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 대한 이해” (막 10장 13-16절) 240505 주일설교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 모두 나온다. 마 19:13-15; 막 10:13-16; 눅 18:15-17
18C 영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Blake,1757∼1827)는 세상은 타락했다 규정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낙원 같은 세계로 ‘순진무구함(innocence)’을 주창했다. 순진무구함은 어린아이와 동의어였다. ‘아이’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순수함, 천진스러움 등 어른의 반의어다.
‘어른아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독립심이 부족하고 결단력 없는 나약한 어른 뜻, 한편 재미있게 스스로 즐기려는 성인들을 의미한다. ‘어른아이’들을 ‘키덜트(kidult)’란 아이를 뜻하는 키즈(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유년시절의 감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인들. 넓은 의미로는 이들이 구매하는 상품과 향유하는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
키덜트 현대 성인들 각박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감성적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자하는 심리 상태다. 다른 측면으로 옛 어린 시절의 환상 정서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하려는 사회현상.
사실 예전엔 키덜트 문화라면 ‘정신적 퇴행’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 소수의, 미성숙한, 비주류 문화로 간주했으나, 당당히 순수와 대중예술 전반에 걸쳐 주류 문화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최근 백화점, 완구점, 영화관,인터넷쇼핑몰 등 키덜트를 겨냥해 특별히 제작한 캐릭터 의류, 액세서리, 장난감, 만화영화 등이 다양하게 등장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4년 약 5000억원 규모였던 국내 키덜트 시장이 2020년 1조 6000억원까지 커졌으며, 향후 최대 11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키덜트(kidult)의 특징은 진지하고 무거운 것 대신 유치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 키덜트가 집착하는 제품은 탱크, 장갑차, 항공모함, 전투기 등 실물을 축소한 프라모델 ‘조립식 키트’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큐어, 인형 등. 키덜트가 어린아이들과 다른 점은 색도 입히고 부품도 직접 만들어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더불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게임 시장도 계속 커지고 있다. 국내 게임산업은 온라인 컴퓨터 게임과 모바일 게임의 성장으로 ’22년 기준 역대 최고 매출액인 22조 2천억 원 달성 세계 4위의 게임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게임은 세계 인구의 40%가 넘는 33억 4천만 명이 즐기며, 국내에서도 전체 인구의 63%가 이용하는 대표적인 여가 문화로 성장했다.
어린이는 1921년 소파 방정환 선생님에 의해 처음 사용 후 보급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어린이의 어원은 ‘어리다’ 훈민정음에도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이런 표현이 나오듯, 어리다의 옛 뜻은 ‘아직 깨우치지 못하다’이다. 한국어의 ‘어리-’는 한글 처음 창제된 15세기 무렵 주로 ‘이르다’(Early)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16세기 이후에 ‘나이가 어리다’라는 의미고, 18세기에는 후자의 의미만 남았다. “어린이”는 17C의 《가례언해》와 《경민편언해》에 나이가 어린 사람을 뜻하여 “어린이”의 형태로 나타나며, 후에 소파 방정환선생이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린아이를 대접해 부르는 말로 “어린이”를 공식화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1922년에 처음 어린이날이 정해져서 매년 지켜지다가, 1937년에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해방 이후에, 1946년에 5월 5일로 어린이날을 다시 정해서 지키기 시작했다. 1957년 어린이헌장이 발표 되었고, 1970년에 공휴일로 제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J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라고 생각된다.
본문에 어린이 단어 많다. 13절~16절 매 절 어린 아이 강조. 부모들 J이 자신의 아이들을 축복 기도해주실 것 기대 아이를 데려왔다. 이일로 랍비로 인식 J께 아주 자연스러운 일.
그런데 제자들은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를 꾸짖었는지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지만, 아마 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을 꾸짖었다. 제자들은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J을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 당시에 아이들 낮게 평가 당연한 행동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제자들에게 J이 노하신다. 14절. “노하시어 이르시되” J은 제자들에게 화 내시면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G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은 G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마가는 어린아이에 관해 9장 36-37절 J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안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게 바로 자신을 영접하게 했다. J의 언행이 있었음에도 제자들이 J께 아이들 오는 것을 막았다는 게 조금 이상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J을 이해 못했다. 이 문제는 마가복음 전체가 계속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해하지 못했고, 부활은 더더구나 이해하지 못했다.
J께서 어린아이들을 막아서는 제자들에게 왜 화 내셨을까? 제자들의 행동이 마귀적이기 때문에 성경에, J이 화내신 경우 마귀적인 일에 대해 G 나라가 어린아이들의 것이다.
무엇보다 J은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괄시를 참지 못하신다. 한 인격으로서 존중할 것을 말씀하신다. J은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을 것을 말씀하신다.
신학자들은 본문을 연구, 어린이들의 장점을 첫째 겸손함, 둘째 의존성 혹 신뢰성, 셋째 단순성 세 가지 모두 긴밀하다. 어린아이들은 선입관 없이 세상을 대함이 경이롭다.
“경이로움 속에서 우리는 사물들을 처음으로 인지한다. 경이로움 외에는 인식의 첫 경험을 가질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의 인지에서 대상의 인상들에게 아무 보호도 없이 내맡겨진다. 그들은 우리를 압도한다. 경이로워하는 어린이는 모든 면에서 그 자극들이 모든 감각 기관들에게 몰려오는 인상들을 파악할 표상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어린아이는 이 대상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전혀 회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 반복될 때, 대상의 인상들이 그것으로 파악될 회상들이 형성된다. 그래서 자기를 엄습하는 인상들에 대한 반복 할 태도가 생성되며, 어린아이는 이 인상들에 대하여 익숙하고 그것을 알게 된다. 어린이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며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다. <중략> 우리가 천재라 부르는 연구가들, 예술가들, 사상가들은 경이로움의 어린이다움과 새로운 것, 놀라운 것에 대한 감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존. 그들은 인식의 근원에 가까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리지널하다.”(위르겐 몰트만, <과학과 지혜> 중)
어린이들에게 세상은 경이로움 자체이다. 광대한 세상 앞에 어린이는 작고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모에게 절대 의존하고, 부모의 말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경이로움 앞에 단순하게 빠져든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 속에서 어린아이와 하늘나라를 연결하신다.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서로 조화롭게 이 가르침을 담고 있다(막 9:33-37; 10:13-16; 눅 9:46-50; 18:15-17).
마 19장 J의 가르침은 세 부분. 가르침은 ‘어린아이’에서 시작(1-5절) ‘작은 자 중의 하나’로 연결(6-9절) 마지막 ‘잃어버린 양’에게까지 이른다(10-13절) J의 가르침은 이와같이 점진적으로 심화된다. 어린아이와 천국에 대해 ‘G 아버지의 뜻’에서 종합 종결(14절) 다소 복잡하고 난해한 가르침에서 독자들은 어린아이와 연결된 G 나라를 깊게 묵상. 천국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를 낮추는 ‘작음’과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지 않는 데서 발견된다.
마태의 본문에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큽니까?” 질문. 제자들의 질문에 J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셨다. 마가는 이 가르침의 무대가 J이 가버나움 집에 계실 때로 J이 가운데 세우신 어린아이는 머무신 집의 어린아이 가운데 한 아이다. 특별히 ‘어린아이’는 집안에서 부리는 몸종과 같은 하인을 일컫는 단어이다. J은 집에서 가장 하찮은 일하는 ‘어린 종’을 가운데 세우신 것. 이 아이가 ‘어린 종’인지 아니면 단순히 가족 중 한 자녀였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 어린아이가 J이 그 집에서 세울 가장 작고, 낮은 이였다.
J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돌이킬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불러 세워진 이처럼 작은 자가 되고, 낮은 자가 되어라. 세상은 끊임없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 ‘성공하라’고 세상은 ‘더 큰 이’가 되기 위해 위대한 업적을 쌓을 것 가르친다. J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이 주목하고 환호하는 더 큰 자의 조건과 자격은 천국 입장을 가로막는 것.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 내게 준 선물》책의 원제는 Chasing Daylight ‘밝은 날, 혹 살아 있는 날 추격하기’뜻. 살아 있음 의미, 죽음의 의미 깊이 생각케 한다, 미 최고 회계법인의 하나인 KPMG의 CEO였던 유진 오켈리가 썼는데 그 책의 마무리는 그의 아내가 했다. 왜? 그가 책 쓰다 죽어서. 책 말미에 남편이 어떻게 죽을지, 어떻게 살지에 대한 교훈하고 싶어 했다고.
그는 20대 초 회계 법인에 입사 탁월한 능력 인정 30년 후 2002년 최고 경영자 됐다. 회장 된 후 더 분주했다. 18개월 후 일정이 꽉 잡힐 정도, 매년 24만㎞ 이상 출장 다녔다. 바쁘게 살던 2005년 5월, 말기 뇌암 선고. 최고 경영인이 된 지 불과 3년 만에 53세였다.
오직 성공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에 정말 열심히 달렸고, 모두가 부러워할 자리에 올랐다. 남은 시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에 관점을 바꾸어야 했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성공한 자리를 내놓고, 미래를 위해 계획했던 원대한 구상도 포기했다. 30년 가까이 자신을 세워주었던 습관과 비즈니스들도 내려놓았다. 새로운 관점 즉 '남은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쓸 것인가?' 새로운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했다.
시선의 방향을 바꾸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과 삶의 소중한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 곁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어느 날 가족과 야외로 나가 식사 하는데 비가 내렸다. 식사 중단 했지만 방해까지도 계절이 준 아름다운 선물임을 깨다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 사랑하는 사람들 최선 다해 사랑했고, 90일간의 시간을 보내고 눈 감았다. 인생길에서 새로운 관점은 언제나 필요하다.
누가 18장 불의한 재판장, 바리새인과 세리 이야기와 이 말씀을 연결해서 제시하는 독특한 구조. 즉 이 이야기를 ‘G 나라의 의’와는 거리가 있는 관점으로 처세하는 고위 공직자의 이야기, 종교 행위조차도 자기 자랑거리로 삼으면서 자기 의와 자랑에 사로잡힌 ‘경건한’ 종교인의 이야기 다음에 위치 기존의 관점과 새로운 관점을 비교해 제시한다. 앞 이야기의 결론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라고 제시하신 다음에 본문이 이어진다. 눅18:17절 그 내용을 반복하듯이 결론을 맺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아이들은 소중하나 완벽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는데 J은 “누구든지 G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7절) 어린 아이를 파격적으로 인정하신다. 단순히 어린아이를 절대화 시킨 것이 아니라 G나라 정신을 알려주시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강조하신 것. “G 나라를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메시지성경)
누가는 G 나라에 대한 J의 교훈에 강조점. 이 말씀은 단순히 어른들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데 강조점보다, 그것이 J이 말씀하신 내용의 골자가 아님. ‘어린아이들처럼’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기 과시와 욕망에 사로잡힌 어른들에 대한 경고를 위한 메타포일 뿐.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 자기 욕망과 자랑에 마음 빼앗긴 종교 권력자들 바리새인, 마음대로 세금 매기고 그것을 착복하고 횡령하는 조세 권력자들인 세리…. 그들을 ‘어른’의 범주로 정하신 후, 그것과 전혀 반대되는 범주로 ‘어린아이들’을 제시하신다.
어린아이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람을 무시하고, G을 두려워할 줄 모르며, 명예와 권력,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삶의 자세와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경고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은 천사와 같은 존재라는 말씀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녀인 아이들도 죄성, 아담의 원죄와 연결 그들도 욕망의 늪이 존재하고 폭력과 야만성이 존재한다.
윌리엄 골딩의 책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에게 내재된 악의 본성과 실체를 폭로한다.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과 암투, 문명과 야만이 어떻게 대립되는지, 그리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이 어떠한지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의 위협을 피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던 아이들은 비행기가 추락해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아이들은 나이가 가장 많고 리더십이 있던 랠프라는 아이를 중심으로 결속되면서 생존을 위한 나름대로의 질서를 잡아간다. 선거를 통해 대장으로 선출된 랠프는 질서유지를 위해 소라나팔을 사용한다. 오두막을 짓고 구조봉화를 올리고, 대소변 구역을 지정하는 등 문명인으로서 따라야 할 규칙을 만든다.
대장에 선출되지 못한 잭은 사냥팀을 조직해 사냥에 나서는데, 처음에는 자신들이 선출한 랠프의 지시를 따르던 아이들이 잭이 사냥해온 멧돼지 고기에 맛이 들려 점점 잭의 편이 된다. 그 과정에서 랠프 진영에 서있던 두 아이가 죽임을 당하고, 랠프 역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하게 되는데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해 잭의 진영에 있던 아이들은 계속해서 추격하다가 나중에 섬에 불을 지르기까지 한다. 죽음에 직면한 랠프는 그 불을 보고 찾아온 해군 구축함에 의해 구조를 받는다.
문명 세계의 사회적 관습은 완전히 붕괴되고, 내재되어 있던 권력욕과 야만성이 춤을 추면서 그 평화로운 섬은 지옥으로 변한다. 어른들은 그들이 전쟁 놀이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어른들도 구축함을 타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전쟁 중이다.
제일 나이가 많은 랠프가 고작 13세였던 이 섬의 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야만적으로 변했을까? 이 책에서 골딩은 인간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내재되어 있으며, 생존에 위협을 느끼거나 권력을 가질 때 어떻게 그것이 드러나는지,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전쟁이라는 폭력에 노출되던 아이들이 환경 때문에 어떻게 폭력적인 존재로 바뀌는지에 대해 잘 제시한다.
J은 어린아이들을 순수의 표본으로 절대화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과 다른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요청을 하신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은 그것을 대안적 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이라고 칭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대안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탄을 받는 이유는 다르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똑같이 살기 때문이다. 세상과 똑같이 살고, 똑같이 거짓말하고, 똑같이 욕심덩어리가 되고, 똑같이 약자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고, 똑같이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기 때문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J C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완성될 G의 구속 역사와 G 나라다. 그 나라에 걸맞는 백성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이 어른 세대에 있는데 그들을 하찮게 여기면 어떻게 하느냐고 책망하시며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가진 좋은 품성을 닮아가려고 애쓰라는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적어도 기독교 공동체는 어린아이와 같은 약자들을 맞아들여야 하며, 어린 자녀들을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야 할 교육의 책임이 있다는 뜻.
순수함, 절대의존의 마음, 신뢰, 사랑, 겸손함 등은 G나라에 필요한 자질들인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순수한 마음이 남아있기에 주님은 예시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
지금 어린아이들은 자랑하거나 과시할 만한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고 싶었고, J이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싶어서, 아니 J이 만져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아왔다. G나라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도 시간이 가면 어른이 된다. 이 아이들에게 G나라에 합당한 가치와 순수함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교육적 사명이 부모와 어른 세대, 신앙공동체에 있다.
시인 도로시 로 놀트(Dorothy Law Nolte),
<사는 것을 배우는 아이들>
어린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보호 속에서 자라면, 믿음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만약 어린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딸을 위한 시>,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콥틱 크리스천의 자녀 교육
이집트에는 1억의 인구 중 10%인 1000만 명이 크리스천. 마가 복음 전했다고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콥틱 크리스천. 이들은 J의 신성과 인성 중에 신성만 주장하는 단성론으로 인해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이들은 동방 교회에도 서방 교회에도 끼지 못하는 이질 기독교 그룹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신학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 곧 자녀를 J과 합쳐 놓으려는 그들의 교육적 열정. 지난 1400년간 계속된 무슬림들의 혹독한 핍박과 압제 속에 살았는데 지금도 1000만 명이 X를 주로 믿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들은 열쇠를 아이들에게서 찾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3가지 의식을 거행. 첫째 기독교식 이름을 지어준다. 이집트의 시민증에 종교란 회교와 기독교 둘만 공식적 허용. 그러나 종교란 보지 않고 그의 이름만 봐도 기독교인. 마르코, 요한, 토마스 등 기독교 이름 때문.
둘째, 신생아를 교회에 데리고 나와 유아 세례를 받는다. 온 교회 공동체가 아이가 J과 영적으로 엮이도록 영적인 공동육아를 한다.
마지막으로, 아기의 오른쪽 손목 안쪽에 산양 젖에 담가 놓았던 바늘로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는다. 평생 그 이름과 손목의 표시로 인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지 알면서도 선조들이 해왔듯이 그렇게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콥틱 크리스천들의 손목에 새긴 십자가 문신은 단지 모양이나 상징이 아니다. 그들이 주일날 교회 갈 때, 크리스천으로 위장한 무슬림이 아님을 보이는 신분증. 그러나 단순한 신분증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J께 속한 사람'임을 숨기지 않으려는 참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의 선언. J 없이 누리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보다 G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영광과 축복이 훨씬 중요. 이렇게 그 사회에서 가난하고 낮은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G을 영화롭게 하고, 그 세상에 축복이 되고 있다
지난 2018년 3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작품상은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든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에 돌아갔다.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기인 1960년대 초, 목소리를 잃은 청소부 엘라이자와 비밀 실험실에 갇힌 괴생명체와의 만남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미 항공우주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서 일하는 청소부인 엘라이자는 어느 날, 남미의 늪에서 생포되어온 괴생명체가 연구소 물탱크에 쇠사슬로 묶인 것을 본다. 인간과 양서류의 모양의 생명체는 인간과 의사소통하고 감정 교류도 가능. 냉혹한 관리인은 그를 고문하며 전기봉으로 괴롭힘. 호기심과 연민으로 다가간 엘라이자는 삶은 계란을 건네고 수화도 가르치고, 음악도 들려준다. 미 당국은 양서류 인간을 해부 우주 탐험 연구에 활용해 소련을 앞서려고, 생명체를 죽이라는 명령 받은 소련 스파이는 연구원으로 가장해 연구소에 잠입.
관리자는 자신과 생김새와 다르면 모든 것을 열등하게 여기는 냉혹한 사람.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기에,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니까, 말 못하는 엘라이자는 말 못하니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인간은 G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지만, 그가 말하는 형상은 백인 남성이 기준이다. 정상적인 백인 남자만이 신의 형상을 가졌고, 나머지는 모두 열등한 존재일 뿐. 그런데 열등한 존재들이 힘을 합해 괴롭힘 당하는 가련한 피조물을 결국 탈출시킨다. 엘라이자에게 그 생명체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 받을 존재요 이웃이었다.
영화는 우리 모두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며, 나보다 더 작은 사람을 사랑하도록 세움 받았고, 그때에만 세상이 세워진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영화의 메시지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부드럽지만 우주에 가장 강하고 가변성 있는 힘이다. 사랑 또한 그렇다. 여성, 남성, 기타 생명체 등 사랑을 어떤 모양이건 사랑은 그것의 모양이다.”
폭력과 오만, 거짓과 탐욕,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시대 서로를 세워주고 받쳐주는 의자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을 주님은 요청하신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말이 알려진 것은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 때문이다. 독일인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정권 당시 수감된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해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오스카 덕분에 구출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금니에서 뺀 금을 모아 반지를 만들어 생명의 은인인 쉰들러에게 준다. 그 반지를 건네 주며 랍비는 반지 안쪽에 새긴 문장을 알려 준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이 말은 창세기 4:8에 대한 탈무드의 주석에서 나왔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을 때, 가인이 죽인 것은 한 사람이 아닌 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뒤집으면, 가인이 그때 아벨을 살렸다면 그는 한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라 한 세상을 살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산술적으로, 한 사람이 두 명씩만 계속 자녀를 낳는다고 할 때 500년 안에 한 사람당 25만 명의 후손을 가진다. 이것은 단지 숫자만의 의미가 아닙니다.
1900년 미 윈십(E. E. Winship) 교수는 19C에 살았던 두 가문을 비교 연구한 결과《주크가와 에드워즈가: 교육과 유전 연구》책 발간. 한 가문은 맥스 주크(Max Jukes)의 가문. 1874년 리처드 덕데일이란 뉴욕 주 교정국 직원은 주내에 있는 여섯 개의 교도소를 방문하는 일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6개의 교도소에 수용된 중범죄자 중 친척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집요하게 법원의 판결 기록들, 감옥의 기록들, 지역 극빈자 구제사무국의 보고서들, 그들의 이웃과 동료들의 인터뷰 등 광범위한 조사해 맥스의 후손 169가정과 그에 따른 사람들, 이미 죽었거나 살아 있는 1200명의 자손에 대한 자료를 얻었다. 그들의 공통적 특성은 게으름과 무식, 방탕과 가난이었다. 조사된 맥스의 자손 1200명 중 310명은 직업적인 거지, 300명 제대로 된 돌봄 받지 못해 유아기에 죽었다. 50명의 여자들은 직업적 창녀였고, 400명 악한 삶을 살았고, 7명 살인, 60명 습관적 도둑질로 평균 12년씩 감옥에서 보냈다. 130명의 후손들은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1897년 윈십 교수는 맥스 주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계 조사를 위탁. 놀랍게도 교정국 직원이 맥스 주크의 가문을 조사 동안 뉴욕 주 교정국의 책임자는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이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경건한 여성과 결혼해 1000명 넘는 후손 중 13명 대학총장, 65명 교수였다. 3명 상원의원, 3명 주지사였다. 100명 변호사, 30명 판사. 56명 외과의사 중 1명은 의과대학장. 100명 선교사와 목사와 신학자였다. 80명 공직자 중 3명 시장, 1명은 재무부 감사관, 또 1명은 부통령이었다.
어린이세례 - 김세광(서울장신대 예배설교학 명예교수)
그동안 장로교에서는 만 2세까지의 유아 세례만을 허용 이후의 아동들이 세례 받기 위해서는 성인 세례 연령 자격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성례전 관습이 형성된 이유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나 신학적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인 세례 연령 자격이 될 때 까지의 기간 성례전과 관련한 목회적 지침이나 교육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목회 현장에서 이 기간에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어린이(아동) 세례에 관한 요청이나 문의가 있을 때, 목회자들은 어린이(아동) 세례가 허용 않았고 신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고 교단의 전통과 헌법을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20C 중엽부터 세계 주요 교단들이 이러한 목회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오랜 시간 신학연구위원회의 신학적 작업 끝에 어린이(아동) 세례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몇 년 한국 장로교단의 합동과 통합 측은 유아 세례자의 연령을 확대, 아동(어린이) 세례를 신설했다. 두 교단은 유아 세례 대상 연령을 기존 0-2세에서 0-6세로 확장. 합동은 만 7-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어린이 세례’를, 통합은 만 7-12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아동 세례’를 신설했다. 합동 측 입교 연령은 14세부터다. 이에, 합동에서 13세로 어린이 세례 연령을 결정한 것은 모든 연령이 세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한 반면 통합은 만 7-12세의 초등학교 재학 연령의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아동 세례'라 칭하는 세례를 제정했다. 이는 동교단의 기존 입교 연령을 15세에서 13세로 내림으로 세례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함과 동시에 아동 세례 대상을 초등학생으로 통일했다.
칼뱅은 세례가 단지 물을 통한 예식 이상의 영적 신비의 사건임을 들어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으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다. 이 전통에 따라 구약의 할례처럼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 들어가는 표인 세례를 유아에게 주는 것은 합당하다고 본다. 유아 세례는 그들이 신앙으로 응답할 수 있기 전에도 G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라고 고백한다.
이때 신자와 그 자녀가 받는 세례가 G의 계약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세례’임을 확인, 신자의 자녀가 지나치게 지체하거나 지나치게 서두름 없이 세례 받아야 함을 가르친다. 온전한 신앙고백 하는 성인 세례든 유아, 어린이 세례든 하나며 동일한 성례전임을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교회와 교회 교육의 역사는 "교육 없이 세례는 없다"는 정신에 근거해 세례를 베풀어 왔다. 세례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 교육의 출발점이자 근간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초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확산됨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례 준비 교육을 '카테큐메나테'(Catechumenate)라는 이름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세례 희망자가 '세례의 의지와 신앙고백'을 표현했더라도 교회는 그들을 세례받기 합당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3년 여에 세례 준비 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교육은 교리뿐 아니라 영성, 도덕성, 삶의 모든 측면을 아울러 훈련하고 준비시켰다. 오늘날 카테큐메나테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카테키시스'(Catechesis)가 교회 교육을 지칭하는 단어로 세례 준비 교육은 교회 교육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의 주 대상자는 새로 태어나는 유아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세례 교육은 불가능해, 그들이 입교 받을 때로 시기를 옮긴다. 그런 의미에서 입교 교육은 ‘추후적 세례 교육’이다. 오늘날 독일 교회는 입교 교육을 세례 교육으로 칭하며 3년 여에 걸쳐 실시. 교회 교육의 역사는 “교육 없이 세례는 없다”는 극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