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휘가 전(㙉)이고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澗)이며, 선조는 흥양(興陽) 사람이다. 고려 말에 이서원(李舒原)이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그의 아들 이은(李垠)은 본조에서 출사하여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또 3대를 지나 휘 수천(壽川)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 집의를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선생의 고조부이다. 증조 휘 조년(兆年)은 의장고 판관(儀仗庫判官)을 지냈고, 조부 휘 탁(琢)은 종사랑(從仕郞)이다.고(考) 휘 수인(守仁)은 선무랑(宣務郞)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추증되었고, 아들인 창석(蒼石) 선생이 고관에 오른 덕에 다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여러 대에 걸친 덕행과 치적에 대해서는 가첩(家牒)에 자세히 실려 있다.비(妣) 김산 김씨(金山金氏)는 처사(處士) 김련(金漣)의 따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비(妣)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처사 신수경(申守涇)의 따님이고 부사(府使) 신송주(申松舟)의 증손녀이다. 이들은 모두 숙부인에 추증되었다.선생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13) 4월 14일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조금 자라서 석천(石川) 김공 각(金公覺)을 스승으로 섬기면서부터는 과정을 챙겨 주지 않아도 학업이 날로 발전하였다. 얼마 지나서는 다시 정공 국성(鄭公國成)과 서산(西山) 민공 여해(閔公汝諧)에게 오경(五經)과 사서(四書)를 익혔다.경진년(1580, 선조13)에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이 상산(商山)에 부임하자 선생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군자의 처신 방도를 배웠다. 이때부터 하상(河上)에서 유 선생을 종유하게 되었다. 유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퇴계 선생의 학맥을 잇도록 격려하니, 선생은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만 힘을 쏟아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임진년(1592)에 왜구가 크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상주(尙州)가 외적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동지들과 약속하고 마을의 병사를 모집하여 안령(鞍嶺)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했으나, 도적이 갑자기 이르러 두 차례 접전을 벌이고 군대가 궤멸되었다. 승지공과 숙부인이 군중(軍中)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도 함께 진중에 있다가 모부인을 잃었다. 선생이 우복 선생을 붙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힘이 약해서 목숨을 내놓고 적을 무찌르지는 못하였지만, 어찌 차마 하루라도 구차하게 살면서 왜적과 이 세상을 함께하겠는가.”
하였다.마침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적을 토벌하여 복수를 하리라 맹세하고 고모담(鈷鉧潭)에 진지를 구축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식량을 조달하며 틈틈이 방략(方略)을 세우니, 죽이거나 포획한 적이 아주 많았고 토적(土賊)의 겁탈도 아울러 평정되었다.계사년(1593, 선조26) 2월에 왜적에게 의병 진영이 함락되자 선생과 창석공(蒼石公)은 간신히 빠져나와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하려고 하였다. 창석공이 갑자기 곽란(癨亂)에 걸려 현기증이 일어 땅에 쓰러져 선생에게 이르기를,
“저는 병이 깊어 죽을 듯합니다. 하지만 형님은 화를 피해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창석공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에도 형제가 적과 싸우다 죽은 일이 있었다. 내가 어찌 차마 너를 버려두고 혼자 살겠는가.”
하고는, 창석공을 등에 업고 산에 올랐다. 갑자기 칼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왜적 두 명을 만나자, 선생이 하늘을 향해 통곡하면서 이르기를,
“하늘이 지각이 있다면, 우리는 죄가 없음을 알 것이다.”
하였다. 또 산을 올려다보고 축원하기를,
“산신령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적을 향해 활을 당기고 호통을 치면서 꾸짖었다. 목소리와 기세가 모두 준엄하여 적들이 놀라 달아나 감히 접근하지 못하니, 그 틈에 창석공을 업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당시에 선생은 마침 거상(居喪) 중이라서 몸이 몹시 수척해진 상태였으나, 정성에 감동을 받아 적을 물리치고 아우를 지켰으며 끝내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얘기는 창석공이 지은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에 실려 있다.계묘년(160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무신년(1608), 광해군이 즉위한 초기에 오현 종사(五賢從祀)에 대한 논의가 일자, 영남의 사류들이 선생을 소수(疏首)로 추대하였다. 선생이 대궐에 나아가 간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허를 받았다. 선생은 이해에 천거를 받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곧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경술년(1610, 광해군2)에는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을 제수받았지만, 1년이 못 되어 돌아왔다. 역졸(驛卒)들이 선생을 회상하고 비를 세워서 덕을 칭송하였다. 선생은 이때부터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추구하였다.계해년(1623)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하고서 선생을 발탁하여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제수하였다. 당시는 막 혼란이 가신 때라서 고을이 잔폐되고 백성이 지쳐 있었으나, 선생은 정성을 다해 백성을 보살폈다. 구언(求言)하는 임금의 유지(諭旨)에 따라 상소를 올려 폐단을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절호(絶戶)의 부세(賦稅)를 이웃 마을에서 징수하는데 남은 것은 거의 없고, 결원이 생긴 병사들은 어린애로 충당하는데 가혹한 정사만 횡행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 명의 역(役)을 감당하고 한 해에 몇 년 치 부세를 다 거두어들이니 열 집 정도 남은 황폐한 조그만 고을이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한시적으로 부역을 모두 면제하여 특별히 백성을 염려하는 뜻을 보이고 다시 소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약 정상적인 부세를 이 지역만 면제해 주거나 역(役)의 징발을 다 없애는 일이 어렵다면, 고을을 혁파하고 수령을 없앤 뒤에 큰 고을에 소속시켜 백성을 보호해 줄 힘을 빌려 참혹한 고통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그다음입니다.
백성들은 위태로운 삶을 꾸리다가 성대한 시대를 만났으니, 이는 막 봄기운이 이르러 초목이 피어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유지를 여러 차례 반포하면서도 포흠(逋欠) 난 부세를 다 탕감해 주지 않으며, 가난한 백성의 원망은 여전하고 그들의 유리걸식(遊離乞食)이 그치지 않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만약 팔짱을 끼고 앉아서 지켜만 보고 제도를 개혁하여 그들을 보살필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 또한 위로는 공물도 바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들을 보살피지도 못하면서 무슨 낯으로 한 현(縣)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겠습니까.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을 내렸다. 해당 조(曹)에서 반대 의견을 올리자 다시 상소하였는데 내용이 더욱 절실하였다. 그러나 해당 조의 반대로 일이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선생은 백성들의 처지에 맞춰 고을을 다스렸다. 송사(訟事)는 분명하고 신중하게 판결하였고 명령은 공정하면서도 너그러웠다. 선생의 다스림은 마치 때를 벗겨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과 같아, 아전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편안하였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간소하게 마부만을 데리고 경내를 순행하면서 농상(農桑)을 권면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었으며, 효제와 근검을 면려하고 마지막에는 글을 지어 그들을 일깨워 주었다.선생의 정사는 특히 교화를 우선으로 삼았다. 고을의 자제들에게는 학문에 힘쓰도록 권장하였으며 이따금 그들을 모아 놓고 향교에서의 학업을 평가하니 모든 선비들이 기꺼이 선생을 따랐다. 봄과 가을에 석채(舍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미리 재숙(齋宿)하면서 희생과 폐백을 올리는 일에 정성과 청결을 다하기에 힘썼다. 이따금 고을의 노인을 불러 모아 연음례(燕飮禮)를 행하고, 효행이 있는 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감사(監司)에게 갖추어 상신(上申)했다. 그러자 한 해가 지나지 않아 현을 제대로 다스렸다는 평을 들었다.정묘년(1627, 인조4)에 벼슬을 완강하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읍민들은 잊지 않고 지나는 길에 반드시 선생을 찾아와 공경을 표하였다.갑술년(1634)에 김공 상복(金公尙宓)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여 조정의 명을 받들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고 나이, 덕망, 학행을 갖춘 인물을 뽑아 약정(約正)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선생을 도약정(都約正)으로 추대하였고, 수암(修巖) 유공(柳公 유진(柳袗))을 부약정(副約正)으로 삼았다. 선생이 매달 초하루, 법식에 맞게 향약의 규약을 낭독하는 모임을 열고 글을 지어 향약의 참여 인원에게 고하기를,
“우리같이 어리석고 미미한 존재가 만물의 으뜸이 되고 금수와 다른 것은 오륜(五倫)의 차서(次序)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어서 혹시라도 윤상(倫常)을 다하지 못한다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금수와 다름이 없다.
옛날 성왕(聖王)들은 백성들이 인간의 본성을 다 발휘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의리와 성현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교화의 법을 만들어,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고유한 이치에 따라 오륜을 다하도록 하였다.
성현의 책 가운데 이 도리를 밝히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중에서도 《소학(小學)》은 일상생활에 더욱 절실하다. 이 책이야말로 인도(人道)의 근본이고 사서(四書)에 이르는 계단이다. 《소학》을 숙독하고 깊이 사색하여 순서에 따라 점차 나아간다면, 반드시 이 도를 체득하고 나의 본성을 다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보존되고 몸소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과 뜻이 견고하고 실천이 독실하다면 내게 있는 것들은 모두 실행에 옮겨지고 사물에 드러나는 것들은 모두 실제로 쓰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효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서야 그 마음으로 어른을 공경할 수 있고, 또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는 벗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벗은 인륜을 바로잡는 자이다. 정직과 진실, 권면과 경계를 서로에게 기대하고 원만하고 부드러운 처신으로 경계를 한다면, 서로의 인(仁)을 거들고 선행을 권면하는 의리에 가까울 것이다. 오호라, 하늘이 백성을 낳고 본성을 부여해 주었으니, 인간이 함께 말미암은 것이 도(道)이고 인간이 똑같이 얻는 것이 덕(德)이다. 도는 하늘에서 나와서 인간에게서 행해지고 덕은 도에 근본하면서 자신에게서 얻어진다. 천성의 순수함을 바탕으로 타고난 선한 마음을 회복하여 사람마다 하는 행동이 같고 곳곳에서 향하는 바가 같아진다면, 아름답지 못한 습속이 변해서 아름답게 될 것이다.”
하였다. 향약이 시행되고 몇 년이 지나자 습속이 크게 변하였다.병자년(1636, 인조14)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당시 선생은 나이가 이미 80이 넘었기에, 자식들은 의병 진영으로 나아가도록 하고 선생은 청부(靑鳧)로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차례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비분강개하는 시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典禮)를 행하여 나이가 80 이상인 이들에게 규례대로 자급(資級)을 높여 주었다. 자제들이 조정에 아뢰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얻은 것이 어떠하냐? 나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다 죽으면 만족한다. 자급을 올려 달라고 청한다면 너무 가소롭지 않겠느냐.”
하였다.무자년(1648, 인조28) 봄, 비위(脾胃)가 좋지 않아졌다. 윤3월 13일에 부축을 받고 앉아서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자리를 바로 하고 누워서 외웠던 글을 나지막이 외웠다. 자제들이 잠깐이라도 그칠 것을 청했으나,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그만두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한다.”
하였다. 약을 올리기를 청하자,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너희는 억지로 청하지 말라.”
하였다.자식들에게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을 해치지 말도록 당부하고는 담담하게 생을 마치니 향년 91세였다. 원근에서 놀라고 슬퍼하며 모두 급히 달려와 상을 치렀다.그해 5월 8일에 청인(靑仁)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고, 병신년(1656, 효종7) 1월 병오(丙午)일에 상주(尙州) 서쪽 중모현(中牟縣) 추동(楸洞)의 서남향(西南向)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앞뒤 두 차례의 장례에 모인 사람이 모두 백여 명이었다.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확고하였다. 부모를 섬기는 일에는 효심이 독실하여 순종하고 뜻을 받들어 부모를 기쁘게 했으며, 평소에는 봉양을 다하고 병환에는 근심을 다했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변고에도 슬퍼함이 법도를 넘어서 비록 전쟁과 기근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례의 집행이 근엄했으며 생강과 계피 따위로 맛을 낸 음식도 먹지 않았고, 왜구가 만든 기물은 평생 동안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다.창석공(蒼石公)과는 형제이자 지기(知己)로서 함께 학문과 예법을 익혔다. 일찍이 창석공이 병에 걸려 몹시 위독했을 때, 몸을 피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선생은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형제는 수족(手足)과 같다. 어떻게 아우를 버려두고 혼자만 피하겠는가.”
하였다. 창석공은 선생 덕에 소생하였고 선생도 아무런 병에 걸리지 않았다.창석공이 14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통곡하면서 몹시 슬퍼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생일날 아침, 자제들이 축수(祝壽)하자 선생이 시를 짓기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끝없는 슬픔과 / 春萱罔極痛
아우를 그리워하는 그치지 않는 마음에 / 常棣無竆情
술을 올리자 눈물이 먼저 흐르니 / 酒進淚先落
무슨 마음으로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 何心壽吾生
하였다. 선생의 효심과 우애의 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 이와 같았다.조상을 받드는 일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반드시 매일 새벽 사당(祠堂)을 찾았고 3, 4일 간격으로 선영(先塋)을 찾아 청소했으며, 나이나 병을 이유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에 바칠 음식을 직접 살폈다. 85세가 되어 사당에 고하는 것이 힘에 부치게 되자, 제수(祭需) 올리는 일을 자제들이 대신하도록 하였다.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법도가 있었으니, 엄중하고 말이 적어 집안이 숙연하였다. 부부간에는 화목하되 의리가 분명하였고 자제들에게는 효제(孝悌)와 신의(信義), 겸양(謙讓)을 가르쳤으며, 친자식 돌보듯이 조카들을 사랑하였다. 친족을 대할 때는 화목함을 다하였고, 비복(婢僕)을 부리는 데는 은의(恩義)가 곡진하였다.다른 사람과의 교제에도 예모와 마음을 다하여 선행을 보면 마치 자신은 못하는 것처럼 추존과 칭찬을 하고, 잘못된 행동을 보면 꼼꼼하게 지적을 해 주어 스스로 바로잡도록 했다. 혹시 누가 상을 당하거나 곤궁한 일을 겪게 되면 그를 구호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후진(後進)을 대하면서는 간곡한 말로 마음을 깨우치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를 하도록 인도하였다.선생은 학문에 연원을 갖추고서도 더욱 자신을 면려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근본으로 삼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저술에 침잠하였다. 특히 《주자서절요》에 힘을 기울여, 강론과 체험을 반복하여 깊이 이해한 뒤에는 마침내 핵심이 되는 말들을 뽑아서 내용을 분류하고 편집하여 각각 《성학요결(聖學要訣)》, 《회암서절요(晦庵書切要)》, 《중류일호(中流一壺)》, 《독서록(讀書錄)》, 《구색록(懼塞錄)》, 《독서법(讀書法)》이라 제목을 정하였다.선생은 이들을 모두 손수 옮겨 적고 아침저녁으로 차분히 완미하여 자신의 행동과 말에 받아들이고 일 처리와 응대에 드러나도록 하였다. 화정(和靖 윤돈(尹焞))의 문인들이 말한 “귀에 순하고 마음으로 이해되어 마치 자기 말을 외우는 것 같았다.〔耳順心得 如誦己言〕”라는 경지는 아마도 선생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선생은 세상에 등용되지 않은 후에는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보일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관직에 머물 때는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다하고 고향에 머물 때는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 방도를 다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이조 판서가 되자, 선생은 주 부자(朱夫子)의 〈답유승상서(答留丞相書)〉의 내용을 빌려 정 선생을 격려하고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데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정 선생이 벼슬에 나아간 후에도 다시 편지를 보내 관례(慣例)를 따르지 말고 공도(公道)를 확충할 것을 권고하였다. 적은 내용이 매우 많았지만, 모두가 치도(治道)의 급무(急務)였으며 당세의 폐단에 꼭 들어맞았다. 이로써 선생의 학문이 국가 경영에 활용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선생이 초야에서 정도(正道)를 지킨 탓으로 우리 백성들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선생은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나 우복 선생과는 도의(道義)로 결의를 맺고 항상 왕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우복 선생은 늘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매번 일을 할 때마다 이치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 월간(月澗)에게 그 일을 알리고는 했다.”
하였다.용주(龍洲) 조공 경(趙公絅)이 선생을 찾아뵙고 돌아가 우복 선생에게 말하기를,
“이번 길에 덕을 갖춘 분을 뵈었는데 나이는 많았지만 안색은 아이 같았습니다.”
하니, 우복 선생은 “아마도 우리 숙재(叔載)를 만난 모양이구나.”라고 하였다.선생은 평소에 영리(營利)를 일삼지 않았다. 의복과 거처는 검약에 힘쓰고 세간의 즐기는 것 일체를 담담하게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마치 일용하는 양식과 의복같이 여겼다. 81세가 되어서는 자신을 경계하는 잠(箴)을 지으니, 위 무공(衛武公)이 나이 90에 잠을 지어 자신을 경계했던 일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일찍이 선생이 이르기를,
“왕양명(王陽明 왕수인(王守仁))은 마음을 이(理)라 하고, 양지(良知)를 이루는 것을 학문이라 하였다. 나정암(羅整庵 나흠순(羅欽順))은 이(理)와 기(氣)를 하나로 보고, 인심(人心)은 이발(已發)이고 도심(道心)은 미발(未發)이라 하였다. 노소재(盧穌齋) 선생은 이 말을 존숭하고 신뢰하여, 욕망을 성(性)으로 파악하고서는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하였다. 퇴도(退陶) 선생은 이 말이 잘못되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주학(程朱學)에서 전해 오는 주지(主旨)로, 해와 별처럼 밝은 것이다. 학자들이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근세 학자들의 병폐는 오로지 문장만 익혀서 과거를 위한 학업을 하고 자기 분수에 맞는 근원적 공부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기량이 정교해질수록 마음은 더욱 피폐해진다.”
하였다. 또 일찍이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병폐로 여기고 이르기를,
“술을 좋아하는 해로움은 홍수나 맹수보다도 심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잃고 몸을 망치는 것은 늘 술에서 비롯되었다. 꽤나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도 흠뻑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며 법도를 어기고, 서로를 흠모하고 본받으며 달인(達人)이라 일컫고 있다. 술자리를 쫓아다니며 예법에서 벗어나 떠돌고 있으니, 풍교(風敎)를 해치는 일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였다. 선생이 올바른 학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무너진 풍속을 경계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선생은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엄숙한 태도로 주자의 편지 몇 편과 《시경》의 〈상체(常棣)〉와 〈억(抑)〉,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의 〈가훈(家訓)〉을 암송하였다. 그리고 마음에서 깨닫는 바가 있으면 기록하였는데, 한밤중이라도 불을 켜고 적어 두었다. 매일 밤 자제들과 옛글을 강론하고, 강론을 마치면 술을 마시며 시를 읊도록 명하면서 말하기를,
“울적함을 풀어내어 마음을 화평하게 하는 것도 학자가 할 일이다.”
하였다.선생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편지에서 읊은 시를 보자면 충담 전아(沖澹典雅)하여 세속의 화려하기만 모습이 전혀 없었다. 식견 있는 이가 선생의 유집(遺集)을 찬찬히 완미해 본다면 선생의 깊은 학문을 알 수 있을 것이다.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 문하에서의 방법을 기준으로 삼아 하루도 쉬지 않고 힘을 쏟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덕행과 기량을 이루어 명성이 주변에 퍼지자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고 본보기로 삼아 우뚝이 동남 지방에서 고고한 학자로 중망을 받는 인물이 되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선생의 부인인 숙인(淑人)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충순위(忠順衛) 안수인(安守仁)의 따님이며 고려의 좌명 공신(佐命功臣) 광릉군(廣陵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경(孝敬)스럽고 자혜(慈惠)로워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을 대함에 도리를 다하였다.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어긋남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는 마땅한 도리를 가르쳤다.부인은 선생보다 한 해 앞서 세상을 떠났고 선생과 같은 묘역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남 일규(一圭)는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을 지냈고, 차남 덕규(德圭)는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지냈고, 삼남 신규(身圭)는 생원이었으며, 딸은 생원 김구(金愳)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庶子)로 남규(藍圭)를 두었다. 일규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기선(基善)은 일찍 죽었고 재박(在博)과 재약(在約)이 있다. 두 딸은 사인(士人) 정타(鄭椯)와 이시진(李時晉)에게 시집갔다. 서자로는 재신(在信)을 두었다. 덕규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기광(基廣), 문과를 거쳐 병조 낭관을 지낸 재용(在容), 무과를 거쳐 현감을 지낸 재정(在定), 재완(在完), 생원인 재헌(在憲)이다. 딸은 사인 강한룡(姜漢龍)에게 시집갔다. 신규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재중(在中)은 무과를 거쳐 현감을 지냈으며, 재숭(在崇), 재륭(在隆), 재웅(在雄)이 있다. 두 딸은 사인 김순명(金順鳴)과 김여필(金礪弼)에게 시집갔다. 사위 김구는 아들 김명휴(金命休)를 두었다. 남규는 아들 재근(在謹)을 두었다. 증손자는 열셋을 두었는데 항지(恒至), 경지(慶至), 응지(應至), 만지(萬至), 시지(時至), 중지(重至), 춘지(春至), 창지(昌至), 장지(長至), 영지(榮至), 석지(碩至), 형지(亨至), 정지(鼎至)이고, 현손 이하는 그 수가 많아 다 적지 못한다.선생의 6대손인 요희(堯禧)가 나에게 명하기를,
“선조의 사행(事行)이 본말을 자세하게 갖추고 있지만 덕을 기록한 행장을 아직까지 짓지 못했습니다. 선조의 막내아들인 생원공이 찬술한 가장(家狀)을 사람을 시켜 보내니 부탁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내가 스스로 생각해 보니, 태어난 것도 늦고 학문도 보잘것없어 식견이 천박하고 문장도 졸렬하니 어찌 감히 선생의 성덕(盛德)을 더듬더듬 적어 스스로 참람하고 망녕된 죄를 자초하겠는가.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요희의 청이 더욱 간절하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당세(當世)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거친 언사로 책의 말미에 이름을 기탁하여 평소에 선생을 흠모했던 마음에 위안으로 삼는 것은 우매한 나의 처지에 큰 행운이었다. 또한 생원공이 찬술한 가장은 집안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의 손에서 나왔으니 언행과 사적이 진실하고 핵심을 담았으리라 생각되었다. 이것을 저본으로 삼고 약간 수정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행장을 지어 입언(立言)하는 군자의 채택을 기다린다.
先生諱㙉。字叔載。號月澗。其先興陽人。高麗末。有議政府左贊成舒原。子垠入本朝。官司憲府大司憲。又三世至諱壽川。擧遺逸官司憲府執義。寔爲先生高祖。曾祖諱兆年。儀仗庫判官。祖諱琢。從仕郞。考諱守仁。贈宣務郞司贍主簿。以子蒼石先生貴。加贈承政院左承旨。累世德行事治。具在家牒。妣金山金氏。處士漣之女。蚤卒。妣高靈申氏。處士守涇之女。府使松舟之曾孫。俱贈淑夫人。先生以嘉靖戊午四月十四日生。幼聰穎。善屬文。稍長。就學于石川金
公覺。不煩程督而業日進。旣而復從鄭公國成,西山閔公汝諧。通五經四子。庚辰。西厓柳先生莅商山。先生執贄登門。得聞君子行己之方。自是從遊河上。柳先生。深加期許。勉以陶山遺緖。先生勵志篤學。至忘寢食。壬辰。倭奴大擧兵入冦。尙爲賊衝。先生約同志募村兵。據鞍嶺以備賊。賊猝至。再合而師潰。承旨公與淑夫人沒于軍中。愚伏鄭先生同在陣。喪其母夫人。先生相持而泣曰。吾輩力弱縱不能刳肝以斃賊。其忍一日偸活。與共戴一天乎。遂倡義糾兵。得數千
人誓復讎討賊。設義陣于鈷鉧潭。修器械給饋餉。間設方略。斬獲甚多。土賊剽劫之患。亦得平。癸巳二月。賊陷義陣。先生與蒼石公僅得脫。將避于白華山。蒼石公猝病癨眩仆。謂先生曰。吾病且死矣。兄可圖免以血我先祀。先生握手泣曰。古有兄弟爭死賊者。吾豈忍舍爾而獨生。遂背負而上山。忽遇二賊抽刃而前。先生號天曰。天若有知。我輩無罪。又仰山而祝曰。願山靈活我。遂彎弓射賊。喑嗚奮罵。聲氣俱厲。賊駭走不敢近。因負上絶頂。時先生方持服毁瘠已甚。而
精誠所感。能却賊衛弟。竟得全活。語具在蒼石所著急難圖。癸卯。中生員。戊申廢朝初。五賢從祀議起。嶺士推先生爲疏首。遂詣闕陳請。未久蒙許。是歲。薦除翊衛司洗馬。未幾棄歸。庚戌。除平陵道察訪。未周歲而歸。郵人追思立碑以頌德。自是謝絶世故。杜門求志。癸亥。仁廟改玉。擢授知禮縣監。時新去亂。邑殘民憊。先生至誠撫摩。應旨上疏陳弊。略曰。絶戶之賦。徵於隣里而餘存蕭然。闕兵之充。皆以襁褓而苛政肆出。一人而應百人之役。一年而徵數年
之賦。十室荒城。一敗塗地。期以歲月。掃盡賦役。另示懷來之意。以待穌息之期。此上策也。若謂賦稅之常。不可獨免。調發之役。難於盡除。則革邑汰守。附於大官。藉其庇庥之力。姑免慘毒之苦。抑其次也。水火餘生。遭値盛際。如春氣方至。草木將敷。豈意惻怛之旨頻頒而逋欠之滌未盡。蔀屋之冤自如而赤子之流轉未已也。今若拱手坐視。不思改絃而圖存。則臣亦何顔寄一縣之長。上以闕貢獻。下以隳字撫乎。逝將釋負而歸。方可安於心也。上優批。命議處。該曹
防啓。乃再上疏。語益加切。又被該曹所尼。事竟不行。先生因俗爲治。聽斷明愼。號令平恕。櫛垢爬痒。吏民俱安。每春秋簡騎從。巡行境內。勸農桑問疾苦。勉以孝弟勤儉。遂爲文以諭。其爲政。尤以敎化爲先。邑中子弟勸令爲學。有時聚集。考校所業。士皆樂趨之。春秋舍菜。必先期齊宿。牲幣祼薦。務致誠潔。時邀邑之耆老。行燕飮之禮。有孝行者厚遇之。具申于監司。一歲中縣境稱治。丁卯。三辭而歸。邑民追思。行過者必造門致敬。甲戌。金公尙宓莅尙。承朝命行呂氏
鄕約。擇有齒德學行者爲約正。於是衆推先生爲正。修巖柳公副之。每月朔。讀約如法。爲文告約中曰。藐吾一身之微。秀出萬物之衆。其與禽獸異者。以有五倫之序也。人而或不能盡其倫。則人之形貌雖具。而其實則禽獸無別也。古之聖王。憂人之不能盡其性。於是而本義理以爲敎條。著經訓以爲敎法。使天下之人。因其固有之理而盡此五者之倫焉。聖賢之書。無非所以明此道者。而其中小學一書。尤切於日用。此實人道之根本。四書之階梯也。苟能熟讀精思。循
序漸進。心之所存。身之所履。必以體是道盡吾性爲期。心志凝定。踐履篤實。則有諸己者皆實行。而見諸事者皆實用也。又曰。君子之道。莫大乎孝。旣盡於親則弟可移於長。况順乎親者。亦能順乎朋友矣。又曰。朋友者。綱紀人倫者也。以直諒規戒相期。以圓和軟熟爲戒。則其於輔仁責善之義。庶幾近之矣。嗚呼。天生斯民而與之以性。人所共由者謂之道。人所同得者謂之德。道出於天而行於人。德本於道而得於己。因其秉彝之天。復其降衷之理。人人同其所行。處處
同其所向。則不美之習可變而美矣。約行數年。習俗丕變。丙子冬。狄人來侵。時先生年已八十矣。使子赴義陣而避地于靑鳧。及聞南漢江都次第失守。悲憤有詩。未幾還。國家用優老之典。八十以上例加資格。子弟欲具聞于朝。先生不許曰。汝等看我所得如何。持此而歸足矣。陳乞恩資。不亦可笑之甚邪。戊子春。患脾胃不和。閏三月十三日。扶掖而坐。盥漱衣冠。俄復正席而臥。默記所誦書。子弟請少止。曰吾亦欲已而不能。請進藥餌。曰吾年紀亦足矣。爾等毋強
請。遺戒諸子毋過毁。遂悠然而逝。壽九十有一歲。遠近驚悼。皆奔赴治喪。用其年五月八日。葬于靑仁之原。丙申正月丙午。改葬于州西中牟縣楸洞負艮之原。前後會者皆百餘人。先生資稟粹美。操履端確。事親篤孝。承順和悅。居致養病致憂。及遭壬辰之變。哀毁過制。雖在干戈飢饉中。執喪謹嚴。不進草木之滋。倭產器玩。終身不入於家。與蒼石公爲天倫知己。互相博約。嘗遘癘危甚。人有勸其出避者。先生辭曰。兄弟猶手足也。安忍舍之而獨避乎。蒼石公賴而得穌。
先生亦無恙。蒼石公先十四年而卒。先生號痛不自勝。遇生朝。子弟爲壽。先生有詩曰。春萱罔極痛。常棣無竆情。酒進淚先落。何心壽吾生。其孝友之情。老而彌篤如此。奉先務盡誠敬。日必晨謁。間三四日省掃先壠。不以老病自懈。祭祀。齋沐必謹。具羞必親。至年八十五。始以筋力不逮告廟。使子弟代奠獻。治家有法。嚴重寡言。門庭肅然。家室之間。和而義。敎子弟以孝弟信讓。撫諸姪視己出。待族婣。盡其雍睦。御婢僕。曲有恩義。與人交。表裏殫竭。見其善。推詡如不及。有
不善則告語切至。使之自改。或有死喪竆阨。爲之極力救護。其接引後進。諄諄以開明心術。變化氣質爲功也。蓋先生學有淵源而益自勉厲。以六經四子爲本而沈淹於洛建之書。尤用功於朱子書節要。講明體驗。反復融會。乃拈出其要語。彙分類輯。各爲一冊。曰聖學要訣。曰晦庵書切要。曰中流一壺。曰讀書錄。曰懼塞錄。曰讀書法。皆手寫成帙。朝夕潛玩。受用於動靜語默而發之於事爲應酬之間。和靖門人所謂耳順心得如誦己言者。先生殆近之矣。先生旣不見
用於世。無以展布其所蘊。然居官極愛民之道。處鄕盡善俗之方。愚伏先生之赴天官長也。以朱夫子答留丞相書勉之。而惓惓於君子小人之分。其旣行。又貽書。勸其勿循常格。恢張公道。縷縷數百言。皆爲治之急務而切中當世之弊。亦可以見其學問之全。可以措諸事業。而惜乎抱道林泉。卒不能使斯民蒙其澤也。先生不喜交遊。與愚伏結以道義。常往來講磨。愚老常曰。吾自少每做事。恐有未當於理。使月澗知之。龍洲趙公絅訪先生。退見愚老曰。今行見一德人。
年高而色若孺子。愚伏曰。豈見吾叔載邪。先生平生不事營爲。衣服居處。專務儉約。世間一切玩好。泊然不入於心。嗜學如菽粟裘褐。年八十一。作箴以自警。蓋追衛武九十箴戒之意也。嘗曰。王陽明以心爲理。以致良知爲學。羅整庵以理氣爲一物。以人心爲已發。道心爲未發。蘇齋盧先生尊信此言。至於認欲爲性而曰。欲者人之性。退陶先生力言其非。此乃洛建相傳之旨訣。昭若日星。學者不可以不知也。又嘗曰。近世學者之病。專事文詞。以爲科擧之業。而於己分
上本原工夫。全未有用心處。伎倆愈精而心術愈壞。又嘗病士大夫嗜酒之失曰。崇飮之害。甚於洪水猛獸。古今亡國隕身。恒由於斯。士之稍有名字者。縱酒號呶。畔棄繩墨。轉相慕效。指爲達人。追隨杯勺之間。放浪禮法之外。傷敗風敎。未有甚於此。其發明正學。警勵頹俗。類如此。日必晨起。莊誦朱子書數篇及詩常棣,抑戒,程子四勿箴,呂滎公家訓。有得則識之。雖中夜取燭以書。每夜與子弟講論古書。畢則命飮酒歌詩曰。宣暢湮鬱。和平志意。亦學者事也。先生不喜
著述。其見於吟詠簡牘者。冲淡典雅。絶無世俗浮艶態。善讀者得其遺集而玩繹焉。亦可以見先生之深於學也。蓋先生之學。專以朱門門路爲準的。而俛焉日有孶孶。不知年數之不足。及其德器渾成。孚尹旁達。則遠邇士子莫不敬慕矜式。屹然任東南麈拂之望。於乎詎不休哉。先生內子淑人廣州安氏。忠順衛守仁之女。高麗佐命功臣廣陵君邦傑之後。孝敬慈惠。事舅姑處娣姒。盡其道。配君子無違德。敎諸子以義方。先先生一年卒矣。葬與同原。有三男一女。男長
一圭。司蓄署司蓄。次德圭。冰庫別提。次身圭生員。女適生員金愳。又餘男藍圭。一圭三男。基善蚤死。在博,在約。二女壻。士人鄭椯,李時晉。庶子在信。德圭五男。基廣,在容文科騎省郞。在定武科縣監。在完,在憲生員。一女壻士人姜漢龍。身圭四男。在中武科縣監。在崇,在隆,在雄。二女壻。士人金順鳴,金礪弼。金愳有子命休。藍圭有子在謹。曾孫男十三人。恒至,慶至,應至,萬至,時至,重至,春至,昌至,長至,榮至,碩至,亨至,鼎至。玄孫以下。多不盡載。先生六世孫堯禧辱命於象靖
曰。先祖事行。具有本末。而紀德之狀。迄未有屬筆。敢以先祖季子生員公所撰次家狀。介以請。願吾子之惠之也。象靖自惟晩生末學。識膚語綿。何敢摸擬盛德。以自納於僭妄之誅。屢辭而其請益勤。則又自惟旣未及供灑掃於當日。得以蕪拙之辭。託名卷末。以慰平昔景行之思。亦愚分之幸也。且生員公之狀。出於過庭薰炙之餘。言信而事核。据爲按本而略加櫽括。亦無甚難者。是以不敢終辭。以俟立言君子之所采擇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