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4:19-33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여호수아의 권면(19-28)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먼저 19절 상반절 입니다.
(19a)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19절 상반절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무시하거나 이들을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한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다시 말하면 인간은 본질상 자신의 힘이나, 결단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에 뒤에 31절에서도 다시 설명하겠으나 오늘 말씀의 내용이 비추어 보자면, 이처럼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앎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경험이 동반되어야 하며, 그렇게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뒤이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19절 하반절입니다.
(19b)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먼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존재이심을 언급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본래 신적인 존재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초월적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온 세상의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거룩은 초월적 완벽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데, 우리는 완전히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로 그 한계를 아담의 원죄 이후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부합한 방식과 태도가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부족함과 그 한계를 더욱 분명히 확인시켜주었으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분이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서 6살 어린아이와 같이 질투하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질투는 앞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속성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질투는 이 세상을 향한 거룩한 질투이며, 하나님의 그 거룩한 질투, 즉 인간들을 향한 거룩한 은혜의 일들을 확인하고도,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에 대해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0절과 21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답입니다.
(20-21)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 앞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고백은 참으로 의미있는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든, 재앙을 주시든,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섬김의 기준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이 인간의 편에서 완벽히 이루어질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인가, 재앙을 받을 것인가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즉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몸부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은혜를 따라 우리를 거룩하게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2-24)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이 본문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더불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에 대하여 화답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23절의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정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24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은 세 번째 다짐이자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반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묻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반복되는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붙들어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25-28절입니다.
(25-28)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이러한 이스라엘의 고백을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언약을 맺고 이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 여호수아가 그러한 신앙을 백성들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개인 신앙적인 영역(율례)과 사회 공식적인 통치의 영역(법도)으로 나누었으나 이 둘이 칼로 자르듯이 명확하게 서로 구분되는 용어는 아닙니다.
세겜에서 여호수아가 세운 큰 돌은 과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운 돌기둥, 미스바에서 라반과 언약을 세우고 이를 보증하기 위해 야곱이 쌓은 돌무더기,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뒤에 길갈에 세운 12기둥, 에발산에서 언약 갱신을 위해 세운 돌등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맺은 언약의 보증으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을 세운 여호수아는 이 돌을 증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그 보증의 대상이 유한한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같이 변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왕들은 자신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하면, 이를 기념하거나 후대에 그 일들을 알리기 위해, 돌 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같이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거나 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우리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이 방법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언약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큰 은혜와 큰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이 본문은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섬겨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로 우리가 나아간다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돌들이 기억해주는 은혜와 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이후(29-33)
(29-30)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여호수아서는 그 시작을 여호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였고(1:1), 가나안 정복(2-12장)과 정복한 땅에 대한 기업 분배(13-21장)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유언적 교훈(22,23장)과 언약 재확인(24:1-28)에 이어 이제는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정복 시대의 이스라엘을 정치적, 경제적, 신앙적으로 이끌었던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던 자들은 일정시간 그 신앙을 유지해 가지만, 그 후 이스라엘은 새로운 세대와 함께 사사 시대에 돌입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백성들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1절에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경험한 전쟁 일 세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세대는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기는 은혜를 누립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뿐더러, 자신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의 시대 이후에 사사시대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행동을 진리처럼 받들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해 신앙을 전수하고, 이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는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교회와 가정이 함께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통해서, 바로 세워야 하는 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교육을 교회에서 시켜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세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교회와 가정이 함께 팀을 이루어 만들어 가야 하는 일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과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각 가정의 부모님들은 어떻게 자녀에서 우리 하나님의 위해하신 능력을 가르치고, 경험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32-33절입니다.
(32-33)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32절이 말하는 요셉의 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에 ‘내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는 요셉의 유언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고 기업 분배를 하는 동안에도 요셉의 유골은 계속 보관되어 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서 마지막에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 땅에 안장하는 것은 실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신의 약속대로,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신 다는 것이며, 이는 오늘 요셉의 경우와 같이 단순히 죽어 유골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안식처에서 거하게 되는 것을 예표의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군사력의 지도자였다면, 마지막 33절에 나오는 엘르아살은 대제사장 아론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그의 형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게 되어, 가나안 정복 전쟁부터 그 이후 기업의 분재에 이르기까지 대제사장으로써 모세나 여호수아와 함께 일해 왔던 인물입니다.
이제 엘르아살도 여호수아와 함께 장사지내게 되면서 이제 이스라엘의 한 세대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는 사람이건, 모든 사람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러한 점에서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열심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임무들을 비교적 잘 감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을 다시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나 자신이 영원히 살 사람처럼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는 마치 잠시 있다갈 지하철을 탄 사람과 같습니다. 지하철에 자신이 좋아하는 자리가 생겨 앉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리가 영원히 나의 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하면 당연히 그 자리를 버리고 일어나 지하철에서 나와 지상의 공기를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하철 자리가 좋다고, 거기서 평생 먹고, 자고, 마시고 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님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삶에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집착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욕심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우리 하나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의 소망과 함께 하나님께서 허락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겠노라 다짐해 봅시다. 우리의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를 뒤따라오는 이 땅의 다음 세대들도 주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크신 능력을 깊이 경험하는 복된 세대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매일 아침 주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곳으로 순종하며 살겠노라 다짐하는 모든 교우님들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모습이 유한함을 깨닫아 알게 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나의 한계를 넘어 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따라 바라고, 기대하며 주께 나아가오니,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어,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다음세대의 중요성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마음 깊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를 바라보고 따르는 다음 세대 역시, 주님 안에서 바르고, 아름답게 자라가는 우리 자녀들 되세 해 주옵소서.
특별히 자녀의 건강과 신앙, 학업을 위해 기도하시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들의 기도의 제목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주시며,
이들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을 가지고, 보다, 크고, 넓게,
그리고 보다 성숙하고 아름답게, 뻗어가는 우리의 자녀들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2.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우리는 무엇으로 그 말할 수 없는 간격이 매어지게 되었나요?
3. 다음세대에게 우리의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4. 언젠가 찾아올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에게 어떠한 말을 하기 원하나요?
(작성: 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