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전후의 조선교회
- 네 가지 대박해 중 병인박해는 마지막이었지만 일시적인 천주교 금지령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쇄국정책과 함께 지속적인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관청에서 문초를 받고 있는 베르뇌 주교’, 탁희성 作)
일반적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초기 역사를 100여 년이 넘는 박해시기로 설명하면서 네 개의 대박해를 이야기한다. 최초의 대박해 신유박해(1801)는 조선교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믿음살이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가르침’ ‘서양 세력에 의한 모반 집단’ ‘사악한 학문’ 등으로 규정하면서 교우들을 처벌하였다. 신자들에게 씌워진 이러한 누명은 박해 내내 계속되었다. 기해, 병오박해를 거치며 성직자는 물론 교회의 주요 지도자들이 순교하자 조선교회는 ‘목자 없는 양 떼’의 교회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김대건 신부의 입국 이후 거의 20여 년간 선교사 수는 적지만 성사생활과 교회서적을 통해 꾸준히 복음전교의 활동이 이어졌다. 네 가지 대박해 중 병인박해는 마지막이었지만 일시적인 천주교 금지령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쇄국정책과 함께 지속적인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지난 호에 살펴본 것처럼 박해 직전 조선교회는 교리서, 기도서, 신심서적 등 중요한 서적들을 출판하였고, 선교사들이 더 많이 입국하면서 복음화의 열정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였다.
먼저 병인박해의 배경부터 간단히 정리하면 이러하다. 186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命福=고종)이 왕위에 오른다. 고종은 당시 열두 살 어린 나이였으므로, 아버지인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봉해져 섭정을 하게 되었다. 1864년 2월(음) 러시아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이를 막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대원군은 처음에 선교사들의 중재를 통해 러시아를 막아내고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며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그와는 정반대로 1866년 음력설 직후 베르뇌 주교 등을 체포함으로써 병인박해를 단행했다.
병인박해의 원인 몇 가지를 들면, 첫째, 러시아인들의 위협이 사라지자 더 이상 서양 주교를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둘째, 1866년 1월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정보가 조선에 들어왔는데, 매우 지엽적인 정보가 과장되어 전달된 것이었다. 셋째, 당시 조정에는 문호를 개방하려는 진보파와 쇄국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파가 맞서고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은 후자 편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해에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박해는 더 거세어지고, 서양인에 대한 증오심과 천주교 박해가 맞물리면서 쇄국정책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재건과 흉년 등 악재가 겹친 것도 박해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려주는 편지의 한 대목이다.
러시아인들이 요구해 온 것을 기회로 나는 조선의 섭정(흥선대원군)에게 북쪽의 이웃들에 대해 방어 태세를 취하도록 몇 마디 전언을 보내게 했습니다. …내 의도는 그가 나를 불러서, 조선을 위협하고 있는 재앙으로부터 조선 선교지를 보호하기 위해 나보고 북경에 가서 우리 공사와 합의하라는 임무를 내게 맡겼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섭정이 나를 만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만, 나는 그 말을 그리 믿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나는 변문 근처 요동과 인접한 지방(평안도)으로 가려고 수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방과 황해도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지요. 나는 그곳에 가서 성인 600명에게 세례를 줄 예정입니다. (1865.12.10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 내용은 베르뇌 주교가 만주대목구 시절 동료였던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1864년 전후로 러시아는 계속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대책을 세워야 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러시아를 막는 대책”이라는 뜻에서 “방아책防俄策”이라고 부른다. 남종삼, 홍봉주 등과 같은 신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흥선대원군과 교섭을 시도했다. 프랑스가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줄 수 있으며, 그러면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자신은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선교사일 뿐이고, 러시아와는 종교도 국가도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전했다. 베르뇌 주교는 다만 그 이후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정식으로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인 앙리 드 벨로네에게 연락해보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만남이 실패하고 찾아온 것이 병인박해이며, 앙리 드 벨로네는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여 이른바 병인양요를 일으킨다. 베르뇌 주교의 편지를 보면 병인박해 직전에 한양 이남 지역만이 아니라, 북쪽 지역에도 이미 복음이 많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20여 년을 조선에서 살던 다블뤼 부주교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어린 왕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우리도 우리 신자들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할 것인지요. 그는 성격이 격하고 잔인하며 백성을 업신여기고 사람의 목숨을 아주 경시합니다. 그가 만약 천주교를 공격하는 날이면 무섭게 할 것입니다. …이번 겨울은 지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선 가뭄이, 다음에는 홍수, 그리고 가을에는 무서운 바람이 불어서 농사를 망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벌써 많은 가난한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경험에 비추어 기근이 있는 때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괴롭힘과 박해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박탈당한 자들이고, 따라서 모든 도둑들과 관리들의 집에 우글거리고 있는 약탈자들에게 만만한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1865.10.6 다블뤼의 편지)
조선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다블뤼는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그해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점과 흥선대원군이 박해를 일으키면 매우 혹독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베르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아홉 명의 선교사와 지도급 평신도들이 순교하고 9월 경(음력 8월 3일)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박해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양화진까지 진입하여 다시 강화부를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의 섣부른 판단으로 조선에 충분한 경고도 되지 못한 채,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고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돌아갔다.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자 천주교 박해는 더 심해졌고, 양화진(절두산)이 새로운 사형터가 되었다. 이외에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했던 덕산의 굴총사건(1868)이, 1871년엔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정에서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고, 백성들에게 척화사상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절두산 순교성지에 가보면, 신미년에 세워진 척화비를 볼 수 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한 때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경계하였다.
1873년 12월 24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8년에 걸친 긴 병인박해가 끝난다. 1866년부터 시작된 이 박해로 전국에서 8,000명(기록상 이름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00여 명이 조금 넘는다)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성직자와 평신도를 합쳐 모두 24위가 시성되었고, 20위(1888년 순교자 1명 포함)가 시복되었으며, 95위 ‘하느님의 종’이 시복조사를 받고 있다.
조선교회는 이러한 긴 박해에도 계속해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한 한국교회의 저력에는 평신도들에 의한 자발적인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역사가 있었다.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령 이후에도 신자들은 모여서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문서 선교를 통한 기도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에 의해 ‘회장제도’ ‘공소제도’ ‘신심단체’가 만들어졌고, 배론에는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신앙공동체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개항과 더불어 교회는 새롭게 재건되어야 했다. 다음 시간에는 병인박해의 주요 순교자 몇몇을 소개하고 싶다.
* 조한건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 척사윤음: 천주교 배척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왕이 백성에게 내린 문서로, 박해를 마무리하며 반포되곤 했다.
[생활성서, 2019년 4월호, 조한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