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안향 향려비(安珦 鄕閭碑) 문화재 지정대상 선정 경상북도는 지난 12월 21일 문화재위원회(동산분과 제3차 회의)를 개최,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를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승격 신청하고,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상』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신청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안동 세심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구미 천생사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 『구미 천생사 소장 청허대사 행장』, 『예천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 등 4건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키로 했다. 상기 문화유산이 지정고시 절차를 거쳐 문화재로 지정되면 경상북도의 문화재는 총1,928점(국가지정 656, 도지정 1,272)이 된다. 아울러, 경북도는 이날 문화재위원회에서 『문경 정동윤 고문서 및 유물』, 『울진 광흥사 소장 명양경』등 2건을 유형문화재 지정대상으로, 『영주 안향 향려비』, 『상주 함창사마소 유물』 등 2건을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번에 지정대상으로 선정된 4건의 문화유산은 지정예고 절차를 거쳐 차기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경상북도 이성규 문화재과장은 “경북은 전국 최고․최다의 문화재를 보유한 광역자치단체로 해마다 문화재 보존․관리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문화유산의 지속적인 발굴 및 관광자원으로의 활용방안을 적극 모색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한, 도지정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키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예산절감은 물론 지역 문화재의 위상을 제고해 나갈 계획이다. ------------------------------------------------------------------------------------ ☞. 1655년(효종 6년) 3월에 순흥 평리촌(석교리 203번지)에 순원군(휘 應昌)께서 회헌안선생향려비(晦軒安先生鄕閭碑)를 세우고 향려비각을 세웠다. 1990년에 추원단이 조성되면서 추원단으로 옮긴 향려비에 2001년에는 향려비각(鄕閭碑閣)를 건립하였으며 현판은 안순권(安順權)이 썼다. 2010년 10월 석교리 203번지에 안자사료관이 건립되면서 향려비는 석교리로 옮기고 비각은 그대로 남겨, 문의공 여항비각으로 사용하고 현 향려비각은 2010년 10월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으로 향려비(鄕閭碑)의 현판(懸板)은 노재봉(盧在鳳) 전국무총리가 제서(題書) 한 것이다. 1665년 3월에 세워진 문성공향려비(文成公鄕閭碑)는 전면에 고려선현문성공회헌안선생향려비(高麗先賢文成公晦軒安先生鄕閭裨)라 쓰여져 있고 그 비문은 성균관 대사성 황호(黃戶)선생이 찬(撰)하고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김광욱(金光煜)선생이 전서를 쓰고 글씨는 김계(金啓)선생이 썼으며 입석(入石)은 안응창(安應昌)으로 되어 있다. ------------------------------------------------------------------------------------ 문성공 회헌 안향 향려비명(順興鄕閭碑銘) 順興鄕閭碑銘幷序 古順興治北白雲洞 有文成公祠 誌所謂紹修書院 是也 又邑墟南有安氏故宅遺址 去祠宇七里 其傍有小澤 謂之洗硯池 爲古跡 至今邦人指而敬之 古事相傳 文成公皇考太師諱孚 太師之王考神虎衛上護軍諱子美 實二祖舊居云 安氏之大 實自上護軍始樹德而發後世祠以爲始祖 今築祠壇於此 置祭田 每十月上日 報祀以太師配之 又東一里 有安氏四賢井 在嘉靖中 周愼齋世鵬立石 書其事 稽之譜牒 三韓之甲族諸姓貴大者非一 而大賢之族多名人達官者 獨稱安氏前古特盛云 文成公之世 當高麗高元烈宣之際 其事著於載籍 又湍州大葬銘可見 上之七年春 安氏子孫 立閭表於古里 不但安氏羣子孫所相告而表識者而已 雖百代之下 凡過此閭者 亦不忘大賢之遺敎 知所敬矣 銘曰 閭表之碣碣 欽上哲者 威如神如 祠壇之擧擧 推厥初者 虔如禋如 嘉善大夫 行成均館大司成 黃㦿撰 資憲大夫 議政府左參贊 金光煜篆 金棨書 순흥향려비명(順興鄕閭碑銘)서문을 병기함 옛 순흥부 북쪽 백운등에 문성공을 모신 사당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른바 소수서원이 이것이다. 또한 고을 남쪽에 안씨의 옛터가 있는데 사당에서7리쯤 되며 그 곁에 조그만 연못이 있으니 이를 세연지(洗硯池)라 하여 옛 사적으로 삼아 오고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이곳을 이야기하고 경의를 표하여 고사로 전해 오고 있다. 문성공의 아버님 태사 부(孚)와 태사공의 할아버님 신호위상호군 자미(子美) 두 선조가 이곳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안씨의 창성은 실로 상호군이 덕을 쌓은 데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세에 사당을 지어 시조로 삼았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여기에 제단을 쌓고 제전을 마련하고 매년 10친 상일(上日)에 태사공과 배향하여 제사 드리며, 또한 동쪽으로 1리쯤에 안씨 사현정(四賢井)이 있는데 중종조에 신재 주세붕이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기를 “보첩을 살펴보면 삼한의 훌륭한 씨족으로 많은 성씨 가운데는 고귀한 집안이 한둘이 아니다. 큰 어진이의 씨족으로 명인과 달관이 유달리 많이 배출되어 전에 없이 특히 번성한 성씨는 안씨(安氏)다.”고 하였다. 문성공은 고려 고종·원종 ·충렬 ·충선왕조에 즈음하여 그의 사업은 많은 기록에 나타나 있고 또한 장단에 있는 묘갈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임금 7년 봄 안씨 자손들이 정려를 세워 선생의 옛 고향임을 표시하니 이는 안씨의 자손만이 서로 고하고 나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 백대의 훗날이라도 이 정려를 지나는 길손은 선생의 남기신 교화를 잊지 말고 공경할 줄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에 명을 짓는다. 정려의 비석으로 크게 밝은 분을 흠모하되 엄하신 듯 신령하신 듯 하며, 제단을 마련하여 그 시초를 미루어서 경건히 제사 드린다. 가선대부로 성균관대사성인 황호(黃㦿)는 짓고, 자헌대부로 의정부좌참찬인 김광욱(金光煜)은 전(篆)을 쓰고 김계(金棨)는 글씨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