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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4 편
결혼과 가족 생활
. 세라핌의 우두머리
. 1934년
84:0.1 물질적 필요는 결혼의 기초가 되었고, 성욕은 결혼을 미화시켰으며, 종교는 결혼을 승인하고 높이며, 국가는 결혼을 요구하고 규제하는 한편, 후기 진화하는 사랑은 문명의 가장 유용하고 숭고한 제도의 조상이자 창시자로서 결혼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시작했다. 가정을 만드는 일은 모든 교육적 노력의 중심이자, 본질이 되어야 한다.
짝짓기는 순전히 다양한 수준의 자기만족과 관련된 자기 존속 행위이다; 결혼, 곧 가정을 갖는 것은 대체로 자아 유지의 문제이며, 그것은 사회의 진화를 암시한다. 사회 자체가 가족 단위의 집합 구조이다. 행성적 요소들로서-가족들만이 사회의 진화에서 지속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개인들은 매우 일시적이다. 가족은 문화와 지식의 강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흐르는 통로이다.
가정은 기본적으로 사회학적 제도이다. 결혼은 자아 유지의 협력과 자손 번식의 동반자 관계에서 성장했으며, 자아 만족의 요소는 대체로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가정은 인간 실존에 근본적인 모든 세 가지 기능들을 포함하며, 한편 생명 번식은 가정을 인간의 기본적인 제도로 만들고, 성은 모든 다른 사회 활동들로부터 가정을 정착시킨다.
1. 원시적 부부 결합
84:1.1 결혼은 성관계에서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성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원시인에게 결혼은 필요하지 않았고, 아내, 자녀들, 가정의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자유롭게 성욕을 충족시켰다.
여성은 자녀에 대한 신체적, 정서적 애착 때문에 남성과의 협력에 의존했고, 이는 여자를 결혼의 보호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결혼으로 이끄는 직접적인 생물학적 충동이 없었다―더구나 결혼으로 붙잡아 두지도 않았다. 남자가 결혼을 매력적으로 이끈 것은 사랑이 아니며, 처음에 야만인 남성을 여성과 그녀의 자녀가 함께하는 원시적 오두막으로 이끈 것은 식욕이었다.
결혼은 성의 의무를 의식적으로 이해한 결과도 아니었다. 원시인은 성의 즐거움과 그 이후의 아이 출산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는 처녀가 임신할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 믿어졌다. 야만인들은 일찍부터 아기가 영의 나라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임신은 여성이 진화하는 귀신에 의해 들어간 결과라고 믿었다. 음식과 악한 눈도 또한 처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에게 임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고, 한편 후일의 관념은 생명의 시작을 숨결과 햇빛에 연결시켰다.
초기의 많은 민족은 귀신을 바다와 연관지었다; 따라서 처녀들은 목욕에 있어 매우 제한적이었다; 기형아 또는 조산아는 부주의한 목욕이나 사악한 영 활동의 결과로 여성의 몸에 들어온 어린 동물로 간주되었다. 물론 야만인들은 이렇게 태어난 자식을 목졸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깨닫는 첫 단계로 성은 임신하게 하는 유령이 여자에게 들어가 길을 열어준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 후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손을 만드는 살아 있는 유전 요소의 동등한 기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도 많은 부모들은 여전히 자녀들을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해 어느 정도 무지한 상태에 있게 하려 한다.
84:1.6 아이를 출산하는 활동이 어머니-아이 관계를 수반한다는 사실에 의해 약간의 단순한 범주로서의 가족은 보장이 되었다. 어머니 사랑은 본능적이다; 결혼처럼 풍습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모든 포유동물의 모성애는 지역 우주의 보조 지성 영들의 본질적인 자질이며, 그 강함과 헌신은 항상 그 종(種)의 무력한 유아기의 생명 길이와 비례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자연스럽고, 강하고, 본능적이며, 따라서 원시 여인들로 하여금 많은 이상한 조건에 굴복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도록 하였다. 이 강력한 모성애는 여성이 남성과의 모든 투쟁에서 항상 엄청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장애를 주는 감정이다. 그마저도, 인간의 모성 본능은 압도적이지 않다; 그것은 야망, 이기심, 종교적 신념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어머니-아이의 관계는 결혼도 가정도 아니지만, 가정의 핵심으로부터 이 두 가지가 솟아 나왔다. 짝짓기 진화의 큰 발전은 이러한 일시적 동반자 관계가 아이를 양육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지속되었을 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가정일 때였다.
이 초기 부부들의 적대 감정과 상관없이, 또 그 결합의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협동 관계로 인해 생존 가능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협력한다면, 가족과 자녀와는 별도로 대부분의 면에서 두 남자나 두 여자 보다 훨씬 우월하다. 남녀 간의 이 협력은 생존을 증가시키며, 바로 인간 사회의 시작이었다. 남녀 간에 따른 노동 분담은 또한 편안함과 증가된 행복을 가져왔다.
2. 옛날의 모계 가족
84:2.1 여자가 정기적으로 피 흘리고 출산할 때 피를 더 흘리는 것은 일찍부터 피가 아이를 창조한다는 (아니 혼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했고, 인간관계에서 혈연의 개념을 낳았다. 옛 시절에 모든 후손은 여자의 핏줄로 계산하였고, 이것이 상속에서 확실하게 인정되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어머니와 아이의 본능적인 생물학적 혈연관계에서 생겨난 원시의 가족은 불가피하게 모계 가족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족이 이런 체제를 오랫동안 지켰다. 모계 가족은 무리에서 집단으로 결혼하는 단계로부터, 일부다처와 일부일처의 부계 가족의 생활, 후일의 개선된 가정생활로 넘어가는 유일하게 가능하였던 과도기적 형태였다. 모계 가족은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이었던 반면, 부계 가족은 사회ㆍ경제ㆍ정치적인 것이었다. 북아메리카 홍인들 사이에서 모계 가족이 지속된 것은, 다른 면에서 진보적인 이로쿼이 인디언들이 실제 국가가 되지 못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다.
모계 가족의 풍습 밑에서 아내의 어머니는 집에서 거의 최고의 권한을 누렸다; 아내의 형제와 조카들조차 가족을 감독하는 데 남편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아버지들은 종종 그들의 자식들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다.
아주 초기의 종족들은 아버지에게 공을 거의 돌리지 않았고, 아이가 전적으로 어머니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그들은 접촉하는 결과로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는다고, 또는 어머니가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았으면 했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아이들이 “닮았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모계 가족에서 부계 가족으로 넘어가는 때가 다가왔을 때, 아이를 낳은 공을 아버지가 온전히 가졌으며, 임신한 여자에 대한 많은 금기는 나중에 그 남편을 포함하도록 연장되었다. 아이를 기대하는 아버지는 해산할 때가 가까워오자 일을 그만두었고, 아이가 태어날 때 침대로 가서 아내와 함께 3일에서 8일까지 남아서 쉬었다. 아내는 그다음 날 일어나서 고된 일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남편은 축하를 받으려고, 침대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모두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확립하려고 고안된 초기 풍습의 일부였다.
처음에는 남자가 아내의 종족에게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으나, 후일에는 남자가 신부 값을 치르거나 그에 해당하는 노동을 제공한 뒤에, 제 아내와 아이들을 자기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모계 가족에서 부계 가족으로의 전환은 동족 결혼이 승인되는 반면에 일부 유형의 사촌 결혼은 무의미하게 금지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84:2.6 사냥꾼의 풍습이 지나가고, 남자가 짐승을 길러 주된 식량 공급을 좌우하게 되었을 때, 모계 가족은 재빨리 해체되었다. 모계 가족은 다만 새로 형성되는 부계 가족과의 경쟁에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어머니의 남자 친척들에게 투입된 권력은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집중된 권력과 경쟁할 수 없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지속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늘어나는 가정의 힘을 키우는 복합된 과제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새로 등장하는 아내 훔치기와 나중에 아내 사들이기는 모계 가족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모계가족에서 부계가족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변화는 인류가 이제까지 실행한 가장 급진적이고, 완전한 극적인 변화 중 하나였다. 이 변화는 즉시 사회적 표현의 증가와 가족을 만드는 모험의 증가로 이어졌다.
3. 아버지 지배 하에 있는 가족
84:3.1 모성 본능이 여자를 결혼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여자의 결혼생활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도록 한 것은, 풍습의 영향도 있지만, 남자의 우월한 체력이었다. 목축 생활은 새로운 체계의 풍습, 가부장적 유형의 가족생활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짐승을 기르고 초기에 농사짓는 풍습 아래에서, 가족 단위의 기초는 아버지의 권한, 도전받지 않는 독단적인 권한이었다. 모든 사회는, 국가이든 가족이든, 가부장적 질서의 독재적 권위의 단계를 거쳤다.
구약 시대에 여성을 거의 대우하지 않은 것은 목자들의 풍습을 진정으로 반영한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하는 말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히브리 족장들은 모두 목자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에 남자가 여자를 낮추어 보는 의견을 가진 것에 대하여 남자는 바로 그 여자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여자는 비상시에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시 시대에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여자는 눈부신 영웅도 위기의 영웅도 아니었다. 생존 투쟁에서 임신은 뚜렷한 장애였다; 모성애는 부족 방어에 있어서 여자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원시의 여자들은 또한 남자가 싸우기 좋아하고 사내다운 것을 찬미하고 갈채를 보냄으로 뜻하지 않게 남자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길렀다. 무사를 이렇게 추켜세운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높였고, 한편 여자의 자존심을 그만큼 억누르고 여자를 더욱 의존적으로 만들었다; 군복은 여전히 여성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한다.
진보한 인종들 중에서, 여자는 남자처럼 크거나 힘세지 않다. 그러므로 여성은 약자이기 때문에 더욱 재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일찍부터 자신의 성매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조금 덜 심오하긴 하지만 남자보다 더 민첩하고 보수적이 되었다. 전쟁터나 사냥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우위에 있었다; 가정에서는 여성이 가장 원시적인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
84:3.6 목자는 먹을거리를 자기의 짐승 떼에서 찾았지만, 이 목자 시대를 통하여 내내, 여자는 아직도 먹을 채소를 마련해야 했다. 원시의 남자는 흙을 피했다. 흙은 너무나 평화롭고 모험하는 재미가 없었다. 또한 여자가 채소를 더 잘 가꿀 수 있다는 오래된 미신이 있었는데, 여자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뒤에 뒤처진 많은 부족들 사이에서, 남자는 고기를, 여자는 채소를 요리하며, 오스트랄리아의 원시 부족들이 행진할 때 여자들은 결코 사냥거리를 잡지 않고, 한편 남자는 뿌리를 캐려고 몸을 굽히지 않는다.
여자는 언제나 일해야 했다. 적어도 바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자는 진정한 생산자였다. 남자는 보통 그보다 더 쉬운 길을 택했고, 이 불평등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존재하였다. 여자는 언제나 짐꾼이었고, 가족 재산을 나르고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이렇게 남자들은 자유롭게 싸움이나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여자의 첫 번째 해방은 남자가 땅을 경작하는 데 동의했을 때, 그때까지 여자의 일로 여겨 왔던 것을 하겠다고 찬성했을 때, 시작되었다. 남자 포로들을 이제 더이상 죽이지 않고 농사에 종속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전진하는 큰 발걸음이었다. 이것이 여자의 해방을 가져왔고, 그래서 여자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훈련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헌신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우유의 공급은 더 일찍 젖을 떼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때때로 잠시 불임에서 해방된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더 낳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소의 젖과 염소젖의 사용은 아기의 사망률을 크게 줄였다. 사회가 짐승을 기르던 단계 이전에는 어머니가 아기들이 네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이곤 하였다.
원시 전쟁의 감소는 남녀 구별에 근거를 둔 노동 분업의 불균형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망보는 임무를 맡았을 때는, 여자들이 아직도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어떤 캠프나 마을도 밤낮으로 보초를 세워야 했지만, 이 과제조차 개를 길들임으로서 가벼워졌다. 대체로 농업의 시작은 여자의 품위와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이것은 바로 남자가 농부로 전향할 때 벌어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땅을 가는 일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농사짓는 방법의 큰 개선이 뒤따랐고, 이것은 뒤잇는 세대들을 통해서 계속 진행되었다. 사냥과 전쟁이 있을 때 남자는 조직의 귀중함을 배웠고 이 기술을 산업에 들여왔으며, 나중에 여자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을 물려받았을 때 여자의 허술한 노동 방법이 크게 개선되었다.
4. 옛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
84:4.1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시대에도 여자의 지위는,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결혼의 진화적 진보를 평가하는 공정한 기준이며, 반면 결혼의 진보 자체는 인류 문명의 발전을 측정하는 합리적인 척도이다.
여자의 지위는 항상 사회적인 모순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능숙하게 다루는 관리자였다; 여자는 자신의 이익과 승진을 위하여 언제나 남자의 강한 성욕을 자주 이용해 왔다. 성 매력을 미묘하게 활용함으로써, 여자는 남자에게 비참한 노예로 있을 때조차 남자를 지배할 수 있었다.
초기의 여성은 남자에게 친구, 연인, 애인, 파트너가 아닌 소유물이나 하인, 노예였고, 나중에는 경제적 파트너, 노리개, 아이를 낳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적절하고 만족스러운 성 관계는 항상 여성의 선택과 협력 요소를 포함해야 했으며, 사회적 위치와는 별개로, 이는 지적인 여성들이 자신의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입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속박을 가볍게 하려는 노력으로, 여자들이 줄곧 기민성에 의존한 사실은, 남자들의 불신과 의심을 줄이지 못했다.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발견했고, 의심과 경멸의 경우가 아니라면, 무지로 인한 불신과 두려울 정도의 매혹이 야릇하게 섞인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부족과 종족의 많은 전통은 고난을 이브나 판도라, 또는 여성을 대표하는 어떤 여자의 탓으로 돌렸다.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왜곡되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악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모두가 한때 여자를 보편적으로 불신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독신 사제직을 지지하면서 늘어놓은 여러 이유들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여자의 천함이라고 믿었다. 무당으로 여겨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자라는 사실에서 여성의 오래된 평판을 개선하지 못했다.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가 특이하고, 심지어 비정상적이라고 여겼다. 남자는 여자가 혼이 없다고 믿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자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여자와 처음 성관계 가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따라서 사제가 처녀와 첫 성교를 가지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여자의 그림자조차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84:4.6 임신은 한때 일반적으로 여자를 위험하고 더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여러 부족의 관습이, 아이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긴 정화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선포했다. 해산하는 자리에 남편이 참여한 집단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출산을 앞둔 어머니를 피하고 혼자 버려두었다. 옛날 사람들은 집안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조차 피했다. 마침내, 늙은 여자들이 진통 중에 있는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 관습이 산파라는 직업을 낳았다. 분만을 쉽게 하려는 노력으로, 출산 중에 몇십 가지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행하였다. 귀신의 방해를 막으려고 갓난아이에게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혼혈되지 않은 부족들 사이에서 출산은 비교적 쉬웠으며, 겨우 두세 시간 걸렸다; 혼혈종족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여자가 출산할 때 죽으면, 특히 쌍둥이를 낳을 때 사망한 경우, 그녀는 영과 간음을 범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중에, 높은 부족들은 출산 중의 죽음을 하늘의 뜻으로 보았다; 그러한 어머니들은 고귀한 이유로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여자들의 옷차림과 몸의 노출에 대해 말하는 소위 절제는 생리 기간 동안 발견되는 것에 대한 치명적인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그렇게 들키는 경우, 그것은 중대한 죄였고,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옛날의 풍습 밑에서, 각 여성은 사춘기로부터 출산기의 끝까지, 매달 한 주 동안 완전히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여자가 만지거나 앉거나 베고 누울 만한 모든 것은 “더러워졌다.”고 여겼다. 달마다 월경이 끝난 뒤에 악령을 몸에서 몰아내려는 노력으로 소녀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이 오랫동안 풍습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출산기가 넘어설 때, 보통 그 여자는 더 배려를 받았고, 더 많은 권리와 특혜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을 보건대, 여자들이 경시 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인들도 생리 중인 여자를 돼지와 마늘과 함께 몸을 더럽히는 3대 원인 중 하나로 여겼다.
아무리 어리석었어도 이 옛 개념들은 좋은 일을 했는데, 그런 개념들이 과로한 여자들에게, 적어도 젊었을 때, 반가운 휴식과 유익한 명상 시간을 가지도록 한 달에 한 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나머지 시간에 남자 동료들을 다룰 지혜를 익힐 수 있었다. 여자를 이렇게 격리한 것은 또한 남자들을 지나친 성욕의 탐닉으로부터 보호했고, 이렇게 함으로 인구를 제한하고 자제를 향상하는 데 간접적으로 이바지했다.
남자가 제 아내를 마음대로 죽일 권리를 빼앗겼을 때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결혼 선물을 소유할 수 있을 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후일에는 여자가 재산을 소유하고 통제하고, 처분까지 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여자는 교회에서나 국가에서 공직을 가질 권리가 오랫동안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는 그리스도 이후 20세기가 이르기까지, 또 20세기에도 어느 정도는 항상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여자들은 아직도 남자의 지배 밑에서 은둔하던 상태로부터 자유를 널리 전 세계적으로 얻지 못한 상태다. 진보된 민족들 사이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남자의 우수함에 대한 무언의 주장이었다.
84:4.11 하지만 원시 여자들은 최근 자유로워진 자매들처럼 그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꽤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했다; 그들은 더 나은 또는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할 용기조차 갖지 않았다.
5. 발전하는 풍습에서의 여성
84:5.1 자아-영속에 있어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만, 자아-유지의 협동 관계에서 여자는 분명 불리한 위치에서 노동한다. 어쩔 수 없는 모성애로 인한 장애는 오직 문명의 진보에서, 깨달음을 얻은 남자의 증가하는 공정한 감각에 의해 겨우 보상될 수 있다.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서 성의 기준은 여자들 사이에서 더 높아졌는데, 이는 성 관습을 위반한 결과로부터 그들이 더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성 기준은 문명이 요구하는 그 공정함의 순전한 감각의 결과로서 겨우 뒤늦게 개선되고 있다. 본성은 공평함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여자 혼자서 분만의 아픔을 겪게 만든다.
현대의 남녀평등 개념은 확대되는 문명의 아름다움과 가치에서 동등하지만, 그 개념이 본성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힘이 권력일 때, 남자는 여자 위에서 지배한다; 공정, 평화, 공평이 더 우세하게 되었을 때, 여자는 노예 상태와 낮은 신분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른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대체로 어떤 나라나 어느 시대에도 군사주의의 정도에 반비례하여 변하였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의 권리를 빼앗은 것은 의식적이었거나, 또는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 후에 점차적으로, 투덜거리면서 그 권리를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모두가 사회의 진화에서 의식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은 사건들이었다. 늘어난 권리를 즐길 때가 정말로 왔을 때, 여자는 권리를 소유했고, 그것은 모두 남자의 의식적인 태도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사회적 조정은 문명이 지속하는 진화의 일부이며, 이를 위해 풍습은 느리지만 확실히 변한다. 진보하는 풍습은 갈수록 더 여자에게 좋은 대우를 제공해 주었다; 여자에게 계속 모질었던 부족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아담 종족과 놋 종족은 여자를 더 많이 인정했으며, 이주하는 안드 종족에게 영향을 받은 무리들은 여자의 사회적 신분에 관하여 에덴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84:5.6 초기의 중국인과 그리스인들은 둘러싼 대부분의 민족들보다 여자를 더 좋게 대우했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지나치게 여자를 불신했다. 서양에서 여자들은 기독교의 일부가 된 바울의 교리 밑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에 부닥쳤다. 그래도 기독교는 남자에게 더 엄격한 성의 책임을 지워줌으로 풍습을 진보시켰다. 여자의 신분은 마호메트교에서 여자에게 따르는 특이한 지위의 하락으로 거의 희망이 없었으며, 다른 몇 가지 동양 종교의 가르침 밑에서 여자는 더군다나 더 악화된 상태에 있었다.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여자를 정말로 해방했다; 집의 울타리로부터 여자를 대체로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것은 현대의 공장이었다. 새로운 생활 체제에서 남자의 신체적 능력은 이제 더 중대한 필수 요소가 되지 않았다; 과학은 생활 조건을 변화시켰고 남자의 힘이 여자의 힘보다 이제 훨씬 우월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집안의 노예 신세로부터 여자를 해방하는 경향으로 갔고, 여자의 지위를 크게 수정해서, 여자는 실질적으로 남자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성의 결정권을 이제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한때 여자의 가치는 여자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능력에 있었으나, 발명과 부요는 여자로 하여금 활동해야 할 새로운 세계―품위와 매력의 분야―를 창조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산업은 여자의 사회ㆍ경제적 해방을 위하여, 의식하지도 않고 뜻하지도 않은 싸움을 싸워서 이겼다. 또 다시 진화는 계시조차 이룩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를 규제하는 불공평한 풍습에서 벗어난 깨우친 민족들의 반응은 정말로 시계추처럼 극과 극을 반복했다. 산업화된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거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고, 군대 복무와 같은 많은 의무로부터 면제되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완화될 때마다 여자의 해방에 도움이 되었고, 일부일처제로 나아가는 모든 진전에서 여자는 직접 헤택을 받았다. 사회가 진취적으로 진화하면서 풍습이 조정될 때마다, 약한 자는 언제나 훨씬 더 이득을 본다.
한 쌍의 이상적 결혼에서, 여자는 마침내 인정, 존엄, 독립, 평등 그리고 교육을 얻어냈다; 그러나 여자가 새롭고 전례 없는 이 모든 성취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입증될 것인가? 현대 여성들은 이 위대한 사회 해방의 성취에 게으름, 무관심, 불임, 불륜으로 대응할 것인가? 오늘날, 20세기에 여성은 그녀들의 오랜 세상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시험을 받고 있다!
84:5.11 종족 번식 면에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짝이며, 따라서 종족의 진화가 전개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진화는 갈수록 더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권리는 결코 남자의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의 권리를 가지고 잘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권리를 가지고 번성할 수 없다.
남녀는 각자 자신의 뚜렷한 존재 분야가 있고, 그 분야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자가 글자 그대로 남자의 권리에 동참하기 열망한다면, 머지않아, 남자들로부터 아주 최근에 얻어낸 것, 기사도 정신과 특별한 고려의 대상인 많은 여성이 지금이 즐기고 있는 것이 동정심도 감정도 없는 경쟁으로 확실하게 대체될 것이다.
문명은 결코 남녀 간의 행동 격차를 없앨 수 없다. 대대로 풍습은 변하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타고난 모성애는 해방된 여성이 산업에서 남자와 심각하게 경쟁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남녀는 생물학적 차이와 정신적 차이점에 의해 결정되는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남녀는 각자 언제나 자신의 특별한 분야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들이 때때로 겹칠 것이다. 오직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조건으로 경쟁한다.
6. 남자와 여자의 협력
84:6.1 번식의 욕구는 자아 영속을 위해 한결같이 남자와 여자를 함께 모이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상호 협력―즉 가정을 세우는 일―에 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공적인 인간 제도는 모두,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조화로 조정된 개인적 이익의 상반된 이해를 포함하며, 가사 노동도 예외는 아니다. 가정 형성의 기초인 결혼은 본성과 사회의 접촉을 특징짓는 상반된 협력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짝짓기는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본성이다. 그러나 결혼은 생물학적 측면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적 측면이다. 열정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할 것을 보장하지만, 연약한 부모로서의 본능과 사회적 풍습은 그들을 함께 붙들어 놓는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유형의 같은 생물 종으로 간주되며, 서로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과 전체 삶의 반응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완전히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남녀 간의 완전한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직관력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러나 논리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듯 보인다. 그러나 여성은 항상 인류의 도덕적 기준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요람을 흔드는 손은 여전히 자녀들의 운명과 동고동락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본성, 반응, 관점, 생각의 차이는 발생되는 우려와는 거리가 먼, 개별적, 집단적으로, 인류에게 상당히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많은 우주 생명존재들의 질서는 이원적 국면의 성격으로 표현되도록 창조되었다. 필사자들, 물질 아들들, midsoniters(중간 초한자, 미초한자)(☞) 사이에서의 이 차이는 남성과 여성으로 묘사된다; 세라핌들, 케루빔들, 모론시아 동반자들 사이에서는, 양성, 즉 적극적인 것, 그리고 음성, 즉 내향적인 것으로 분류되었다. 그러한 이원적 관계는 파라다이스 및 하보나 체계의 어떤 삼자일체 결합처럼, 다양성을 크게 증대시키고 내재된 한계들을 극복한다. ☞ midsoniter 미드소나이러 : 자식을 낳으나 absonite에 이르지 못한 자를 언급한다.
84:6.6 남자와 여자는 필사 생애뿐 아니라 모론시아 생애와 영적 생애에서도 서로 필요하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관점의 차이는 첫 생명을 지나서도, 그리고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면서 내내 지속된다. 그리고 하보나에서도, 한때 남자와 여자였던 순례자들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면서 여전히 서로를 도울 것이다. 최후자 집단에서도, 결코 인간이 남성과 여성이라고 부르는 personality 성향이 그렇게 아득히 지워지기까지 생명존재의 변형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인류의 이 두 가지 기본 변형은 서로 흥미를 유발하고, 자극하고, 격려하고, 도움을 줄 것이다; 그들은 항상 복잡한 우주 문제를 풀고 다양한 우주적 어려움들을 극복하는데, 언제나 서로 협동하고 의존할 것이다.
남녀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들은 효과적으로 보완한다. 협력은 종종 개인적으로 다소 대립되지만,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하는 능력이 있다. 결혼은 남녀의 차이를 완화하도록 고안된 제도이며, 한편 문명을 계속하게 하고 종족의 번식을 보장한다.
결혼은 모든 인간 제도의 어머니인데, 이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구조적 기초가 되는 가정의 설립과 유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은 자아-유지의 메카니즘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문명의 풍습 아래에서 인종 영속성의 유일한 희망이며, 동시에 특정한 높은 자기만족의 형태를 제공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가족은 인간의 가장 큰 순수한 인간적 업적이며,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관계의 진화를 남편과 아내의 사회적 관계로 결합시킨 것이다.
7. 가족 생활의 이상
84:7.1 남녀의 짝짓기는 본능적이고,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따라서 가족은 자동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인종이나 국가의 가족들이 그 사회를 형성하는 시민들이다. 가정이 좋으면, 사회도 좋다. 유대인과 중국인의 문화적 안정은 그들 가족 집단의 힘에 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여자의 본능은, 결혼과 원시의 가정생활을 장려하는 데 있어, 여자가 이해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남자는 후일의 풍습과 사회적 관례의 압력에 의해 가정을 이루도록 강요되었을 뿐이다; 남자는 성적 행위로 인한 어떤 생물학적 결과가 그에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결혼과 가정을 세우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느렸다.
성(性) 결합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결혼은 사회적이며 항상 풍습에 의해 규제되어 왔다. 풍습들(종교ㆍ도덕ㆍ윤리적)은, 재산, 자존심, 기사도 정신과 함께, 결혼과 가족 제도를 안정시킨다. 풍습이 이리저리 변할 때는 언제나, 가정과 결혼 제도의 안정에 변동이 생긴다. 결혼은 이제 재산 단계를 벗어나서 개인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므로 남자가 여자를 보호했고, 여자는 같은 이유로 남자에게 복종했다. 그 장점에 상관없이, 이 체계는 안정을 가져왔다. 지금은 여자를 더이상 재산으로 여기지 않으며, 이 새로운 결혼 및 가정 제도가 정착하도록 고안된 새로운 풍습들이 다음과 같이 생겨나고 있다:
1. 종교의 새로운 역할. 부모로서의 체험이 필수라는 가르침, 우주의 시민들을 낳는다는 관념, 하나님 아버지께 아들들을 태어나게 하여 드리는 특권에 대한 확대된 이해는 기본이다.
2. 과학의 새로운 역할. 출산은 인간의 통제하에서, 점점 더 선택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옛 시절에는 출산에 대한 이해와 상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을 때도, 아이가 출생했다.
3. 기쁨이 갖는 새로운 기능. 이것은 종족의 생존에 새로운 요소를 제공한다; 옛날 사람은 바라지 않는 아이들을 죽게끔 버려두었다. 현대인은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4. 부모 본능의 강화. 각 세대는 이제, 부모가 되는 본능이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 출산을 보장할 수 없는 사람들을 종족 번식의 흐름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은 다음 세대에 부모가 될 사람들이다.
84:7.8 (그러나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협동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제도로서, 정확하게 약 50만 년 전 달라마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이미 안돈과 그 직계 후손이 지켜온 일부일처의 관습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 후 놋 종족과 나중에 도래하는 아담 종족의 시절 이전에, 가족생활은 그다지 자랑할 것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온 인류에게 오래 가는 영향을 미쳤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들이 동산에서 협력하여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온 가족이 채소 가꾸는 에덴의 이상은 유란시아에서 새로운 개념이었다.
초기의 가족은, 노예들은 물론 함께 일하는 집단을 모두 포함하였고, 모두가 한 거처에서 살았다. 결혼과 가족생활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았지만, 필요에 의해 가깝게 관련되었다. 여자는 언제나 개별 가족을 바랐고, 결국 여자는 뜻대로 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보편적이며 뚜렷한 생존 가치를 지닌다. 옛날 사람들은 아이의 복지를 위하여 언제나 어머니의 이익을 희생했다. 에스키모인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목욕시키는 대신 핥기도 한다. 그러나 원시의 어머니들은, 제 자식들이 아주 어릴 때만 아이를 기르고 보살폈다; 그들은 동물들처럼, 아이들이 자라자마자 내버려 두었다. 영속적이고 지속되는 인간관계는 오직 생물학적 사랑에만 기초하지 않는다. 동물도 제 새끼들을 사랑한다. 사람―문명화된 사람―은 손자ㆍ손녀를 사랑한다. 문명이 높을수록, 아이들이 승진하고 성공할 때 부모의 기쁨이 더욱 커진다. 이처럼 이름에 대한 긍지가 새롭고 더 높은 실현을 가능케 했다.
84:7.11 옛 종족들 사이에서 대가족이 반드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요구되었다:
1. 아이들은 일꾼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2. 아이들은 노령에 대한 보험이었다.
3. 딸은 팔 수 있었다.
4. 가족의 자부심은 이름 남길 것을 요구한다.
5. 아들들은 보호와 방어를 마련해 주었다.
6. 귀신 공포증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
7. 어떤 종교들은 자손을 희생 제물로 요구했다.
조상 숭배자는 아들 못 가지는 것을 온 세월과 영원을 통해서 최악의 재난으로 여긴다. 그들은 죽은 뒤의 축제를 거행하고, 영 나라를 통하여 귀신이 나아가는 데 필요한 희생 제물을 바칠 아들들을 무엇보다도 더 원했다.
옛날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훈육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복종이나 실패가 심지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현대에 아이들이 순종하지 않는 것은, 문명이 어리석은 행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84:7.21 에스키모 아이들은 단지 그들이 천성적으로 온순한 작은 동물이기 때문에 훈육과 교정을 잘 받는다; 홍인과 황인의 아이들 모두 거의 똑같이 다루기 쉽다. 그러나 안드 종족 유전을 가진 인종에서 아이들은 그렇게 차분하지 않다; 상상력이 보다 더 풍부하고 모험적인 젊은이들은 더 많은 훈련과 규율을 필요로 한다. 아동문화의 현대적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1. 인종 혼합이 확대된 점.
2. 인위적이고 겉핥기식 교육.
3. 부모를 모방함으로 아이가 교양을 얻을 수 없는 것―부모가 너무나 자주 가족의 그림에서 빠져 있다.
옛 가족 규율의 생각은 생물학적이었으며, 부모가 아이의 존재에 대한 창시자라는 인식에서 자라났다. 가족생활의 진보된 이상은 아이를 낳는 것이 특정한 부모의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인간의 존재에 대한 최상의 책임을 수반한다는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84:7.26 문명은 아이가 모든 권리를 가졌고, 부모는 모든 의무를 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은, 자식을 낳는 것이 어떤 의무를 갖게 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삶의 투쟁에서 승리하도록 사랑스럽게 보여주는 보살핌ㆍ훈련ㆍ애정의 결과로서 자연히 생겨난다. 참된 부모는 계속하여 서비스와 봉사를 베푸는 데 몰두하며, 지혜로운 아이는 이를 깨닫고 고맙게 여기게 된다.
현재의 산업 및 도시 시대에, 결혼 제도는 새로운 경제 노선을 따라서 진화하고 있다. 가족생활은 갈수록 더 비용이 높아졌고, 한편 예전에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아이들은 경제적 부채가 되었다. 그러나 문명 자체가 안전하려면, 아직도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미래 세대의 복지에 기꺼이 투자하려는 성향이 강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책임을 국가나 교회에 떠맡기려는 어떤 시도도 문명의 복지와 진보에 자살 행위임이 입증될 것이다.
아이들과 그 결과로 생기는 가족생활과 더불어, 결혼은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높은 잠재력을 자극하며, 동시에 필사자의 personality를 가속화한 이 특성을 표현하는 이상적 길을 마련해 준다. 가족은 인간종의 생물학적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 가정은 자연스러운 사회 무대이며, 그곳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핏줄로 맺어진 형제 사랑의 윤리를 배울 수 있다. 가족은 근본적 친교 단위이며, 그 안에서 부모와 아이들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형제 사랑을 실현하는데 아주 긴요한 인내, 이타주의, 관용, 자제력을 배우게 된다.
문명화된 종족들이 더욱 널리 안드 종족의 가족회의 풍습으로 돌아간다면, 인간 사회는 크게 개선될 것이다. 안드 종족은 족장이나 독재 형태의 가족 정부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우애와 친교 성향이 있어서, 가족의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과 규칙을 자유로이 솔직하게 토론하였다. 그들은 가족을 다스리는 모든 일에 이상적으로 형제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상적 가족 안에서 효도와 부모 사랑은 모두 형제처럼 헌신함으로 커진다.
가족생활은 진정한 도덕의 선구자이며, 의무에 충성하는 의식의 조상이다. 가족생활에서 강제적 연관성은 다른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필수적 적응을 하도록 함으로 성격의 안정과 성장을 자극한다. 그러나 오히려, 진정한 가족―좋은 가족―은 노련한 창조자인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창조자의 태도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러한 진정한 부모는 오랫동안 연속되는 상승하는 훈련 과정 중, 모든 우주 아이들에 대한 파라다이스 부모의 사랑인 첫 번째를 그들의 자녀들에게 나타낸다.
8. 자아-욕구 충족의 위험
84:8.1 가족생활의 큰 위협은 자아-욕구 충족의 위험 수위에 달하는 현대인들의 쾌락을 쫒는 열정이다. 예전에는 결혼의 첫 번째 동기가 경제적 요인이었다; 성적 매력은 2차적인 것이었다. 결혼은 자아-유지를 기반으로 하여 자아-영속을 이어가는 동시에 가장 원하는 자아-욕구 충족의 형태 중 하나를 제공했다. 결혼은 인간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세 가지 큰 동기를 모두 포함하는 유일한 제도이다.
원래 재산은 자아-유지의 기본적 제도였고, 반면 결혼은 자아-영속의 독특한 제도로서 작용했다. 배를 채우는 것, 놀이, 유머는, 이따금 얻는 성욕의 만족과 더불어 자아-욕구 충족의 수단이기는 했지만, 진화하는 풍습이 자아-욕구 충족을 위한 어떤 뚜렷한 제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즐거움을 얻는 전문화된 기술을 이렇게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 제도는 이 쾌락 추구에 완전히 젖게 되었다. 재산의 축적은 자아-욕구 충족의 모든 형태를 증가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으며, 한편 결혼은 종종 오직 쾌락의 수단으로만 간주된다. 그리고 이 과도한 탐닉, 널리 퍼진 이 쾌락을 쫒는 열정은, 일찍이 사회의 진화적 가족 제도인 가정을 겨냥해 오는 가장 큰 위협이다.
보라 인종은 새롭고 겨우 불완전하게 실현된 특징―유머 감각과 함께 놀이 본능―을 인류의 체험 속에 들여왔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산긱과 안돈 족속 안에 있었지만, 아담의 혈통은 이 원시적 성향을 가능한 즐거움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은 새롭고 영화롭게 된 자아-욕구 충족의 형태이다. 자아-욕구 충족의 기본 유형은 식욕을 달래는 것을 제외하고, 성욕을 채우는 것이며, 산긱과 안드 종족이 혼합으로 이러한 감각적 쾌락의 형태는 크게 높아졌다.
안드 이후 종족들의 모험적 기질, 호기심ㆍ모험, 그리고 쾌락에 빠지는 특징이 합친 곳에 진짜 위험이 있다. 혼의 갈증은 육체의 쾌락으로 만족할 수 없다;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즐거움을 현명하게 추구한다고 해서 증대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예술ㆍ색깔ㆍ소리ㆍ리듬ㆍ음악의 자원들과, 장식의 자원들을 다 소진시킨다해도 혼을 고양시키거나 영이 성장하는데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허영심과 유행은 가정과 자녀들의 양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경쟁심은 뒤잇는 세대들이 생존 자질들을 향상시키는 데 무력하다.
진보하고 있는 하늘 존재들은 모두 휴식을 즐기고 유머 회상 지도자들의 봉사를 누린다. 건전한 기분전환을 얻고 흥을 돋우는 놀이에 참여하려는 모든 노력은 건전하다; 상쾌한 수면, 휴식,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단조로움의 지루함을 예방하는 모든 취미생활은 가치가 있다. 경쟁적 게임, 이야기하기, 맛있는 것을 맛보는 것조차 자아-욕구 충족의 형태로 작용할 수 있다. (너희가 음식을 음미하기 위해 소금을 사용할 때, 거의 백만 년 동안, 사람은 음식을 재(ashes)에 담가야만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84:8.6 사람은 스스로 즐기라; 인류는 천 가지 방법으로 기쁨을 찾으라; 진화하는 인류는 오랫동안 진보하는 생물학적 투쟁에서 얻어낸 정당한 자아-욕구 충족의 모든 형태를 탐구하라. 인간은 오늘날의 기쁨과 즐거움 중 일부를 공정하게 얻어냈다. 그러나 운명의 목표를 잘 살피라! 쾌락이 정말로 자아-유지의 도구가 된 재산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살이다; 그리고 자아-욕구 충족들이 실제로 결혼의 파탄, 가정생활의 퇴폐, 가정의 파괴를 가져온다면,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된다―가정은 사람이 진화로 얻은 최고의 성취이며, 문명이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이다.
[유란시아에 주둔하는 세라핌 우두머리가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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