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_BxDRsRBvE
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봐예쉐브 / 거주하였으니 | 창 37:1-40:23 | 암 2:6-3:8 | 요 2:13-4:42 |
<단락 1> 1. 창 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거주하다 (히 : 예쉐브)’는 ‘제자리로 돌아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수 많은 고난 (하나님께 순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을 겪게 됩니다. 자신의 형에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수고하고, 그 이후 삼촌 라반은 야곱을 영원히 자기 종으로 묶어 두려고 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며, 라반과 같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자신의 종으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내 라헬의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 라헬의 장자 요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본향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주인 된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통치권을 내어드리기 위함입니다.
1)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타국인이며,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특징은 삶이 단순하며,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언제든지 순종할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서 편안히 정착하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기를 갈망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경주해야 합니다 (롬 8:17-18).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의 삶을 통하여 형제들이 연합되어지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말할 때에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남 유다를 ‘유다의 집’, 북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야곱의 혈통으로 낳은 10명의 아들들은 남 유다가 되어지며, 유다 지파가 남 유다를 대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애굽 여자 (이방인)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습니다. 야곱은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창 48:5). 이 때,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은 아니지만, 참감람나무 (이스라엘)에 접붙힘을 받게 됩니다 (롬 11:17-26). 그래서 열방 교회는 북이스라엘의 집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창 48:17-19). 그러나 요셉과 야곱의 10명의 아들들의 연합 (온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남 유다 (유대인), 북이스라엘 (열방 교회)로 나누어지게 되며, 지금까지 연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슈아를 상징하는 요셉을 통하여 두 집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장차 이 땅에 왕으로 오실 예슈아를 통하여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은 하나가 되어질 것이며 (한 새 사람의 비전), 예슈아와 함께 예루샬라임 성전에서 거하게 될 것입니다 (히 : 예쉐브 : 제자리로 돌아가다). 그리고 이번 주 토라포션에 또 다른 한 새 사람의 예표가 되는 인물이 나옵니다.
2) 창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는 요셉을 팔아넘긴 후에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집에서 이탈). 이는 예슈아를 예표하는 요셉을 팔아넘긴 후 영적으로 타락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예슈아를 거절하고 지난 2000년간 열방에 흩어져 핍박을 받으면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무슨 지파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유다 지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유다를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저주한 가나안 족속의 사람 수아의 딸을 취해서, 엘, 오난, 셀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예슈아는 유다 지파로 오시는데, 가나안 족속의 피가 섞임으로 메시야 계보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가 오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 가운데 ‘다말’이 등장합니다.
(1) 창 38: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아버지 유다가 첫째 아들 엘과 결혼시키기 위해 다말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유다의 첫째 아들 엘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죽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 다말과 결혼하고자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함으로 죽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다의 아들들과 다말이 결혼하는 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말은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요?
(2) 창 38: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은 유다와 관계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다말이 임신한 것을 알고 난 이후에 유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립니다. 유다는 다말이 거짓말하고 자신을 모함한다고 생각하기에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다말은 자신을 임신하게 한 유다의 물건들 (유다의 도장, 끈, 지팡이)을 보여줍니다. 도장은 왕의 직분을 상징하며, 끈은 제사장 직분을 상징하며, 지팡이는 심판장 직분을 상징합니다. 즉, 도장, 끈, 지팡이는 예슈아를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이를 통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메시야의 계보에 관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말은 무슨 생각으로 유다를 속여서 임신을 하였을까요? 다말의 히브리어는 ‘타마르’이며, 그 뜻은 종료나무 (의인을 상징)입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다말이 유다의 자녀들과 결혼하는 것이 아닌 메시야의 계보를 잇는 유다와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아들이 죽으면 아버지가 며느리를 책임지는 것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말은 용기 있는 행동과 믿음을 통해 유다지파의 사람이 되길 원하였고, 그 결과 예슈아의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복을 취하였습니다.
(3) 창 38:26 (현대인)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그녀가 나보다 옳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다.' 하고 다시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유다는 요셉을 파는 사건을 통하여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갈 지파로의 부르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다시 일으킬 계획을 하시고, 다말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녀가 자신보다 낫고, 옳다고 고백합니다 (유다의 부르심의 회복). 이처럼 다말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수 많은 모함과 수모와 수치를 겪어야 했습니다. 주변에서 창녀라고 하며, 손가락질해도 다말은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을 신뢰하였습니다. 다말이 받는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얻게 되어질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살아있는 교회는 다말처럼 (종료나무) 이스라엘을 예슈아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단락 2> 아모스는 호세아와 요엘 선지자의 동시대 인물이며, 남 유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와 농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북이스라엘 벧엘에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참고로 아모스의 뜻은 무거운 짐입니다.
2. 암 2: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7 족속 중 1 족속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처럼 우상숭배하여 군사력과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리인과 같은 죄악에 빠져, 약속의 땅에 쫓겨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 아마샤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우리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암 6:1).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방법 (불순종)을 통하여 얻게 되는 안정감과 행복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방법 (순종)으로 통하여 얻게 되는 안정감과 행복함을 누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삶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삶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으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봐야 합니다.
1) 암 2: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게 선지자와 나실인을 주셨습니다. 선지자는 삶의 원리를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 가운데 행하시고자 하는 시대의 영적 흐름을 알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실인은 한정된 기간 동안 (통상적으로 30일에서 100일) 하나님을 위하여, 세속적인 쾌락을 멀리하고, 자신의 시간, 재능, 자원을 여호와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나실인을 원하지 않았으며, 거짓 선지자 아마샤의 음성을 좋아했습니다.
(1) 암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알았나니’의 히브리어는 ‘야다티’입니다. 히브리어 ‘야다티’는 히브리어 ‘야다’의 완료형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창세기 4장 1절에 나온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매’, 이 말씀 중에 ‘동침’이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즉, ‘야다’는 신랑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인격적으로 사랑하셨고, 그들은 당신의 신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모든 열방 가운데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을 뒤로 하고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징계와 심판을 통하여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뜻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동일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비인격적인 관계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2)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비밀 (히 : 소드)은 깊은 친밀함, 비밀회의, 은밀한 일을 의미합니다. 시편 25편 14절에 ‘(KJV) 주의 은밀한 일 (히 : 소드)이 그 분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함께 하나니, 그 분께서 자신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우리의 인생은 두렵고 떨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토라)를 통하여 은밀하고 비밀한 계시들을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파트너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부르심이며,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부르심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세상의 부르심을 위해 살아갔으며, 그 결과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