Ⅻ. 임제(林悌)의 문학-1
번역/나천수
1. 云云矣。(운운의)/앞부분은 여차 여차 하더라.
惟厚賦而薄發者。(유후부이박발자)/생각건대 넉넉하게 타고 났으나 조금 밖에 드러내지 못한 사람은
吾友林君子順是已。(오우림군자순시이)/나의 벗 林君子順1) 바로 이 사람이다.
君家世弓刀。(군가세궁도)/임군은 대대로 武人 집안으로2)
斥弛不群。(척이불군)/법도에 얽매이지 않은3) 무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少嘗軒輊其才。(소상헌지기재)/일찍이 어려서부터 드높은 기개의4) 재주는
慨然慕燕代之風。(개연모연대지풍)/개연히 燕나라와 代나라 풍5)을 그리워하였다.
時於香奩酒肆。(시어향렴주사)/때로 香奩6)이나 술집〔酒肆〕에서
漫浪以自適。(만랑이자적)/제 마음대로 얽매이지 않고 즐겼으며
或悲歌慷慨。(혹비가강개)/혹은 슬픈 노래로 강개하였으니
人莫測其端。(인막측기단)/사람들은 그 端緖를 헤아릴 수 없었다.
而常自謂功名可徒手取。(이상자위공명가도수취)/그런데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功名이란 것은 맨손으로 취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樂弛置自放。(악이치자방)/즐거워하는 것을 내버려 두거나〔弛置〕 자유분방하고
縱謔不羈。(종학불기)/얽매이지 않고〔不羈〕7) 해학을 일삼았으며
不屑屑操觚以黔其口吻。(불설설조고이검기구문)/자질구레하게 문필에 종사하지도8) 않았는데 文墨으로서9) 남의 입에 오르내렸으니10)
世以是疑之。(세이시의지)/세상은 이것을 가지고 의심하였고
而亦以是奇之。(이역이시기지)/또 이것을 가지고 기이하게 여겼다.
中忽自悟。(중홀자오)/그러던 중에 갑자기 스스로 깨달아
稍諱言俠。(초휘언협)/말의 호협함을 차츰차츰 숨기고
遂屈首書史。(수굴수서사)/마침내 書史에 머리를 굽혔다11).
因遍遊名山。(인편유명산)/ 명산을 두루 유람함으로 인하여
以佐其奔放豪逸。(이좌기분방호일)/자유분방하고 작은 일에 매임이 없이 호방한 것을12) 북돋아
而洩之以詩。(이설지이시)/詩에다 쏟아 냈다.13)
往往若晴虹之舒卷于空明而不可得以摸也者。(왕왕약청홍지서권우공명이불가득이모야자)/왕왕 마치 비가 그치고 갠 날 무지개가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에서 나타났다, 끊어졌다〔舒卷〕 하지만 무지개를 본뜰 수 없는 것은
雖由天造。(수유천조)/비록 하늘의 조화로 말미암지만
而至於丹靑綵繢。(이지어단청채궤)/붉고 푸른 수놓은 비단에 이르기 까지
得之樊川而弁髦之者多矣。(득지번천이변모지자다의)/당나라의 시인 樊川14)에게 터득하였으나 한번 쓰고 나면 다시 쓰여 지지 않는 물건15) 같은 것이 많다.
今去公歿。(금거공몰)/이제 公이 죽고 떠나간 지
二十有餘年。(이십유여년)/20여년(1587년)인데
其弟懽得君詩若干篇。(기제환득군시약간편)/그의 동생 懽이 林君의 시 약간 편을 가지고
屬余剞劂之。(촉여기궐지)/나에게 간행을 맡겼다.
余嘗與公遇景酬唱。(여상여공우경수창)/내가 일찍이 公과 더불어 좋은 경치 만나 시를 주고받았는데,
竊覸其所爲。(절간기소위)/가만히 그러한 추억을 엿보니
先自胸中無滯礙。(선자흉중무체애)/먼저 스스로 가슴 속에서 막힘이 없었으며16)
比物屬辭。(비물속사)/사물을 비유하여 문장을 지었는데
固已脫然超乎文字之外。(고이탈연초호문자지외)/진실로 이미 초연하게 문자 밖에서는 뛰어나므로
而能剔去根塵。(이능척거근진)/능히 六根과 六塵17)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涵而揉之。(함이유지)/너그럽게 바로 잡았다.
故意行言從。(고의행언종)/그러므로 뜻이 가는대로 말을 따라서
渙若不思。(환약불사)/생각치도 않은 것처럼 풀렸는데〔渙〕
而水湧雲騰。(이수용운등)/물이 솟구치고 구름에 오른 것처럼
自爲一家。(자위일가)/스스로 一家를 이루니
若彩蜃浮海。(약채신부해)/마치 채색의 신기루가 바다 위에 떠 있고
結成空樓而忘乎斤斧矣。(결성공루이망호근부의)/하늘에 누각을 결성하려는데 도끼를 잃어 버렸다면
是豈非韓子所謂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者乎。(시기비한자소위수대이물지부자대소필부자호)/이것이 어찌 韓子18)에 이른 바, “물이 크면 물위에 뜨는 물건은 크든 작든 모두 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後之欲昇公堂者。(후지욕승공당자)/훗날 벼슬에19) 오르려 한 자
如不欲歷階。(여불욕력계)/계단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려 하지 않을 것 같다.
而直將御風也。(이직장어풍야)/그런데 곧바로 바람을 타려면20)
則惟善養其氣幾矣云云。(칙유선양기기기의운운)/다만 그 氣를 잘 기르면 될 것이다 운운...
○백사집(白沙集) > 白沙先生集卷之二 > 叙 > 淸江集序에 보면 말미 글이 “ 是豈非韓子所謂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者乎。後之學先生之爲者。唯善養其氣。幾矣。”이다.
○백사가 쓴 淸江集序의 내용이 백호집 서문과 상당부분 같아 보이니, 앞과 끝 부분이 망실되어 잃어버렸다 하지만 극히 작은 부분일 것 같다. ○백사가 서문을 쓴 淸江集은 李濟臣(1536-1583)의 유집이다. 淸江은 李濟臣의 號이다.
○則惟善養其氣幾矣云云는 則惟善養其氣。 幾矣。(다만 그 氣를 잘 기르면 될 것이다.) 라고 끝맺음 할 것 같다. |
右白沙李相國舊撰序文。(우백사리상국구찬서문)/백사 이상국이 예전에 지은 서문
亡其首尾。(망기수미)/앞과 뒷부분은 亡失되었다.
Ⅻ. 임제(林悌)의 문학-2
번역/나천수
2. 林悌字子順。(임제자자순)/임제(林悌)의 자는 자순(子順)이고
羅州人。(나주인)/나주인으로
萬曆丁丑進士。(만력정축진사)/만력 정축년(1577, 선조10)에 진사21)가 되었다.
性倜儻不羈。(성척당부기)/성품이 대범하고 빼어나 남에게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아서
與世齟齬。(여세저어)/더불어 세상과는 틀러져서 어긋나므로
因此不遇。(인차부우)/이로 인하여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행하였으며
早卒。(조졸)/일찍 죽었다.
官止儀制郞中。(관지의제랑중)/벼슬은 의제 낭중(儀制郎中)22)에 그쳤다.
歿後人誣。(몰후인무)/죽은 후에도 남들에게 무고하기를
與逆魁論項羽。(여역괴론항우)/“역적의 괴수23)와 더불어 항우를 논하면서
天下英雄。(천하영웅)/항우는 천하 영웅이지만
惜不成功。(석부성공)/애석하게도 功을 이루지 못하였다 라 하면서
因相對涕下。(인상대체하)/인하여 서로 마주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다.
語傳三省。(어전삼성)/이 말이 三省24)에 전해지자
鞠其子地。(국기자지)/그 아들 地25)를 鞠問하니
地以所作烏江弔項羽賦。(지이소작오강조항우부)/地는 아버지가 지은 ≪烏江弔項羽賦≫26)를
投進。(투진)/제출하므로
因得原徙邊。(인득원사변)/인하여 용서를 받고 변방으로 귀양을 갔다.
其送李評事瑩詩曰。(기송이평사영시왈)/≪평사 李瑩27)을 보내며≫란 詩에 이르기를
朔雪龍荒道。(삭설용황도)/龍荒道28)는 북풍한설 내리고
陰風渤海涯。(음풍발해애)/渤海 물가는 陰冷한 바람 부네.
元戎掌書記。(원융장서기)/최고 사령관〔元戎〕29)의 書記를 맡으니
一代美男兒。(일대미남아)/한 시대의 아름다운 사나이로다.
匣有干星劍。(갑유간성검)/器匣30)에는 방패와 星劍31)이 있는데
囊留泣鬼詩。(낭유읍귀시)/주머니에는 귀신도 울릴 詩가 남았네.
邊沙暗金甲。(변사암금갑)/변방의 모래 금갑 옷에 자욱한데
關月照紅旗。(관월조홍기)/關門 위의 달 紅旗를 비추네.
玉塞行應遍。(옥새행응편)/변방의 군영 응당 두루 다닐 것이니
雲臺畫未遲。(운대화미지)/雲臺32)에 畵像 걸 날 늦지 않겠네.
相看豎壯髮。(상간수장발)/머리털 씩씩하게 세운 모양 바라보니
不作遠遊悲。(부작원유비)/멀리 벼슬 나아가는 것 슬퍼하지 않네.
絶似楊盈川。(절사양영천)/楊盈川33)과 비슷한 絶句이다.
悌號白湖。(제호백호)/임제의 호는 백호이다.
官北評事。(관북평사)/벼슬은 북평사를 지냈다.
○按簪纓譜。(안잠영보)/≪簪纓譜≫를 살펴보니
悌長子坦號閒亭。(제장자탄호한정)/임제의 장자 坦(탄)의 號가 閒亭인데
不仕。(부사)/벼슬을 하지 않았다.
次子垍號月牕。(차자게호월창)/작은 아들 垍(게)의 號는 月牕으로
官佐郞。(관좌랑)/벼슬이 좌랑을 지냈다.
坦或地之改名歟。(탄혹지지개명여)/坦이 혹시 地의 개명 아닌지
○白湖閨怨詩曰。(백호규원시왈)/백호의 ≪閨怨≫34)시에 이르기를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열다섯 살 越나라 소녀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35)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남부끄러워 말없이 헤어졌네.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돌아와 겹문 닫고는
泣向梨花月。(읍향리화월)/배꽃에 비친 달 보며 울었네.”라 하였다.
山寺詩曰。(산사시왈)/≪山寺≫시에 이르기를
半夜林僧宿。(반야림승숙)/“한 밤중 숲속에서 스님이 자는데
重雲濕草衣。(중운습초의)/무거운 구름이 초의를 적시네.
巖扉開晩日。(암비개만일)/해지는 저물녘에 석굴 사립문 여니
棲鳥始驚飛。(서조시경비)/깃든 새 비로서 놀라 날아가네.”라 하였다.
○瑩固城人。(형고성인)/李瑩은 고성인으로
字彦潤。(자언윤)/자는 언윤이며
號南皐。(호남고)/호는 남고로
靑坡隆之孫。(청파륭지손)/청파 융의 손자로36)
官牧使。(관목사)/벼슬은 목사를 지냈다.
(許筠, 《惺所覆瓿藁》卷26, 〈鶴山樵談〉)
(허균 (許筠 : 15691~618))《성소부부고》卷26. (〈학산초담>)
허균이 25세 되던 해인 1593(선조 26)년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성소부부고> 원본에는 없던 것을 번역서에는 부록으로 실었다. 〉)
※참고자료
청나라 黃景仁의 《烏江弔項羽》詩道
번역/나천수
憤王遺像黯承塵,(분왕유상암승진)/王37)의 초상화가 먼지 낀 시커먼 돗자리38)에 있는 것도 원통한데
已事空悲五裂身。(이사공비오렬신)/이미 일이 글러 몸이 다섯으로 찢어지는 것도 서럽네.
百二山河銷赤炬,(백이산하소적거)/函谷關은 둘이 지켜도 백사람을 당해내는데39) 붉은 횃불사라지니
八千子弟走青磷。(팔천자제주청린)/항우를 따르는 팔천 子弟들 도깨비불40) 에 도망가네.
好尋鬼母揮餘淚,(호심귀모휘여루)/鬼子母神41) 찾아 남은 눈물 뿌리기 좋아하면
自有獅兒作替人。(자유사아작체인)/사자가 있더라도 자연히 사람을 바꾸려 하네.
王氣東南來尚早,(왕기동남래상조)/왕이 날 조짐이 동남쪽에서 오지만 오히려 이르고
不須亭長在江濱。(불수정장재강빈)/마땅히 烏江의 亭長이 江가에 있어야 하는데 있지도 않았네.42)
‣초패왕 항우는 8천 제자와 함께 강동에서 일어나서 유방과 더불어 8년간 천하를 놓고 싸움을 하였으나 천운(天運)을 얻지 못해 실패한다. 마지막 해하(垓下)싸움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많은 군사를 잃고 사랑하는 우(虞)의 시신마저 뒤로 한 채 오강(烏江)까지 쫓겨 내려온다. 오강의 정장(亭長)은 배를 대며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하도록 권유하였지만, 항우는 이미 천운이 없음을 알고는 거부한 채 오강의 강가에서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다.
Ⅻ. 임제(林悌)의 문학-3
번역/나천수
3. 林正郞白湖悌爲詩學樊川。(임정랑백호제위시학번천)/정5품 정랑의 백호 임제는 시를 지으면서 樊川43)을 배워
名重於世。(명중어세)/명성이 세상에 거듭되었으며
蓀谷嘗論人詩品。(손곡상론인시품)/蓀谷44)이 사람들의 시품을 논하다가
及於白湖。(급어백호)/백호에게 미쳐서는
目之能手。(목지능수)/能手45)로 지목하였는데
聞者皆以爲善喩。(문자개이위선유)/듣는 이들은 모두 잘 비유한46) 것이라 하였다
白湖年少時。(백호년소시)/백호는 젊은 시절에
自湖西向洛。(자호서향락)/호서(湖西)에서 서울47)로 향해 가는데
政當窮冬。(정당궁동)/바로 음력 섣달48)을 당하여
風雪滿天。(풍설만천)/눈바람이 하늘에 가득하였는데
道上成一律曰。(도상성일률왈)/길에서 율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이르기를
大風大雪高唐路。(대풍대설고당로)/ 큰 바람 큰 눈 오는 高唐49) 길에
一劍一琴千里人。(일검일금천리인)/검 하나 거문고 하나로 천리를 가는 사람이네.50)
僮寒馬病若無賴。(동한마병약무뢰)/家僮은 춥다하고 병든 말은 의지할 곳 없는데
嘯志歌懷如有神。(소지가회여유신)/뜻을 읊조리고 감회를 노래하니 신들린 것 같구나51)
鴉啼喬樹暮煙冷。(아제교수모연랭)/갈까마귀는 높은 나무에서 울고 저녁연기는 찬데52)
犬吠孤村民戶貧。(견폐고촌민호빈)/개 짖는 외로운 촌락에 민가는 가난하네.
悠悠忽起故園思。(유유홀기고원사)/홀연히 일어나 아득한 고향 동산 생각하니
錦水梅花南國春。(금수매화남국춘)/매화 꽃피는 錦水53)는 남국의 봄이겠네.
高唐。(고당)/고당은
所過地名也。(소과지명야)/지나가는 곳의 지명이다.
成大谷先生見此詩。(성대곡선생견차시)/성대곡(成大谷)54) 선생이 이 시를 보고
願見其面。(원견기면)/한번 만나보기를 원하여
白湖遂造拜。(백호수조배)/백호가 마침내 처음 절을 올리니55)
甚驩。(심환)/ 매우 기뻐하였다.
癸未甲申年間。(계미갑신년간)/계미갑신년(癸未甲申年間1583:선조16 - 1584: 선조 17)간에
成先生牛溪爲銓曹亞判。(성선생우계위전조아판)/우계(牛鷄) 성혼(成渾)56)선생께서 전조(銓曹)의 아판(亞判)57) 이었을 때,
憐其抱才沈滯。(련기포재침체)/백호가 재주를 품고 침체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欲遂吹虛/噓/。(욕수취허)/마침내 그를 추천하고자 하여58)
邀而與之語。(요이여지어)/초대하여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問其姓氏所由來。(문기성씨소유래)/成渾이 백호에게 성씨의 유래를 물으니
仍曰。(잉왈)/백호가 이에 말하기를
必累世奕閥矣。(필루세혁벌의)/“필시 여러 세대에 혁혁했던 문벌이었는데” 라고
對曰。(대왈)/대답하면서 또 말하기를
數三代忝得科名。(수삼대첨득과명)/“수 삼대에 욕되게도 과거 시험의 합격의 명예〔科名〕을 얻어59)
人以爲貴姓。(인이위귀성)/사람들이 보기 드문 姓이라고 여기지만
而實則起於寒微。(이실칙기어한미)/실제는 寒微60)한데서 일어나
世葉未久矣。(세엽미구의)/세대의 갈래〔世葉〕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牛溪大加奬歎。(우계대가장탄)/우계는 더욱 더 그를 기리고 찬탄하며,
謂其有拔俗氣像。(위기유발속기상)/그에게는 세속을 초탈한 기상이 있음을 논평하며
將置淸班。(장치청반)/그를 청반(淸班)61)에 두고자 하여
遂與於弘文錄。(수여어홍문록)/마침내 홍문록(弘文錄)62)에 그의 이름을 등재하였는데〔與〕
未幾病逝。(미기병서)/얼마 안 있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其所爲詩絶無窮態。(기소위시절무궁태)/그가 지은 시는 궁태(窮態)라곤 전혀 없는데
竟不振。(경불진)/끝내 명성을 떨치지 못했으니
何哉。(하재)//무슨 까닭인가.
(양 경우,《제호집》卷9, <임제의 시품>)
Ⅻ. 임제(林悌)의 문학-4
번역/나천수
4. 林斯文悌。(임사문제)/ 사문 임제는
豪士也。(호사야)/호걸스런 선비이다.
嘗爲平安評事。(상위평안평사)/일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63)
行過松都。(행과송도)/송도를 지나가다가
以隻鷄壺酒操文往祭于眞伊墓。(이척계호주조문왕제우진이묘)/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황진이(眞伊)64)의 묘에 제사지냈다.
文辭放蕩至今傳誦。(문사방탕지금전송)/글귀나 문구가 방탕(放蕩)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암송되고 있다.
悌夙有文才任俠傲物。(제숙유문재임협오물)/임제는 일찍이 문재(文才)가 있고 맡은 일은 호협하지만〔任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傲物〕
終爲禮法之士所短。(종위례법지사소단)/종말에는 예법을 지키는 선비로서 단점이었다.
官纔正郞。(관재정랑)/벼슬이 겨우 정랑에 이르렀는데
齎志早沒。(재지조몰)/뜻을 지니고도 일찍 죽었으니,
豈非命也。(기비명야)/어찌 운명이 아니랴.
惜哉。(석재)/애석한 일이다.
(李德泂撰, 《松都記異》)
(이덕형 찬, 《대동야승》<송도기의>)
1) 임군자순(林君子順) : 임제를 말하며 자순은 자이다. 1549(명종 4)∼1587(선조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세궁도(世弓刀) : 직역하면 대대로 활과 칼이란 뜻, 의역하면 대대로 武人이란 뜻. 아버지 林晉, 증조부 林枰이 무과 합격하여 武人집안이라 한 듯하다. 조부 林復은 문과 급제하였다.
3) 척이(斥弛) :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조선왕실록 사례> 欲致斥弛之士/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를 오게 하려면
4) 헌지(軒輊) : 우열, 드높은 기개, 뒤집어지고,
5) 연대지풍(燕代之風) : 연나라, 대나라는 춘추 전국시대의 지명으로 지금의 하북성 지역이다. 형가를 비롯한 의협들이 그 지방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대개 비분강개한 기풍을 뜻하게 되었다.
6) 향렴(香奩) : 본래는 향을 넣어두는 그릇. 여기서는 妓房을 가리킨다. 韓 偓, (844~923) 중국 당나라 말의 시인. 시집《향렴집(香奩集)》에서 유래된 말로써 관능적인 정경을 화려하고 곱게 직설적으로 나타냈다. 그 시풍은 후세에 '향렴체(香奩體)'로 불렸다. 한편 우리나라의 역대 여류 시인들의 시를 선별하여 모아 놓은 책으로 內題는《本朝香奩詩》가 있다.
7) 불기(不羈) : 얽매이지 않다. 벼슬하지 않다란 뜻도 있음.
8) 조고(操觚) : 고(觚)는 네모진 나무 패.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 여기에 글자를 적었음, 붓을 잡아 글을 씀. 문필(文筆)에 종사(從事)함이란 뜻.
9) 이검(以黔) : ‘文墨으로서’로 해석하였으나 이 경우 以墨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영인본 원문도 以黔이니 다른 해석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以黔其口吻은 ‘그의 입을 검게 더렵혔으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10) 구문(口吻) : 직역하면 ①입술 ②주둥이. 부리 ③말투 란 뜻, 의역하면 다른 사람의 말,
11) 굴수(屈首) : 고개를 숙이다, 이를 ‘몰두하다’로 의역할 수 있을까?
12) 호일(豪逸) : 예절(禮節)이나 작은 일에 매임이 없이 호방(豪放)함
13) 설지(洩之) : 쏟아내다.
14) 번천(樊川) : 杜牧의 號이다. 字는 牧之이다. 803년~852년대 당나라 시인. 두우(杜佑)의 손자다
15) 변모(弁髦) : 쓸모 없는 것. ‘변(弁)’은 치포관(緇布冠)으로서 관례(冠禮)를 행하기 전에 잠시 쓰는 것을 가리키고, ‘모(髦)’는 결혼하기 전 총각의 더벅머리를 말함. 이것들은 관례가 끝나면 모두 소용없게 되므로, 한번 쓰고 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의 비유로 쓰임.
16) 체애(滯礙) : 지체될까, 막히다,
17) 근진(根塵) : 六根과 六塵 즉 내 몸의 여섯 가지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眼耳鼻舌身意]과 그것들이 상대하는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함.
18) 한자(韓子) : 중국 춘추 시대 말기, 한비(韓非)가 엮은 책, 한유의 答李翊書에 ‘氣水也 言 浮物也 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 氣之與言猶是也 /문장의 기(기)는 물이요, 말(言)은 물에 뜨는 물건입니다. 물이 많으면 물 위에 뜨는 것이 크든 적든 모두 뜨게 될 것입니다.’가 있다. 이 말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작자의 내면의 기가 충실하고 왕성하면 어떤 내용이고 자유자재로 담아 훌륭한 문장을 이룰 수 있음을 물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19) 공당(公堂) : 공무를 보는 곳, 官衙, 의역하면 벼슬,
20) 어풍(御風) : 바람을 타다, 바람을 馭車하여
21) 임제의 진사시 방목을 보면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4위(4/100)’ 로 되어 있어 정축년이 아니라 병자년(1576년)이다. 한편 1576년에는 문과 합격의 방목 기록을 볼 수 있다.
22) 의제랑중(儀制郎中) : 예조정랑 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의 별칭
23) 역괴(逆魁) : 정여립(鄭汝立)을 말함
24) 삼성(三省) : 조선시대는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를 말함.
25) 지(地) : 林悌의 아들 林地를 말한다. 선조수정실록 23년 경인(1590,만력 18) > 4월1일 (임신) > 에 보면 ‘林地는 임제(林悌)의 아들이었는데 【임제는 시를 잘한다는 명성을 지녔고 무협(武俠)을 좋아하여 호걸이라 자처하였다. 벼슬은 정랑(正郞)이었다.】 ’란 기록이 있다. 아울러 각주 23)에서 밝힌 역괴 정여립은 본 실록의 기록에 약간 언급 되었는 바, 林地와 서로 아는 僧 性熙가 체포되어 자신은 정여립(鄭汝立)과 같은 무리였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성희가 가지고 있는 문서 가운데 비밀로 기록된 문자로서 정여립의 가장본(家藏本)과 서로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희는 ‘이는 본래 여립의 집에 있는 책에서 베껴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개청(鄭介淸)도 끌어대어 그때에 함께 앉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희 등에게는 사형을 내렸고 임지는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서 북도로 유배시켰다.
26) 오강조항우부 (烏江弔項羽賦) :《백호집林白湖集≫ 제 2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백호의 사후 2년 되던 해에 일 어난 기축옥사에서 백호의 사상이 문제선상에 떠올라 항우의 숭배자로 지목 받았는데 이「오강부」를 해명
자료로 제출 했다는 것이다. 한편 청나라 黃景仁의 《烏江弔項羽》詩道가 있다. :憤王遺像黯承塵,已事空悲五裂身。百二山河銷赤炬,八千子弟走青磷。好尋鬼母揮餘淚,自有獅兒作替人。王氣東南來尚早,不須亭長在江濱。 출처:http://open-lit.com/showlit.php?gbid=467&cid=48&bid=&start=&search1=&search2=
27) 이영(李瑩) : 1541-? 대 인물로, 고성인(固城人)으로 자는 언윤(彦潤), 호는 남고(南皐). 조부는 李滉, 평사는 병마평사를 말하니 정6품 외직 무관 병사도사를 지칭한다.
28) 용황(龍荒) : 용(龍)은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荒)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 오랑캐가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29) 원융(元戎) : 최고 사령관, 병거, 군용의 수레 란 뜻.
30) 기갑(器匣) : 무기를 넣은 상자, 世宗 53卷, 13年(1431 辛亥 / 명 선덕(宣德) 6年) 8月 23日(乙卯) 5번째기사에 器匣一張, 定安求銅碗等物, 命與之。가 있다.
31) 성검(星劍) : 《晋书》指宝剑. 唐 杜甫 ≪暝詩≫ 正枕當星劍 收書動玉琴,.
고전번역원의 “칼집엔 별을 찌르는 칼 있고 / 匣有干星劍”라고 하였는데, 匣과 干과 星劍의 해석이 필자와는 다르게 본 것이다.
32) 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전대의 공신(功臣) 28인을 추념(追念)하여 초상을 그려서 걸었던 곳.
33) 양영천(楊盈川) : 양형(楊炯, 650~700?)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박학(博學)하
고 문장에 능하였다. 676년에 진사(進士)로 발탁되었는데, 관리로서는 과혹(過酷)하여 아랫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초당 사걸(初唐四傑 왕발, 양형, 노조린, 낙빈왕)의 한 사람으로, 오언
율시(五言律詩) 방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34) 규원(閨怨) :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이나 이별을 당한)버림받은 부녀(婦女)의 원한(怨恨)
35) 월계(越溪) : 본디는 월(越)나라의 미녀인 서시(西施)가 깁을 빨던 곳을 가리키는데, 후대의 시문에서는 흔히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는 주위의 시냇물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36) 李瑩의 문과 방목 기록으로 보면 자와 호가 분명한 것으로 보아 祖父가 李滉이다.
37) 왕(王) : 초패왕 항우를 말한다.
38) 승진(承塵) : 천장에 반자처럼 치고, 지붕의 안쪽에서 떨어지는 먼지와 흙 따위를 받는 돗자리나 피륙
39) 백이산하(百二山河) : 진(秦)의 요새 함곡관은 매우 험하여 두 사람이 지키면 백 사람을 당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40) 청린(青磷) : 漢典에 보면 靑燐과 같은 의미. 도깨비불,
41) 귀모(鬼母) : 鬼子母神의 줄인 말로 해산(解散), 유아(乳兒) 양육(養育) 등(等)을 맡은 야차(夜叉) 여신. 만 명(名)의 자식(子息)을 두고도 늘 남의 어린아이를 잡아먹으므로 부처가 그의 막내아들을 숨겨 놓고 그를 훈계(訓戒)하여 귀의(歸依)하도록 하였다고 함.
42) 오강(烏江)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화현(和縣) 동북쪽에 있다. 항우가 한군(漢軍)에 패하여 오강에 도착하니 오강의 정장(亭長/초소의 우두머리)이 강동(江東)으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할 것을 권하였지만, 수천의 강동 자제(子弟)를 죽이고 자신만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다 하여 강을 건너지 않고 漢軍과 싸워 패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하지만 이 글 지은이는 그래도 항우를 살려낼 수 있는 자는 亭長인데 항우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기에 亭長에게 책임을 물어 아예 강가에 亭長이 없었다고 추궁하는 것이다.
43) 번천(樊川) : 李杜의 號이다. 字는 杜牧 또는 牧之이다.
44) 손곡(蓀谷) : 李達(1539-1612)을 말한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45) 능수(能手) : 능란(能爛)한 수단(手段)이나 솜씨를 가진 사람
46) 선유(善喩) : 잘 깨우치고 말을 잘하다. 비유를 잘하다.
47) 락(洛) : 낙양 즉 서울을 지칭함.
48) 궁동(窮冬) :겨울의 마지막. 곧 섣달(12월)을 말함. 궁핍(窮乏)한 겨울철
49) 고당(高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동 산천조(권16)에 “고당포(高唐浦) 는 영동읍 15리에 있다고 나와
있다. 이 시에서 나온 고당과 같은 곳이 아닌가 한다.
50) 검 한자루......가도다 : 임제는 장성한 뒤 세상을 뜰 때까지 칼과 거문고를 늘 지니고 다녔다.
51) 신들린 것 같구나(如有神) : "(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책 1만 권을 읽고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쓸 수
있다. - 두보(杜甫)
52) 이 부분이 霽湖集에서는 鳥啼喬木暮煙冷로 되어 있는데 백호집에는 鴉啼喬樹暮煙冷이다.
53) 금수(錦水) : 영산강의 별칭이다.
54) 성대곡(成大谷) : 成運을 말하다. 1497∼1579.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1531년(중종 26년 진사에 합격,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55) 조배(造拜) : 처음 造, 절하다 拜,
56) 성혼(成渾, 1535∼1598)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충달(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순(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다.
57) 전조아판(銓曹亞判) :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합칭(合稱)하던 말로서, 동반(東班 :
문관)의 인사전형을 맡아보던 이조(吏曹)를 동전(東銓),서반(西班 : 무관)의 전형을 맡아보던 병조(兵曹)를 서
전(西銓)이라 하였는데, 관리의 인사문제와 관련하여 이들 양조(兩曹)를 전조라 하고 관원을 전관(銓官)으로
불렀으며, 참판(參判)은 아전(亞銓), 정랑(正郞)·좌랑(佐郞)을 전랑(銓郞)이라고 하였다. 곧 이조참판의 별칭이다.
58) 吹虛는 吹噓의 誤記같다. 吹噓 : 남이 잘한 것을 크게 부풀려 칭찬하여 천거함
59) 수 삼대..... 얻어(數三代忝得科名) : 조부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 경주부윤 광주목사를 지낸 귀래정(歸來
亭) 임붕(林鵬)이며,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도병마절도사와 훈련원판관을 지낸 임진(晉)이다
60) 한미(寒微) : 형편이나 지체가 구차하고 변변하지 못함
61) 청반(淸班) : 조선시대 때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奎章閣), 홍문관(弘文館), 선전관청(宣傳官廳) 등의 벼슬. 지위와 봉록은 높지 않으나 뒷날에 높이 될 자리이다
62)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나 수찬 등을 임명할 때, 후보자를 골라 천거하는 기록을 이르던 말 .
즉 칠품 이하의 홍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의중의
사람위에 원점을 찍었는데 이것을 기록 한 것을 홍문록 이라한다
63) 평안도......되다 : 계미년(1583, 선조 16) 에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다. 백호 35세.
64) 진이(眞伊) : 황진이 조선 시대의 명기(名妓)). 자는 명월(明月)이다. 재색이 뛰어난 명기로, 서경덕, 박연 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한시와 시조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