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위진(魏晋) 시대에 이르러 문(文)을 자각하여 문(文)이 자기독립성을 취득했다고 한다.
조조(曹操)의 아들로 220년에 아버지가 죽자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를 퇴위시키고 위나라를 세운 조비(曹丕)가 문(文)의 중요성을 선언한 '전론논문'(典論論文) 중 일부를 옮겨본다.
"문장(文章)은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經國之大業 경국지대업)이요, 결코 썩지 않는 성대한 사업(不朽之盛事 불후지성사)"라는 단호한 선언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 유명한 문장이라고 한다.
蓋文章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 年壽有時而盡 榮樂止乎其身 二者必至之常期 未若文章之無窮. 是以古之作者 寄身於翰墨 見意於篇籍 不假良史之辭 不托飛馳之勢 而聲名自傳於後.
故西伯幽而演 ‘易’ 周旦顯而制 ‘禮’ 不以隱約而弗務 不以康樂而加思. 夫然 則古人賤尺璧而重寸陰 懼乎時之過已. 而人多不强力 貧賤則懾於饑寒 富貴則流於逸樂 遂營目前之務 而遺千載之功. 日月逝於上 體貌衰於下 忽然與萬物遷化 斯志士之大痛也.
대개 문장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요, 결코 썩지 않는 성대한 사업이다. 수명이란 때가 되면 다하고 영예와 즐거움도 그 몸에 그치니, 이 두 가지는 반드시 다다르는 기한이 있으니 문장의 무궁함만은 못하다. 이 때문에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들은 모두 문장에 몸을 맡기고 붓과 먹 속에서 뜻을 펼쳤다. 그래서 굳이 사관의 글을 빌리지 않고 날듯이 뛰는 기세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명성은 절로 후세에 전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서백 문왕은 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풀이했고, 주공 단은 드러내어 ‘예’를 지었다. 뜻을 잃었다 해서 저술에 힘쓰지 않음도 없었고, 편안하고 즐겁다 해서 생각을 옮기지 않았다. 이러했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옥구슬과 같은 보배는 천하게 여기고 한 치 시간을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시간이 자신을 지나쳐 흘러가 버려도 사람들이 애써 더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가난하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두려워하며 부유하고 귀해지면 일락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목전에 닥친 일만 완수하지 천년을 길이 갈 공훈은 놓치게 된다. 해와 달은 하늘에서 노닐며 지나가고 신체는 땅 아래에서 쇠약해지기만 하다가, 갑자기 만물과 더불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뜻있는 선비가 크게 가슴 아파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