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앞 뒤도 안맞는 희한 망측한 글도 다 본다.
구 영필 선생의 모함글 1.
<밀양경찰서 폭탄사건(崔壽鳳 義士 義擧)>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이 있은 지 겨우 석 달 후인 1920년 12월에는 밀양결찰서가 또 의열단의 폭탄 세례를 받았다. 이 일을 감행한 사람은 최수봉(崔壽鳳:호적명,崔敬鶴)이라는 청년이다.
최수봉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1894년 3월 3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馬山里)에서 기독교를 믿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나 소년시절부터 향학의 열성이 남다르더니 한문 서당을 거쳐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우다가 15세 되던 해에 을강(乙江)전홍표(全鴻杓)선생이 훈도하는 동화학교(同和學校)에서 다시 2년간을 수학하고, 1912년에는 동래 범어사(東萊 梵魚寺)에 있던 명정학원(明正學院)으로 학교를 옮겨 졸업 하였다.
학교 공부를 거의 쫓겨다니다 시피하고 밀양으로 돌아온 최수봉은 모교인 동화학교의 폐허를 돌아보며 나라 잃은 서러움이 더욱 복받쳐 옴을 누를 길이 없었다. 1913년에는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崇實學校:현,崇實大學校의 前身)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도 불온 학교라 하여 폐교 당하자 부득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또 다시 객지에서 떠돌아다니는 몸이 되어 버렸고 1916년 음력 6월경부터는 평안북도 창성군(昌城郡)에 있던 어느 사금광(砂金鑛)에 날품팔이로 들어가 근무하기도 하고, 우편소집배원(郵便所集配員) 노릇도 하며 방랑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1920년 여름에 밀양으로 돌아와 있을 즈음 의열단의 제1차 의거(密陽爆彈事件)를 위해 밀양에 들어온 황상규, 윤세주, 이종암(당시에 ¨김원석¨이란 가명을 씀) 등등 의열단 동지들을 만나 정식으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자신도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고 있었는데, 이 거사 계획이 의열단원이면서 배신자인 구영필(具榮泌)의 밀고에 의해서 주력 동지들이 검거되고 숨겨 둔 폭탄이 압수 당하는 등 의거가 실패로 돌아감을 보고 통분을 금할 수 가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인 그해 8월경에 평안북도 창성군 사금광에서 근무할 때 사귄 임태호(任泰浩)라는 친구를 만나 ¨이제 거국적으로 맹렬한 항일운동이 전개되는데 영남이 홀로 조용하니 동지는 영남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아니한가?¨라는 충고를 듣고, 임태호로부터 폭탄 2개를 넘겨받아 은밀히 숨겨 두고 밀양에서 의열단원으로 가입한 친구 몇 명과 긴밀히 상의하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수봉은 어릴적부터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는, 고집이 있고 심지가 깊으며 성격이 강인하고 폐기가 있는 청년이였다. 어려서 보통학교에 다닐 때의 일화 가운데, 일본역사 시간에 한 일본선생이 ¨일본의 조상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는 스사노오 미코토(素盞鳴尊)이라는 남자 동생이 한 사람 있었는데 조선의 단군(檀君)은 이 스사노오 미코토의 동생이다¨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많은 학생 중 최수봉이 일어나 의문을 제기했는데, ¨단군은 지금부터 4천 2백년 전의 분이고 스사노오 미코토는 2천 5백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형이 되고 아우가 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 일본인 선생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 문제가 시험문제로 나오자 최수봉은 스사노오 미코토는 단군의 중현손(重玄孫:고손자의 고손자)이라고 답을 써내서 학교에서는 야단이 났고, 최수봉의 행위는 일본황실을 모독하는 것이며 그를 불온분자(不穩分者)라 하여 퇴학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차계획의 실패로 잡혀간 의열단 동지들이 왜적들에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피는 끓었고 동지들의 뜻을 받아 자신도 일어서야 하겠다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그해 9월에, 또다시 자기와 같은 의열단원인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이 살고 있는 밀양의 경찰서장도 동지들을 많이 검거하였으므로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결론을 짖고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에 드디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게 되었다.
그날 아침 9시 30분경 서장실에서 서장 와타나베(渡邊末次郞)가 순사 19명을 모아 놓고 연말 경계를 위한 특별 훈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최수봉은 준비해 간 두발의 수류탄 중 한발을 경찰서 현관 오른편에 있던 서장실을 향해 유리창 밖에서 던졌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들어간 폭탄은 순사부장 남경오(楠慶吾)의 오른쪽 팔에 맞아 가볍게 마룻바닥에 떨어져 그 충돌력이 약했던지 불발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놀란 왜경들은 훈시고 무엇이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달려나오는 순간에 또 한발의 폭탄을 경찰서 현관을 향해 던지자 큰 소리를 내며 폭탄이 터지면서 현관문과 마루, 벽 일부와 서류함 정도만 파손되었다. 이 통에 현관으로 나오려던 왜경들은 혼비백산해서 뒤쪽으로 빠져나와 범인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고, 수봉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증스런 왜놈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또 얼마나 상하였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그만만 하여도 우선은 적지 않은 성공이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추격해 오는 왜놈 순사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놈들의 손에 잡혀 죽임을 당하느니 보다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도주로 근처에 있던 황석(黃錫)이란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품에 숨겨 갖고 있던 25cm 정도의 단도(短刀)를 꺼내서 자결을 하려고 배를 그었다.
복부를 15cm 가량이나 갈랐는데도 현장에서 죽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절명 전에 왜경들이 억지로 그를 살리려고 부산의 도립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처치를 하는 등 2주간의 치료 후에 검찰로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다. 최수봉의 폭탄 투척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폭탄사건으로 인하여 의열단에 대한 왜놈들의 공포감(恐怖感)과 증오심도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대구지방법원은 처음에 최수봉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사가 이에 불복하고 1921년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2부에 항소하여 마에사와(前澤成美)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았고, 곧이어 최수봉이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5월 23일에 이시가와(石川)재판장, 나가이누마(永沼)배석판사, 쿠사바(草場)검사가 연석한 재판에서 기각(棄却)결정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21년 7월 8일 오후3시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었다. 교수(絞首)된지 13분만에 절명(絶命)하니 의사의 나이 약관 28세였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아오야마(靑山)라는 재판장이 ¨너는 ``부산경찰서폭탄사건``의 박재혁(朴載赫)이나 ``남대문사건``의 강우규(姜宇奎)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왜 이러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최수봉은 ¨내 그때 목적을 달성치 못했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 않았더냐? 너희놈들의 꼬락서니를 보지 않으려고 죽으려 했는데 왜? 죽지도 못하게 하고 이 야단들이냐?¨고 고함을 치며 나무라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밀양경찰서의 송치 서류에 나타나 있는 밀양경찰서폭탄사건에 관련된 사람을 보면: 밀양면 내이동(대구형무소 재소) 한봉인(28세), 경북 칠곡군 왜관면 석전리(대구감옥 재소)이수택(36세), 경북 대구부 남산정(町)양건호(31세:의열단 부단장 이종암을 말함:미체포), 밀양면 내이동(대구감옥 재소) 고인덕(40세), 상남면 조음리(미체포)이원경(28세), 중국 하문(미체포) 김상윤(31세), 길림성 영안현(미체포) 구영필(45세), 평북 정주(미체포) 임태호 등이라고 나와 있으나 대부분이 복역 중이였거나 미체포 상태였으므로 최수봉 의사 이외 이 사건으로 특별히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는데, 밀양강에 다리(橋)가 놓여져 있지 않던 시절이라 나룻배로 의사(義士)의 유해를 운구(運柩)하여 고향 마산리에 안장(安葬)코져 나섰던 밀양청년 수명에 대해 일본 경찰은 소요가 일어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치안을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유치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하고 있고, 의사께서 할복(割腹) 당시에 입으셨던 피묻은 저고리(血衣)가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어서 3.1절이 되면 관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관람을 시키기도 했다고 하나, 당시 교육장을 지낸 황(黃)모씨가 가져갔다는 말만 전할뿐 혈의의 흔적은 찾을 길이 막연하기만 하다.
최수봉 의사에 대한 행적이 대체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데, 지역을 중심으로 그분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애국심을 밀양인의 저항정신(抵抗精神)으로 승화시켜서 민족과 겨레를 위해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위대한 애국자의 장거(壯擧)가 만대에 빛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듯 싶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구 영필 선생의 모함글 소개 1. 2.|작성자 초록바다
영남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
필자가 섬기는 밀양마산교회는 경상남도 밀양 땅에 위치해 있다. 밀양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길이 남을만한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로 유명한 고장이다. 조선총독부 폭탄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 밀양경찰서 폭탄사건 등을 비롯하여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로 이어지는 의열투쟁의 주역인 김원봉, 황상규, 윤세주, 최수봉, 고인덕, 김병환, 윤치형,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이병철 열사 등을 배출한 항일 저항 정신의 뿌리가 깊은 역사의 고장이다.
밀양에서는 1919년 3월 13일 기미년독립운동에 이어 영남지방의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밀양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지금까지 최초의 기록이라고 알려진 창녕의 영산 만세운동과 거의 같은 시기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밀양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밀양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에 밀양 장날(음력 2월 12일)을 맞이하여 궐기한 영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가 발표되고 3월 3일 장례식이 결정되자 밀양에서도 많은 애국인사들이 이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윤세주, 윤치형이라는 청년이 끼여있었다. 이 두 사람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만세 시위에 참예하고 독립선언서를 얻어 밀양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돌아온 즉시 밀양의 선각자로 동화학교 교장이었던 전홍표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친구, 선·후배들을 규합하여 밀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의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부북면과 밀양면 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 수천 장의 독립선언서를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고, 부녀자들은 수백 개의 태극기를 만들어 윤세주의 집에 숨겨두고 3월 13일 정오를 기하여 수천 명이 운집한 밀양장터에 잠입하여 이를 나누어 준 뒤 오후 1시 30분경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가로 기를 앞세우고 윤세주 열사가 높은 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은 열광하고 큰 깃발을 따라 거리를 누비며 만세행진이 시작되자 밀양에 주제하고 있던 10여명의 헌병과 경찰병력이 착검한 총을 휘두르며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막지 못하고, 부산의 헌병수비대 병력의 증파를 요구하여 가까스로 진압하게 된다.
하지만 타올랐던 만세의 함성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다음날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이 교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군경의 무자비한 총칼에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한 밀양출신 청년들의 불같은 애국심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사를 통하여 의열투쟁으로 이어진 역사적인 자취를 남긴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 밀양에서의 만세운동은 밀양교회와 춘하교회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그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었다. 그리고 이후 의열단에 가담했던 이들 가운데서도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신앙과 민족을 위하여 몸바친 귀한 애국열사들이었다.
한편 사회단체 밀양향토청년회(회장 김종원)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영남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인 3.13 만세운동을 재현행사를 오는 2007년 3월 13일에 가지기로 하였다. 이날 행사는 오후 1시에 밀양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인 경남 밀양시 내일동 사무소 앞에서 3.13 밀양만세운동을 재현하여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선열의 빛나는 항일 저항정신을 계승하고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3.1절은 그저 공휴일 정도로만 인식되어 야외 나들이 나가는 이들이 많다.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들도 하루 행사를 가질만한 좋은 국경일로 여겨 친교 나들이에 분주하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을 오늘에 되새기고 훗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가슴 깊이 새길만한 좋은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만하기에 2007년 3월 13일에 밀양에서 가지게 되는 이 행사를 소개하는 것이다. (2007. 3. 14. 교회복음신문 / 박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