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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천지를 초월한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하늘과 땅을 초월한 사람은 어떻습니까(超過乾坤底人如何)?”
“그런 사람이 있으면 곧 와서 알려다오.”
'초과건곤저인(超過乾坤底人)',우리말로 하늘과 땅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고 조주에게 묻는다. 조주는짐짓 내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아나? 하는 시늉을 하며,“그런 사람이 있으면 곧 와서 나에게 알려주게나."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런 의미로 말했겠는가. 이제 여러분도 '척하면 '착' 하고 알 때가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깨닫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뭐가 그렇게 된다는 말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312. '그대 안의 법당'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가람(伽藍)입니까?”
“절 3문과 법당이다(三門佛殿)."
가람(伽藍)은 저 앞에서 범어(凡語)로 승가람마의 줄인 말이라고 했다. 사찰, 절, 도량(道場)이란 뜻이라고도 했다. 또한 가람(伽藍)은 바로 스스로 도(道)를 닦는 장소인 우리 마음을 가리킨다고도 했다. 그러면 답이 바로 나오는가.'가람이 무엇입니까?'
'삼문불전(三門佛殿)', 절에 가면 보통 입구에 일주문(一柱門), 다음 해탈문(解脫門), 불이문(不二門) 등 드나드는 문(門)이 있다. 가람이란 바로 절의 3문이고, 그 안의 법당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절 안에만 3문, 불당이 있을까? 우리 마음 안에 똑같이 불당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바로 온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바로 정답 아닌 정답을 드리고 있다. 그렇다고 말로서만 헤아리면 도대체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마음에 콕 박혀야 한다. 그러려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마음 안의 법당을 보라.'
313. '지금도 없어지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不生不滅) 것입니까?”
“본래 나는 것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本自不生 今亦無滅)."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여러분 공부했다.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모든 법(法)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 자기 성품이 없어 텅 빈(空) 모습이다. 아니, 모습이 없는데 억지로 표현하다 보니 공상(空相)이라 한다.
불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 '불생(不生, 無生)의 진리'라 하는데 다시 한번 설명한다. 모든 법(사물, 생각 등)은 우리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특히 사물은 바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불법은 이것이 텅 비고, 존재하지 않고, 나지도 않은 것이라고 하는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 어렵고, 아예 들으려 하는 사람도 드물고,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진리를 통달한 사람이 잘 나오지를 않는다.
먼저 모든 사물, 현상, 우리의 생각 등 세상의 모든 것(法)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 수소와 산소가 서로 만나 화합하여 물이 생겨나는 이치이다. 이 물[하나의 法]은 없는 것은 아닌데 다른 것(수소, 산소)에 기대어 생겨나기 때문에 물(法)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은 없다. 수소, 산소의 화합물일 뿐인데 사람이 물이란 이름을 붙여 쓰나 물(法) 그 자체는 자기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諸法無自性)'고 한다.
물(法)은 자기 성품이없기 때문에 이 말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없고 텅 비었다는,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모든 법은 자아가 없다(法無我), 또는 법은 텅 비었다(法空)'고 말한다.
물(法)이 텅 비고, 자아가 없어 존재하지 않으니 물(法) 그 자체는 원래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겨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물(法)은 본질상 나지 않았다고 하여, 이것을 '모든 법은 나지 않는 것이 진리이다. 즉 무생법인(無生法印)'이라고 한다.
이 물(法)은 생겨나지 않았으니 또 없어질 리는 없다. 즉 무멸(無滅) 또는 불멸(不滅)이다. 이 불생(不生, 無生)과 불멸(不滅, 無滅)이 합쳐져서 드디어 불생불멸이 탄생한 것이다.
이 물(法)은 불생불멸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반야심경의 진리가 읊어진 것이다.
이 이치를 찬찬히 살펴보면 논리 전개상으로도 모든 법(法)은 무생(無生)임을 입증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무생의 진리에 통달하면 불법의 걸림돌을 모두 제거하게 된다. 모두 텅 비고, 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도대체 걱정하고 애달파 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물론 처음 말한 대로 눈으로 보면 이 물(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법(法)이 그 본질은 참으로 텅 빈 것이고, 현상은 묘하게 있는 것이라 하여,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 라고 한다. 우리 마음을 포함하여 모든 법은 진공묘유이다. 이것이 본질과 현상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불법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위 무생(無生)과 진공묘유의 이치를 완벽하게 이해하여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면 불법에 전혀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도(道)에 금방 접근한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이치 하나만은 꼭 통달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정말로 마음공부 한 보람을 찾을 것이다.
조주의 대답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나는 것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바로 한순간이다.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감이 익으면 빨간 홍시가 되어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지듯이 이 깨달음도 여러분 안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314.'주인공은 대왕'
한 스님이 물었다.
“누가 조주의 주인(趙州主)입니까?”
“대왕이다(大王是)."
이번에는 '조주의 주인(趙州主)'이 누구인지 묻는다. 조주선사의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가? 그 무엇인가? “(조주의) 대왕이다(大王是)." 조주성(趙州城)의 성주(城主)를 말하는 게 아니다. 조주의 마음이 대왕이다. 바로 마음의 왕(心王), 또는 우리의 법왕(法王)이다. 모든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결하는 왕이라는 뜻이다. 무생의 진리를 알면 이것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15. '급하고 절박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급하고 절박한 일(急切處)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오줌 누는 것이 작은 일이긴 하나 내가 몸소 가야만 한다.
(尿是小事須是老僧自去始得)."
'급하고 절박한 곳'은 앞에서 공부했다. 인연이 맞지 않으면 사람의 몸 받아 불법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우니, 이렇게 만났을 때 생사를 벗어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3계에 윤회하며 떠돌아다녀야 한다고 했다." 이것보다 급하고 절박한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이 스님 정말로 깨달음에 갈급한 상황인 것 같다.
조주선사는 대답한다. “오줌 누는 것이 작은 일이긴 하나 내가 몸소 가야만 한다."
이 스님의 갈급한 심정을 전혀 도외시하는 듯하다. 결국 '급하고 절박한 깨달음도 자기 스스로 이룰 뿐이지, 남이 도와준다고 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인데, 듣는 수행자로서는 맥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왜 이렇게 수행자를 맥 빠지게 만드는지 그 이유가 있다.
간절하게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뼈와 살을 깎는 수행을 한다고 해도 이것 또한 집착이다. 도(道)는 결코 집착해서는 얻을 수 없다. 어느 순간 탁 놓아버려야 한다. 믿음을 놓지 않으면서도 계속 '방하착(放下着)' 하라는 소리가 이것 때문이다. 익을 대로 익게 만들었으면, 어느 때부터는 계속 방하착!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홍시가 톡 터지듯이 깨친다.
316. '겨드랑이에 옷깃을 달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장육 크기의 부처 몸(丈六金身)입니까?”
“겨드랑이에 옷깃을 달아라.”
“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거든 다른 사람에게 재단해 달라고 해라(不會請人裁).”
'장육금신(丈六金身)'은 무엇인가?
장육(丈六)이란 높이가 1장(丈) 6척(六尺)이란 뜻으로, 4.8m라고 한다. 그러니까 4.8m 높이의 금빛 나는 몸(身)이 장육금신인데, 부처님(아미타불)의 몸을 일컫는다고 한다. 장육 불상이라면 4.8m 높이의 불상이 되겠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 이렇게 큰 경우는 없다.
이것이 뭐냐고 물으니, 조주는“겨드랑이에 옷깃을 달아라.”라고 대답한다. 존엄한 부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소리는 아닌 듯하다. 무슨 뜻일까?
질문한 스님은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주는“모르겠으면 다른 사람에게 재단해 달라고 해라(不會請人裁)”고 말했는데 참 재미있는 가르침이다. 재단(裁斷)이란 옷을 치수에 맞게 자르는 것이니, 본인이 겨드랑이에 옷깃을 다는 것에 빗대어 남에게 마름질을 잘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뜻이다. 바느질하는 사람에게 부탁하란 소리일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왜 겨드랑이에 옷깃을 달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재단해 달라고 부탁해라고 말했는지, 그 무엇을 비유하는 것인지 깊이 의심해야 한다. 모두 한 가지 통속으로 마음을 콕 찌르는 직지인심이다. 부처가 되려면 겨드랑이에 옷깃을 달아야 하고, 못 달겠으면 그 못다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재단 잘하면 된다. 스스로 옷깃을 달듯이 깨달아야 하고, 깨닫지 못하면 다시 우리 마음에 의지하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마음일 뿐이다. '고양이가 밥을 먹는데 밥그릇이 깨져버렸네' 억!
317. '큰일은 모퉁이에서 본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제게 의심이 있을 때는 어찌합니까?”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大宜小宜)?”
“큰 의심입니다.”
“큰일은 동북쪽 모퉁이에서 보고, 작은 일이라면 승당 뒤에서 보라(大宜東北角
小宜僧堂後)."
선(禪), 마음공부를 할 때 큰 의심이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선사의 말 한마디의 뜻을 알 수 없어 계속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고 참구(參究)하는 것, 즉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몰입하는 것, 이게 바로 화두 공부이다. “제게 의심이 있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한 공부인이 물었다.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大宜小宜)?”
조주는 그 의심이 얼마나 큰지 되묻는다. 그 스님은 당연히 아주“큰 의심입니다.”라고 자신이 있게 대답한다. '제가 지금 얼마나 이 의문 덩어리에 대하여 골치아파 하는지 큰스님은 정말 모르실 것입니다.'라는 투로 말하는 듯하다. 큰 의심이라고 하니까 조주는 답한다. “큰일은 동북쪽 모퉁이에서 보고, 작은 일이라면 승당 뒤에서 보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큰일(대변)은 동북쪽 모퉁이에서 보고, 작은 일(소변)은 승당 뒤쪽의 오줌 칸에서 보라'는 말 아닌가? 하하!
아주 심각하게 큰 화두를 잡고 의심을 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아주 무겁고 심각한 일을 이렇게 새털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승화시키는 방법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자기 성품을 보는데, 즉 견성(見性)하는데 즉각적인 효과를 많이 본 모양이다. 한없이 무거운 것을 탁 내려놓을 때 활짝 밝아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법문이다. '차나 마셔라.', '발우를 씻어라.' 등의 화두는 이런 종류이다. 마음에 큰 충격을 받으면 얼마나 큰 복을 가져오는지 여기서 곧바로 알아채기를 바란다.
318. '부처를 초월한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도 뛰어넘은 사람(佛向上人)은 어떤 분입니까?”
조주선사는 선상을 내려와 그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놈이 이만큼 크니 세 토막으로 내도 되겠다. 무슨 향상과 향하를 묻느냐?”
‘불향상인(佛向上人)’이란 선가에서 부처의 경지를 초월한 사람, 또는 부처의 지위를 지향하는 사람, 이 두 가지로 혼용하여 쓰이고 있다. ‘부처 위에 부처 없고, 부처 밑에 부처 없다’라는 옛말도 있는데 조주선사에게는 모두 쓸데없는 소리인 것 같다.
한 수행자가 '누가 부처도 초월한 사람(佛向上人)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는 의자에서 내려와 그 스님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그대는 키가 매우 크고 장대하니 한 세 토막쯤 내면 되겠구나"라고 마음에 충격을 준다. '네 몸을 톱으로 썰어 세 토막으로 나누겠다.' 이 뜻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곧바로 눈을 뜬다. 여러분이.
이 말은 '부처를 초월하느니 마니 그런 정신빠진 소리 하지 말고, 네 한 몸이나 잘 처신해라'라는 그런 의미인 것 같지만, 사실 '그대 몸도 법신, 보신, 화신의 3신(身)으로 된 부처이니 그 정도는 알아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곤 추가로 덧붙인다. '향상(向上), 향하(向下)는 또 무슨 똥막대기냐?'조주가 여러분에게 설하는 것이다.
319.' 가장 비밀한 뜻'
한 비구니가 물었다.
“무엇이 가장 비밀한 뜻(密密意)입니까?”
조주선사가 손으로 그녀를 꼬집으니 비구니가 말했다.
“큰스님께서도 이런 것이 있으시군요.”
“그대가 이런 것을 가졌다.”
오래간만에 여자 스님이 등장했다.' 밀밀의(密密)라는 게 무엇입니까?'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운 뜻, 바로 조사의 뜻을 말하지 않겠는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 그 뜻을 선가(禪)에서 각종 미사여구나 의미를 갖다 붙여 사용하고 있다. 모두 한 소리일 뿐이다." 가장 비밀한 뜻이란 무엇입니까?”
조주가 손으로 슬쩍 여스님을 꼬집는다. 비구가 어떻게 여자 스님의 몸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중생에게 바른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서는 원효대사처럼 기꺼이 파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뜻을 모르는 이 비구니는“큰 스님께서도 이런 것이 있으시군요.” 옛 부처(古佛)이신 조주선사까지도 섬씽(something)이 생각나는 때가 있습니까? 이런 뜻인가?
“그대가 이런 것을 가졌다.” 점잖게 표현하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너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불법을 얻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 이 뜻인 듯한데 꿈에서라도 이런 뜻이 아니다. 그럼 어떤 의미인가?' 나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다.' 오직 한 마음이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마음 하나로 통일을 이뤄라!
320. '주인도 손님도 없다.'
조주선사가 시중(示衆)하여 설했다.
“내가 30년 전에 남방에 있을 때 화롯가에서 주인도 없고 손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이를 거론한 사람이 없다."
위 설법은 조주록 초반에 공부했던 문답을 근거로 한 법문인 듯하다. 그것이 30년 전의 일이라고 하니까,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위 20번을 다시 한번 복습해 보면, 어느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손님(客) 가운데 주인(賓中主)입니까?”
“나는 각시에게 묻지 않는다.”
“누가 주인 가운데 손님(主中賓)입니까?”
“내게는 장인어른이 없다.”
임제선사의 '4빈주(四賓主)'를 주제로 한 이 문답에서, 조주는 손님 가운데 주인, 즉 빈중주(賓中主)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나는 각시에게 묻지 않는다'라고 답했고, 주인 가운데 손님, 즉 주중빈(主中賓)에 대해서는' 나는 장인어른이 없다'라고 답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수행자의 경지가 선생을 능가하는 것은 여자 색시에게 묻지 않는 것이고,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만한 역량이 없는 것은 장인이 없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선(禪)에 대한 이론이라곤 세운 적이 없는 조주로서는 손님 가운데 주인이든, 주인 가운데 손님이든 이런 쓸데없는 분별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서 누구에게 뭔가를 물을 필요도 없고, 장가도 안 가 장인이 없는 것처럼 데려와야 할 손님도 필요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지금까지 아무도 이 법문을 거론조차 안 하였는데, 새삼 오늘에야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봉의존 선사(822-908)의 말씀을 기록한 '설봉록'에는 아마 위 법문과 관련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한 스님이 물었다. “조주 스님의 무빈주(無賓主)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설봉 스님께서 이때 그 스님을 한번 발로 밟아주고, 다시 가까이 오라고 불러 그 스님이 가까이 오자, “가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곧바로 조주의 '주인도 손님도 없다(無賓主)'는, 그 정확한 뜻을 알아채야 하는데, 알쏭달쏭한가? 그냥 우리 안의 보배 구슬에는 주인도 손님도 없다. 모든 분별을 다 함께 녹여버린 자리가 우리 마음이다.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 아주 긴박하고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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