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법(道德法) 설명(說明)
- 존 칼빈의 십계명 해설(기독교강요 제2권 8장 1,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생명의말씀사, 문병호 옮김, PP.230-232)
1. 십계명(十誡命)으로 내적(內的)인 법(法)이 기록되게 하심
나는 여기에서 율법(律法)의 십계명(十誡命)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논지에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432)
432) 칼빈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totam fere pietatis summam, etquidquid est in doctrina salutis cognitu necessarium, complectens; omnibus pietatis studiosis lectudignissimum opus, ac recens editum, CO 1.9-252) 제1-3장에서 십계명(CO 1.31-42), 사도신경(CO1.63-79), 주기도문(CO 1.90-99)을 차례로 다룬다. 같은 순서로 1537년 프랑스어(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église de Genève, CO 22.33-74)와 1538년 라틴어(Catechismus, sive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communibus renatae nuper in evangelio Genevensis ecclesiae suffragiis recepta, et vulgari quidem prius idiomate, nunc vero Latine etiam, quo de fidei illius sinceritatepassim aliis etiam ecclesiis constet, in lucem edita, loanne Calvino autore, CO 5.323-362) 제1차신앙교육서에서 십계명(CO22.38-44; 5.327-331), 사도신경(CO22,52-59; 5.337-343), 주기도문(CO22.62-67;5.345-348)을 다룬다. 그러나 1542년 프랑스어(Le Catéchisme de l'église de Genève, c'est adire le Formulaire d'instruire les enfants en la chrestienté, CO 6:1-134)와 1545년 라틴어(Catechismusecclesiae Genevensis, hoc est, formula erudiendi pueros in doctrina Christi, CO 6.1-146) 제2차 신앙교육서에서는 사도신경(CO 6.13-44)이 앞서고 십계명(CO 6.51-76)과 주기도문(CO 6.91-106)이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지금까지 다룬 다음 두 가지가 또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첫째, 하나님이 한 번 명령하신 예배(禮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有效)하다.
둘째,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참 경건의 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을뿐만 아니라 스스로는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그것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공포에 사로잡혀서 불가피하게 중보지께로 이끌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확정될 것이다.(Institutio. 2.7.1-2).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들 중에 핵심을 간막히게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엄위에 압도되어서 그를 즉시 예배하게 되지 않고는
그의 위대함을 마음속에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쳤다.(Institutio, 12.2).
우리는 우리 자신(自身)을 아는 지식(知識)을 다루면서 이를 주요한 주제로 부각시켰다.
즉 우리 자신의 덕성(德性)에 대한 모든 편견(偏見)을 몰아내고,
우리 자신의 의(義)에 대한 확신을 걷어 내며,
우리 자신의 지극한 빈곤을 인식함으로 양심이 꺾이고 분쇄되어
순수한 겸손(謙遜)과 우리 자신의 낮아짐을 배우자는 것이었다.(Institutio, 1,1,1-3; 2.16).
주님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자기의 율법 가운데서 수행하신다.
첫째, 합법적(合法的)인 명령권(命令權)이 자기에게 있음을 항변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신성(神性)을 경배(敬拜)하도록 하시고,
그 경배가 어디에 달려 있고 무엇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명령하신다.
둘째, 자기 의(義)의 규범(規範)을 공표하시면서
우리의 무능(無能)과 불의(不義)를 모두 논박(論駁)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천성은 사악하고 변질되어서
항상 그의 올바름에 거스르고
우리의 재능은 약하고 선에 무기력하여
그의 완전하심에서 아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되고
마치 새겨진 것 같은 내적(內的)인 법(法)은
우리가 두 판으로부터 배워야 할 바 그 자체를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일러 준다.(Institutio, 2.2.22. Cf. Institutio, 4,20,16).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良心)은 우리가 의식(意識) 없이
영구적인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진 우리의 빚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내부적 증인과 충고자가 되어
선과 악의 차이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우리의 의무가 이행되지 않을 때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Institutio. 3.19.15).
그러니
사람은 오류의 어둠에 휩싸여서 이러한 자연법(自然法)을 통해서는 무엇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인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다.
분명 사람은 예배의 올바른 원칙으로부터 더없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교만과 야망에 심히 부풀어져 있고 맹목적(盲目的) 자기애(自己)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어서 여전히 자기를 직시(直視)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사람은 자기를 굴복시키고 내던지며
자기의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자기 속으로 내려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무기력(無氣力)과 우리의 오만(傲慢) 이 둘 모두로 인한 필요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하셔서
자연법(自然法)에 있어서는 지극히 희미했던 것을
한층 분명(分明)하게 증언(證言)하심으로써,
우리의 무관심(無關心)이 떨쳐졌을 때,
우리의 마음과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자극(刺戟)시키고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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