은 몇몇 아동잡지 지면을 빌려 그 형식의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다시 새로운 시인-평론가-잡지의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하나의 장이 마련되어 가는 중이다.2)
손바닥동시
말놀이 동시는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놀이에 의미를 두었다. 이후 짧은 동시라는 이름으로 지속된 이 시형은 대상을 순간 포착하여 시적 의미보다는 감각적인 표현에 치중하였다. 이로써 독자에게 재치와 위트 등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짧은 시 형식은 그 실험적 발상에 비해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유강희는 ‘손바닥동시’를 고유명사화 하여 그 시형을 제시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글자 수가 시조의 앞 첫 구만으로 짜인 형식의 시입니다. 3행의 이 시는 기본 자수에서 2~3자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대신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중략) 손바닥 동시는 신축성을 최대한 살린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바닥 동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말」에서 유강희는 10년 전 처음으로 손바닥동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와 같은 형식을 제시하였다. 위의 논리에 따르면 손바닥동시는 무턱대고 짧은 것이 아니라 ‘시조의 앞 첫 구만으로 짜여진’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가운데 그 형식을 규정하고 있다. 굳이 시조의 형식을 빌려 각 장의 첫 구를 따와서 정형으로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손바닥동시의 형식이 시조에서 각 장의 반을 취했다고 하지만 이는 초장 혹은 중장의 어느 한 장의 모두를 취한 것과 리듬(음수율이나 음보율)에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그 정형 리듬이 아닌 미학적 혹은 시적 의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손바닥 동시의 형식에 대해서 이안은 보다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하며 옹호하고 있다.
시조의 각 장을 반으로 나누어 새로 잘라낸 것이 손바닥 동시의 기본 형식이다. 그러니까 3·4·3·4(초장)/3·4·3·4(중장)/3·5·4·3(종장)의 시조 형식에서 각 장 1음보와 2음보, 첫 구만을 취한 것이다. (중략)
그런데 손바닥 동시는 형식을 제안하면서도 스스로 이를 위반하려는 내적 충동을 곳곳에 드러낸다. 이는 시조 자수가 엄격하지 않은 것과도 관계될 터인데, 시조가 엄수율의 정형시라기보다 끊어 읽기의 단위인 음보율의 정형시에 가깝기 때문일 터이다.
유강희의 설명을 이안은 구체적인 시조형식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부연하고 있다. 논의를 이어가지 전에 다음 동시를 먼저 읽어보자.
①
하늘 연못에 사는
잉어는 부끄러운가
입술만 사알짝 내민다
- 유강희 「초승달」 전문(『손바닥 동시』, 창비, 2018)
②
감나무에
감이 조롱조롱
깜둥 강아지
먹고 싶어서
자꾸만 쳐다보네.
-「감」 전문(『다람쥐』, 인문각, 1963.)3)
①은 유강희의 손바닥동시이고 ②는 김영일의 자유동시집 『다람쥐』에 수록된 작품이다. 두 편의 동시에서 풍기는 포에지가 비슷하다. 작가를 가리고 읽었을 때 그 구별이 힘 든다. 유강희는 정형 시조의 전통을 이으면서 3·4의 율격을 지키려하였고, 김영일은 당대(1930) 정형의 율격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작품은 결과적으로 흡사한 느낌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유강희의 ‘손바닥동시’를 참신하고 독특한 형식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김영일의 작품이 일본의 하이쿠(はいく)를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신하다는 평가를 한 것은 당대 동요가 일본의 창가에다가 외형률(주로 4·4조와 2음보)을 준수하였고, 곡을 붙여서 불려 질 것을 전제로 한 가사 형식이거나 노래에 치중된 면을 극복하였다는 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직서적(直敍的)이기 때문에 관념적인 수사어는 별로 씌어지지 않았다. 또 또박또박 끊어서 씌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그 기발한 착상과 함께 시전체가 깔끔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各聯은 대부분 종결어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흐르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러한 그의 동시가 가지는 특징을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중략) 結句의 妙라고 할 수 있다. 즉 처음에 제시부를 내 놓은 후, 결구에 가서는 제시부의 내용이나 분위기·성격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을 제시부에 集中照明(spotlight)시킴으로써 하나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상화하거나,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한다는 것이다.(이재철, 『한국아동문학작가론』, 개문사, 1983. 100~101쪽, 밑줄 필자)
김영일의 짧은 동시(短形童詩)에 대한 이재철의 평가이다. 이 평론의 핵심어는 기발한 착상, 깔끔한 인상, 감정의 빠름, 결구의 묘 등인데, 이 해설을 유강희의 작품 밑에 붙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손바닥동시는 김영일의 시풍을 닮았다. 이는 유강희 시인 스스로가 손바닥동시를 ‘10년 전 처음 이름을 붙인 손바닥동시’라고 명명하면서 의미를 붙였지만, 오늘날 동시의 한계를 새롭게 극복하였다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손바닥동시’ 다시 읽기
한편 유강희는 손바닥동시는 3행을 기본으로 하면서 기본 자수는 2~3자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변형을 허용한다. 이는 시조의 첫 구로 그 형식의 제한하지만 시조가 가지는 특징인 정형속의 자유로움을 구사하기 위함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가 애써 그렇게 규정한 시 형식이지만 별다른 독창성은 없다.
③
차가 지나갔다
웅덩이가
날개를
편다 - 유강희 「차가 지나갔다」 전문(『손바닥 동시』, 창비, 2018)
④
소나기 그쳤다
하늘에
세수하고 싶다. -김영일 「소나기」 전문(『다람쥐』, 인문각, 1963.)
④를 유강희의 작품집에 끼워 넣었을 때 어색함이 있을까. 물론 ③은 제목을 함께 표기하였고 김영일의 「소나기」는 제목을 별도로 처리해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독자가 동시를 읽을 때는 제목을 나중에 읽지 않으므로 독자의 읽는 흐름에 맞추어 본다면 두 작품의 시적 분위기나 문법이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유강희는 ③과 같은 작품을 ‘특별히 자수의 제한을 두지 않는’ 그의 손바닥동시의 변형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짚어 볼 것은 유강희의 시조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전통시조는 자수의 정형을 원형으로 하지 않는다. 조동일에 의하면 시조의 기본자수는 4음절이다. 이를 기본으로 한두 자씩 적거나 많은 것을 허용한다. 시조의 자수에 대한 연구는 1930년에 조윤제의 「시조자수고」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를 서원섭이 「평시조의 형식 연구」(1977)로 이어받았다. 이 연구에 의하면 3·4-4(3)·4/3·4-4(3)·4/3·5-4·3의 기본 음수율에 맞는 작품은 소수에 불과하다.4) 이는 시조의 특성을 음수율이 아닌 음보율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시조는 전체 3장, 각 장은 2구 4음보의 율격을 정형으로 한다. 이는 일본 하이쿠가 음수율을 기본으로 하는 것과 차별적이며, 읽기의 호흡 단위에 따라서 끊어지는 율격의 휴지(休止)를 문법적 휴지에 앞세운 여유로움이다.
이러한 시조의 정형속의 자유로움을 염두에 두고 유강희가 정의하는 손바닥동시의 형식을 살펴보면 그것이 음수율에 치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이런 한계를 알고 있다. 그래서 ‘기본 자수에서 2~3자를 넘지 않아야 하며(…)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주를 달아 이를 보완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조의 음보율에 의한 정형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 그의 작품집에는 음보율보다는 음수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작품이 눈에 띈다. 「겨울 보름달」, 「낙숫물」, 「가을바람」, 「여름밤」, 「하늘 딱지」 등 많은 작품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앞의 예시 작품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의 동시가 이미 김영일이 1930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출간한 작품집 『다람쥐』(1950)에 수록된 단형동시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당대 다수의 비평가들은 김영일의 작품을 참신함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시는 간결한 형태와 소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일면이 번득이는 표현을 통하여 자연을 관조하고, 로만(낭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이재철의 평이 대표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유강희의 작품이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안은 「새로운 동시 놀이형식의 탄생」(『손바닥 동시』 해설)에서 유강희의 작품을 이론적으로 보완하고 나섰다. ‘시조의 각 장을 반으로 나누어 세로로 잘라낸 것, 즉 3·4(1행)/3·4(2행)/3·5(3행)’으로 시조의 형식에서 각 장의 첫 구만을 취한 것으로 이 손바닥동시의 기본 형식을 해설하였다. 이렇게 유강희의 견해를 부연 설명하면서 시조가 음보율의 정형시임을 내세워 손바닥동시가 음수율만을 맞추려 한 것이 아니라는 입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음수율과 음보율의 파격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손바닥 동시가 결국 정형의 틀을 갖추지 못함을 반증한 셈이 되었다. 예시①(「초승달」)의 3행 ‘입술만 사알짝 내민다’는 3음보로도 읽힌다. ‘사알짝’으로 음수를 늘린 까닭이다. 만약에 음보율을 염두에 두었다면 ‘살짝’으로 해야 가락의 파탄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이안은 3·5의 자수를 맞추지 않으려고 ‘사알짝’으로 했을 것으로 추측(『손바닥 동시』, 123쪽)하며 손바닥동시가 ‘자수보다 음보에 따른 운용’에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나 별 의미 없이 자수의 파탄을 가져올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굳이 자수의 제한을 받지 않음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살짝’을 ‘사알짝’으로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서쪽 하늘에
빨간 달 떴네
수박 한 쪽 - 「여름밤」 전문
1행은 한 음보이다. 문법적 휴지(休止)로는 ‘서쪽∨하늘에’로 끊어지지만 율격의 휴지인 호흡단위에서 보면 1음보(‘서쪽하늘에’)가 맞다. 3행도 1음보로 처리될 수 있지만 1~2행에서 제시한 내용을 조명하는 결구이므로 포에지를 살리기 위해서 ‘수박∨한 쪽’처럼 2음보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인용 시는 전반적으로 가락이 경직되어 있다. 또 시조 종장의 형식을 차용하였다는 3행도 손바닥동시의 정형을 스스로 깨뜨린 사례로 보인다. 현대시에서 리듬은 분행과 분연, 구두점의 종류 또는 그 유무 등의 시각적인 효과로 폭넓게 나타나지만, 시조에서는 호흡단위인 율격의 휴지로 말의 가락을 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현대 (동)시조에서는 이 둘 다를 수용하면서 그 가락을 현대적 감각으로 넓혀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툭- 하고
스위치를 켠 듯
환해진다.
아, 다행이다.
정진아의 동시조 「다행이다」의 종장이다. 하이픈(hyphen)과 쉼표(comma)가 스타카토(Staccato) 역할을 하고 있다. ‘툭’ 다음의 하이픈은 시각적으로 이어면서 호흡은 끊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스위치를 켠 듯’은 2음보의 문법적 휴지를 한달음에 읽어야 리듬이 살아난다. 그리고 ‘환해진다’ 다음의 마침표는 한 박자 쉬어야 하고 ‘아’ 다음의 쉼표는 반 박자 끊음으로써 4음보의 길이를 같게 한다. 마치 음의 길이를 조절하면서 연주하듯이 의도적으로 호흡을 이었다 끊는 효과를 가져와 리듬에 탄력을 더해 준다.5)
이처럼 시조는 유강희나 이안도 인정한 것처럼 단순히 음수율에 의한 리듬보다는 박자 개념에 의한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으로 리듬이 살아난다. 즉 음보율은 길이에서 그 균형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자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호흡 때문에 이루어진다. 자수의 많고 적음 보다는 호흡단위에서 휴지(休止)가 일정한 길이마다 나타나기 때문에 음보율이6) 생긴다. 따라서 시조의 한 장은 2~4의 음절수까지 가변적이지만 그 음보는 4음보의 정형을 이룬다. 이때 한 음보의 길이는 음절수와 관계없이 율격의 휴지인 호흡으로 균형을 이룬다. 다음의 고시조를 통해서 그 리듬의 자유로움을 살펴보자.
부모 세상에 계실 때 섬길 일 다 하여라
돌아가신 후면 애달픈들 어찌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 「부모 세상에 계실 때」 전문7)
인용 시조의 자수율은 2·6·3·4/4·2·4·4/3·5·4·3으로 기본율격에 비하면 초정과 중장이 모두 파격이다. 그러나 호흡단위인 음보율은 4음보로 가락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초장의 첫 구 ‘부모∨세상에 계실 때’는 2·6의 자수로 기본 음수율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지만 호흡의 휴지로 끊어 2음보로 읽는다. 종장의 첫 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조의 종장 첫 구 첫 음수는 3음절로 불변이다. 그것은 초장이나 중장과 달리 마지막 행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처리하기 위해서인데 이로 인해 종장의 특이한 짜임새가 나타난다. 그 자수는 ‘3음절(1음보)-5~7음절(2음보)-4음절(3음보)-3음절(4음보)’로 처리하여 초장에서 중장까지 제시한 긴장을 종장의 첫 구(1~2음보)에서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8) 이후 둘째 구(3~4음보)에서 함축(집중조명)시키면서 마무리 짓는다. 종장 첫 구의1음보가 엄격한 제한을 둔 것에 비해 2음보에서는 대개 5~7음절까지 늘어나는 여유를 준다. 예를 들면 ‘저 님아∨가는 나를 잡지 말고∨지는 해를∨잡으려문’(「말은 가려 울고」 종장)9) 에서 보는 바와 같이 8음절이 한 음보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음보율의 등장성을 지키는 호흡의 휴지로 인해 가락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변형과 미완의 차이
그러나 고시조에서도 종장에서 한 음보를 생략하는 변형이 있기는 하다. 주로 시조 창(唱)에 한정되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그것은 2음보에서 음보 결합이 일어나서 다른 음보보다 늘어난 것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로 행해진다. 또 뒤의 한 음보를 생략하더라도 뜻이 통하고 여운을 남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고시조 한 편을10) 읽어 보자.
ᄭᅮᆷ정녕 허ᄉᆞ로다 임이왓다 갓단말가
제정녕 왓게더면 흔적이ᄂᆞ 뵈련마ᄂᆞᆫ
지금에 제아니오고 남의 방에
종장의 마지막 한 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생략된 의미는 쉽게 짐작된다. 화자가 기다리는 님은 지금 내 방에 있지 않고 남의 방에 있다. 이 시조의 형식을 앞에서 설명한 문법대로 풀이하면 종장은 ‘지금에∨제∨아니오고∨남의 방에’처럼 문법적 휴지는 4음보이다. 그러나 첫수 2음보에서 ‘제아니오고’로 음보결합이 일어났다. 따라서 마지막 음보가 생략될 수 있으며 작품을 인용하면서 바로 파악했듯이 생략된 그 의미 또한 분명하다.
이제 다시 유강희의 「여름밤」을 읽어보자. 애초에 손바닥동시가 시조의 각장 첫 구만을 취한 정형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이 작품은 앞에 설명한 시조의 변형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가 제시한 문법(3행은 3·5음수율의 2음보 리듬)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수박 한 쪽’은 4음절이지만 한 음보이다. 이를 의식한 이안은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통해서 그것이 미완의 형식임을 밝히면서 더 많은 공론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손바닥 동시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립되기 위해 더 요구되는 부분이 있음도 눈에 띈다. 가령 3행 3구(6음보) 22자 내외이면 다 손바닥동시로 볼 수 있는가? 손바닥 동시가 되지 않음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써 판별할 수 있는가? 「차가 지나갔다」 「낙숫물」 같은 형식의 파격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중략) 하이쿠가 여러 시대와 세대에 걸쳐 완성된 것처럼 손바닥 동시 역시 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질문과 응답을 통해 차츰 완성될 수밖에 없다. - 이안(『손바닥 동시』, 132~133쪽)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식의 동시놀이가 탄생하는 현장’으로 보는 것은 지나침이 있다. 앞에서 김영일의 작품을 읽었고 또 고시조의 특징을 살펴보았을 때 손바닥동시는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짧은 동시의 연장이며 전통적 가락을 계승한 짧은 동시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종래의 동시가 관념에 치우쳤고, 또 지나친 무게감을 앞세웠다는 비판,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가벼움 등이 어우러져 나타난 짧은 동시 보다 한 걸음 나아간 면은 인정된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유행했던 짧은 동시가 대상에 대한 순간포착과 언어유희 그리고 지나친 재미에 치중되어 시적 포에지를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짧은 동시를 극복 하였는가 또 시인이 제시한 손바닥동시의 정형을 완성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 과제이다. 현 단계 동시문학이 새로움의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추동하는 문학권력의 전략(場의 형성)에 의한 창작을 고민해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