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산성경학원은 사실 한국 첫 침례교 선교사 Malcolm C. Fenwick(1889) 부인이 세운 여성들만을 위한 성경클래스였는데,
최근 한국 최고 대전침례신학대학은 그 시작을 이 성경학원으로 채택햇다???
1953년도 제 8회 총회, 장소는 1947년도에 구입 건축예배를 드린 점촌교회 당시 최고의 건물???
가운데 한기춘, 안대벽, 나요한선교사, 이모부 최성업? 제목사님들이 앉았고 안대벽목사 뒤 부인 이순도여사 왼쪽 옆 세번째 얼굴은 빠꼼히 수줍게 내밀고 계시는 오마니 김혜경 그 오른쪽 뒤 김광택박사...
같은줄 오른쪽 6번째 남용순, 그 뒷줄 얼굴크게 나온 김갑수목사님들이 보인다.
아버님은 어디 계시나.. 또 누가 계신가???
1957년도 미남침례교 첫선교사 나요한 한문으로는 나약한으로 된것을 처음알았다.
John Abernathy 선교사 회갑기념 크라운맥주가 빛나는 대명관례당이다 ㅎㅎ
나선교사 사모님 왼쪽에 안대벽목사 이순도여사 부부, 오른쪽에 서울침례교회 필동 강성주목사님부부 사모님뒤가 오마니 김혜경전도사, 그 뒤 왼쪽 할머니가 청송의 병건이 할마시, 그 왼쪽 두번째 미남이 김광택박사.
나요한선교사가 한국부임직후 625동란 발발로 바로 철수 했다가 51년도에 다시 바로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오마니의 의형제 였던 미래의 사돈 청송 할머니의 장남이 당신 한국스레이트 김사장에게 부탁하여 영도의 김사장 사택에 머물게 된다. 미군의관들에 의해 시작된 부산침례병원의 태동도 이와 관련이 있을수 있다.
가운데 앉으신 모친, 그 뒤 검은 안경을 쓴이가 동생 김광훈박사, 뒷줄 왼쪽 끝이 워싱톤침례신학대학장(현 University of Verginia)을 지내신 신석택목사,
그 제일앞줄 검은 옷이 신석태목사 부인. 우리 어릴적 60년대 말 서울침신이 인천 숭의동 성애원에 잠시 와있을당시 교수로 와 있었고 부인은 가수였던기억이 난다.
사진 당시는 워싱톤 락빌 지역에 치공소를 크게한 김용구집사처럼 치공을 했었는데 우리가 미국에 온 80년대 초에 일본 동경에 선교사로 나가 오래 있다가 돌아와서 김호식박사가 세운 워싱톤침례신학대학에 학장을 지냈다.
1974년 여름이라고 직접 김광택박사가 기록하신 친필.
'어머님과 광훈이(김박사 동생, 같은 메릴랜드 주립대교수로 민족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셨지만 1980년대 중반쯤 일찍돌아 가셨다. 백인과 결혼햇고 후손은 두지 못햇다) 중심으로 와싱톤에사는 한국에서 오신 침례교인들이 어머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러가지고 와서 야외예배를 본후 기렴 찰영. 1974년 여름.
가운데 분은 우리가 아는 선교사는 아닌 것으로 보아서 중국선교사 엿던 나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한데 결정적역활을 하고 같이 왓던 동경본부의 아세아 담당 디렉터 고든박사일 가능서이 크다.
그렇다면 나선교사가 파견전 방문햇을때의 사진일 가능성도 있다.
침례교의 영원한 젊은이 김광택박사... 영원히 젊은이로 있을 것 같았던...
호적상 나이가 1920년생 2018년 소천당시 만 98세인데..
김박사 어머니와 처녀때 친구엿던 오마니가 1915년 생으로 5살 차이는 말이 안돼고..
아마도 전쟁으로 호적이 없었으므로 나이를 수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전침신대학의 첫시작으로 기록된 원산성경학원에서 1933년도 사진에 7살? 내 기억이 맞다면 1926년생으로
2018년 소천할때 92세였을것이다.
사진은 부산민예사 마크가 선명한데... 그렇다면 서울 수복전 1950년대 초, 1926년생으로 치면 그래도 20대 후반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산 피산시절에는 저런 건물이 있을 데가 없으니 서울 수복후 어디 궁전에서...
오마니가 계시고 오른쪽 둘이 따로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좀 납작해 보이지만 머리과 세련된 복장이 김박사일수 밖에없다??
가운데 듬직한 학셍은 인천숭의동 산성침례교회 이천수목사??
앞줄 왼쪽 끝 김용해, 오른쪽 2번째 담임 강성주, 끝이 이모부이자 설립자 안대벽목사.
1946년 남하한 우리부모님은 안대벽목사와 8명이 첫예배를 드렸다.
1964년 김용해 목사가 쓴 침례교사.
펜위익 선교사는 1929년 유서를 쓰고 영국 대사 까지 불러 공증을 마쳐 놓고 1935년도에 소천 했다.
당시 2 사람에게 돈을 남겼는데
양자로 있던 전치규 목사 에게 천원,
그리고 '할아버지 의 아희' 김박사 에게 거금 500원을 남겼다.
얼마나 김 박사를 사랑 했는지 알수 있다.
김박사의 할아버지는 아마도 원산 본부의 사찰 집사 같은 분 이었을것이다.
그뿐만 호상 6인 중에 한 사람으로 기록에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