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기준 1510년대 발행 추정.(중종 5년, 경오년)
*고적보 기준 생졸년. 밀직공부터 1대 년차 120년.
1世 → 2世 → 3世 → 4世 -----→ 5世 -----→ 6世 --→ 7世 ----→ 8世 ------→ 9世 -----→ 10世
민(敏) 척(倜) 준(俊) 윤철(允哲) 제운(霽雲) 소(紹) 지도(之道) 영수(永壽) 필우(弼牛) 익(翼)
→ 11世 ----→ 12世 ---→ 13世 ----→ 14世 ----→ 15世 ---→ 16世 ----→ 17世 -----→18世-→19世----→ 20世
전금(殿琴) 양규(陽葵) 회석(懷碩) 대기(大器) 원량(元良) 군보(君甫) 공약(公若) 비(備) 성노(星老) 유손(有孫)
* 고적보를 기준으로 하면, 관조 밀직공과(이하대 포함), 약 120년의 년차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남씨성은 귀화 후에 태어난 후손들이라" 했는 데,
시조공과 2세 휘 척공의 생졸년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어느 기록이 진실인지 궁금???)
*관조 밀직공 이상은 +120년 추가 적용.
*15세부터 60간지 +120년을 더하면 밀직공 이하 생졸년의 적용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의령 병술보와 안동파 고적보를 기준으로 연차를 계산한 것입니다.
ㅡ, 이상으로 자료들을 비교시에,
*관조 밀직공과의 생졸년은 무리가 없으나, 시조 生 712년과, 2세 倜공의 生은 843년으로,
131년의 연차가 발생하여, 755년 이후 출생으로 보아도,
약 85년의 년차가 발생하니, 단순적용은 무리가 있습니다.
ㅡ,계유보 수권(首券) 176 쪽 몽뢰 가첩(夢賚 家牒)에 있는 의령 후손 연년(延年)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은 사고의 가설이라 말하고 있다.
최소한 1622년 이전에 만들어진 남씨 최고(最古)의 족보중의 하나이다.
책 177쪽 병암(屛巖)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이 실증적으로 고증해서도 신빙성 없음을 말하고 있다.
***영양남씨보 선계고적은, 밀직공 안동종회 까페에서 내려받은 족보이며,
양정공파보 양식의 정리를 참고 바람니다.
ㅡ의문점 총 정리ㅡ
1. 직계만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방계는 아들(子/名)만 기록함.
방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상계도를 작성시에 난해 함. (아마도 불가???).
2. 배(配)는 부(父)와 생졸년을 상세하게 기록 함.
3. 파조 밀직공(휘 군보)의 호와 생졸년은, 임진보를 기초자료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일치.
4.임진보와 발행 전 후가 궁금??? / 남자(南磁) 1680년 편찬, 1712년 안동 남흥재사 간행.
5. 당나라 연호와 기록의 오류가 다소 발견 됨..
6. 계유보의 선조 중, 척(倜)공은 2세로, 익(翼)공은 10세로 기록 함.
7. 시조부터 안동파의 27세(1509년)까지의 기록만을 확인 함.
8. 시조 영의공 이하 생졸년 (당 천보 14년, 755년 기준) 상이 (적용의 오류).....755년???
9. 영양군은 광보로, 고성군은 ???, 두분의 관조는 기록이 바른것인지 의문이 든다. 는 점.
10. 영양관 대동보를 발행시에, 안동파에서 "휘 홍보공(대광)"을 관조로 기록한 족보를 발행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피력한 이유가 위의 고적보의 내용과 상이하기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11. 60간지 적용시에 연대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첫댓글 신라왕들의 무덤들도 금관이 출토되었지만 누구의 묘인지 몰라 천마총이라 하지 않습니까? 밝혀진것은 백제 무릉왕릉 밖에 없지 않습니까? 남씨 최초의 계유보에서 남구만 공도 밝히지 못하고 전하는 대로 전할 뿐이라 했는데, 상계에 대해 의문점이 많으나 이것이다라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사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간 죽일 놈으로 몰리니깐, 이 문제는 남씨 대종회에서 주관하여 토론을 거쳐 나와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위 내용은 영양관 밀직공파에서 내려받은 고적보이고, 내용이 상세하여, 각 왕조의 연대와, 60간지를 첨부하여, 비교한 것입니다.
또,고적보를 근대에 발행한 족보들과 비교 검토하여, 연대의 오차와 의문점을 적어보았습니다.
ㅡ,영양관 밀직공파 카페에 의문점을 문의중입니다. 답이 늦어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