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독후감
Ⅰ.머리말
중고교 시절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명작 국내외 장.단편소설들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읽어봤다. 독서를 통해서 문학가가 된다든지 당대의 시대적 모순을 깨닫고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청소년기의 성장통에 연유해서 여기에 매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때 읽었던 책들을 당시에는 재미로 아니면 이왕 이 책을 들었으니 읽었는데 대부분 어떤 내용인지 생각이 나나 이 책의 내용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당대의 모순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갖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관심을 가지면서 몇 권이라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하는데 이 책인 <변신>을 조금 일찍 정리할까 해서 들다.
이 책은 고향집에 있는 것이여서 고교 방학 중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어느 박스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정리가 서재에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주인공이 그리 직장 생활에 만족은 느끼지 않으나 집안의 생계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날 흉측한 벌레로 변하면서 직장과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생각난다.
이후 이런 실존주의 종류의 책을 대학 들어가서 몇 권을 더 접해보다.
카프카의 작품을 실존주의로 분류하나 그렇게 보기에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담고 있어서 꼭 실존주의로 보지 않기도 한다. 이런 매력 때문에 먼저 이 책을 정리해본다.
먼저 실존주의가 어떤 철학.문학인지를 간단히 보고, 다음으로는 실존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다음에 이 책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Ⅱ.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역사주의와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어 개인적인 실존의 문제 즉 죄의식과 불안과 절망을 주제로 삼았다.
시대배경은 20세기에 실존철학의 등장은 세기의 배경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20세기는 과학기술 발전의ㅣ 불균형과 거기에서 야기되는 제반문제들, 두차례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 진보적주의적인 낙관주의의 역사관에 대한 회의, 추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학문적의 강박증,물질적 가치의 팽배에 따른 종교성의 상실과 인간소외 그리고 불안,죽음,고통, 타락 등로 나타난 인간현실의 부정적적인 측면의 증대, 인간적인 가치의 하향화시대였다.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문제가 아닌 개별적인 인간의 좌절,선택,죄책감,불안,죽음 등의 실존적 문제이다.
실존은 전통적인 철학적 개념인 본질에 대비된다.본질은 한 사물을 규정할 때, 그 사물으 변화하지 않은 고유한 특질을 지시한다. 인간의 동물과 구별되는 본질은 이성과 정신이라할 수 있다.
실존이 함축하는 말은
1.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을 다룬다.합리주의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이성을 지닌 유적 인간보다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개인에게 관심을 둔다.
2.인간에 대한 관심사는 실존적이라고 할 만한 생과 사, 고뇌 등의 숙명과도 같은 실존적인 체험과 주체적 자각이다. 실존주의는역사와 현실세계 속에서 소외되고 함몰되지 않는 개인의 주체적인 자각을 촉구한다.
3.인간의 실존은 사물을 고찰하는데 사용하는 범주와 과학적인고 합리적인 방법ㅇ로 파악이 불가능하다. 실존에 대한 해석방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4.실존은 초월이다.실존은 인간만의 것인데, 사물처럼 본질과 정의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물이 만들어져 있는 존재로서 생성소멸의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반해 인간은 자유 즉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스스로 투기投企함으로써 창조하는 자유인 것이다. 자유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데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가능성은 항상 실존의 미래라는 시간성 속에서의 선택과 투기를 말하며 이는 곧 초월이다. 또 실존은 항상 자기자신을 넘어서 세계의 다른 존재(사물과 타인)로 총체로서의 세계로 향하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Ⅲ.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
현대 부릊아 철학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주관적인 관념론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사조이다.
실존주의는 1930년대에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현상(세계경제공황)이 첨예화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립,발전하다가 그 이후 프랑스에 보급되면서 널리 확산되어 제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나서는 서구자본주의국가들으 부르주아 지식인과 소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인기있는 세계관이 되었다. 실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절망적인 시대에 인간들을 엄습한 전반적인 불안감과 더불어 성립되었다.
실존주의자들은 실존 개념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물질과 의식(객체와 주체)간의 인식론적 구별을 거부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 철학의 근본문제란 지금까지 철학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따라서 실존주의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평가절하하고 특히 과학적 인식의 가치를 대폭 깍아 내린다. 객관적 실재란 과학적 방식으로는 인식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개별적으로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객관적 실재를 체험케 하는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불안>이다.불안을 통해서 인간은 전체 세계 내에서의 자신의 궁극적 위치를 자각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절대적 <비합리주의>를 선언한다.비이성을 위해 이성을 평가절하한다.이성은 봉건귀족 사회와 그 제도 및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투쟁했던 혁명적 부르주아의 무기였으나 실존주의는 한낱 망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존주의 자들의 결론은 인간의 삶은 죽음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인간)가 존재하자마자 곧 떠맡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
현존재란 무無속에 들어가 있음을 뜻한다.이것은 모든 집단적인 책임을 해체하고 모든 이념을 파괴하며, 객관적인 척도를 부정하게 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친다.실존주의는 개별적이 존재이자 유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타자에 대한 의존이나 지향혹은 그밖의 어떠한 관계도, 특히 사회적 관계도 결여되어 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Ⅳ.변신에 대하여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소외와 경제적 토대에 의하여 형성된 가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의류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는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고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갑작스런 일에 당황하면서도, 그는 조금 더 자 보려 하지만, 수면에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등껍질을 침대에 대고 누운 상태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여러모로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출장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데,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시간에 늦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 하고, 짧은 틈을 이용해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며, 상대할 고객들은 계속 바뀌어 깊이 사귈 수도 없기에 대인 관계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른 기상 역시 불만스런 일이며,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난다는 건 인간을 바보로 만든단 말이야. 인간은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거든' 그레고르는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업 실패 때문에 사장에게 거액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빚을 청산할 때까지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즐겁고 보람된 노동이 아니라 강제된 노동이기 불쾌하고 의미없이 마지못해서 직장에 나간다. 이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소외에 기인한다.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와 생산의 사회화로부터 소외가 발생합니다.
그레고르는 상업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노동자로써 자신과 같이 노동력을 판매해서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노동자의 노동생산물을 유통시장에 판매하나 그 상품이나 이익을 소유하지도 못함으로써 소외를 느낀다.
또한 놀이처럼 또래들과 함께 처음부터 놀이과정을 숙지하여 계획을 세우고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매우 세분화.전문화되어서 노동과정의 전체과정을 알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만을 담당하고 있기에 노동자의 의지대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면서 재미있고 의미있게 일을 할 수 없기에 이로부터 소외를 느낀다.이런 계획과 운영은 자본가가 소유자이기에 자본가가 한다.노동자는 이런 계획하의 시킨대로 하기에 고역이 된다.그레고르도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짜여진 큰 틀 속에서 노동을 하기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유적존재부로부터의 소외'는 맑스가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특성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산활동을 한다고 말합니다. 동물의 실천은 생명활동일 뿐입니다. 즉 생명의 생존이 요구하는 것들의 지배 아래에서만 활동하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구와는 다르게 자유롭게 생산하고, 또 창조적이며 의식적으로 생산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오직 그의 생존을 위해서만 실행됩니다. 노동은 인간류로써의 특징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은 오직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그레고르 또한 동물과 달리 노동과정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산활동을 하기 보다는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만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출장 갈 시간이 이미 지났다. 그의 몸 상태를 두고 걱정하는 가족들과 방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 하다가, 몸을 움직여서 침대에서 빠져 나오려고 할 때 그레고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지배인이 온다. 근무 태만이라고 비난하는 지배인에게, 그레고르는 방 안에서 변명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인은 그레고르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그들 쌍방이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소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그가 다른 인간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현실화되고 표현된다
노동과정으로부터 소외를 느끼면서 자신의 자아와 대립하게 되고 이는 타인에게 전가하여 타인과 경쟁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소외를 느끼고 자신은 소외는 것이다.여기서 그레고르는 지배인과 경쟁과 대립을 하면서 소외를 느낀다.
다음은 헤겔이 사회 공동체 중 가장 원초적이면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한 가족에 대해서 보자.
헤겔은 마르셀이 말한 것처럼 가정은 존재를 드러나는 장소이어야 한다. 가정이란 사람이 그 어떠 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있음 그 자체, 곧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여기에서 가족이 사랑조차 경제적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류는 초기 단계에 군혼이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하는 난교(亂交)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족의 첫째 단계인 혈연가족, 즉 부모와 자녀간의 성교가 금지된 혼인집단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어서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 금지 관념이 생겼다. 그리고 다음에는 남자들은 많은 아내들 중에서도 본 아내를 가지고, 또한 여자도 여러 남편들 중 본 남편을 가지는 ‘대우혼’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식량이 풍부해지고 먹고 남은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잉여생산물의 분배를 놓고 드디어 인간사회에 체계적인 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개인이나 특정 가족이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됨으로써 빈부격차가 생기고 신분 지위의 고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류사에 처음으로 계급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농경과 목축을 담당하던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사유하고 축적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상속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만약 상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축적과 사적 소유는 의미 없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상속을 위해서는 자기 아들임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모계사회의 특징이었던 난혼은 금지되고 하나의 남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일처제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아버지의 혈통을 확인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 형성과 상속의 문제가 발생한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왔고, 개별성에 기초한 일부일처제 가족은 인류 역사 전체를 볼 때 아주 뒤늦게 생겨난 것이 된다.
드디어 부계제 사회가 출현한 것이었다. 소유의식은 지배의식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계급사회의 탄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식,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의식을 만들어내었다. 또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소유와 지배는 처음에는 주로 폭력에 의존했다.
여기에 더해서 자본주의 경제활동이 생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폐단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적나라한 이해관계, 냉정한 현금 계산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남겨두지 않았다.…인격의 가치를 교환의 가치로 해소시켜버렸고,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던 무수한 자유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버렸다.…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 위에 드리워진 그 감동적인 감상의 포장을 찢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금전관계로 만들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이전의 경제활동이 그 사회.정치.문화에 종속되어 있어서 필요한 욕구충족에 필요한 생산물인 사용가치가 주를 이루었으나 이제는 경제활동에 그 외 사회의 모든 활동이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경제활동이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교환가치를 위해서 생산되어야만 했다. 이런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은 모든 것을 계산가능한 양적개념으로 만들고 인간의 도구적 이성은 이를 위해서 충실한 개념이 되었다.
인간의 사랑, 우정. 행복 등도 계산가능한 양적 개념으로 경제적 개념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여기서도 가정의 사랑과 행복이 경제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음은 다음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죽은 그레고를 향해 가족들이 “옆방의 물건을 치워야 한다”라고 외침에서 가족들의 경제적 가치가 없어짐으로 해서 가지는 비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카프카의 <소송>작품을 통해서 작품세계를 보자.
맑스’가 ‘상품’으로 자본의 작동방식을 분석했다면 ‘카프카’는 사람들과 세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법원’을 통해 시대의 가장 투명한 모순들을 노동자 의식을 통해 읽어내었던 것이다.
‘카프카’의 ‘소송’은 죄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체포당한 금융(은행) 노동자의 황당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 ‘요제프 카’ 주변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등장하나 그들은 하나같이 법원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신부나 화가, 변호사, 일가친지, 그가 쉽게 유혹당하는 여자들도 알고 보면 법원에 피와 살처럼 속해있다. 자본주의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상품을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돈이 없다고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다) ‘카프카’도 그런 인간들의 세상을 그린다.
‘요제프 카’를 위한 조력자는 아무도 없고 법원을 거드는 조력자들이 카를 끊임없이 회유하려고 한다. 체포니 심판이니 소송이니 상급법원이니 하는 법률용어로 쓰인 소설이라서 법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체포당하는 것은 법 말 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본, 권력, 언론, 종교, 지식, 사랑 등도 사로잡혀지면 체포당하는 것이 아닌가? 체포당한다는 것은 해방이나 또는 억압을 향해가는 인간의 반작용과 그것의 철학을 낳게 한다. 그래서 일까. 카프카는 생존 시엔 무명작가였지만 사후에 가장 많은 논란과 상반된 해석을 낳게 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의 조국인 체코 공화국은 부르주아 퇴폐작가로 낙인찍어 ‘카프카’의 작품을 금서목록에 넣었던 시기가 있었다.
‘카프카’의 ‘소송’은 소위 열려있는 텍스트라고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흔히 그렇듯 텅 비어있는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고 그건 누가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내용의 획기적인 반전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요제프 카’는 소송을 유예시키며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켜나가는 법의 조력자들(변호사)이나 주변의 노예들(신부, 화가)을 하나씩 끊고 정리해나가면서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고자 한다. 법원의 통고가 없었는데도 사형집행인이 올 거라는 걸 알았던 카는 저항 없이 사형집행인을 따라간다. 그들이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주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부정성(안 좋았던 관습적 습성, 또는 지적우월감 같은)을 중지시키려는 각성자인 ‘요제프 카’는 그들의 칼을 빼앗아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을 법도 하지만 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 새로 태어나는 한 순간에 그는 개 같은 죽음으로 자신이 사형집행인에게 인식될 것 같아 치욕을 느낀다. 그는 치욕을 희망으로 간직하고 싶다. 저 멀리 허름한 건물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활짝 흔들고 있는 마른 남자를 보면서 ‘요제프 카’는 자신을 이해해줄 친구를 떠올린다. 이는 마치 전태일이 죽으면서 대학생 친구들을 절실히 원했던 심정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전태일’은 자신이 죽으면서도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요제프 카’도 자신의 죽음 뒤의 일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참 처절한 노동자의 붙잡힘과 해방의 희망에 관한 아주 명확한 이야기이다.
2012.8.12. 24:00 두암동 미라보아파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