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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9
최초의 역법, 칠정산<내,외편> 완성
옛사람들은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별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역대 임금들은 천상계의 변화가 나라의 안녕과 직결된다고 여겼다. 농업이 산업의 전부였던 당시에는 하늘의 움직임을 읽고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왕의 중요한 책무이기도 했다.
당시 천문학의 핵심은 ‘역법曆法’ 즉,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살피고 예측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달력을 만드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에는 일식과 월식의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으로 역법의 정확성을 검증했다.
1422년 1월1일 일식 날에는 일식으로 인한 재앙을 막기 위해 세종이 나와 관찰했다. 이때 예보한 시각이 약 15분 정도 차이난다는 이유로 예보관이 곤장을 맞았다. 이것은 관측관리의 잘못이 아니라 역법의 부정확성 때문인데도. 조선은 그때까지 중국의 역법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중국의 위치에서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위도와 경도의 차이로 오차를 피할 수가 없었다. 역법도 중국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농사의 절기를 알려 주고 천재지변을 예측하는 데는 우리의 역법이 필요했다.
정초, 이순지에게 관측기구 제작을 위한 연구를 하게하고 장영실과 이천에게는 관측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이들이 연구한 결과 혼천의, 간의, 규표가 만들어졌다. 1432년 세종이 원의 수시력을 참조한 달력을 만들었다. 혼천의, 간의 등을 이용한 한양의 위도를 확인하고 칠정의 운행궤도와 주기를 밝혀냈다. 10년 만인 1442년 마침내 칠정이 운동하는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칠정산 내편七政算 內篇>을 만들었다. 한양을 기준으로 한 천체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역법이 탄생한 것이다. 1444년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한 <칠정산 외편七政算 外篇>이 완성되었다.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에 다섯 행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칭한 것이다. 오늘날의 일곱 요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서울의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고, <외편>은 아라비아 천문학을 흡수하고 있다. <내편>은 1년을 365.2425일, 1달을 29.530593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는 현재의 값과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일치했다. <내편>이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고 있는 데 비해, <외편>은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초를 60초로 한 새로운 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이 방식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
1442년에 당시 이 정도의 천문학 계산을 할 수 있던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조선밖에 없어 우리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정초와 이순지, 이천, 장영실이 과학기술을 주도하다
세종이 정초를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공조 참의로, 이순지를 천문과 역산 연구에, 이에 필요한 기계제작은 장영실에게 맡겼다. 두뇌가 뛰어난 정초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체학, 산학,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농사직설, 삼강행실도를 지었다. 세종이 세자시절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고 예문관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관장하기도 했으며 이천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했다.
이순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천문학, 수학에도 능력이 뛰어났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는 '시묘'를 위해 이순지가 의표창제에서 빠지자 천문을 관측하던 일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결국 세종은 이순지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두 사람의 연구를 통해 서울을 중심으로 표준시간을 정할 수 있게 되면서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천은 병기 제조와 금속가공 기술자로 고위 관리직에 등용된 기술관료 이며 유능한 과학기술자로서 세종의 과학, 국방, 음악, 인쇄술의 혁신을 주관했다. 이천은 세종 16년인 갑인년 7월에 조선조 금속활자의 기본이 되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의 성분은 구리 84%, 아연 3~7%, 납 5%, 무쇠 0.1%로 만들었다. 이천이 이 같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의표창제 사업을 진행하면서 얻은 기술을 활자 주조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화학무기 체계를 완성하면서 자주국방의 길을 여는 데도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출신이다. 영남지방에 가뭄이 들었을 때 물을 퍼 올리는 펌프를 고안해 내 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주었다. 주자소에서 활자 만드는 일을 하다가 세종에게 발탁되어 북경유학까지 다녀왔다. 장영실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개발에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나라의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정교함이 장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자주,민본,애민정신을 실천하다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본 맨 앞의 글이다.
1446년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28자를 반포하면서 창제목적을 “자주, 민본, 애민”이라고 밝혔다. 훈민정음은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가 일부 도와주고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옛 글자를 본떠 만들었는데 초, 중, 종성을 합해 글자를 이룬다. 글자는 간단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불렀다.<세종실록>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당시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것에 대한 연구가 끝나지 않아 대군들에게 해결하도록 했으나 모두 풀지 못했다. 이를 정의공주가 해결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노비 수백 명을 내려 주었다.<죽산안씨 대동보> |
훈민정음은 1443년 12월에 창제하고 1446년 9월에 반포했다.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한 사대주의 때문에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했다. 집현전을 대표한다는 최만리가 상소를 올렸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 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한글의 반대는 곧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믿고 최만리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훈민정음의 등장은 평민이나 천민들이 지식을 공유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1432년 11월 7일, 세종이 신하들에게 주요 법조문을 우리식 한문체인 이두문으로 번역 반포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문제를 의논한 것이다. 허조가 백성들이 문자(이두문)를 알면 부작용이 커진다며 반대하였으나 임금은 법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옛 기록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례를 조사하도록 했다. 1428년 10월 3일,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교화를 위해 ≪효행록≫이란 책을 펴내라고 하였다. 도덕 윤리는 일벌백계로 안 되므로 책을 통해 근본적인 교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1434년 충신, 효자, 열녀 등 행실을 그림으로 묘사한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반포하려 했다. 정창손이 “사람이 행하고 않는 것은 각자의 자질에 달렸습니다. 어찌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읽는다 해서 사람이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부정했다. 세종이 속물 선비라며 파직했다. 세종은 더 확장하여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펴냈다.
쓸쓸한 말년, 후대가 걱정이다.
세종은 20대부터 두통과 이질, 중풍과 종기로 40대에는 당뇨, 전립선염, 각기병, 고혈압을 앓았다. 초정리 약수를 마시며 눈병과 피부병을 치료하고 온천을 자주 다녔다. 심지어는 4군6진을 개척하던 시기에도 온천에 있었다.
1419년 큰아버지 정종이, 1420년 어머니 원경왕후가, 1422년 아버지 태종마저 세상을 떠났다. 연속하여 6년이나 상중에 있었다. 상중에도 경전과 역사책을 놓지 않았다. 1444년에는 5남 광평대군이, 한 달 후 7남 평원대군이, 1446년에는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세자(문종)이 등에 부스럼으로 고생하자 세종이 아픈 몸으로 정사를 대신하다 1450년 54세의 나이로 8남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합장했다.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이다. 풍수논란이 일었다. 경복궁터가 흉지라고 주장한 최양선이 이곳에 능을 쓰면 후손이 끊어지고 장자를 잃는다絶嗣損長子고 했다. 실제 세종의 큰아들 문종이 일찍 죽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죽임을 당했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와 예종의 큰아들 인성대군도 일찍 죽었다. 예종은 세종의 능을 경기도 여주로 옮겼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 묘자리 문제가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그저 지나칠 일이 아닌가 보다.
세자폐위에 반대했던 황희를 포용하다
세종은 말년에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조성하려 했다. 유교를 숭상하는 대신들이 반대했다. 마음이 상한 임금이 텅 빈 전내殿內를 둘러 보다 옆에 있던 황희에게 말했다.
“모든 학사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신이 가서 달래 보겠습니다.”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고, 내불당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황희는 세종의 마음속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다.
황희의 아호는 방촌이다. 조상의 고향은 남원인데 개경에서 태어났다. 성균관 학관으로 있을 때 고려가 망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달랠 길 없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그러나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을 물리치지 못해 뜻을 꺾고 벼슬자리에 올랐다.
조선왕조에 들어서 세자를 가르치는 우정자를 시작으로 태종 때에 6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좌참찬에 기용된 뒤 좌 ·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정승 24년, 영의정 18년을 재직한 뒤 물러나 평탄한 생애를 보냈다. 황희는 관직에 들어선 뒤, 단 한 번의 유배와 두 번의 가벼운 파직밖에 겪지 않았다.
그가 유배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양녕대군이 큰아들이므로, 큰아들을 제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으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일로 그는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으로 이배했다. 태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그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 동안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그가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이유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1422년 좌참찬으로 발탁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난 인사였다. 황희는 세종의 빛나는 업적에 조력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 식견이 좁은 선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세종을 보필했다. 특히 황희는 과학적인 농사 개량과 실질적인 예법 개정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그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황희는 공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늘 너그럽고도 인자했다. 죄인을 다스를 때에는 가벼운 처벌을 위주로 했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나라를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흔히 황희라면 순하고 좋은 사람이라 뼈대 없는 무골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계집종들이 싸움을 했다. 한 계집종이 황희대감에게 고자질했다. “저 아이가 제 험담을 하고 다닌답니다.” “네 말이 옳다.” 다른 계집종이 억울하다는 듯이 달려와서 말했다. “대감마님, 거짓말입니다.” “네 말도 옳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아들이 물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십니까?” 황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네 말도 옳다.”
그는 결코 뼈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자질구레한 일에는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한 치의 빈틈도 주지 않았다. 사실 앞의 두 계집종의 시비나 아들의 참견은 부질없이 따지는 인간사를 풍자한 이야기이다.
그는 청렴결백했다. 흔히 관직을 이용하여 권세와 부를 누리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는 녹봉만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늘 쪼들리게 살았으며 그의 집은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해 비가 샜고
방 안에서 책을 읽을 때 우산을 받쳤다고 한다.
세종이 그를 돕기 위해 머리를 썼다. 날짜를 정해 그날 4대문 안에 들어오는 계란을 그의 집으로 보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홍수가 나 계란장수들이 문 밖에서 며칠 묵은 뒤 계란이 들어와 모두 곯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계란유골鷄卵有骨 -계란에도 뼈가 있다. 운이 나쁜 사람은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나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을 철저히 실천했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벼슬자리를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과거시험이나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도록 했다. 그런 탓으로 그는 자기 패거리를 만들지 않은 청백리였다.
부드러운 리더십, 소탈한 맹사성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다. 재능이 있고 성품이 올바르기에 태조(이성계)가 맹사성을 중용했다. 맹사성은 예의가 바르고 소박하면서도 업무에는 강직하여 공직자의 모범이라고 불리고 있다. 맹사성은 세종의 여진정벌을 돕고 조선 초의 음악을 정비하였으며, 김종서를 천거하는 등 인재를 발굴하고 농사개량에 힘썼다. 특히 여진정벌은 맹사성이 세종의 뜻을 받아 영토를 확장할 수 있도록 공헌했다. 맹사성은 세종을 보필하면서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려고 했으나,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은퇴 후에도 조정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세종은 자문을 구하곤 했다.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았기 때문에 향악 정리와 악기 개발에도 재능을 보였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 황희와 맹사성을 뽑고 있다. 맹사성은 세종의 믿음을 받으면서도 황희 정승과 서로 다른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황희는 강직하고 명확한 성격이었고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외교, 국방, 행정 등에는 황희가 교육, 제도, 문화 등에는 맹사성이 맡아서 했다.
세종이 대궐에 내불당을 지으려고 하자 두 사람은 주장이 달랐다. 황희는 세종의 마음에 동화되어 대신들을 회유하기도 했지만, 맹사성은 유학자로서 강직하게 반대하며 집현전 학자들과 반대했다.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했다. 맹사성은 벼슬 중에도 부모의 봉양을 위해 여러 번 벼슬을 그만 두려고 했다. 맹사성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며 예를 차릴 줄 알았으나, 업무에 있어서는 엄격하여 사리분별이 뛰어났다.
맹사성은 벼슬이 낮은 사람도 예의를 갖추어 배웅했으며, 하인의 잘 못에도 항상 너그럽게 대응했다. 자식의 술버릇이 나빠지자 맹사성은 자식에게 절을 하며 술버릇을 고쳐주었을 정도로 엄하지 않고 부드러운 소통을 했다.
그의 생활은 검소했다. 공무가 아니라면 맹사성은 걸어 다니거나 소를 타고 다녔다. 맹사성의 검소함 때문에 그가 재상인 줄 모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다.
박연과 더불어 우리의 음악으로 발전시키다.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에서 중시한 것은 예악이다. 예법에는 5례라 하여 국가나 개인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의 길례, 손님을 맞는 빈례, 혼인의 가례, 흉사 때의 흉례, 군사 행렬 시의 군례다. 이 행사에 수반되는 것이 음악이다.
세종 때에 발전시킨 음악의 범주는 아악의 정비와 제정, 신악의 창작, 정간보의 창안을 들 수 있다. 박연은 과거를 본 선비지만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세종은 박연에게 아악별좌라는 직책을 주고 음악을 발전시키도록 임무를 주었다.
①오례 중 길례의 서례와 의식은 왕실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태종 때 허조가 만들었다. 길례를 제외한 빈례, 가례, 흉례, 군례는 세종 때 제정되었다.
세종 대의 음악은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뉘는데 가장 많이 연주된 음악은 아악이었다. 아악은 아정(雅正)한 음악, 바른 음악이다. 아악은 종묘제례나 기타 국가의 의례를 시행할 때 연주되던 음악이다. 세종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에서 전해진 아악보를 그대로 사용하다 세종이 아악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새로운 아악보가 제작되었다. 아악의 기본은 중국 주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우리와 맞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중국 아악을 정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430년부터 새 아악보를 이용해 제향에서 연주했고, 1433년에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참여하는 회례에도 새로 만든 아악을 연주했다.
②세종은 신악新樂을 제정했다. 이것은 고려에서 전해진 음악을 새로 편곡하고 작사한 것으로, 중국 음악인 아악과 구별해 향악이라 불렸다. 세종이 선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용비어천가』가 대표적인 향악이다. 향악은 복잡한 리듬을 가지고 있어서 리듬이 비교적 단순한 아악보의 형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다. 세종은 새로운 형태의 악보인 정간보를 만들었다. 정간보는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다.
③세종은 박연에게 아악기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편경을 제작하도록 했다. 박연은 어릴 때부터 피리·비파·거문고 등을 잘 연주했고 아악의 제정과 악기 제작은 박연을 신밍하고 있었다.
박연은 경기도 남양에서 나는 옥돌로 편경을 제작했다. 완성된 편경을 세종에게 바치고는 시연했다. 편경 소리를 들은 세종이 “이칙夷則 1매枚 의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했다. 박연이 살펴보니 편경을 갈 때 그었던 먹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박연이 말했다. “경석위에 먹줄로 모양을 만든 다음 돌을 잘라내는데 그 중 하나의 경석에 먹줄 자국이 남아서 소리가 제 값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경석이 두꺼우면 높고 얇으면 음의 높이가 낮아진다. 세종은 반음의 1/10까지 찾아낼 수 있는 음감의 소유자였다.
세종 인간으로서의 고뇌
세종이 다스리던 시대도 친인척 비리, 권력형 부정부패 있었다. 왕은 왕가의 결속을 위해 자주 종친을 대궐로 불러서 친목을 다졌다. 상왕(태종)과 함께 대궐에서 종친들과 격구도 했고, 연회를 열어 함께 즐겼다. 친인척을 가까이 하면서 부작용도 생겼다. 의산군 남휘(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남편)가 말썽을 많이 피웠다. 어느 날 남휘가 조정 관리를 폭행했다. 왕은 조용히 그를 감쌌다. 남휘는 상중에 있던 공신의 비첩을 데려다가 간음하기도 했다.
양녕대군의 큰아들 순성군(이개)도 문제가 있었다. 전염병을 피하겠다며 무작정 판관 김후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김후생은 아내가 병중이라며 사양했으나 순성군은 막무가내였다. 불청객 순성군은 밤이 되자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벽에 구멍을 뚫어 안방을 엿보았다.
막내 영응대군을 지나치게 아껴 그와 관련되는 일이라면 사리 분별이 어두웠다. 영응대군의 양부 이순몽에 관한 세종의 지나친 애정이 그렀다. 판중추원사 이순몽은 거액의 뇌물을 받고 벌을 받았지만 왕은 이순몽을 감쌌다. 이순몽이 무사했던 까닭은 영응대군의 비호 덕분이었다. 대군은 어렸을 적 잠시 이순몽의 집에서 전염병을 피했다. 그 인연으로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수양아들로 삼았다.
영응대군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대군은 세종 16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소헌왕후가 낳은 여덟 대군 중 막내였다. 영응대군은 마음이 착해, 동자를 그려 넣은 초를 바라보다가 만약 촛불을 켜면 어린아이도 녹을 테니 차마 불을 켜지 못하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응대군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본래는 큰 집을 사서 선물로 줄 계획이었다고 한다. 대군의 집 짓는 문제로 왕은 대신들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세종이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자 김종서와 하연이 적극적으로 나서 왕을 편들었다. 김종서는 고관들도 법제대로 집을 짓지 않았다며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연은 영응대군에게 아직 집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라며 속히 집을 짓자고 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한발 더 나아가 예정한 택지가 너무 좁다며, 왕실 정원 상림원上林園 터와 그 곁에 있는 호조 참판 목진공의 집까지 아울러 택지로 쓰자고 건의했다. 그때 문신 이현로가 풍수지리를 근거 삼아서 대군의 집터로 안국동 부지를 제안했다. 마침내 60여 채의 민가를 헐고 웅대한 저택을 짓게 됐다. 판관 조휘는 상소를 올려 왕을 비판했는데, 그는 왕의 잘못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절제가 부족하고 둘째, 백성이 생업을 잃게 했고 셋째, 왕실 건축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지적했다. 여론이 불리해지자 세종은 우회 전략을 생각해냈다. “영응대군의 집이 법제에 어긋난다고 다들 말한다. 그래서 나는 풍양(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별궁을 영응대군에게 주고, 현재 건축 중인 집은 왕세손(단종)에게 주려고 한다.”고 했다.
왕은 장차 영응대군과 함께 살기를 소망했고, 왕의 그러한 생각을 대신들도 곧 알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집을 대군의 집으로만 삼을 일이 아니옵니다. 장차 임금님께서 옮기실 곳으로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소서”라고 하면서 공사 재개를 요청했다. 대신 정분과 민신이 공사를 진두지휘해 넉 달 뒤 완공했다.
왕이 일단 영응대군 집으로 들어가자 세자도 계획을 바꾸어 그곳으로 옮겼다. 영응대군의 저택은 임시 궁궐로 바뀌었다. 거처를 옮기고 불과 13일이 지났을 때 세종이 새집에서 운명했다. 짐작하건대 소헌왕후가 세상을 뜨자 왕은 경복궁에 살 마음을 잃고, 사랑하는 막내와 여생을 함께 보낼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로서 세종은 매우 무섭고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네 명의 며느리를 쫓아냈다. 세종은 임영대군에게도 아내 남씨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임영대군의 아내는 개국공신 남은의 증손녀이자 대신 남지의 딸인데도 결혼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강제로 이혼 당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 등을 불러, 며느리 남씨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나이가 12살도 넘었으나 아직도 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눈빛이 바르지 못하고, 발음이 분명하지 못하며, 행동거지도 정상에서 벗어나 놀라고 미친 사람 같다.” 고 비난한 다음에 남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세자(문종)의 아내(빈)였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는 폐출 당했다.
세종 9년, 휘빈 김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됐으나 세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자빈은 세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시녀 한 사람에게 비법을 들었다.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의 신발을 불에 태워 그 가루를 남성이 마시게 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 세자빈은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들의 신발을 가져다 시험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뒤늦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세종은 분노했다. 왕은 세자빈을 다그쳐 자백을 받고는 곧 폐출했다. 휘빈에게 비법을 알려준 시녀는 사형을 당했다.
순빈 봉씨의 일도 끔찍했다. 세자는 봉씨도 좋아하지 않았고, 후궁 승휘 권씨(현덕왕후)를 가까이해 임신했다. 세종은 세자를 타이르며 정부인에게 아들을 두는 것이 좋다며 넌지시 책망했다. 그 후 봉씨는 상상임신을 하기도 했고, 승휘 권씨를 괴롭히기도 했다. 나중에 봉씨가 시녀와 동성애를 하였다. 왕은 봉씨가 아이도 낳지 못하는 데다 투기도 심하다는 이유로 폐출했다. 왕은 네 명이나 되는 며느리를 축출했다.
누구나 허물은 있다. 세종은 공정과 정의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그의 판단과 결정도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다. 결점이 하나도 없는 성군, 어질기만 한 현왕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할 수가 없다. 세종은 대단히 뛰어난 군주였으나, 그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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