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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 빅토리아폭포(잠비아)
해발고도약 90m의 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잠베지강의 물이 너비 약 1,500m의 폭포로 바뀌어 110∼ 150m
아래로 낙하한다.
폭포 위에는 몇 개의 섬이 있어서 레인보 폭포 등 다른 이름을 가진 폭포로 갈라져 있다.
수량이 많은 11∼12월에는 1분간에 낙하하는 수량이 무려 30만m3에 달한다.
이 폭포는 아래쪽의 강폭이 50∼75m에 불과하여 반대쪽 낭떠러지 끝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뿐이며,
멀리서는 치솟는 물보라만 보이고 굉음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옛날부터 ‘천둥소리가
나는 연기’라고 불렸는데 1855년 영국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발견하여 빅토
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였다.
북쪽의 잠비아와 남쪽의 짐바브웨의 경계를 이루는 미들 잠베지 강에 있는 웅장한 폭포.
폭과 깊이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2배 이상인 이 폭포는 강이 최대 너비인 곳에서 강과 같은 너비로
펼쳐져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최대 108m의 낙차를 이루며 떨어진다.
연평균 유수량(流水量)은 935㎥/sec이다(→ 하천방출).
폭포에 가까워져도 강의 흐름이 빨라지지 않으나, 우렁찬 폭포소리와 물안개로 폭포에 다가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문에 칼롤로 로지족(族)은 이 폭포를 '천둥치는 연기'라고 불렀다.
폭포 가장자리에서 45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소리가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리며, 물보라 벽이 공중
으로 305m 이상 튀어올라 65㎞ 떨어진 곳에서도 이 광경을 볼 수 있다.
매일 달이 뜰 때면 안개에 달무지개가 비치기도 한다.
폭포의 입구는 가장자리를 따라 자리잡고 있는 섬·저지대·갑 등에 의해 몇 부분으로 나뉜다.
폭포의 동쪽 끝에는 이스턴 캐터랙트(Eastern Cataract)가 절벽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썰물 때 대
부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절벽은 서쪽에서 암체어(Armchair)라고 불리는 저지대와 경계를 이루며 이 저지대가 건기에는 깊
은 물웅덩이가 된다.
암체어에서 서쪽으로 레인보(Rainbow) 폭포가 뻗어 있고, 그 옆에는 또다른 절벽이 있어 호스슈(Hors
eshoe) 폭포를 이루고 있다.
호스슈 폭포를 지나 나마카브와(옛 이름은 리빙스턴) 섬이 있으며 나마카브와 섬과 캐터랙트(옛 이름
은 보아루카) 섬 사이가 균열되어 형성된 메인(Main) 폭포가 있다.
캐터랙트(Cataract) 섬 다음에는 데블스 캐터랙트라는 좁은 절벽이 있는데, 건기가 한창일 때도 꽤 많
은 물이 떨어진다.
빅토리아 폭포의 물은 넓은 웅덩이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이 25~75m인 깊은 틈으로 모이는데,
이 틈은 폭포의 절벽과 같은 높이의 반대편 절벽으로 형성된 것이다.
폭포 반대편의 벼랑을 따라 레인 포리스트(Rain Forest)라는 나무가 우거진 지역이 나타나며 폭포에
서 물이 튀어 1년 내내 푸른빛을 띤다.
이 폭포벽의 선반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폭포의 서쪽 끝에서 레인보 폭포 반대편, 좁은 협곡을 내려
다보는 데인저 포인트(Danger Point)까지 뻗어 있다.
사나운 폭포수의 유일한 배수구인 이 협곡은 폭이 65m 미만이고 길이가 120m인데 잠베지 강물 전
체가 모이는 곳이며 이 협곡의 끝은 보일링 포트(Boiling Port)라는 깊은 웅덩이로, 밀물 때에는 이곳
에서 물이 거세게 소용돌이친다.
보일링 포트 바로 아래, 폭포에 거의 직각방향으로 폭포교(Falls Bridge)가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는
영국 통치령을 통과해 남쪽에서 북쪽까지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종단하려는 의도로 계획된 케이프-
카이로 철도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를 오가는 기차·자동차·보행인이 이 다리를 이용한다.
이 지역을 지배하던 로지족 군주 레와니카는 1900년에 영국남아프리카회사(British South Africa Com
pany)의 대표들과 '레와니카 양도조약'(Lewanika Concession)을 맺었는데, 1901년 조약이 비준된 후
유럽인들이 남쪽에서 이동해오기 시작했다.
1905년에 폭포교가 완성되었고 1904년 불라와요에서 철도가 들어왔으며, 1938년에는 '제3협곡'의 사
일런트풀에 발전소가 세워졌다.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찾는 폭포 그 자체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폭포 국립공원(짐바브웨), 리빙스턴 동
물보호구역(잠비아)에는 크고 작은 사냥용 짐승들이 많으며 위락시설도 갖추고 있다.
22위 홍콩
중국식 지명은 샹강[香港].
중국 광둥성[廣東省] 남쪽 해안지대에 있는 특별행정구.
이전에는 영국 식민지였으나 1997년 7월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홍콩 섬과 인근의 작은 섬들, 스톤커터 섬, 본토의 주룽 반도[九龍半島]뿐만 아니라 본토 일부와 란터
우 섬, 그외 230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신계(新界)까지 포함된다.
남북길이 43km, 동서길이 56km이다.
북쪽은 광둥 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행정중심지인 빅토리아는 홍콩 섬에 있고 면적은 1,091㎢ 이다.
정식명칭은 ‘영국령 홍콩’이었으나 중국으로 반환 뒤부터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로 바뀌었다.
주장강(珠江) 하구의 동쪽 연안에 있는 홍콩섬과 주룽반도(九龍半島) 및 그 밖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
다.
그 가운데 홍콩섬· 스톤커터섬과 주룽반도의 선단(先端)에 있는 주룽시(市)는 영국 영토이고, 주룽시의
후배지인 신제(新界:New Territories)와 230개의 부속도서는 조차지(租借地)이다.
홍콩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된 유물들은 중국 북부, 그중에서도 특히 룽산[龍山]의 석기시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
다.
영국이 점령하기 이전의 홍콩은 단지 소수의 어민들이 살고 있는 해적소굴이었다.
19세기초 영국은 불법적인 아편무역을 통해 홍콩을 손에 넣었다.
1839년 중국 정부는 광저우[廣州]에서 아편 추방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그곳에 있는 영국 공장이 공략당하고 2만 상자가 넘는 아편이 몰수되었다.
마카오로 퇴각한 영국은 상업상의 조약을 체결하든지 아니면 영국인들이 안전하게 기업운영을 할 수
있는 작은 섬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홍콩 섬 근해에서 시작된 전투는 제1차 아편전쟁(1839∼42)으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맺어진 난징 조약[南京條約]에 따라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었다.
19세기 들어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자 1860년 영국은 스톤커터 섬과 주룽 반도를 포함해 홍콩 주변
의 영토를 추가로 손에 넣었으며, 1898년에는 신계(중국 본토 근해의 235개 섬과 주룽 반도에서 선
전 강[深圳江] 사이의 육지를 포괄하는 지역)에 대한 99년간의 조차권을 얻었다.
이렇게 불행하게 시작되기는 했지만 홍콩은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이민을
끌어들였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그뒤 항일전쟁 시기에, 가장 최근에는 중국 국공내전(1945∼49) 이후에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해왔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과 같은 시간에 홍콩도 공격을 받았으며, 1941년 크리스마스 때 함락되었
다.
1945년 영국인이 돌아오고 1949년 중국이 공산당에 넘어가자 많은 중국 기업가들이 홍콩으로 건너
오면서 홍콩 경제는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 산업화는 섬유제조업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었고 197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
되면서 점차 전자, 금융, 무역 등으로 확대되었다.
1982년 영국과 중국은 1997년 신계 조차기간 만료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는데 중국은 만료당일로 홍
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조건을 대략적으로 정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이후 여러 해에 걸친 협상 끝에 중국 정부는 1990년 기본법을 승인했고 이 법이 1997년 7월 1일 효
력을 발생하면서 이 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과 동시에 중앙정부 직속으로 홍콩특별행정구가 설립되
었다. 이로써 100여 년에 걸친 영국의 홍콩 식민통치가 막을 내렸다.
전인구의 99%가 중국인이고, 그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둥인(廣東人) 외에 커자인(客家人:Hakka)·
푸젠인(福建人)·차오저우인(潮州人)이 있다.
그 밖에도 영국인·미국인·유럽인·아시아인들이 살고 있다.
공용어로는 영어와 베이징어(北京語)가 함께 쓰이고 있으나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광둥어이다
홍콩을 이루고 있는 반도와 섬들은 부분적으로 광둥 성 동부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온 산맥이 바다
에 잠긴 부분이다. 수많은 산봉우리들은 주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은 대륙에 있는 타이모 산[太摩山:957m]이다.
홍콩은 크게 주요농업지대인 북서부 저지대와 그보다 인구가 조밀하며 천연항이 있어 바다로 쉽게
나갈 수 있는 남동부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지역은 대체로 남서쪽의 란터우 섬에서부터 북동쪽의 광둥 성 접경지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
주룽 산으로 구분된다.
북위 22° 30′의 북회귀선상에 있는 홍콩의 기후는 열대기후이다.
여름철은 습하며, 연강우량(2,220㎜)의 절반 이상이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7월평균기온은 29℃이다. 겨울은 쌀쌀하고 건조하며, 연강수량의 약 10%만이 이때 내린다.
1월평균기온은 약 16℃이다.
태풍은 대부분 6∼10월에 발생하나 때로는 11월에도 불어닥친다.
경작지는 1970년대에 거의 90㎢에서 1980년대 중반에는 약 78㎢로 줄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광범한 재조림계획으로 소나무·유카리나무·벵갈고무나무·야자나무 수림을 포함해
본래의 숲지대 일부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의 대부분은 열대초본식물과 거대한 홍수림 습지로 덮여 있다.
야생 포유동물 36종이 서식하며, 그중에는 엄청난 수의 박쥐와 설치류도 포함된다
23위 요세미티국립공원(미국)
면적 3,061㎢. 189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중부,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서쪽 사면 일대에 전개되는 대자연공원이며, 미국에서 가
장 유명한 국립공원 중의 하나이다.
샌프란시스코에 근접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광대한 면적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도로는 몇 개밖에 없으며, 끝에서 끝까지 관통하는 도로는 그나마
동서 횡단로 하나뿐이다.
공원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남서부에 있는머세드강의 상류이며, 빙식으로 생긴 거
대한 엘캐피탄·하프돔 등의 절벽과 브라이들베일·요세미티·네바다 등의 폭포가 있다.
그 밖에도 북부의 투올러미강 상류에는 투올러미 협곡의 웅대한 경관이 있다.
공원의 동쪽 경계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주맥에 상당하며, 해발고도 3,000m의 고산이 이어져 있다.
공원의 서쪽과 남쪽의 입구 일대에는 세쿼이아의 거목들이 늘어서서 장관을 이룬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요세미티는 1868년 스코틀랜드인 존 무어가 발견한 지역으로 189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국립공원
이다.
마사드의 북동 77km, 후레스노의 북쪽에서 6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총면적 3,081 평방킬로
미터 넓이의 광대한 그리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공원내의 표고는 해발 609m에서 3,962m까지로 5개의 상이한 식물대가 있으며, 침엽수를 중심으로
아메리카 오크(Oak, 참나무)등의 경목, 철축, 관목, 야생화가 사시사철 삼림과 초원을 물들이고 있으
며, 200종 이상의 야생 조류와 75종에 이르는 포유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야생동물의 낙원이기도
하다.
요세미티는 크게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요세미티 밸리지역, 해발 3,000m 이상에서 만년설이 있
는 Tuolumne 고원지대, 수령이 2,700여년이나 되는 거목들이 자리잡고 있는 마리포사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Yosemite Valley 지역]
- El Capitan : 거대한 화강암 기둥이 밸리 입구에 파수병처럼 서있는 엘 캐피탄은 세계에서 노출된
화강암 중 가장 큰 하나의 덩어리로 믿어지고 있다.
정상은 Merced River 위 3,593 Feet (1078 M)지점에 있다.
전 세계의 암벽등반 전문 산악인들이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엘 캐피탄에 도전
한다.
- Glacier Point : Sierra Nevada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중 한 곳이다.
고도 7,214 Feet (2164 M). 하프돔의 측면이 어렴풋이 보이고, 네바다 폭포(Nevada
Falls)가 선명하게 보인다.
요세미티 빌리지에서 포장도로를 이용하여 30마일 거리에 있으며 보통 6월-10월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 Half Dome : 요세미티에서 가장 특이한 상징물로 여겨지는 하프 돔은 요세미티 밸리의 동쪽 끝,
고도 8,842피트 높이로 서 있다.
돔을 형성한 화강암은 8,700만년이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alf Dome의 다른 "Half"는 빙하가 물러갈 때 떨어져 나갔으며 빙하가 계속되는 동안
밸리 바닥을 따라 모래의 일부로 침전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이다.
10월에서 5월까지는 케이블이 운행하지 않는다.
- Clouds Rest : 높이 9,926 Feet (2,978 M)의 정상에 있다.
다른 곳에서는 구름을 볼 수 없을 때 조차도 이곳에서는 구름이 정상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 Mirror Lake - Mirror Meadow
요세미티 밸리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셔틀버스 정거장 #17에서 1마일정도 거리
에 있어 도보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봄에는 Tenaya Canyon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듯 미러호수에 비쳐 나타나는 모습과
주변의 전경이 인상적이다.
- Yosemite Falls : 요세미티 밸리의 북쪽을 따라 3부분으로 나누어지며 폭포의 총 낙차는 2,425 Feet
(728m).
상류의 폭포는 1,430 Feet (429m)의 가파른 낙차를 보이고 있다.
다음에 나타나는 중간정도의 폭포 낙차는 675 Feet (203m).
하류 폭포의 낙차는 320 Feet (96m).
요세미티 폭포들은 늦은 봄과 초여름에 수량이 피크를 이룬다.
이외에 Ribbon Fall(491m), Varnal Fall(97m), Bridalveil Fall(189m), Nevada Fall(181m),
Illilouette Fall(113m)등 여러개의 폭포들이 요세미티국립공원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Yosemite Valley 외부]
- Grand Canyon Of The Tuolumne : 투올름의 그랜드 캐년이 호수들, 밸리들, 산들이 산재해 있는
광대한 산림지인 북쪽부분에서 공원의 남쪽 파트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투올름 강이 이 반마일에 이르는 깊은 골짜기를 따라 갈라진 폭포 사이를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여름에 굉장히 덥고 특히 방울뱀으로 유명하다.
- Tenaya Lake : 요세미티의 고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호수 가운데 한 곳.
이 호수는 요세미티 내와 인접한 그지역의 Mi-wok 부족의 추장인 Tenaya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Tenaya는 1851년 마리포사전투에서 생포되었다.
호수 동쪽 끝에 있는 울퉁불퉁한 화강암 돔이 호수에 비쳐 보인다.
Tioga Road를 따라 Tuolumne Meadows의 서쪽 수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Tuolumne Meadows : 요세미티공원의 고지대를 관광하는 사람들의 활동의 중심지.
이곳은 시에라 네바다에서 가장 대규모의 알프스 산록과 같은 초원단지를 이루고 있
다.
해발 8,575 Feet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선한 공기, 들꽃들, 아름다운 투올름 강(Tuolum
ne River)이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특히 캠핑하기에 좋은 장소이면서 초원의 동쪽 끝에 있는 Lembert Dome과
같은 험준한 지역으로 들어가는 몇 개의 루트의 기점이기도 하다.
인접지역에 관한 문의나 기타 활동에 관한 더 자세한 문의는
위치 : 요세미티 빌리지에서 티오가 로드를 경유하여 55마일 거리.
- Wawona And The Mariposa Grove Of Giant Sequoias : 마리포사 숲은 요세미티에서 거대한 세쿼
이어(삼나무과의 거목)가 대거 자리하고 있는 곳 중 하나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곳은 Grizzly Giant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마리포사 그로브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수령이 2,700년이나 되며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 중 하나이다.
마리포사 그로브 박물관(Mariposa Grove Museum)은 그로브 위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자이언트 세쿼이어와 관련된 몇 가지 전시회를 열고 있다.
안내가 따르는 트램투어가 이곳 주차장에서 출발하며 눈의 양에 따라 때때로 크로스
컨트리 스키를 즐길 수도 있다.
그로브는 공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Wawona Road (Hwy 41)을 경유하여 갈
수 있다.
그로브에서는 주차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Wawona에 주차를 하고 무료 셔틀을 이
용해서 이곳에 오는 것이 좋다. 박물관은 여름에만 문을 연다.
24위 하와이(미국)
면적은 1만 6729㎢, 인구는 127만 400명(2004)이다.
주도(州都)는 호놀룰루이다.
북태평양의 동쪽에 있는 하와이제도(별칭 샌드위치제도)로 구성된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하와이섬 남단의 사우스케이프(南串)는 북위 19°에 위
치한다.
하와이제도는 니하우·카우아이·오아후·몰로카이·라나이·마우이· 카호올라웨·하와이 등 8개 섬과 100개
가 넘는 작은 섬들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한 호(弧)를 그리면서 600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그들 섬 사이에는 카울라카히·카우아이·카이위·칼로히·파일롤로·아우아우·케알라이카히키·아랄라가이키·
알레누이하하 등의 해협이 있다.
최대의 섬은 하와이섬이며 주민의 대부분은 오아후섬에 살고 있다.
모든 섬은 화산섬이고 대체로 남서쪽으로 갈수록 화산 형성의 시기가 늦다
태평양 중앙부의 여러 화산섬들로 구성된 미국의 주.
샌프란시스코의 서쪽 3,857㎞ 지점에 있다.
하와이의 원주민은 마르키즈 제도에서 유입된 폴리네시아인으로 400년경에 이미 하와이 제도에 건너
온 것으로 추정되며, 그보다 400~500년 뒤에 타히티 섬에서 또 한 번의 대규모 이주가 있었다.
1778년 유럽인으로서 처음 하와이 제도를 발견한 것으로 공인되고 있는 제임스 쿡 선장은 이 제도
를 샌드위치 제도라고 명명했다.
1796년 카하메하 1세가 제도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된 뒤, 19세기에는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하와이의 이름을 따서 하와이 제도 또는 샌드위치 제도라 불리기도 했다.
1820년 뉴잉글랜드에서 최초의 선교사가 들어온 후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1840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여러 법안을 본떠서 만든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미국·프랑스·영국에 의해
하와이 왕국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1851년 카메하메하 3세에 의해 하와이 제도는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87년 미국은 진주만을 해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결국 미국인 설탕산업 관계자들의 선동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군주제가 전복되고 1893년 하와이 공
화국이 건설되었다.
1898년 이 공화국과 미국은 합병에 동의했고, 1900년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1959년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 제도는 연속된 화산들의 봉우리가 바다 위로 솟아올라 형성된 8개의 주요섬과 124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년기 지형지대에서는 비교적 반구 형태를 띠고 조금 오래된 지대에서는 깊게 홈이 팬 깎아지른 듯
한 절벽들과 동굴, 깊은 계곡, 해안평원이 있다.
전반적으로 지형이 험해서 분지나 호수가 드물다.
하와이는 온화한 열대기후로서 종종 이상적인 기후로 묘사된다.
번화가인 호놀룰루의 평균기온은 22~26℃이며, 산악지대는 매우 서늘하고 특히 겨울에는 차갑다.
강우량은 지역별 차이가 심한데, 세계 최다강우지역으로 불리는 와이알레알레 산의 연평균강우량은
1,280㎜이지만 카와이하에는 230㎜도 안 된다.
하와이 원주민 수는 1778년에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1853년에는 7만 명으로 감소했다.
부모 중 적어도 한 사람이 하와이 원주민인 사람은 전체인구의 1/8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의 후손들
은 전체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어 최대의 단일민족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하와이 주 인구의 대부분이 오아후 섬에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60% 정도가 호놀룰루 도심지역에,
20%가 호놀룰루의 교외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하와이는 미국의 최대 사탕수수 생산지 가운데 하나이며, 파인애플도 중요한 환금작물이다.
그밖에 수수·옥수수가 널리 재배되며, 중요한 광물자원은 전혀 없다.
하와이 경제에서 비중이 가장 큰 산업은 관광업이며, 제2의 수입원은 연방정부 공영산업으로 방위관
련산업이 그 대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은 해양선박이며, 호놀룰루 항이 주요항구이다.
호놀룰루는 태평양 버니스 P. 주교박물관과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하와이 예술품이 소장된 호놀
룰루 예술원, 그리고 하와이 원주민으로 유명하다.
25위 뉴질랜드 북섬
남섬과는 쿡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한다.
북단 노스곶에서 남단의 팰리서곶까지의 길이는 816km이다.
형태상으로는 북서쪽이 좁고 긴 오클랜드 반도가 돌출해 있으며, 북동쪽에 플랜티만(灣), 동쪽에 호크
만이 있어 변형된 마름모꼴을 이룬다. 인구 약 273만 3천(1996).
지형상으로는 섬의 중앙부에 활화산 루아페후(2,799m)를 주봉으로 하는 타우포 화산대가 있으며, 섬
전체는 고원 형태를 이룬다.
섬 중앙에는 화산이 집중되어 있고 온천이 분포하며, 타우포호(湖)가 있어 경치가 아름다워 통가리로
국립공원을 이룬다.
서부에도 에그몬트산(2,518m)을 중심으로 에그몬트 국립공원이 있다.
섬에서 가장 큰 강은 와이카토 강, 호수는 타우포호이다. 유제품 ·목재 ·석탄 ·아마 등이 산출되며, 중
심도시는 오클랜드와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이 있다
뉴질랜드(New Zealand) 또는 아오테아로아(Aotearoa)는 남서태평양에 있는 섬나라이다.
두 개의 큰 섬(남섬과 북섬) 그리고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테즈먼 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부터 1,500 킬로미터 (900 m) 떨어
져 있고, 피지, 뉴칼레도니아, 통가같은 태평양의 섬로부터 대략 1,000킬로미터 (600m) 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호주로부터 1,600㎞ 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쿡 해협으로 격리된 남·북 두 섬으로 이루어지는 산이 많은 섬나라로서, 해발 200m 이하
의 땅은 온 섬의 6분의 1 정도이다.
총면적은 북섬, 남섬, 스튜어트 섬, 그 외 작은 섬들을 모두 합쳐 268,680㎞로 영국보다는 약간 크고,
일본보다는 작으며, 미국의 콜로라도 주와 비슷하며, 대한민국의 2.7배, 한반도의 1.3배이다.
전체면적의 43%가 북섬, 56%가 남섬으로서 남섬이 더 크다.
두 섬은 지형적 성격이 크게 다른데, 북섬은 전체적으로 구릉성 토지가 펼쳐지는 가운데 에그몬크산
(Egmont 山, 2,510m)을 비롯하여 화산이 돌출한다.
한편, 남섬은 서쪽에 남알프스 산지가 남북으로 달리고 빙설에 빛나는 고산지형이 탁월하다.
최고봉인 쿡 산(3,764m) 주변에는 태즈만·폭스 등의 대빙하가 발달해 있다.
산록부에는 빙하호, 서해안에는 U자 계곡이 침수한 밀포드 사운드 등의 아름다운 피오르드 해안이
발달한다.
뉴질랜드는 화산과 빙하의 나라로서 그 지형이 매우 아름답다.
남섬은 아직 원시림으로 뒤덮힌 지역이 많다.
특히 70%가 남알프스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산지이며, 평지는 고작 9%에 불과하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3000m가 넘는 고산준봉이 잇달아 이어지고 빙하의 침식을 받은 피오르드 지형
은 수많은 호수와 U자 계곡을 형성하고 있어 변화가 풍부한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반면 북섬의 특징은 지열지대를 포함한 화산지대에 온천과 간헐천, 그리고 크고 작은 호수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비옥한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국토 최남단엔 스튜어트 섬이 있고 크라이스처치로부터 동편으로 멀리 떨어진 태평양에 캐썸섬(Ch
atham Island)이 위치해 있다.
전체적으로 국토는 산과 언덕으로 뒤덮혀 있는데 75%가 해발 200m 이상이며, 국토의 최고점은 해발
3,754m인 쿡 산이다.
북섬의 가장 높은 산 루아페후 산으로서 2,797m이다.
이러한 고산과 타우포 호수, 로토루아 호수는 약 1백만 년전에 발생한 통가리로 산의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것이다.
호수는 서기 186년에 화산폭발로 생성된 북섬의 타우포 호가 최대이다.
가장 긴 강은 북섬의 와이카토 강으로 425㎞에 달한다.
남섬의 면적이 더 크지만, 인구의 75% 이상(300만 명 이상)은 북섬에 살고 있다.
수도 웰링턴과 주요 도시 오클랜드, 해밀턴은 북섬에 위치한다.
남섬의 주요 도시는 크라이스트 처치와 더니든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발견한 마지막 섬 중 하나였다.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동물, 식물, 균류의 다양성이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많은 수의 독특한 새 종류이다.
다양한 지형과 뾰족한 산 봉우리는 섬의 융기와 화산분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기 1250~1300년 사이 폴리네시아인이 정착하고 나서 독특한 마오리족 문화가 발전되었다.
1642년에는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발견했다.
19세기 초 감자와 머스킷총이 도입되면서 머스켓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고, 마오리족은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영국에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민자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갈등이 커졌고, 마오리족이 북섬 중부 땅을 몰수 당하게되는 뉴질
랜드 전쟁으로 이어진다.
1890년대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경제 불황이 찾아왔고 1930년대부터 복지국가가 확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함께 안보 조약 ANZUS에 가입했으나,
나중에 군사 동맹 체제로 전환된다.
1950년대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나라 중 하나였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으로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졌다.
1980년대 동안 보호 무역이 완화되고 변형된 자유 무역 경제가 퍼지면서 한때 수출품의 대부분이었
던 양(털, 고기)이 유제품, 육류, 와인으로부터 추월당하는 등 주요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뉴질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유럽계이다.
가장 큰 소수민족은 원주민인 마오리족이며, 이어 아시아인, 태평양 제도민 순이다.
영어, 마오리어, 뉴질랜드 수화가 공용어이며, 이 중 영어가 지배적이다.
뉴질랜드 문화의 대부분은 마오리족과 초기 유럽 정착민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초기 유럽인들의 예술은 풍경화가 대부분이였는데, 마오리족의 묘사가 적었다.
마오리족의 문화는 최근 다시 알려지고 있는데, 조각, 세공, 문신 등 전통 예술이 주류이다.
이러한 뉴질랜드 문화는 세계적으로 퍼졌고 태평양과 아시아 이민자들을 증가시켰다.
뉴질랜드의 다양한 풍경은 많은 야외 활동의 기회를 주며 고예산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다.
뉴질랜드는 11개 행전 구역과 지방 자치의 목적인 67개의 지역 당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는 지금은 없어진 주 제도보다 더 자율성을 가진다.
뉴질랜드의 국가 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이지만, 총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뉴질랜드 왕국은 토켈라우(속령), 쿡 제도, 니우에(뉴질랜드 자유 연합의 자치 주), 뉴질랜드의 남극
영유권 주 이라고 주장하는 로스 속령을 포함한다,
뉴질랜드는 국제 연합, 영국 연방, ANZUS, 경제 협력 개발 기구, 태평양 제도 포롬,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의 가입국이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Abel Tas
man)이었다.
그는 이곳을 고향 제일란트의 이름을 따서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 말의 영
어식 번역이다.
타스만 이후 뉴질랜드를 찾은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었다.
쿡 선장은 1769~177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식민지로서, 고래와 바다표범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
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
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
하였다.
1880년대 초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에서도 농목업이 발전하였고,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지매매와 관련하여 마오리족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겼고
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은 마오리족의 반영 감정 완화를 위해 힘썼고,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노력을 통해,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
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후 뉴질랜드는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1907년 영국의 자치국이 되었다가 1947년 독립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 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1949년 7월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 때에는 총 5,350명이 영국 연방으
로 참전하였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1951년에 호주, 뉴질랜드, 미국은 공식적으로 안전보장조약(ANZUS Treaty)을 체결했다.
이는 태평양 지역 방어를 위한 군사동맹이다.
1985년에는 비핵화지대(Nuclear freezone)을 선언하였으며 1985년 남태평양 국가들과의 비핵화선언
인 라로통가 조약(Treaty of Rarotonga)을 체결했다.
1987년 데이빗 레인지가 이끄는 노동당에 의해 뉴질랜드 비핵화지대 선언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핵추진함에 대한 뉴질랜드 기항불허로 이어져 ANZUS조약의 권리가 중지되기도 했
다
2006년 기준 노동당(Labour Government) 헬렌 클라크 총리는 야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의 지
지도 함께 이끌며 뉴질랜드 비핵화지대(Nuclear-free zone)의 입지를 고수하고 있다.
주민은 유럽계 백인 17%, 마오리족, 폴리네시아인이 있고,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계 백인과 맘오리족 원주민이 거주, 인도인과 황인도 많이 거주한다.
백인들은 영국계는 물론, 아일랜드계와 네델란드계 등이 섞여있고, 마오리족은 지역마다 여러 종족들
로 나뉘어져있다.
또한 마오리족은 이미 도시로 옮겨가 현대 생활에 적응하였다.
중국인들과 인도인들도 살며, 특히 사모아, 통가, 피지, 쿡 제도 등의 남태평양 도서민들도 늘고 있다.
뉴질랜드는 온대 지역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섬의 최북단에는 연중 따뜻하며 눈을 보기 힘들다.
반면에 남섬의 최남단은 겨울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그리고 서안(西岸) 해양성 기후로서 연강수량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600∼1,500㎜인데, 남도는 남알프
스 서쪽 경사면에서는 5,000㎜ 이상에 이르는 지역도 있어, 동쪽지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전지역이 편서풍대에 속한다.
기온의 교차는 작으며, 연평균 기온은 북섬의 오클랜드 반도에선 15℃ , 남섬의 남부에선 10 ℃안팎
이다.
전국적으로 13개의 국립공원을 갖고 있으며 이중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테와히포우나무 국립공원은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통가리로는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로 세워진 국립공원이다.
또한 13곳의 해양보호구역이 지정되어 있다.
여타 지역에서는 이미 사라진 신생대, 중생대의 생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약 8천5백
만년 전인 백악기때부터 다른 대륙과 격리되어 온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같은 격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뉴칼레도니아와 함께 유일하게 뱀이 없는 지역이다.
최초의 포유류는 두 종의 박쥐였다.
뱀이 없는 나라(동, 철 성분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습기가 많아 서식하지 못함) 뉴질랜드는 포유
류보다 새들의 종류가 많아 약 250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오포섬은 1958년 가죽을 목적으로 12마리를 방출하였으나 천적이 없고 번식력이 좋아 현재 약 7천
만 마리가 살고 있어 해로운 동물로 분류되어 정책적으로 없애고 있다.
식물 중에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를 수 있는 카우리 나무로 (전 국토의 4%) 약 40m, 가지가 20m
나 된다.
환경보호 활동에 적극적인 뉴질랜드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도 그 해결이 쉽지 않은 숙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고유 동식물에 대한 대책이다.
사람들이 이주한 이후 낮은 지대의 늪과 습지대에 사는 고유 동식물 85%가 멸종되었다.
또한 800종 이상의 생물들이 심각한 생존 위험에 처해 있다.
북쪽에 사는 갈색 키위는 멸종위기에 있으며 다른 키위들은 해마다 6% 정도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진화하고 생존했던 새는 모두 93종이었으나 이중 43종이 멸종되었고, 37종은 멸종의
위험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고유 생태계의 변화는 주로 서식지의 파괴와 분열, 그리고 해충과 잡초 때문이다.
특히 해충은 뉴질랜드의 생태계와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
외국에서 들어온 해충과 잡초들은 뉴질랜드 고유의 생물들을 멸종으로 몰고 간다.
이 때문에 뉴질랜드 검역당국은 외국에서 입국하는 사람과 화물에 대해 검역을 철저히 한다.
피해를 주는 동식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양이, 개, 흰조제비, 주머니 쥐와 같이 외
국에서 유입된 동물들이다.
이들은 뉴질랜드에 살고 있던 동물이나 꽃 등에 악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해치는 동물이 없어 날지 못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모아새(멸종)나 키위새는 이들 외
래종에게 먹히기 때문에 생존의 위기에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는 지난 60년까지는 고래를 잡았지만 지금은 열렬한 고래보호국이다.
벌집을 의미하는 비하이브(Beehive), 수상과 의회 등의 사무탑, 의사당은 아니다.
뉴질랜드는 영국 여왕을 모시는 상태에서 영연방 입헌 군주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여왕이 상징적인 국가원수이지만 뉴질랜드 총독이 그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정부형태는 영국식 의원내각제이며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나 실제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이다.
노동당·국민당의 양당제가 확립되어 있어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다.
1989년 8월 롱이 건강상 이유로 사임, 외무장관 파퍼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현재 실권자는 존 키 제38대 총리(2008~)이며, 헌법 규정에 따라 그가 추천한 아난드 사티아난드
변 호사가 현재 뉴질랜드의 총독(명목상, 2006~)이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총 120석(지역구 62+마오리특별지역구 7+전국구 51, 2005년부터 현재까지는
121석)을 철저하게 정당득표율로 나누는, 영연방국가 중 유일한 독일식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
(1996~)를 취하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정신에 입각하여, 남섬의 지역구 의석(현재 16석)은 전체 지역구 의석의 25% 이상을 뽑
도록 규정했다.
2004년에는 독자적 최고법원인 뉴질랜드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New Zealand)이 창설, 기존
영국판례만을 원용하던 사법권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그 아래에 항소법원과 3개 지역의 고등법원, 지역 주요도시들마다 지방법원이 있다.
1980년대 후반 데이비드 롱 총리 정부 시절의 국적 및 이민법 개정 이후 여성과 소수민족 등 사
회적 소수층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비교적 강력하다.
이 나라의 경제는 대부분 농목에 의존하고 있다.
목양(牧羊)은 이 나라 제1의 산업으로서 양은 북도에 60%, 남도에 40%의 비율로 분포한다.
양모의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농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품이 수출의 55%를 차지한다.
그외 육류·유제품(乳製品)은 양모에 버금가는 수출품이다.
낙농지역은 북도에 집중하며, 양모에 비하여 훨씬 집약적으로 경영된다.
남도의 동쪽 및 남쪽 연안에는 혼합농업 지역이 발달하여, 목초 등과 윤작을 하면서 곡류의 생산이
활발하다.
농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품을 수출하고 석유와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무역구조이다.
주요 수출품은 낙농품· 육류· 양모· 목재· 과실· 약재 등이고, 수입품은 공산품· 기계류 ·자동차· 철강·
원유· 비료· 금속제품 등이다.
1970년대 초까지는 영국이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으나 이후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
고, 현재는 미국, 중국, 호주, 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와의 교역량이 무역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사회적·경제적인 상하계급이 나뉘어 있지 않고, 주민 사이에는 평등정신이 강하다.
세계 최초로 양로연금 제도를 실시하고 완전 고용 등 사회 보장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
스웨덴, 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3대 복지국가 중의 하나이다.
영어와 마오리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인구의 90%가 공식 국가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1987년부터 마오리어가 공식언어로 채택
되어 두 가지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나라에는 마오리족만의 토착 문화와 영국계 백인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높은 실업율, 상대적 빈곤, 범죄, 청소년 불량서클, 복지시설 부족 등의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불만으로 마오리족 고유의 문화가 부흥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있다.
요즘와서는 오클클랜드, 헤밀턴, 웰링턴, 크라이스처치 같은 대도시들에 여러 이민들이 섞여 사는 이
유로 뉴질랜드의 전통 문화는 약간 사라져 가는 편이다.
뉴질랜드는 오랜 전통과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무대예술이 뛰어나, 음악·연극·무용 등의 전문인들이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다.
400개의 박물관과 화랑을 통해 예술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뉴질랜드 심퍼니 오케스트라
(NZ Symphony Orchestra)는 연중 10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고 있다.
발레단은 26명의 종신단원으로 구성되어 국내 공연을 펼친다.
가장 큰 예술 행사는 2년마다 웰링턴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가 있다.
뉴질랜드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럭비, 크리켓 그리고 넷볼 같은 영국식 스포츠가 성하다.
특히 럭비는 뉴질랜드의 국기이다.
뉴질랜드의 최대 종교는 기독교(69.9%)이며, 그중에서도 뉴질랜드 성공회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성공회 24.3%, 장로교 18.0%, 카톨릭 15.2%이다.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과 지상 최후의 낙원으로서, 뉴질랜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포츠 급류타기,
제트 보트, 스키, 트레킹, 번지점프 등 깨끗한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며, 자연의 부드러운 숨결을 닮은 사람들, 아름다운 황금빛 해변,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 등
모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와이탕이
와이탕이 조약으로 유명한 와이탕이는 뉴질랜드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1840년 영국 왕실과 마오리 족의 대표가 이 곳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뉴질랜드는 영국 왕실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트리티하우스는 당시 영국 거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의 명소 중 하나
이다.
또한 와이탕이에는 여러 부족들을 대표하는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37m의 거대한 마오리 공
화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와이탕이 기념일인 매년 2월 6일 마오리 청년들이 마오리 전통 카누를 띄워 축제를 즐긴
다.
전쟁기념 박물관
오클랜드 시에 있는 이 박물관에서는 마오리족의 문화유산 및 남태평양 일원에 흩어진 원주민의 문
화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동식물 및 광물자원을 비롯하여 정작 초기 백인의 이주생활 및 해양문화 등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고, 전쟁에 참전했다
희생된 사람들의 자료 등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구성은 1층 마오리 홀, 2층 뉴질랜드 자연사 박물관, 3층 전쟁기념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
다.
달분화구 지역의
북섬 타우포에 있는 달 분화구 지열지대(Craters of the Moon)는 지면 여러 곳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아 오르면서 마치 달의 분화구를 연상시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 일대가 온통 수증기로 가
득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진흙 자체가 끓는 곳도 있으며 특히, 비가 온 뒤에는 더욱 많은 수증기가 솟아오른
다.
케리케리
파이히아에서 북쪽으로 약 33㎞ 떨어진 곳에 그림같은 케리케리가 있다.
뉴질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케리케리 감귤, 키위 농장과 공예품의 중심지로 특히 도자기나 직물 등
이 유명하다.
와카레와레와 온천지
로토루아 와카레와레와 온천지(The Whakarewarewa Thermal Reserve)는 로토루아의 대표적인 관광
지로서 마오리족의 마을 내에 위치한 최대의 온천지이다.
특히, 간헐적으로 유명한 곳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 페더즈 간헐천(Prince of Wales Feathers Geyser)
과 포후투 간헐천으로 포후투 간헐천(Pohutu Geyser)의 경우는 약 20분 간격으로 20∼30m 높이까지
뜨거운 온천수가 마치 분수처럼 뿜어 오른다.
아그로돔
아그로 돔(Agrodome)은 뉴질랜드의 양 사육과 관리 등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매일 3회에 걸쳐 19종의 양을 볼 수 있으며 양털 깎기쇼, 양몰이 개의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쇼를 진행하는 사람의 유머와 재치로 즐겁게 관람할 수 있으며 설명은 세계의 언어로 통역되는 이어
폰을 주기 때문에 듣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로토루아 호수(Rotorua Lake)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성된 호수로 로토루아 내에 있는 9개의 호수 중에서 가장 크며 많은 송어를 비
롯한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낚시를 즐기는 곳이다.
유람선과 수상스키를 즐길수 있다.
레드우드 그로우브
레드우드 그로우브(Redwood Grove)는 로토루아 근교에 자리한 임업 시험장으로 세계 각국의 나무들
이 식수되어 있다.
세고비아 나무를 비롯하여 잣나무, 이끼다 소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리하고 있어 한낮에도 어두울 정
도이며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저절로 삼림욕이 되는 쾌적한 곳이다.
와이토모 동굴
와이토모 동굴(Waitomo Cave)은 개똥벌레의 일종인 그로우웜(Glow Worm)이 서식하고 있는 동굴로
동굴 아래 냇물이 흐르고 있어 배를 타고 그로우 윔을 관광한다.
어두컴컴한 곳에 가면 개똥벌레가 마치 밤하늘의 은하계를 보는 것과 같이 촘촘히 빛나 신기함을 더
해 준다.
와이토모란 마오리어로 물과 동굴을 뜻하며 우기에는 동굴에 흐르는 냇물이 증가하여 배를 타고 동
굴 안을 관광할 수 없다.
주요도시는 철도로 연결되며 고속도로도 잘 닦여 있다.
남섬과 북섬 사이를 운행하는 여객선이 있다.
오클랜드· 웰링턴· 크라이스트처치에 공항이 있고 오클랜드· 웰링턴 항구가 있다.
주요도시로는 오클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웰링턴 등이 있다.
오클랜드 국제공항은 대한민국, 일본 등 아시아와 미국, 아르헨티나 등 타 대륙으로 통하는 주요 관
문이다.
뉴질랜드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우방 국가로,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62년 3월 26일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서울과 웰링턴에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오클랜드에도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있다.
주뉴질랜드 대한민국 대사관은 서사모아, 통가를 겸임하고 있으며,
최근 피지와 뉴질랜드는 기자 억류를 둘러싸고 관계가 냉각되고 있다.
인접국인 호주와 전통적인 혈맹관계이다.
26위 이과수폭포(브라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 파라나 강과의 합류점에서 상류 쪽으로 23㎞ 지점에 있다.
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2m이고, 너비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낙차지점에 있는 절벽 가장자리의 숲으로 뒤덮인 많은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 되는
275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로 형성되어 있다.
이과수라는 이름은 원주민인 인디오의'이구'는 물이라는 뜻이며,'이수'는 장대한 것에 대한 경
탄을 뜻하는 과라니어 말에서 유래가 되었다.
이과수 폭포는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와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3대 폭포로 불린다.
이과수 폭포는 이과수 강이 서쪽으로 굽이치며, 파라나 고원의 가장자리를 흐르다가 협곡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생긴다.
폭포와 관련된 섬 가운데 폭포 바로 위에 있는 산마르틴 섬과 그란데 섬이 가장 유명하다.
그란데 섬을 중심으로 2개의 지류로 갈라진 이과수 강이 다시 합류해 현무암 및 용암층을 지나 가르
간타델디아블루('악마의 목구멍')로 불리는 깊은 틈으로 낙하하며, 그 모습은 '심연으로 뛰어드는 대양
'이라는 말로 묘사된다
이과수 강은 협곡을 지나 계속 흐르다가 파라나 강과 합류한다.
한 층의 안개가 폭포의 아래 지점에서부터 위로 150m되는 곳까지 드리워져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에
한몫을 한다.
각각의 많은 폭포 줄기들은 돌출한 암붕(巖棚)으로 인해 중간에서 부서진다.
이때 생기는 물보라와 물의 굴절로 인해 생긴 무지개가 장관을 이룬다. 녹색의 정글지대를 가르며
지나온 거대한 물길이 떨어지며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300여 개의 물기둥과 높이는 100m를 넘는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가 만나는 접경지대이며 폭포의 80%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다.
폭포를 방문한 최초의 스페인의 탐험가는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이다.
1541년 그는 폭포를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곧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18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폭포를 탐사하기 시작했지만 이 탐험은 1767년 남아메리카에서 온 예
수회 선교사들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폭포의 지형도는 1892년에야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과수폭포가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897년 브라질의 장교 에드문두 데 바루스 미국에 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필적할 만한 국립공원을 이과수 폭포에 세울 것을 구상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국경이 조정된 후에 각 나라에 별도의 국립공원이 세워졌다.
공원 모두 폭포와 관련된 식물, 야생동물, 아름다운 풍경 등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원 내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정부 소유의 호텔이 있다.
공원에서 사냥은 금지되어 있으나 낚시는 허용된다.
아르헨티나 쪽의 공원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반낙엽성 식물에서 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 다양한 식물이 분포하고 있어서 식물학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폭포의 전경은 브라질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브라질 쪽에 있는 폭포들로는 벤자민콘스탄트·데오도루·플로리아누 등이 있다.
이곳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가 만나는 접경지대이며 폭포의 80%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
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과수 폭포를 관광할 수 있는 포스두 이과수시는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경
에 접해 있는 도시이다.
이과수 국제 공항은 포스두 이과수시의 동남쪽으로 10km 떨어져 있으며, 건물 안에는 관광안내소,
여행사, 레스토랑, 토산품점 이있다. 공항까지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항공편으로 리우데 자네이루에서 2시간, 상파울루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영토에 속한 이과수 강 절반 지역에 있는 산마르틴 섬에서 아르헨티나 영토에 해당하는
폭포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현지에 가면 발로 걷는 이과수 폭포를 즐긴 후지프를 타고 이과수 폭포 근처의 정글을 트래킹한 후
배를 타고 이과수 폭포를 여행하는 코스가 있는데 이곳에서 폭포 웅덩이까지 다가가 세계적인 폭포
의 진면목을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프에서 내려 사람의 손이 거의 닫지 않은 정글을 만끽하며 걷다보면 이과수 강에 다다르게 된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가 폭포 쪽으로 다가갈수록 고막을 찢을 듯이 울부짖는 이과수의 괴성에 제압을
당하게 되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이과수를 몸으로 느끼며, 자연의 장대함에서 평소에 느끼지 못한
스릴을 경험할 수 있어서인지 스릴있는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서인지 점점 관광자가 늘고 있
다.
오렌지색의 구명조끼를 입고 쌍발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이과수 강을 거슬러 폭포로 향하게 된다.
폭포가 가까울수록 배는 더욱 더 출렁거리며, 어느듯 폭포의 아래 부분에 다다랐을 때엔 폭포에서
나는 굉음에 귀가 멍멍거릴 정도이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이과수 폭포의 장관은 정말 장관 그 자체이다.
이곳에서 산마르틴·보세티·도스에르마나스('두 자매')·미트레·트레스모스케테로스('삼총사') 폭포 등을 볼
수 있다.
27위 파리(프랑스)
2,000여 년 전 센 강에 있는 섬에 세워진 이 도시는 영국 해협에 면한 센 강 어귀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75km 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의 파리는 이 섬(시테 섬)으로부터 센 강의 양쪽 기슭 훨씬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파리 시 자체는 면적이 105㎢이지만, 파리 시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교외와 개발지역
이 형성하고 있는 파리 대도시권은 약 2,118㎢에 이른다.
파리는 파리 분지로 알려진 비옥한 농업지역의 중앙에 있으며, 일드프랑스 지방에 속한 8개주 가운
데 하나이다.
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괴테의 말대로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 전개’된다.
또한 파리는 역사적 유적의 무한한 보고일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살고 현대에서 활동하는 도시이다.
짧은 시간으로 파리를 모두 돌아보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몽마르트르 언덕 위나 에펠탑, 개선문 등에
올라가 지형·건물의 배열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여러 코스로 나누어진 관광 버스를 이용하고 센강의
관광선을 타보면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목표한 대로 거닐어 보고, 베르사유, 생드니, 퐁텐블로 등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시테 섬
파리의 오래된 건물, 기념물, 정원, 광장, 가로, 다리 등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경관을 이룬다.
도시가 시작되었던 시테 섬에는 12세기의 훌륭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갈리아-로마 시대의 선원들이 이곳에 주피터를 위한 제단(지금은 클뤼니 박물관에 소장)을 세웠고,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신전이 있던 장소에 교회가 건설되었다.
파리 최초의 주교인 성 드니는 이곳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의 붉은색은 참수형을 당한 후 자신의 머리를 집어들고 걸었다는 전설을 지닌
이 순교자의 피를 나타낸다.
1159년 주교가 된 모리스 드 쉴리는 6세기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대신하여 새로운 고딕 양식으로 교
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1163년에 시작되어 1345년에 끝난 이 공사에는 외관의 미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내부를 더 높이
솟게 해주는 플라잉 버트레스(버팀벽))라는 새로운 건축방법이 도입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손상을 당한 이 대성당은 그후 경매에서 한 건축자재상에게 팔렸으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 매매를 무효화하고, 1804년의 황제대관식을 위해 다시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후일 루이 필리프가 방치된 교회를 복구했고, 건축가인 외젠 비올레트 드 뒤크에 의해서도 1845~64
년에 복구되었다.
1992년의 복구사업은 산업오염에 의한 부식 때문이다.
생루이 섬
1627년 루이 13세는 건축 청부업자 크리스토프 마리와 2명의 재정가에게 시테 섬 뒤쪽의 두 진흙제
방을 60년 기한으로 임대해주었다.
37년이 지나서야 마리는 두 섬을 합쳐 주변에 도랑을 파서 배수시키고, 중앙의 대로에 10개의 나란
한 도로들을 배치시켜 땅을 가옥소유주들에게 임대해줄 수 있었다.
생루이장일 교회가 같은 해인 1664년에 시공되었지만, 가장 훌륭한 주택은 루이 르 보가 1640년에
완공했다.
앙주 부두를 끼고 상류 쪽으로 수m 떨어진 곳에 있는 오텔 드 로죙은 1657년에 완공되었다.
건축계약의 일부로 건설되어 센 강 우안과 연결되는 마리 다리는 비록 오늘날의 교통량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되었으나 길이는 원래 그대로이다.
생루이 섬은 번잡한 중심부에서 조용한 지역을 이룬다.
라틴 지구
생루이 섬 건너편으로 센 강 좌안에는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카르티에라탱(라틴 지구)
이 있다.
1699년 라신이 이곳에서 죽었고, 들라크루아는 퓌르스탕베르 광장에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이 광장에는 19세기에 옮겨온 출판사들이 모여 있다.
주요찻집들은 예술가·작가·출판업자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1945~55년 실존주의 운동 및 그와 관련되어 부활된 보헤미아니슴(인습을 벗어던진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주의)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문학·요리·사교의 활력적인 중심지이다.
생미셸 대로 너머 서쪽에는 왕의 권한 밑에서 자치를 누렸던 대학지구가 있다.
이곳에서는 1789년까지 수업 외의 시간에도 선생과 학생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다.
루이 9세의 궁정 목사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이 1257년경 창립한 소르본대학은 프랑스 신학의 중심
지가 되었다.
이 대학은 수세기 동안 파리 대학교의 행정본부로 이용되었지만, 1968~71년 완전히 별개인 몇 개의
대학들로 나누어졌다.
소르본대학 건물 그 자체는 분리되어나간 몇몇 대학의 구내로 계속 이용되고 있다.
다른 학부·학교·연구소들은 파리 교육환경의 과밀현상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에서 교외의 보다 넓은 장
소로 옮겨졌다.
독자적인 콜레주 드 프랑스는 소르본대학의 편협된 신학·라틴어 과정보다 더 자유로운 교과과정을
제공하기 위해 1529년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소르본대학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학위가 수여되지 않지만, 특히 철학·문학·과학 분야에 최고의 명성을 지닌 교수진을 갖추
고 있다.
대학들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루이 15세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성 주느비에브에게
봉헌하기 위해 1755년 세운 건축물이 있다.
이것은 원래 파리의 중심 교회로 삼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혁명 정부는 이를 세속화시켜 팡테옹이라
고 개칭하고는 혁명 영웅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다.
이곳에 묻힌 이들로는 빅토르 위고, 볼테르, 루소, 졸라 등의 작가들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
탕스의 지도자였던 장 물랭이 있다.
생제르맹 대로와 생미셸 대로가 만나는 곳에는 로마 시대에 세워진 목욕탕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486~1500년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저택인 클뤼니 박물관 구내에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현재 6폭으로 된 유명한 일각수 태피스트리 〈라 담 아 라 리코른 La Dame a la licorne〉을 포함하여
중세기 예술품이 수집되어 있다. 강가에 솟아 있는 구릉 꼭대기에는 뤽상부르 공원의 가장자리를 따
라 생미셸 대로가 지난다.
뤽상부르 궁전은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1612~21년에 건축된 것이다.
뤽상부르 공원에는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장난감 배를 띄울 수 있는 연못, 꼭두각시 인형극장, 조상
(彫像)들이 있다.
이 공원의 남쪽에 몽파르나스 지역이 있다.
강 좌안 하류 쪽에는 모네관(館)과 1806년 이래 5개의 프랑스 아카데미들이 사용해온 프랑스 연구소
가 있다.
근처에서 시테 섬의 끝을 가로지르고 있는 퐁뇌프('새로운 다리'라는 뜻)는 1578~1604년에 지어진 것
으로, 이름과는 달리 파리의 다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이 다리보다 건축 시기가 앞서는 다른
다리들은 재건되었음).
200년 동안 퐁뇌프 다리는 파리의 주요도로이자 상설시장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다리에서 여름 장을 여는 관습이 부활되었다.
관청지구
지방 및 중앙정부는 파리 전체 사무실 공간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센 강 좌안에 카루셀 다리로부터 에펠 탑까지 강과 나란히 뻗은 이 지역은 제7구이며, 프랑스 혁명
이래 오래되고 훌륭한 대저택들에 행정사무실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관청지구'로 알려져 있다.
모든 건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앵발리드 광장과 국회 사이의 케도르세(오르세 강변도로)에 있는,
나지막하고 장식이 많은 외무부 건물이다.
국회의사당은 프랑스 혁명기에 점유당했던 부르봉 궁전(1722~28)에 들어서 있다.
이 궁전은 혁명 이후의 정권들에 의해 조금씩 증축되었는데, 특히 강을 마주한 그리스식 주랑(柱廊)
은 1807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강 근처에 있는 오래된 오르세 철도역은 사용되지 않다가 보수되어 1986년 19세기 미술·문명 박물관
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이전에 죄 드 폼에 있었던 세잔·마네·모네·르누아르·고흐 등의 인상파·후기인상파 작품이 소
장되어 있다.
앵발리드
앵발리드 관(폐병관)으로 알려진 대규모 복합건물은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7,000명의 노령·상이군
인들의 보호시설로서 5년(1671~76) 만에 완공되었다.
병원건물들 위로 솟아 있는 금도금된 돔(1675~1706)은 생루이 교회에 속한 것이다.
고전시대의 로마 것보다 더 자유롭게 고전적 원리를 적용했던 이 건물은 17세기 파리의 건축양식이
되었다.
돔 구조물 바로 밑에는 붉은 반암(斑岩) 석관(石棺)으로 덮인 6개의 관들이 있다.
관 속에 또다른 관이 들어가 있는 식으로 된 이 6개 관에는 루이 필리프 왕의 노력으로 1840년 세
인트헬레나 섬으로부터 반환된 나폴레옹의 유해와 유물들이 들어 있다.
가로수가 서 있는 거대한 앵발리드 광장은 케도르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출연으로 세워
진, 알렉산드르 3세 다리 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다.
센 강이 남서쪽으로 굽어진 근처에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에펠 탑이 서 있다.
에펠 탑은 철근을 노출시킨 트러스 탑으로 안전성과 외관에 회의를 가졌던 사람들의 거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9년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1909년 박람회의 사용권이 만료되었을 때,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라디오 방송을 위한 안테나로
서의 가치 때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증축으로 원래 300m이던 탑 높이가 18.4m 더 높아졌다.
3개의 단 중 가장 높은 단에 서면 64km 이상까지 시야가 미친다.
20세기에 와서 에펠 탑은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게 되었다.
약 8,000㎡에 달하는 탑의 기부로부터 거대한 들판인 샹드마르스('3월의 들판'이라는 뜻)가 육군사관
학교까지 펼쳐져 있다.
1769~72년에 지어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는 현재 국방대학이 들어서 있다.
원래 육군사관학교의 행군장소로 사용되었던 샹드마르스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대대적인 집회가 열
렸던 장소였다.
육군사관학교 뒤에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본부가 있다.
강 건너 에펠 탑의 맞은편에 있는 샤요 궁에는 많은 박물관이 있다.
이 궁은 1878년의 박람회 때 남겨진 건물인 트로카데로 궁을 대신하여 1937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되었다.
조상들이 줄지어 있는 이 궁의 테라스에서는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강쪽으로 경사
진 계단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개선로
북쪽으로는 클레베르가 거리가 구릉 위의 샤요 궁으로부터 원형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 원형광장으로부터 12개의 인상적인 가로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별(에투알) 모양을 이루고 있
어 1753년부터 에투알 광장으로 불렸으나 1970년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이 광장의 중심부에는 1806년 나폴레옹이 세우도록 한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 너머로 V자형 교외지역인 뇌이의 맨 끝 쪽에는 약 3.2km에 걸쳐 1970년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고층 건물군이 있다.
데팡스 소구라고 불리는 이곳은 상업·공업·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제2의
개선문이라고 하는 대 아치 문이 세워졌다.
샤를 드골 광장 남동쪽에는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되었던 장소인 콩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는 때때로 개선로라고 불리며, 데팡스 소구로부터 루브르 박물관까지 뻗은 큰
축의 동부를 형성한다.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 사이에 있는 튈르리 공원에는 예전에는 박물관이었으나 현재는 전시
장으로 쓰이고 있는 죄 드 폼과 오랑주리 회화관(繪畵館)이 있다.
바이킹들은 885년 시테 섬 서쪽 끝에서부터 강 건너편의 우안에 걸쳐 진을 쳤으나 파리의 포위 공격
은 실패로 끝났다.
약 1200년경 필리프 2세가 신도시 성벽 바로 바깥쪽으로 같은 장소에 서쪽 방어를 돕기 위해 직4각
형으로 된 십자군성을 축조했다.
그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증축과 개조가 이루어졌으며, 1852년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규모의 궁전이
완공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강을 따라 뻗은 남쪽 화랑과, 4각형 안마당(쿠르 카레)을 둘러싼 궁전의 4면을 차지
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사모트라케의 승리〉·〈밀로의 비너스〉·〈모나리자〉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BC 7세기
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
예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 전체에 걸쳐 대대적인 개조작업이 벌어졌다.
1980년대초 2개의 화랑 사이에 있는 거대한 나폴레옹 안마당에 새로운 출입구와 지하 연회장을 만
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출입구를 덮기 위해 I. M. 페가 설계한 높이 23m의 유리 피라미드는 강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강 좌안으로 걸쳐진 아르 다리는 파리의 모든 다리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
다.
처음에는 철교(1803)였으며, 도보자들이 계속 이용해왔던 이 다리에서는 센 강변의 경치가 자세히 보
인다.
루브르 박물관 북쪽으로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국립음악 아카데미가 있는 오페라 광장이 있다.
오스만 대로 너머의 언덕에는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우뚝 서 있는 몽마르트르 지역이 있다.
카페와 나이트클럽들이 있는 이곳은 환락가의 중심지이며, 시인·화가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리볼리가(街)
리볼리가는 콩코르드 광장으로부터 남동쪽으로 강과 나란히 뻗어 있다.
이 거리를 낀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에는 팔레 루아얄이 있다.
이것은 추기경 리슐리외가 왕가에 양도한 것으로, 현재는 국가 고위기관인 참사원이 들어 있으며, 근
처에 국립도서관이 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여러 거리들은 1183~1969년에 파리의 중심 상가였던 알 소구이다.
철골과 유리로 된 19세기의 독특한 시장 건물들을 해체할 때 일반 대중들이 큰 소란을 일으켰고, 해
체한 후 생긴 거대한 공간에는 1979년 지하층을 포함한 여러 층의 상업 센터가 들어섰다.
이 센터의 주위에는 차량통행이 없는 구역이 둘러싸고 있다.
알 광장으로부터 세바스토폴 대로를 가로질러 조르주 퐁피두 국립예술문화센터가 있다.
널리 상트르 보부르라고 알려진 이 건물은 1977년에 문을 연, 유리와 금속으로 독특하게 설계된 거
대한 구조물이다.
이 건물은 파리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명소이다.
근처의 마레('저습지')로 알려진 지역에는 국립고문서보관소와 피카소 박물관이 있다.
리볼리가의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 광장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1789년 7월 14일에 있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제군주의 희생자들을 해방시킨 사건이라기보
다는 전제군주에 대한 상징적인 타격이었다.
사실상 수년 간 사용되지 않았고 왕의 명령으로 해체될 계획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에는 사건 당일 단
지 4명의 위조범, 2명의 정신이상자, 그리고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젊은 귀족이 수감되어 있
었을 뿐이었다.
이 감옥은 점령당한 후 파괴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바스티유 광장을 만들게 했다.
1859년 이곳에 건설한 철도역은 새 오페라관 건축을 위해 1984년에 완전히 없앴다.
오페라 하우스는 1991년에 개관되었다.
28위 알래스카(미국)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 끝에 있으며 지질학적으로 북태평양 화산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면적은 가장 크나 인구는 가장 적은 주이다.
알래스카 본토의 남북길이는 1,450km, 동서너비는 1,300km이다.
알류샨 열도와 남동쪽의 팬핸들 지역을 포함하면 동서길이는 4,800km에 달한다.
길이 약 760km. 반도 기부(基部)는 북위 59°이며 남서쪽으로 돌출해 나가다가 끝이 북위 55°에 이른
다.
환태평양조산대의 일부로 알류샨산맥이 뻗어 있으며, 빙식지형이 도처에 있다.
화산도 많은데, 특히 반도 기부의 카트마이 황화산이 유명하며, 부근 일대는 카트마이 국립자연공원
으로 지정되어 있다.
북서쪽의 브리스틀만(灣)은 게 ·핼리벗(넙치의 일종) · 바다표범 등의 산지로서 유명하다.
알래스카는 서쪽으로 베링 해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베리아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과 북서쪽으로
는 북극해, 남쪽으로는 태평양과 알래스카 만, 동쪽으로는 캐나다의 유콘 준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접해 있다.
알래스카의 인디언은 1만 5,000~4만 년 전에 베링 육교를 건너 최초로 북아메리카에 온 사람들의
후손이거나 아메리카 양 대륙에 원래 거주했던 사람들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에스키모(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은 비교적 정주성(定住性)이 강한 북극지방 민족으로 3,000~8,000년
전에 알래스카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는 1784년에 세워졌는데 러시아 모피사냥꾼이 코디액섬에 있는 스리세인츠베
이에 건설했다.
1799~1867년에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관리했으나 그후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슈어드가
알래스카를 사들이는 조약을 체결시켰다.
1880~90년대에 금이 발견되자 미국인의 정착이 크게 촉진되었고, 1912년 의회의 인준을 받아 알래
스카 준주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일본의 적대적인 활동 때문에 알래스카 간선도로(Alcan)와 더불어 방어시설도
필요했다.
알래스카는 1959년 1월 3일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었다.
알래스카 토지에 대한 내부 행정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연방정부는 광대한 지역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원주민들의 소유권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
른 막대한 지역을 그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지형학적으로 볼 때 알래스카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첫째, 섬과 산계로 이루어진 남부이고, 둘째, 내륙의 중부 평원과 대지이며, 셋째, 브룩스 산맥이고,
넷째, 브룩스 산맥의 북쪽에 있으며 노스슬로프로도 불리는 해안 저지대이다.
알래스카 산맥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매킨리 산(6,194m)이 있다.
남서쪽의 알류샨 산계와 남동쪽의 세인트일라이어스·바운더리 산맥은 화산활동·지진·빙하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알래스카 중부의 습한 내륙지역에는 유콘 강과 커스커큄 강이 흐른다.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져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지형적인 기복 때문에 기후가 매우 다양하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이나 강우량이 많고 주의 남단에는 해양기후의 두드러진 특징인 안개가 나타난다.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인해 여름에는 낮이, 겨울에는 밤이 길고 북쪽에서는 북극사막기후가 펼쳐진
다.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인구와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주해오는 많은
젊은이들 때문에 인구증가율은 매우 높다.
1940~80년에 인구가 454% 증가했는데 평균연령은 겨우 26세이다.
원주민은 전체인구의 1/7에 불과하다. 에스키모족(3만 4,000명)이 가장 큰 인구집단이며 그 다음 아
메리카 인디언(2만 2,000명), 알류트족(8,000명) 순이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앵커리지 지역에 살고 있으며 페어뱅크스에 15%, 남동부 팬핸들 지역에 있는
마을들에 13%가 살고 있다.
알래스카의 경제는 차츰 석유, 천연 가스 산업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1977년 알래스카 횡단 송유관이 개설된 이래 이곳은 천연 석유 생산에서 텍사스에 이어 2위를 자랑
해왔다.
또 석탄·금·아연·은·구리·모래·자갈 등도 중요한 광산물이다.
노동인력의 1/3가량이 주와 연방정부기관과 군사방위시설에 고용되어 있다.
전통적인 어업과 임업은 남획과 남벌을 금지하는 정부 규제하에 행해진다.
내한성(耐寒性) 작물과 가축의 사육이 가능하나 농경지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한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고 교통시설이 개선됨에 따라 관광도 주요사업이 되고 있다.
주 내부에서나 여타 지역으로의 교통편은 주로 항공을 이용한다.
알래스카 머린하이웨이는 해안의 지역사회들을 오가는 여객선의 항로로 중요하다.
중남부 지역에 있는 시들은 도로를 통해 알래스카 고속도로와 연결되며, 나아가 캐나다 서부와 미국
의 48개 주로 연결된다.
주 전체에 걸쳐 있는 알래스카대학교의 고등교육기관과 여러 개의 지역사회대학들이 페어뱅크스·앵
커리지·오크레이크(주노) 등에서 도심을 형성한다.
알래스카의 유산은 문화적으로 미국 문화의 주류에서 제외되고 있는데, 이는 알래스카의 문화가 주
로 원주민들의 공예·예술품과 러시아 정착민들의 유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광대한 북쪽 땅은 미국의 마지막 미개척지라고 할 수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종종 극적인 아름다움과 독특한 국가적 특징을 지닌 것으로 여
겨지기도 한다. 면적 1,530,700㎢,
29위 앙코르와트사원(캄보디아)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중반경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하지만, 반영구적 사원은 아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
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
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
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 ·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칭되는 웅장, 화려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앙코르왓은 앙코르 왕국의 수리야 바
르만 2세(1113-1150) 의 시기에 건립되었다.
도읍을 둘러싼 성벽은 한 변이 약 4km나 되었고, 서쪽과 남쪽에는 폭이 넓은 수로가 만들어졌다.
성의 북동쪽에는 길이 7Km, 너비 2Km의 '동바라이'라는 큰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도읍의 중심인 프놈바켄의 언덕 위에는 5층의 피라미드형 사원이 세워지고, 제일 높은 층에는 주사
위의 눈처럼 다섯 신전이 배열되고 중앙의 신전에 링가를 모셨다.
현재 남아 있는 앙코르 톰(큰 도시)은 제4기 공사에 속한다.
각 왕들에 의하여 연속적으로 확대된 도읍은 마지막에는 그 넓이가 1,000km2를 넘었다.
앙코르왓은 크메르의 고대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중의 하나이다.
시엠립시 북쪽 6.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이 사원은 1860년 식물학자 앙리무오가 발견한 이래 이곳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있다. 이곳은 공항에서 버스로 갈 수 있다.
이 사원은 12세기 전반에 수리아바르만 2세가 건립하였으며 힌두교의 비슈누 신과 일체화한 자신의
묘로 사용하기 위해 이 사원을 건립하였다.
앙코르왓은 힌두교의 신들과 그 대리인인 왕에게 바쳐진 장대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모든 건축물 하나하나에는 크메르인들의 독자적인 문화와 그들의 우주관 및 신
앙관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그들이 건설한 세련되고 정교한 호수, 운하와 레삽으로부터 연결시킨 관개수로를 이용하여 부
유하고 막강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앙코르왓의 구조는 동서로 약 1,500미터, 남북으로 약 1,300미터의 넓이에 중앙에 있는 탑을 기준으
로 석조의 대사원이 건설되어졌다.
사원 주변의 운하는 바다를 의미하며 높이 65미터의 중앙탑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나타낸다.
또한 사원의 회랑은 히말라야 산맥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넓은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그 외부는 너비가 약 200미터인 수로로 둘러싸여 있다.
과거부터 북쪽 밀림 속의 큰 도시, 앙코르와트에 가면 반드시 큰 저주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
져 있었다.
앙리 무오는 5일 동안 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반쯤 묻힌 유적을 탐험하였다.
무오는 앙코르를 발견한 다음 해인 1861년 9월 여름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신들의 건
축물을 발견하여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
앙코르톰
지금의 시엠레아브 북쪽 6㎞ 지점에 있다.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아바르만 2세(1113~50경 재위)
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
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함)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
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
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
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
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요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
근대 이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
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친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
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바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
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
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
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
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 자체의 관계는 도시의 주요거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또는 피라미드나 사원은 '데바라자'라고 불리는 신격화한 왕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위대한 절대적 신격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
을 왕의 개인 장례용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심부 사
원을 새로 짓지 않은 왕이나 실질적 통치자가 아니었던 왕가 구성원, 또는 몇몇 경우에 특정 귀족들
이 시바 신이나 왕국에서 섬기던 다른 주요신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숭배
장소로 세워졌다.
예를 들면 앙코르 유적의 사원 가운데 가장 거창하며 유명한 앙코르와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자신
의 유해를 안치하고 상징적·종교적으로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
의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
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
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
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
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
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30위 에베레스트산(네팔)
높이 8,848m. 인도의 측량국장 앤드루 워가 1846년부터 1855년까지 히말라야 산계의 3각측량을 계
속하였는데, 특히 히말라야의 고봉 79개를 커다란 경위의(經緯儀)로 정밀 측정한 결과, 1852년까지
피크 15(인도 측량국 번호)라고만 부르던 이 산이 세계 최고임을 확인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네팔과 티베트사이에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국경을 이루며, 대략 북위 2
8°, 동경 87° 지점에 솟아 있다.
불모지인 3개의 능선(남동쪽·북동쪽·서쪽 능선)에서 2개의 정상이 각각 8,848m(에베레스트)와 8,748m
(남봉) 높이로 솟아 있다.
에베레스트 산은 티베트 고원 위에 약 3,600m로 솟은 북동쪽 기슭에서 바로 볼 수 있으나 네팔에서
는 에베레스트 산 기슭 주변에 솟아 있는 창체(북쪽 7,553m)·쿰부체(북서쪽 6,640m)·눕체(남서쪽 7,85
5m)·로체(남쪽 8,516m) 산과 같은 낮은 봉우리들에 가려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아시아 대륙 히말라야 산맥 정상에 있는 봉우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네팔과 티베트(중국) 사이에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국경을 이루며, 대략
북위 28°, 동경 87° 지점에 솟아 있다.
불모지인 3개의 능선(남동쪽·북동쪽·서쪽 능선)에서 2개의 정상이 각각 8,848m(에베레스트)와 8,748m
(남봉) 높이로 솟아 있다.
에베레스트 산은 티베트 고원 위에 약 3,600m로 솟은 북동쪽 기슭에서 바로 볼 수 있으나 네팔에서
는 에베레스트 산 기슭 주변에 솟아 있는 창체(북쪽 7,553m)·쿰부체(북서쪽 6,640m)·눕체(남서쪽 7,85
5m)·로체(남쪽 8,516m) 산과 같은 낮은 봉우리들에 가려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대(大)히말라야 산맥은 마이오세(700만~2,600만 년 전)에 인도 대륙과 티베트 고원이 부딪히면서 퇴
적 분지가 압력을 받아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카트만두 나페(단층작용과 횡와습곡작용을 받아 原地性基盤을 덮고 있는 岩床)와 쿰부 나페가 압력을
받아 위로 솟은 후 곧이어 서로 겹치게 됨으로써 생긴 원시 산맥은 북부 대륙의 전반적인 융기로 더
욱 높아졌으며, 또한 나페들이 다시 한번 습곡작용을 받아 산맥 전체에 겹쳐짐으로써 플라이스토세
(약 1만 년~250만 년 전) 마하바라트 시대에 에베레스트 산이 형성되었다.
결정형 퇴적물(뒤에 성질이 변한 퇴적물)로 층 사이가 분리된 에베레스트 산의 석회암층은 페름기와
석탄기부터 향사층(向斜層)에 겹쳐져 내부 지층과 함께 습곡작용을 받았다.
에베레스트 산 형성과정에 작용한 이와 같은 힘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일어나고 있는 융기작용을 통
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층의 융기는 지속적인 침식작용으로 상쇄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에베레스트 산은 대기권을 지나 산소가 희박한 성층권의 2/3 지점까지 솟아 있어 산소 부족과 강풍,
혹한 때문에 정상부의 비탈에는 어떠한 동식물도 살 수가 없다.
비는 내리지 않고, 계절풍이 부는 여름 동안 눈이 내려 눈더미를 이룬다.
이 눈더미는 증발선(蒸發線) 위에 있기 때문에 보통 밑으로 흘러 빙하를 이루는 넓은 만년설(부분적
으로 결빙된 싸라기눈) 분지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에베레스트 산의 빙하는 자주 일어나는 눈사태를 통해서만 형성된다.
주요능선으로 서로 분리된 산 측면의 빙상(氷床)은 산비탈에서 아래로 산기슭까지 뒤덮고 있으나 점
점 기후가 변하기 때문에 조금씩 뒤편으로 물러나는 경향을 보인다.
정상부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기 때문에 겨울 동안 비교적 눈이 쌓이지 않는다.
빙하로는 캉슝 빙하(동쪽), 주빙하인 동(東)롱부크 빙하(북쪽), 서(西)롱부크 빙하(북서쪽), 푸모리 빙하
(북서쪽), 쿰부 빙하(서쪽과 남쪽), 서(西)쿰 빙하가 있다.
이 가운데 서쿰 빙하는 로체 산과 눕체 산을 잇는 능선과 에베레스트 산 사이에 있는 폐쇄된 얼음
계곡이다.
에베레스트 산에서는 수로(水路)가 남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쿰부 빙하는 녹아서 네팔의 로부지아콜라 강으로 흘러들며, 로부지아콜라 강은 남쪽으로 임자콜라
강과 두드코시 강의 합류 지점까지 흘러간다.
티베트의 강인 롱추 강과 칼마추 강은 에베레스트 산 기슭의 푸모리·롱부크·캉슝 빙하에서 각각 발원
한다.
롱추 강과 두드코시 강 유역은 정상으로 연결되는 북쪽과 남쪽 진입로 구실을 한다.
오래 전부터 그 웅장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티베트어로 '초모룽마'('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라
고 불렸으나 1852년에 인도 정부 측량국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확인되었다.
이전에는 '15호 봉우리'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1865년 이후 인도 측량국장을 지낸 영국인 관리 조
지 에버리스트 경(1830~43 재임)의 이름에서 따온 현재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정상부는 강설량, 인력(引力)의 변화, 빛의 굴절에 따라 고도가 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고도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 공인된 에베레스트 산의 고도(8,848m, 안팎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음)는 1952~55년에 인도 측량
국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는 시도는 1920년 티베트 등반로가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동쪽 능선과 북동쪽 능선에서 각각 3회(1951~52), 7회(1921~38)에 걸쳐 시도된 등정은 차
갑고 건조한 공기, 거센 바람, 험한 지형, 높은 고도 등 때문에 실패했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 등정은 1953년 '왕립지리학회'와 '히말라야 공동 산악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한
원정대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졌다.
이들은 특수절연 등산화 및 등산복을 착용하고 개폐회로 산소 공급장치, 휴대용 무전기 등의 장비를
갖추고 쿰부 빙폭(氷瀑)과 쿰부 빙하, 서쿰 빙하를 거쳐 로체 산과 그 정면에 있는 해발 7,986m의 바
위 능선인 사우스콜까지 이르는 등반로에 8개의 캠프를 설치했다.
1953년 5월 29일 마지막 캠프에서 출발한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뒤에 '경'칭호를 받음)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는 남동쪽 능선을 오른 후 남봉을 지나 정오 무렵 정상에 이르렀다.
그후 여러 나라에서 후원하는 수많은 원정대가 등반을 시도했으며, 그 가운데 많은 경우가 성공했다.
1963년 2명의 미국인이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서쪽 능선길을 택해 정상을 정복하고 사우스콜로 하
산함으로써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횡단에 성공했다.
일본의 준코 다베이는 1975년 5월 16일 네팔인 앙 체링의 안내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정상에 올랐
다.
1975년 9월 25일 2명의 영국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 산 남서쪽 능선을 통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
으며, 1980년 5월 11일에는 2명의 일본인들이 티베트 쪽 북벽을 통한 첫번째 등반에 성공했다.
한국인으로서는 1977년 9월 15일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탁) 소속의 고상돈이 셰
르파 펨바노루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 사상 14번째로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1987~88년 겨울에는 허영호가 동계등정을 시도해 정상에 올랐으며, 그는 1993년 4월에 다시 한번
등정을 시도, 성공했다.
1993년 5월 16일에는 동국대학교 에베레스트 원정대 소속 대원인 박영석·안진섭·김태곤 등 3명이 남
동릉 루트를 통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안진섭은 하산 도중 추락사했고 정상공격조 지원을 위해 등정하던 남원우는 아이스폴 지대에
서 실족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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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본곳 보다 안가본 곳이 더 많은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곳은 눈에 선한 곳이라 반가움 마져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