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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 4장
성령의 사역,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새언약에 담긴 새 창조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바울의 새 언약의 사역,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위로받고 하나님이 세상에 알려지는 수단인 자기가 겪는 고난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로서의 정당성을 변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이 자신의 새 언약의 사도로서의 사역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1~6절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주장이 공허한 자랑이 아니라 성령과 자신의 고난의 사역을 통해 뒷받침되므로 자신의 두 가지 수사적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합니다(1절). 고린도 교인들의 변화된 삶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자로서의 바울의 참된 사도직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에게서 온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돌판'에 쓰신 옛언약과 '육의 마음판에' 쓰는 사도의 사역을 대조합니다. 바울은 '먹으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 위에 씁니다.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새 언약이 바울의 사역을 통해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2~3절).
바울은 마침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옛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것처럼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르심의 결과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바울의 권위있는 직분을 가리키는 반면 일꾼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전달하는 바울의 역할, 바울이 사도가 아닌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역할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일꾼은 새 언약에서 약속된 바와 같은 성령을 전달하는 바울의 역할을 가리키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지킬 한 백성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위에 자신의 법을 쓰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과 새 언약의 사역은 '율법 조문'이 아닌 '영으로' 이뤄집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출애굽기 32~34장에 대한 바울의 해석, 옛 언약의 사역과 새 언약의 사역의 대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바울은 신자들에게 금송아지 사건과 두 번째 율법 수여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7~11절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옛언약 새언약, 모세의 사역이 '죽게 하는....직분'으로 묘사되는 것은 율법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율법의 영구적인 가치는 하나님이 친히 십계명을 돌에 써서 새기셨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옛 언약 아래서 여전히 '목이 곧은' 백성이었고 계명 자체는 사람들에게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계명의 효과는 정죄였습니다. 율법 수여에는 너무나 큰 영광이 수반되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을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모세 얼굴에서 너무 밝게 비추어서 백성들은 모세를 쳐다보기로 두려위 했습니다(7~9절).
옛 언약은 과거에 하나님의 스스로를 드러내는 임재의 초점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 언약에 이르렀으므로 옛 언약은 영광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심지어 옛 언약의 영광을 없어질 것이 되게하셨읍니다. 새 언약은 다가올 시대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을' 영원한 언약이라는 점에서 새 언약의 영광 또한 옛 언약의 영광보다 더 큽니다(10~11절).
12~18절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의 확신에 찬 기대는 영광스런 새 언약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음을 변화시킬 성령을 부어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바울은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의 일꾼으로서 자기 얼굴을 가렸던 모세와 대조적으로 훨씬 더 나은 언약을 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12절).
수건은 13~18절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며 바울은 이제 이 개념을 정교하고 복잡한 이미지로 발전시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에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는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린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석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영광이 점차 사라져서 옛 언약의 일시적인 생각을 암시하는 것을 보지못하도록 자기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는 것입니다(13절).
모세가 수건 없이도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언제든지 믿음 안에서 주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수건과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야기된 하나님에 대한 불이해가 벗겨질 것입니다(16절).
'주는 영이시니', 이 어렵고 압축적인 진술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경험 속에서 함께 활동하신다-즉, 주님(그리스도)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비록 두 분은 여전히 구별된 인격이지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바울의 일차적인 요점은 새 언약 아래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옛 언약 아래서 여호와에 대한 모세의 체험에 상응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성령은 새 언약 아래서 우리의 마음을 완고함이라는데에서 해방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글에서 규칙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여 여기서도 분명 그렇습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바울은 주의 영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 중에 어느 두 부분은 같은 인격이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을해선 안됩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양태론 이단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 은혜로운 목적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있느니라', 비록 문맥 속에는 명시돼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및 성령의 임재와 함께 찾아오는 정죄, 죄책, 죄, 사망, 옛 언약, 복음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자유를 가리킬 것입니다(17절).
'수건을 벗은 얼굴로....주의 영광을 보매', '보매'라고 번역된 단어(헬, '카톱트리조')는 '보다'나 '반영하다' 또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라는 뜻을 가질 수 있고 주석가들은 세 관점 모두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거울과의 관련성이 이 단어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보다'라는 의미가 아직도 모르는 것을 가로막는 수건을 덮고 있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수건이 벗겨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개념과 더 잘 조화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은 출 34:34에서의 모세의 경험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는 열쇠로 사용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우리가 다')과 모세와의 비교를 계속합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주님을 본 결과로 신자는 타락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18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새 언약에 담긴 새 창조의 여명,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이 타락한 세상 중에 새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에 사역 가운데 낙심하지 않습니다.
1~6절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은 돈이 동기가 되어 사역을 하지 않으며 인간의 인정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해석시키거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에 맞도록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포도주 상인이 포도주를 해소시키는 일에 대해서도 사용된 단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도리어 바울이 '진리를' 나타내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그를 재판관으로 추천하며 그가 선택된 내부 집단에게만 은밀한 복음 내지 감춰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세 번이나 외적인 증거를 통해 자신을 추천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면 세 번은 비록 매 번 하나님의 자비 덕분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가리킴으로써 자신을 추천합니다(2절).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임재에서 분리되게 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악한 마음을 가르킵니다. '이 세상의 신'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미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변화되어 그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고 그 임재 안에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조명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로 전파하고(복음) 바울 자신이 청중을 섬기는 가운데- 즉 스스로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종'노릇하는 복음의 화신으로서- 복음을 삶으로 실천합니다(3~5절).
바울은 창세기 1장3절에서 빛이 창조된 일을 이용하여 회심을 이 타락한 세상 가운데 새 창조의 여명으로 묘사합니다. '예수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것은 곧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영광과 마주치는 것입니다(6절).
7~18절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새 언약에 담긴 부활의 능력, 사도로서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바울로 하여금 역경을 견뎌낼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바울에게 세상 끝 날에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징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보배',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질그릇', 이 구절은 1:3~11절과 2:14~17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고린도후서의 핵심 주제, 즉 하나님은 인간에 약함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를 구현하신다는 사실을 재차 진술합니다(7절).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이 구절들은 현재 악한 세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일에 역설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죽음에 넘겨짐'은 (역경을 견뎌내는 바울의 능력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강력하게 확산되는 데서 경험 되는) '예수의' 부활 '생명'의 능력이 바울이 '죽을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섭니다. 바울의 고난과 인내는 고린도 교인들도 역경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그들 가운데 바로 이 부활 '생명'이 생겨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8~12절).
'우리가....가졌으니', 이 말은 바울이 방금 말한 내용을 요약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같은 믿음의 마음', 대다수의 해석자들은 이를 성경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다윗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라고 간주합니다# 성령은 믿음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13절).
'겉사람....속사람', 이는 영혼의 강건해짐과 대조되는 육체의 약해짐을 가르치며 또한 현재의 악한 시대에서의 바울의 고난의 삶(바울의 겉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거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변화(바울의 속사람) 사이에 대조를 나타냅니다(16절).
이전에 바울의 고난은 너무 짊어지기 무거운 짐이었지만 이제 그 고난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환난의 경한것'일 것입니다. 고난은 바울을 영속적으로 해하기는커녕 바울이 크고 영원한 보상을 받는 일을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 자체로 이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에 비춰볼 때만 유익을 줍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즉, 바울의 고난과 현재의 이 시대 모든 결함)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다가올 부활의 때에 있을 만물의 완전한 회복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확실한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잠깐이요...영원함이라', 이 대조는 '영원함이라'(직역하면, 다가올 '시대'[헬, '아이오니오스']에 속하거나 그 시대로 특정 지어진다는 뜻)라는 말이 무시간성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가리킴을 보여줍니다(17~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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