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개심開心 외 1편
가슴을 절개할 때
나예요, 날 알아보겠어요
첫눈에 당신을 알아봤다니까요
당신이 무안해 날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죠
마른 가슴팍에 내가 안길 때
무언가 부끄러워하는 동작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수술대에서 주먹을 쥔 자세는 여전하네요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 천사가 돼 나타났어요
천사의 기도를 기억하다니
미쳤지 정말, 그런 표정이네요
아니 미친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린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내 날개가 수술 도구인 줄 알고
마취에 빠져들면서도 당신, 영문 모를 웃음을 띠는군요
잠시 우리 몸 바뀔 때
여기가 내 꿈속인지 당신의 가슴속인지 아무도 몰라요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주소서*
천사의 기도가 붙어 있는 병실
흰 천을 덮어쓰고 당신은 싸늘히 누워 있고
난 수액 줄에 주렁주렁 온몸으로 매달려가며
난간을 붙잡고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 간신히 손 내밀면
덜컹 닫히는 수술실 문 앞에서
당신이 다급하게 날 부르는 줄 알고 움찔했어요
비스듬히 구름에 앉아 공중정원을 내려다보며
밑도 끝도 없이 우린 동시에 숨이 차올라
당신의 날개를 놓치지 않으려고 개처럼 혓바닥을 헐떡거렸죠
알았으면 손, 목줄 같은 호스와
의사의 말만 철석같이 믿어야 했어요
움켜쥔 붉은 심장을 내려놓고
공중을 향해 부드럽게 풀리는 내 손을 봐요
당신이 흘러들어올 때마다
내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쳐요
들려요, 어디선가 웃음꽃이 피어나고
엄마, 부르고도 남는 심장의 잡음은
내가 당신에게 듣고 싶었던 아니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같이 꽃 보러 가요
두 손 맞잡은 한 개의 심장으로
*타고르.
----------------------------------------------------
봄멸*
심장을 닫을 때
나예요, 송정 바다에 내가 열려요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대변항 부두 옆 찰싹 붙은 멸치 배엔
눈살을 찌푸리고 힘줄만 세운
영차영차, 소리가 그물을 뚫고 나오고 있어요
당신은 송정 파도로 출렁이고
난 대변 멸치 훑어내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저러다 비늘만 남고 허리 다 나가겠어요
허공에 튀어 오르다 보면
바다 멀리 대마도의 턱밑까지 닿겠어요
당신 그물에 안겨 난 상처 하나 없이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집어등 불빛만 따라가요
당신을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내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모래가 서걱서걱 걸어와요
대변 송정 이고지고 부전시장에 팔러 가는 길
당신도 멸치의 심장도 반쯤 멎어 있어요
빈손으로 돌아앉은 동해남부선
소나무는 바위 위에선 못 자라도 모래에선 자라요
매일같이 기다림에 부서지고 무너져
아름다운 모래가 되는 비결을 배웠어요
가다 쉬다 당신은 자꾸만 척추를 추켜세워도
내겐 휘어진 멸치 등만 보여요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모래 유해발굴단보다 먼저 당신을 찾아가요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건 당신 유품이 파도 소리인 걸
숨을 놓기 전 내 귓가의 솜털 하나 놓치지 않는 걸
술 한잔 올릴께요, 송정과 대변에게
비린내는 떼고 파도는 꼭꼭 씹어 주셨잖아요
흰 소금가루로 변한 당신
품속에서 꺼내 조용히 쥐었다 놓아주자
물결 위 흩날리다 입가에 묻어 조금 짰어요
당신 입에서 내 입으로 옮겨 온
키스보다 강한, 봄의 물결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릴 가로질러 가요
*봄멸치
김세윤
198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도계행』, 『황금바다』, 『코로나 블루스』가 있다.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포항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코로나 블루스”로 오산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