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에 짙은 눈썹을 하고 있다.
크고 쌍커풀 진 두 눈은 비슷하게 유지했지만 원판
'극악..'의 여자처럼 가늘고 섬세한 턱 선은 좀더 각
지게 바뀌어 있었고 전체적인 얼굴 형태 역시 훨씬 남
자다워 보인다.
이 시대에서 인피면구라고 불리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눈과 코 주위 등 접합 경계선을 세밀하게 다듬는
작업 끝에 완성된 이 얼굴...
하하-! 본래의 나 진유준의 얼굴과 비슷하네? 내가
나로 변장을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묘한 걸?
"자.. 어때? 어디 이상한 곳 있어?"
내가 돌아보며 묻자 그 동안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
던 외당(外堂) 부당주(副堂主) 형의귀(泂意鬼) 마진풍
이 고개를 저었다.
"훌륭하십니다. 몇 번 해 보지도 않고 그렇게 빨리
익숙해지시다니..."
"만들어 준거 쓰는 거야 대단할 거 있나. 이렇게 잘
만들어온 외당이 훌륭한 거지 뭐. 정말 수고했어 마부
당주."
내 칭찬에 반색을 하며 기뻐하는 마진풍 부당주를
내보내고 나서 나는 한동안을 더 거울을 들여다보았
다. 인상을 구겨 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
잡아당겨 보기도 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참 재밌다.
만들기도 참 잘 만든 것이... 얼굴에 착 달라붙어
내 손으로 만져봐도 본래의 피부와 잘 구별이 안가고
착용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마진풍 말로는 특수한
공법으로 표면이 처리되어 땀도 배출되는 고급 인피면
구라고 했다. 우리 시대에도 이 정도 수준의 가면을
만들려면 돈 무지하게 써서 헐리우드 일류 SFX 전문가
들을 동원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후후... 내가 주문한데로 본래의 내 얼굴과도 비슷
하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맘에 든다. 소교 시켜서
이거 만든 외당 소속의 기술자들에게 상이라도 내려야
겠는걸?
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평소 먹고 자는 방의 옆방이
다. 원판이 쓰던 의료 기구며 각종 장비가 쌓여있는
방이고, 본래 원판은 이 곳에서 죙일 뭔가 조물딱 거
리고 만들거나 연구하곤 했다고 한다.
나야 뭐 가끔 심심풀이로 천하 각지의 지도(地圖)를
보는 정도였지만, 최근 며칠 동안은 여기서 거울 보며
인피면구 착용과 뒷처리 요령을 연습했었다. 아직은
아무도 용도를 묻지도 않았지만, 총관이나 세 자매들
이 물으면 나중에 장청란과 대교의 비무를 참관하러
갈 때라던가 변장.. 여기 용어로 '역용술(易容術)'이
필요할 지 모른다는 소위 '명분'을 내세울 생각이다.
후후.. 실은 보름 전 향어회 안주로 두꺼비 술 먹을
때 생각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지만 말
이다.
여자를 꼬셔서 어찌 어찌 하는 생각은 다음 날 아침
에 술 깨고 나니까 영 쑥스럽고 그래서 관뒀지만, 시
간이 지날수록 신분을 감추고 일반 시민 구역을 구경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비화곡주가 아닌 평범한 청년으로써 정당하게(?) 여
자를 꼬시는 건.. 그 건 뭐, 기회가 되면 시도해 보던
가 말던가 결정하기로 했지만, 어쨌건 비밀 나들이라
는 거 자체가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내 방으로 돌아가자, 세 자매
가 동시에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간다.
"어, 나야, 나..."
"고, 곡주님..?"
깜작이야. 자매들이나 나나 놀라긴 했지만 재미있
군. 허구헌날 내 옆에 있는 얘들도 못 알아 볼 정도면
완벽한 변장이지..?
"후후... 어떠냐? 지금 내 모습?"
"괴, 굉장한 역용입니다."
웬일로 말 수 적은 소령이가 먼저 입을 열어 감탄사
를 발했고, 그 옆의 미령이는 어느새 장난기 어린 표
정이 되어 있었다.
"과연..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시면 어떤 적도 본래
곡주님의 준수한 용모를 연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뭐시라고라고라..?
"....미령이 너, 지금의 내 얼굴이 아주 형편없다는
뜻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곡주님 본래의 고아한 풍모을
항상 접하다 보니, 그런 평범한 얼굴은 웬지... 쿡!
쿡!"
미령이 기집애가 나 열 받은 지도 모르고 쿡쿡대고
웃는 걸 보니.. 아무리 정밀한 인피면구라도 세밀한
표정 변화는 잘 안 드러나나 보다.
"미령아.. 이 얼굴..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형님'의
얼굴이란다."
"아.. 자, 자세히 보니 곡주님만은 못해도 사내답고
영웅의 기개가 느껴지는.."
"됐네, 이 사람아!"
우쒸... 나 진유준의 본 얼굴과 아주 똑같지는 않아
도 대충 비슷한 얼굴인데, '극악..' 놈보다 그렇게 못
하다고?
"소교, 니가 보기에도 이 얼굴이 영 아니냐..?"
"...사람의 용모를 어찌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
까. 미령이가 아직 어려 함부로 말 한 것을 용서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그런 거야 용서하고 말 것도 없고.. 대답이나 해
봐. 이 얼굴.. 니가 보기엔 어때?"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짙은 눈썹과 굵은 입술이
잘 어울려 사내답고 굳건한 분으로 보입니다. 미남형
이라기 보다는 호남형이라 하겠습니다. 헌데.. 곡주께
형님이 계시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이 것이.. 조금 칭찬하는가 싶더니 슬며시 말을 돌
리는 군.
"어.. 친형제는 아냐. 우연히 만난 사람인데, 이름
은 진유준..이라고 하지. 뭐랄까, 아주~ 훌륭한 분이
라는 것만 알아둬."
아이, 민망해라. 내가 내 칭찬을 하다니...
"진유준.. 진대협의 성함을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
다. 곡주님과 의형제를 맺으실 정도라면 위대한 영웅
이 분명하겠군요."
"그, 글쎄... 진유준 하사를 위대한 영웅이라고 하
는 건 좀 그렇지만... 그게.. 하여간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기는 해."
"하사.. 처음 듣는 명호로군요. 세속을 등진 은거
기인이신 모양입니다."
"명호..? 그래 뭐, 명호라면 명호겠지. 아래 하 자
에 선비 사 자 쓰는..."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는 명호는 처음 들어봤습니
다. 참으로 겸손한 분인 듯..."
"..........."
얘기가 좀 이상하게 흘러갔군.
하지만 뭐.. 은거해 있다는 부분은 과히 틀린 얘기
도 아니지? 영혼은 여기 엉뚱한 놈의 몸 속에 은거 중
이고, 몸은 깊고 깊은 동굴 속 얼음 구덩이에 은거..
음, 그러고 보니 좀 걱정되는 군. 몽몽은 내 몸이 거
기에 몇 십 년 있어도 까닥 없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
라도....
"후.... 언제 한 번 보러가긴 해야 하는 데..."
내가 혼자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소교가 조심스럽
게 물어왔다.
"곡주님, 혹시 그 분 신상에 좋지 못한 일이라도 있
는 것입니까?"
"음.. 사실 그 분은 얼마 전 꽤 나쁜 일을 당했지.
하필 인생의 새로운 전기(제대)를 맞은 순간에 아주
엄청난 일을 당해서 그래서 지금은 죽었다고 하기도
살았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구."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소교도 그렇고 소령, 미령이까지 자기 일처럼 슬픈
표정이 되어 있다. 구여운 것들.. 고맙다.
"후.. 거기엔 매우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어서 너희
들에게 자세히 말해 주긴 어렵다만 뭐.. 어쨌든, 같이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도 틀림없이 지금 너희들 마음
을 고맙게 생각할 거야."
음, 괜히 조금 심란했다만...
내가 내 육체로 복귀하는 것은 어차피 '진'이라는
그 미래 여자가 와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내 능력으
로 안돼는 거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분 전환도 할 겸, 진유준 얼굴로 민간 지역 시찰
(?)이나 나가야겠다.
난 우선 혈랑대가 단체로 거처하고 있다는 건물로
찾아갔다.
찾아간다고 표현했지만, 내 직속 호위대인 만큼 거
주지도 무지 가깝다. 내 처소가 있는 건물 뒤쪽의 단
층 건물인데, 꼭 구형 군대 막사 같이 생겼고 지난번
에 보니 내부 구조도 영판 군대 막사였다. 양쪽으로
침상과 관물대가 주욱 늘어선... 그래서 웬지 정이 가
지만 또 한 편으론 '지겨워서' 쳐다보기 싫어지기도
했다.
연락을 받고 나는 듯 마중을 나온 혈랑대주 흑랑검
마(黑狼劍魔) 정천우. 삼십대 중반 정도로 여겨지는
강인한 인상의 사내..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일
명 애꾸눈 남자인데, 검은 안대 밑으로 흉터가 엄청
굵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그어져 있는 것이 살벌한 인
상에 한층 강도를 높여 주고 있었다.
그 살벌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약한 모습이랄까?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며 날 반기는 모습
을 대하고 보니, 멀지도 않은데도 처음 왔던 시기에
한 번 와보고는 지금까지 무심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
이 들었다.
"혈랑대 무사 두 명 정도 쓸까하는데.. 뭐, 그 동안
다들 얼굴 본지도 꽤 된 것 같아서 직접 왔어."
"곡주께서 직접 왕림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희 혈랑
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검은 안대부터 시작해서 검은 망토에 검은 옷.. 그
래서 흑랑(黑狼)이라고 불리는 모양인 정천우를 따라
막사(?)로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분위기가 난리가 아
니다. 양쪽 침상에 수십.. 아니 수백 명인가..? 하여
간 엄청 많은 젊은 무사들이 주욱 기립해 있었다.
"혈랑대가 곡주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터져 나와 쩌렁 쩌렁 울리는 외침!
으.. 미리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주눅이 드는 느
낌이고.. 그리고 귀도 좀 아프다. 이 비화곡의 체계가
본래 군대 느낌이 많이 들지만 그 중에서 이 혈랑대가
가장 압권인 것 같았다.
"아.. 다들 앉아, 편히 있으라구. 그냥 와 본 거니
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다들 하던 일 계속해."
음.. 내가 이렇게 말해도 다들 자세를 풀지 않는군.
부담 되게스리.. 그렇다면 역시 군대식으로 해야겠지?
"백인장(白人長)들은 집합하고 나머지는 해산!"
내가 스윽 쳐다보니, 역시 대주가 알아서 명령을 내
리는군. 그리고 오호.. 역시 군기 센 부대답게 동작이
빠르기도 하여라. 어느 틈에 백인장들로 보이는 자들
다섯 명이 내 앞에 모여들어 포권하며 인사를 해 온
다.
에.. 근데 이건 좀 문제인 걸? 번득이는 눈빛하며
하나 같이 지나치게 살벌한 인상들이잖아?
눈에 안 띄게 민간 시찰 나가려는 건데 이런 애들
데리고 다닌 다는 건... 음, 그래도 맨 오른 쪽의 백
인장이 얼굴에 흉터도 없고 그나마 가장 정상인에 가
까운 거 같군.
"이봐, 너.. 얼굴 좀 풀어봐."
"예..?"
"그렇게 눈에 힘주고 있지 말고, 표정을 부드럽게
풀어 보라구."
내 명령에 순간적으로 당혹한 듯 했지만, 녀석은 곧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하느라 애쓰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이 하도 어설퍼서 좀 웃기긴 했지만 좀더 연습시
키면 나아 질 듯 싶었다.
"...좀 낫군. 일단은 이 한 명하고.. 그리고 계급은
상관없으니까, 좀 얌전하고 평범한 인상을 가진 자가
한 명 더 필요하거든?"
혈랑대주와 5인의 백인장들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한 백인장이 손을 들었다.
"십인장(十人長) 백상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평소
너무 착한 인상이라고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
는.."
잠시 후, 불려 온 십인장 백상을 보니 혈랑대에도
이런 자가 있구나 싶었다. 다른 혈랑들과는 달리 살이
쪄서 몸매와 얼굴이 넉넉한 식당 주방장 같은 느낌을
주는 대다, 가만있어도 약간 웃는 듯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네.. 용케도 그 몸매를 유지하고 있군, 그래."
"제가 식성이 너무 좋아 그렇습니다. 훈련량이 많은
혈랑대 소속이 아니었으면 벌써 돼지가 되어 버렸을
겁니다, 곡주님."
넉살좋게 나에게 농담까지 하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드는 군. 좋아 나머지 한 명은 이 놈이다.
"혈랑대주, 앞으로 당분간 이 두 명 좀 빌려 줘. 그
리고.. 그 동안 내가 좀 무심했던 것 같은데, 혈랑대
에 내가 해줄만한 일이 있으면 말해봐."
"혈랑대는 오직 곡주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
다. 어찌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뭐, 꼭 대가라기 보다도 말야.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항상 수고하는데 별로 해준 것도 없는
것 같고.."
군대에서 군바리에게 가장 큰 선물(?)은 당근, 휴가
나 외출.. 그 다음은 '회식'이다. 이 많은 인원 모조
리 휴가나 외출 내 보내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좀 멕
이기나 할까?
"총관에게 말해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고 해놓을
테니까. 적당한 날 잡아서 회식.. 아니 잔치나 한 번
벌이도록 해. 음.. 지금 절반 정도 인원은 내 경호 훈
련 중이라고 했지? 그 들도 불러서 함께 하는 것이 좋
겠군."
"존명! 배려에 감사 드립니다!"
든든한 창고를 가진 부자(?) 군대가 먹는 거 가지고
난리 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생각이상으로 반응이 좋
았다.
혈랑 대주가 내가 나가기 전에 '회식' 소식을 부하
들에게 알리자, 입구로 걸어 나가던 내 뒤에서 어마어
마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곡주님 만세'를 외치는 이들을 모른체하고 그냥 나
가기도 뭐해서 슬쩍 돌아보고 손 한 번 흔들어 주었
다. 거.. 무지 어색하고 쑥스럽구만. 부대에 돼지 한
마리 기증하고 환호성을 받던 우리 부대 자매 청년회
회장 기분은 어땠으려나..?
"평소에 혈랑대 짬밥 아니 식사가 좀 부족해..?"
나와서 내가 농담처럼 묻자 따라 나선 혈랑대 십인
장 백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혈랑대에게 곡주님은
부모님과도 같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는 것을 자식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
대교 자매들 교육해서 한 동안 이런 '위대한 수령
어버이' 식의 '닭살 대사'안 듣는가 했더니 또 시작인
가? 이 놈도 같이 다니려면 교육 좀 시켜야겠군.
흠.. 근데 생각해 보면 혈랑대 같은 경우 그런 행동
들이 아주 이해가 안돼는 건 아니다.
이 비화곡 아해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곡주에 대한 무
한 충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혈랑대 같은 경
우 그게 아주 심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강호 각지에서 부모 형제 일가 피붙이가 없
는 고아들만을 모아 구성된 부대였고,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나(원판)를 따라다니며 철저히 저 사람만을 위해
살아라..고 세뇌 교육을 받으며 오늘날 평균 나이 20
대의 청년이 되도록 살아 왔다니까 말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먹는 것도 숨쉬는 것도 오직 진
하운 곡주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아무리 지금은 내가 그 숭배의 대상이라고 해도, 이
들의 행동에 웬지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는 거 보면 나
는 아직 정상인가 보다.
이 두 명.. 백인장 황성과 십인장 백상. 내가 달리
해 줄 건 없고, 오늘 데리고 나가서 맛난 거나 많이
사줘야겠다.
"에..? 뭐, 뭐야..?"
당황해 하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귀여운
백의 소년.. 아니 남장을 한 미령이는 살짝 혀를 내밀
고 짓궂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너, 너도 따라오려구..?"
"미령이는 곡주님의 호위 무사인데, 어디에 가신들
곁에서 지켜 드려야지요."
기집애, 그런 즐겁게 놀러 나가는 표정으로 말하는
데 설득성이 있을 것 같으냐?
으... 혈랑대 두 명과 내가 입을 평범한 복장 구해
오랬더니 그 사이에 지도 남장을 하고 나타나다니..
"곡 내 시찰이니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
니다만.. 미령이가 특히 안심을 못하고 성화이니 데려
가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러는 소교 너도 눈치 챘니? 내가 밖에서 여자 꼬
시려는 거 알고 미령이를 감시 역으로 붙이는 거 아니
냐구. 으...
예정에 없던 상황이라 별의별 생각이 다 났지만, 바
깥 나들이에 대한 기대에 차 눈빛을 반짝이며 날 바라
보는 미령이를 차마 떨구고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알겠다, 미령이 너도 같이 가자."
"감사합니다. 곡주님!"
폴짝거리고 뛸 듯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애
는 애다. 에구.. 결국 정말 민간 시찰이나 하고 와야
겠군. 제기~!
혈랑 두 명과 미령이를 대동하고 처소를 나선 지 어
언(?) 두 시간이 넘고 있다.
우쒸- 처음 이 곳에 올 때는 가마 타고 와서 잘 몰
랐는데 마을은 디게 멀었다. 본부 건물 나와서 바깥으
로 나가는 초소를 통과하기까지 내 걸음으로 한 시간
이나 걸렸고, 이 후 산길만 그 정도 시간을 더 걷고
있는 참이었다.
본래의 내 몸이라면 이 정도 산길 걷는 거야 애들
장난이었겠지만, 이 '극악..'놈의 몸은 체력이 개판이
라 벌써 힘들어 죽겠다.
"후.. 모두 십 분간 휴식-!"
"예..?"
"..좀 쉬었다 가자구."
"존명!"
내가 길가의 적당한 바위를 찾아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미령이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건네준다.
제기랄! 이 놈의 땀.. 숨은 또 왜 이리 차는 거야?
이게 사내놈의 몸 맞아..? 빌어먹을....
"곡주님, 이걸 드십시오."
백인장 황성이 허리에 차고있던 호리병 수통을 내밀
었고, 십인장 백상은 어느 사이 잎사귀 많은 나무 가
지를 꺽어다가 양산처럼 내 머리 위에 드리운다. 미령
이도 커다란 잎사귀를 떼어와 부채처럼 부쳐 주기 시
작했다. 이 것들이 장난치나...
"됐어. 백상도 미령이도 그 것들 치워. 난 괜찮아."
아.. 존심 상해.
혈랑들은 나보다 두 어살 어린 젊은 청년들이니 그
렇다 쳐도, 저 어린 소녀 미령이 만도 못한 체력이라
니... 새삼 그리워라, 본래 몸이여...
"다들 쉬면서 경치 감상이나 해. 오랜만에 나왔을
거 아냐."
"존명!"
민간 지역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저 놈의 말투들부
터 고치라고 했야겠다. 음.. 앞으로 30분 정도면 도착
한다니까 나부터 슬슬 점검해 볼까?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쓰불, 이등병 때 첫 행군하
며 맛이 간 그 표정이군.
어쨌거나 인피면구 상태는 괜찮은 거 같고 일단 선
택한 백의(白衣) 도련님 복장도 크게 이상한 점은 없
어 보인다.
역시 수수한 백의 차림의 나머지 세 사람... 십인장
백상이 생긴 것부터 가장 눈에 안 띄는 스타일, 백인
장 황성은 아직도 표정이 너무 살벌하게 굳어 있으니
풀라고 해야겠고.. 가장 문제는 역시 미령이였다.
긴 머리채는 위로 말아 올린 후 두건을 써서 가렸으
며, 얼굴의 화장기는 말끔히 지워져 있고 가슴은 바짝
동여 메고 허리띠는 일부로 느슨하게 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긴 했다만.. 문제는 얼굴이 너무
예쁘다는 점이었다.
나는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길가의 들꽃을 들여
다보고 있는 미령이를 가리키며 혈랑들에게 물었다.
"이봐, 두 사람이 보기엔 재 남장 한 거 어때..?"
"남장 자체는 특별히 나무랄 때가 없는데, 역시 너
무 예쁜 소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흐흐.. 아마도 소년 취향의 사내가 보면 환장을 할
겁니다."
"흠.. 역시.."
"흥-!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그 살찐 몸을 감추려면
몇 달은 족히 고생해야 할 걸?"
미령이의 뾰족한 목소리였다. 음.. 귀도 밝군. 십인
장 백상의 말투에 화가 난 모양이지?
"미령 아가씨의 지나치게 예쁜 얼굴이 남들 시선을
끄는 것이 문제이지. 제 살이야 감추지 않아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야 본래 이 넉넉한 몸 때문에
곡주님 동행으로 뽑힌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미령이는 태연히 지껄이며 웃는 십인장 백상을 매섭
게 노려보고 있다.
"흥-! 혈랑들은 모두 백인장 황성님처럼 과묵한 무
사들인 줄 알았더니, 당신처럼 철면피도 있었군요?"
미령이의 신경질적인 말에도 백상은 여유있게 자신
의 풍성한 배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령
이는 그런 상대의 반응이 더욱 분한 모양이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진 못하고 숨만 몰아 쉬고 있었다.
후후.. 한 말빨하는 미령이가 드디어 임자 만났군
그래.
"에.. 싸우지 들 마. 그리고 마을에 도착하면 각자
호칭부터 조심해. 공연히 나에게 곡주 어쩌고 하면 산
통 깨지니까 말야."
"존명!"
"그 말부터 쓰지 마."
"예! 도련님!"
역시, 십인장 백상이 가장 적응이 빠르군. 어디가나
별종은 하나 있기 마련이라더니, 그 살벌한 군기의 혈
랑대에도 이런 유들유들한 녀석이 있었다.
"그럼, 미령이 변장 조금 손보고 나서 다시 출발하
도록 하자."
마을 입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40분 정도
가 더 지난 후였다. 그 사이 또 땀 깨나 흘리며 불쾌
해 졌던 기분이 마을에 들어서자 한결 나아진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경촌(歌磬村)에 장이 서는
날이로군요."
백인장 황성.. 아니, 이제부터는 나들이 나온 도련
님의 하인인 황성의 말처럼 마을은 매우 북적대고 요
란한 분위기였다.
하핫! 장날이라.. 이제야 사람 냄새가 나는 곳에 온
기분이랄까? 나는 힘든 것도 잊고 천천히 걸으며 오가
는 사람들과 마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당근, 시대와 상황이 틀린 대도 어쩐지 우리 한국의
시골 장터와 비슷한 정겨운 느낌이 드는 것이.. '사람
사는데는 다 똑같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
쉬었던 장소에서, 내가 여벌로 준비했던 특수한 약
물을 피부에 발라 약간 햇빛에 그을리고 거칠어진 피
부로 보이게 된 미령이도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곡.. 아니 도련님. 저 것 좀 보세요!"
미령이가 반색을 하며 기뻐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끌려간(?) 곳은 웬 원숭
이 한 마리와 깜찍하게 생긴 10대 초반의 소녀가 함께
쇼를 하는 장소였다.
빙 둘러싼 구경꾼들 앞에서 소녀는 원숭이와 함께
어우러져 재주를 넘고 난리였다. 동작만 봐서는 누가
원숭이인지 사람 소녀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이 지나니까, 박수를 치며 구경하던 사람들로부
터 동전이 마구 날았다. 음.. 나도 몇 개 던져 줄
까..? 내가 던져 준 동전은 바닥을 기어다니며 떨어진
동전을 줍던 중년의 턱수염 남자 앞으로 떨어졌다.
즉시 표정이 변하여 날 올려다보는 턱수염 남자...
어랏-? 내가 던져 준 게 동전이 아니었잖아..?
돈주머니에서 잡히는 데로 두어 게 던졌는데, 그게
은전이었네? 전에 들었던 화폐 단위를 생각해 보면,
나는 수 십 만원을 던져 준 셈인가..?
우.. 엄청난 시선 집중! 이런, 이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며시 구경꾼들 틈에서 빠져
나왔다. 에구구.. 철없는(?) 무협지 주인공이 하는 공
연히 눈에 띄는 짓을 내가 저지르다니.
어쩐지 이번엔 저 앞에 '내기 무술 시합'하는 패거
리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과연.. 있군.
..근데, 여기 정말 비화곡 안이 맞아?
저런 썰렁한 수준의 무술(나도 그 동안 눈이 높아
졌다.)솜씨로 내기 시합을 벌이다니.. 가장 쎄 보이는
저 대머리 근육질 사내도 미령이가 널널하게 깰 수 있
겠는걸? 미령이도 그 들이 시시해 보였는지, 코웃음을
치더니만 더 구경하자고도 않는다.
"일단, 점심이나 먹고 더 돌아 다녀 볼까..?"
내 말에 우리 일행은 모두 근처의 식당을 찾아 들었
다. 허름하지만 제법 넓은 실내였고, 사람들이 꽤 많
은 곳이었다.
음.. 무협지에서 보면 주인공이 마을에 뜨면 거의
내기 무술 하는 곳이나 아까 같은 원숭이 곡예 하는
곳 아니면 보편적으로 '식당'같은 곳에서 꼭 무슨 말
썽이 일어나다. 난 무협지 주인공도 아닌데 설마 그
공식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
"헤헤.. 손님들 무얼 주문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예상대로(?) 헤헤거리는 웃음소리와 약간 천
박한 표정의 젊은 점소이가 등장하는 군.
"여기서 제일 자신 있는 게 뭐지?"
"헤헤헤.. 이 비화곡에 들어 오신지 얼마 안 된 분
이로군요. 강호에서 손꼽히던 마두이자 천하 제일의
요리사인 식인왕(食人王) 오두명이 운영하는 식당을
몰라보시다니요."
식당 주인이 식인왕..? 이 것이 장난치나.
"여기서.. 사람고기로 만든 만두.. 그런 것도 판다
는 거야?"
"헤헷-! 평범한 음식에 질린 분들이 주문하시는 경
우가 있읍지요."
점소이는 짐짓 목소리를 깔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비화곡 안의 치안은 천하의 어느 곳
보다 철저한 지라.. 싱싱한 인육을 구하기가 쉽지 않
지요."
"..되긴 된다는 거야?"
"물론 입죠. 재료가 귀해 가격이 다소 높은 것이 흠
이지만 맛은 끝내 준답니다요."
기어이 마인들의 천국 비화곡 영토라는 티를 내는
구만. 제기, 하필.. 밥맛 떨어져서 그냥 나가고 싶었
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혈랑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가 싫어 그냥 주문하기로 했다.
"....난 별로 배 안고프니까. 그냥 국수나 하나 말
아 줘. 너희들도 각자 뭐든 주문하고."
미령이도 인육 얘기가 거슬렸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나와 같은 국수를 시키면서 '고기'는 빼라는 주문까지
했지만, 혈랑들은 태연히 국수에다가 고기 만두를 추
가시킨다. 비위들도 좋지...
근데.. 식인왕이라는 명호는 데이터에 없는 모양인
지 몽몽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몽몽에게 입력되어 있는 강호인명록(江湖人名錄)이
라는 열 권 짜리 책에 나와있지 않은 이름이라면, 점
소이가 거짓말로 꾸민 인물이거나, 최근 10년 정도 사
이에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강호인명록.. 빨리 수정 재판하도록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 혹시 식인왕이라는 놈 알아?"
내가 묻자 백상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
다.
"본래 명호는 미식마(美食魔)였던 마도인이라고 들
었습니다. 그가 강호에 처음 등장했던 것은 12년 전으
로 알려져 있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으면 먼저 자신
이 만든 요리를 대접한 후에야 싸워서 죽이곤 했다는
괴인이라지요."
아주 웃기는 놈이었나 보다. 자기가 만든 음식이 맛
없다고 안 먹어서 싸운다면 또 몰라도, 싸울 상대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미식마.. 음.. 그 데이터는 있었는지. 내 시야 아래
쪽 허공에 띠리리~ 문자가 새겨진다.
< 미식마(美食魔) 오두명, 추정 연령 현 43세.
독문절기, 어육인참살도법(魚肉人斬殺刀法).
추정 무공 수위, 혈랑검대 백인장 수준.
특기 사항, 요리 도구를 병기(兵器)로 사용.
독물(毒物) 사용 능력도 높다고 추정. >
"나도 누구 말하는 건지 알겠군. 독문절기는 어육인
참살도법.. 도법이 꽤 길고 웃기는군."
나는 그제야 기억이 난 척을 하며 웃었다. 요리사
겸 마두 다운 무공이라고는 해도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런지 유치한 느낌이 앞서는 것 같다.
내 말에 다른 이들도 피식거리고 웃었지만 황성은
곧 진지한 표정이 돼서 말했다.
"무공명은 다소 괴상해도 상당히 무서운 도법이라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살인 후 인육을 탐하기 시작해,
식인왕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그가 피해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추적에 쫓겨 비화곡에 피신해 들어 온 것이
2년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가경촌에 자리잡고 있다
는 소문도 얼핏 들었습니다만.. 설마 이런 식당을 경
영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제야 미령이도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이 곳에서는 누구도 병기를 소지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이 자는 본래의 자기 병기를
항상 지닐 수 있을 것이고 위아래를 몰라보는 괴팍한
성격이라고 하니, 어쩐지 이 식당 안에 있는 것이 불
안하네요."
백상은 음식 냄새가 사방에서 나는 것을 흐뭇한 표
정으로 즐기느라 별 생각 없는 것 같았고, 황성도 주
의는 해야겠지만 까짓 거..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불안하고 찝찝한 기분인 건 미령이와 나인데, 나도
명색이 천하의 '극악..' 신분인 이상 티내고 싶지 않
아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점소이가 다른 하인 한 명과 함께 싱글거리
고 다가와 음식 접시들을 내려놓았다.
음.. 국수는 각자 하나씩이지만, 고기만두는 황성
한 접시, 백상 세 접시 분량으로 주문 된 것이었다.
백상은 맞은편의 미령이가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
나 후루룩! 게눈 감추듯 국수 그릇을 비웠다. 내가 딱
두 젓가락 째 먹었을 때였다.
국수는 생각보다 맛있었지만 미령이는 아예 젓가락
질을 멈추고 백상이 먹는 걸 구경(?) 하기 시작했다.
거의 미령이 주먹만한 크기의 만두를 한 입에 날름
삼키고 두어 번 우물우물.. 또 날름! 우물우물, 날름!
우... 이 인간 만두 먹는 기계 아냐?
"후후-ㅅ 그렇게 먹다간 며칠이 못 가서 돼지들이
친구라고 따라 나서겠네요."
미령이가 기어이 풀썩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백상
은 그녀에게 힐끗 한 번 시선을 주었을 뿐 대꾸도 없
이 계속 먹는대만 열중한다.
결국 국수 한 그릇인 나와 거기에 고기 만두 한 접
시인 황성, 세 접시 더 먹는 백상의 식사시간이 거의
비슷하게 소요되었다. 미령인 아직 국수 한 그릇 다
못 먹었다.
이런.. 제일 평범한 인상이긴 한데 이 딴 걸로 주목
받는 녀석이었군. 게다가 백상은 아직도 아쉬운 얼굴
로 입맛을 다시고있다.
"..더 시켜주리?"
"하하! 아닙니다. 더 이상 먹으면 몸이 둔해질 것
같습니다."
질렸다는 표정이 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이 편을 힐끗거리
고 있었고, 게 중에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대고 웃는
자들도 있었다.
"헤헤.. 정말 멋진 식성을 가진 분이군요. 도대체
어디서 온 분들이죠?"
어느 사이 점소이가 다가와 친한 척을 했다. 뭐, 별
로 대화하고 싶은 대상은 아니지만 기왕에 준비해 놓
은 가짜 신분도 있고 해서 대답해 주었다.
"아, 난 이틀 전에 이 곳에 새로 들어온 진유준이라
고 하네. 본래는 지방 관리를 아버지로 두었는데, 운
이 나빠 죄를 짓고 이 곳으로 도망쳐 들어왔지. 이쪽
은 내 의제(義弟)들.. 날 항상 도와주는 강호의 호걸
들이지."
"의형제를 따라 이 비화곡까지 들어오다니 정말 의
리가 있는 분들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점소이는 황성과 백상, 미령이를 향해 과장된 몸짓
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녀석의 교활해
보이는 시선이 미령이에게서 좀 오래 머무는 것 같아
어째 불안하다.
"음.. 이만 일어서야겠군. 계산하고 가지 아우들!"
조금 서둘러 식당에서 나온 나는 다시 관광을 시작
했다. 조금 전 식당에서는 좀 깼지만, 동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처음의 인상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나는 조
금씩 다시 기분이 좋아져 갔다.
황성과 백상은 그리 티를 내지 않았고, 일단은 내
경호에 집중해 있었지만 이런 한가로운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기색이었다.
미령이 역시 항상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으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예쁜 장신구 같은 걸 보면 어김
없이 관심을 보이며 잠깐.. 날 잊는다.
하는 짓이 밉지 않긴 하지만, 역시 보디가드로써는
실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강호에 나갈 때까지
소위 '특훈'으로 어느 정도 달라지려는지 몰라도 말이
다.
그렇게 꽤 한참을 돌아다니며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호떡(중국 호떡.. 이거 생각보다 무지 맛있다.)으로
군것질도 하고, 미령이하고 집(?)에서 기다릴 자매들
몫의 장신구 쇼핑도 하고, 길고 가는 통에 화살을 많
이 던져 넣으면 경품을 타는 놀이도 했다.
황성과 백상의 경호가 어느 사이 '나'에서 '나와 미
령이'로 바뀌었는지 미령이가 순간적으로 혼자 튀어
나가기라도 하면 한 명은 미령이 가까이 이동한다.
두 혈랑은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곡주는
마을 시찰을 구실로 저 조그맣고 앙증맞은 소녀와 데
이트를 나온 것이라고...
"후후.. 예쁘죠?"
신이 나서 결국 광분한(?) 미령이는 노점상에서 화
사한 꽃 한 송이를 뽑아다가 자기 귓가에 꽂았다.
"넌 남자야, 임마!"
내 지적에 그제야 깨닫고 귀에서는 뽑았지만, 고른
꽃이 너무 마음에 들어 포기하기는 아까웠는지 기어이
값을 치르고 꽃을 사고야 만다. 노점상 사내가 들으라
고 짐짓 이렇게 말하며...
"우리 누나에게 사다 주려고 그래요."
그러나 나는 보았다. 노점상 사내가 웬지 음흉한 미
소를 지으며 남장한 미령이와 나를 번갈아 힐끔거리는
것을... 으으.. 미령이 이 기집애, 로리타 변태도 모
자라서 이젠 날 소년까지 탐하는 놈이라는 오해를 받
게 만들다니. 계속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정말....
귀엽..군.
쳇-! 이래서 '막내'를 야단 치지 못하는 건가..?
이거 구경하자, 저거 사달라 귀찮게 하는 미령이...
어렸을 때 여동생 갖고 싶다고 어머니를 조르던 기억
이 나게 한다. 그 땐 정말 내게 예쁜 여동생이 생기면
뭐든 다 해주고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까불대고 돌아다니는 여동생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후후.. 오빠가 된 기분을 느껴
보는 것도 나쁜 지 않군 그래.
결국 여자 꼬셔 건수 올리기는 물 건너갔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구경하며 어슬렁거리고 다니
는 것도 나름대로.. 음, 언젠가는 대교하고도 이런 시
간을 가졌으면...
"대인, 대인!"
응..? 뭐야, 처음 보는 꾀죄죄한 차림의 이 꼬마가
날 부른 거야? 어.. 뭔가 적혀있는 듯한 종이를 내게
내밀고 서있네?
의심을 가지고 주의를 주는 혈랑들을 무시하고 난
꼬마에게 쪽지를 받아 펼쳐보았다.
< 당신들은 이미 극독에 중독 되었다. 그 꼬마를 따
라오지 않으면 해독할 수 없다. >
내참! 갑자기 이러니까 놀랍기보다 어이가 없군.
내가 쪽지를 보여주니 혈랑들과 미령이의 표정이 급
격히 굳어진다. 백상이 먼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조금 전부터 약간의 복통이 있어 이상
하긴 했지만, 도대체 어느 틈에...?"
이어서 황성과 미령이도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들의
아랫배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는 나도 조
금 아프다. 응..? 나도 배가 아파..?
"절 따라 오세요. 대인들.."
꼬마는 앞서 걸음을 옮겼지만 혈랑들은 따라 나서려
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곡주님, 곡주께선 만독불침이시니 굳이 흉수의 뜻
대로 움직이실 필요가 없고, 만에 하나의 사태가 우려
되니 이대로 가경촌을 벗어 날 때까지 저희가 호위하
겠습니다."
"안가면 독에 중독 된 너희들은 어쩌고..?"
"저희들이 어리석어 곡주님의 신변에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살길을 도모하겠습니까."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인 혈랑대 백인장 황성~옛
터.. 윽, 지금 엉뚱한 연상할 때가 아니지..?
"험..!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그냥 저 꼬마 따라
가자구. 이건 명령이니까 군말 없이 따라와."
"고, 곡주님..?"
나는 먼저 출발한 꼬마를 놓칠까봐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고, 결국 우리 일행 모두는 그 꾀죄죄한 차림의
어린 꼬마 뒤를 따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