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信) -그것은 사람을 믿는 마음이다
"신" 그것은 사람을 믿는 마음이다
믿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말 얼마나 깊이 서로 믿으면서 살고 있을까. 마음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속에 있는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한쪽 손의 손가락 수인 다섯만 갖고 있어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불신사회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다. 스승이 제자를 믿지 못하고 상사가 부하를 믿지 못한다. 심지어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미더워하지 못한다. 국민이 행정부를 믿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을 불신시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너무 황량하다.
유학에서는 신의를 큰 덕목으로 꼽고 있다.
제자 한 사람이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식량의 충족, 군비의 충족, 그리고 사람 사이의 신의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급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공자는 '군비'라고 즉각 대답했다. 그리고 '군비' 다음으로 버려야할 것이 있다면 식량'이라고 공자는 말했다. 공자는 이어 "사람은 어느 때고 죽는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신의다. 신의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 먹을 양식이 부족해도,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살아도 신의를 잃지 않으면 훌륭한 삶을 영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하더라도 신의가 없는 생활은 사람다운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사회를 비롯한 서구사회를 일반적으로 크레디트(credit) 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신용사회다. 소위 크레디트 카드(Credit Card)라는 신용카드의 신용대출액에 따라 그 사람의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까지도 가늠된다. 그러나 서양사회에서의 신용은 법으로 묶여 있는 신용이다. 법이 신용의 깊이, 신용의 질을 좌우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문화 속의 '신'은 법이 아니라 인간에서 비롯되는 '믿음'을 말한다. '신는 사람과 말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인'은 사람을 가리키고 '언'은 사람의 말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은 사람의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은 또한 인-구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사람의 입이란 뜻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곧 '신'이다. 따라서 믿을 신, 펼 신으로 풀이되는 '신'의 속뜻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말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의 철학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다. 사사로운 약속은 물론 사회에 내놓은 공적인 약속인 공약은 어떤 위난이 있더라도 지킨다는 정신이 아쉬운 때가 바로 요즈음이다. '신'은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영역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말고 자신이 없는 공약은 애초에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의 있는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작고 큰 것이 없는 '신'의 마음
일구이언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입으로 두 가지 상반된 말을 한다는 뜻으로써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적으로 약속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 한 번 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약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그렇지만 약속을 어긴 상대방에 대해서도 으례 그러려니 하고 만다. 자기 자신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니까 상대방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의 시정을 믿으려 하지 않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의 폭도 크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해결과제는 아마 이와 같은 불신풍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근래에 접어들면서 한국인들이 갖게 된 나쁜 습성임을 알아야 한다. 선비사회였던 지난날 '약조'라는 것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영조 때 정승과 호조판서를 지낸 정홍순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한 번 약속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던 신의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가 호조판서로 있었을 때 그의 집을 수리하게 되었다. 집의 수리가 끝난 후 목수가 당초 약속한 돈보다 좀 더 달라고 하자 그가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서 목수와 그가 임금문제로 시비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까짓 것 몇 푼 안 되는 돈인데 주어버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진언했다. 그러자 정흥순은 아들의 말도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첫째, 당초부터 서로 약속했던 노임이었기에 그 약속을 서로 지킴 도리고 둘째, 노임을 마구 올려주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 곤경을 겪을 때가 있게 된다."라고 밝히면서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흥순에 대해서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일이다. 왕이 동구릉에 행차를 했다. 정흥순은 왕의 거동구경을 갔는데 우천에 대비해서 갓모를 두 개 가지고 갔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의 소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날 비가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갓모를 썼는데 옆에서 함께 구경을 하던 사람이 비를 맞고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다른 갓모를 빌려주기로 했다. 구경을 끝내고 헤어지게 되자 정흥순은 빌려준 갓모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비는 그때까지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인정상 그냥 되받아오기도 곤란해서 다음날 아침 정홍순네 집으로 갖다주기로 서로 약조를 했다. 정홍순은 자기 집을 자세히 일러주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상대방 집 주소도 알아두었다. 그 이튿날이 되었는데 갓모를 빌려간 사람이 갓모를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녁때까지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해질 무렵에 그 집에까지 가서 갓모를 되찾아왔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정홍순은 호조판서가 되어 새로 부임한 호조좌랑의 신임인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홍순은 그 신임자가 오래전에 갓모를 빌려갔다가 약속을 저버리고 되돌려주지 않았던 당사자임을 알게 되었다. 정홍순은 "한갓 갓모 하나를 약속한 날 되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신용을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찌 나라의 살림을 맡게 되는 호조의 관리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후 그를 파직시켰다. 신용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준다. 인격을 말하는 데 가볍고 무거운 것이 없듯이 신용에는 사소한 것과 큰 것의 구별이 없다.
신용은 사회가 채점한 사람의 값
'세일즈의 진수는 물건을 파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는 데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세탁기 판매, 자동차 판매 등을 맡게 되는 외판원들의 교육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판매요령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판다는 것은 바로 신용을 생명으로 해야 세일즈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일즈맨의 입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소비자측에서 볼 때에는 신용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똑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신용이 있는 상점에서 산다는 생각을 갖는다. 값의 차이가 좀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믿는 사람을 통해, 믿어온 상표를 찾아나서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용이란 어떻게 쌓여지는 것일까. 언변이 좋거나 인상이 좋아서 신용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이나 점잖은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신용이 없으면 마음이 떠나게 된다. 신용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는 먼저 신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먼저 이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공자의 말은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은 되새겨봄직한 말이다. 이익만 찾는 기업은 처음에는 잘되는 듯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결코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그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 공헌하고, 사회발전에 기여를 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비즈니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코퍼레이트 시티즌(corporate citizen)'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코퍼레이트 시티즌은 기업체도 그 자체 지역사회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당한 세금을 내야하며 지역사회 발전이 곧 기업의 발전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과 그 지역사회가 신뢰의 바탕 위에 공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기업시민정신'은 미국 대기업체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싹텄다. 예를 들어 도서관, 병원, 학교 등등 공공시설이 황폐화한 지역사회에 있는 기업체는 기업체로서 온전할 수가 없으며, 만약 건전한 운영을 하고 있다면 그런 사실 자체를 창피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역사회의 발전을 도외시하는 기업체라면 공장에서 배출되는 폐수 등 공해에도 둔감할 것이다. 결국 그 공해로 인해 지역주민의 건강이 악화되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노동력이 저하되고, 구매력이 떨어지고, 전체 사회가 병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기업체의 생산력이 크게 감소되어 기업체는 끝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못지않게 기업체와 지역사회간의 신뢰 역시 중요하다. 지역사회가 아끼는 기업체라면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의 아낌을 받을 수가 있다.
쉬운 예를 들자. 국내시장에서 한국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체의 상표는 해외에 수출되어도 역시 좋은 반응을 얻게 된다. 그 반대로 국내시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선례가 있는 기업체의 상품은 해외에 나가서도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힘들다. 아무리 방대한 돈을 들여 매스컴을 통해 선전을 한다 해도 초기에는 잘 팔리는 듯하다가도 끝내는 외면을 당하게 된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신용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용은 그 기업과 연관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쌓여지기 마련이다.
한국인 특유의 '신'의 세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우정의 깊이를 헤아린 말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과 신의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화로 세조 때의 서거정과 김시습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후 서거정은 세조가 주는 벼슬을 받고 일생 동안 관직에 머물러 있는다. 그러나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힌다. 이와 같은 상반된 시국관만을 본다면 두 사람 간에 신의는 없어야 옳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우의는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세월이 흐를수록 단종을 죽인 일, 형제들을 죽인 일, 성삼문 등 재능 있는 여섯 신하를 무참하게 죽인 일 등이 몹시 후회되었다. 그래서 추천재(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식)를 지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 추천재를 김시습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거정에게 김시습을 찾아 그 일을 맡도록 하라고 분부했다. 김시습은 이미 그 당시 생육신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성삼문, 하위지 등처럼 세조에게 적극적인 반항을 한 나머지 쿠데타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으나 세조의 녹을 받기 거절하고 초야에 묻혀 있었다. 그는 세조에 반항하다 역신으로 처형된 사육신의 버려져 있는 시체를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기도 한 신의의 사람이었다.
서거정은 세조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김시습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김시습은 장안에 나타나면 다른 사람은 일체 만나지 않았으나 서거정에게만은 연락을 하고 술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을 만난다고 해도 김시습이 그의 요청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세조의 청이라면 응당히 반대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을 생각한다면 시습이 마음을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중 김시습이 홀연히 장안에 나타나 서거정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려왔다. 서거정이 반가운 마음으로 김시습이 묵고 있는 허름한 주막에 들렀더니 그는 이미 반쯤 술에 취해 있었다. "어 강중(서거정의 아호)인가, 술 가져왔으면 들어오게"라고 김시습은 말했다. 이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막혀 있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서거정은 김시습의 강직한 성격을 아는지라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는지 초조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예민한 김시습은 서거정의 심중을 헤아렸다. 그는 대뜸 "자네 나에게 무슨 할 이야기가 있군. 어서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건 하지. 벼슬만 빼놓고...." 이렇게 김시습은 운을 떼었다. 그제서야 서거정은 세조의 분부를 전했다.
"상감이 노산군(단종)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초혼제를 상감이 올리신다는군. 자네를 그 추천재의 법사로 부르시네, 자네가 맡아줄 수 있을까," 그러자 김시습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래서 자네가 나섰군. 그렇게 하기로 함세"라고 이에 응했다. 그래서 김시습은 오랜만에 대궐에 들어가 추천재를 주관하고는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조는 서거정을 통해서 김시습을 꼭 만나보았으면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간 것은 서거정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어떤 경우라도 왕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서거정과 김시습의 신의는 이처럼 깊었다. 두 사람의 우의는 살벌한 정치적인 대결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다운 예의를 가르친 삼강오륜에서도 붕우유신을 말한다. 신의가 있어야 참다운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는 사람은 형제간에도 우애가 있을 수 없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타인과의 접촉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친구를 사귀되 신의로써 사귀는 한국인의 전형을 서거정과 김시습을 통해서 본다.
다소의 결함이 사람을 따르게 한다
사람이 너무 고원한 인격자라면 사람들이 접근을 어려워하게 된다. 그 반면에 지나치게 나쁜 점만이 누구에게나 눈에 띄면 그 사람 역시 사람들이 접촉을 꺼리게 된다. 흠 없는 사람이란 없다. 누구에게나 다소간의 잘잘못은 있는 법이다. 결점이 눈에 띄면 그것을 덮어둘 줄도 알고,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칭찬해 주기도 하면서 서로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인간사회다. 성현으로 알려진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사람사는 방법도 그런 것이었다. "결점을 크게 탓하지 말고 장점을 드러내 칭찬하면서, 교접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단점을 없애고 장점을 키워가는 것이 교육"이라고 했던 것이다.
공자 역시 크고 작은 결점이 없었던 사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에는 정치적인 야심도 남다른 바 있었다. 노나라나 제나라에서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었고 한때는 높은 관직에 앉기도 했었으나 중도에서 그만두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가 지향했던 사회는 그 옛날의 은이나 주나라 같은 평화롭고 예의가 충만한 나라로써 그는 그런 사회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주변인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좌절을 거듭하면서 관직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같이도 보여진다. 그러나 그가 후일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된 것은, 완벽한 인간이 아닌 다소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상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닦았고 사람들을 폭넓게 가르쳤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자를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뜻을 펴지 못하고 좌절 속에서 길을 떠나는 공자에게 "군자가 어째서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야 합니까. 이럴 때에 군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어도 바른 행실을 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고 대답한다. 하고자 하는 뜻은 실현되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인데도 그 역경을 극복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제자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다. 완벽한 인간으로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마치 컴퓨터로 잰 듯이 매사를 처리했더라면 그의 주변에 그처럼 많은 제자들이 따라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조 성종 때에 이상주의 정치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인물로 우리는 조광조를 손꼽는다. 후세사가들은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실패했음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높은 뜻이 실현되었더라면 조선의 사회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너무나 급진적인 개혁은 기존층과의 극한 대립을 낳았고 결국은 희생되었다. 너무나 완벽에의 길을 서둘렀던 것이다. 조광조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에 당시의 대학자인 김굉필에게 사사를 받았다. 어느날 김굉필이 어머니에게 보내려고 말리던 꿩 한 마리를 고양이가 몰래 훔쳐 먹게 되자 크게 화를 내어 지키던 계집종을 꾸짖는데 그 말이 너무 지나쳤다. 이를 듣던 어린 제자 조광조가 스승에게 말했다. "부모를 봉양하시는 정성은 지극해야 하겠습니다만 군자는 언제나 말을 가려서 하셔야 할 줄 압니다."라고 곧바로 지적했다.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은 어린 제자 조광조의 손을 잡고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네 말이 옳다.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네 스승이 못 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수가 눈에 띄면 못 참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말해 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정치가 실패한 데 대해 뒷날 이퇴계는 "퇴계언행록"에서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 시대는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기묘사화도 이와 같은 것이니라."고 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경륜을 폈던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아깝다. 공(조광조)은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정치계로 나갔으니...."라고 그의 좌절을 몹시 아쉬워했다.
깊은 신뢰는 기적을 낳는다
상사가 부하를 신뢰하고 부하가 상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느 조직도 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의 상식이다. 이런 믿음은 굳은 결속을 낳고, 그런 결속은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만든다. 혈맹과 같은 믿음을 자산으로, 범인으로는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백범 김구와 백범을 따른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우리는 본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실제로 거사에 나서기가 어려운 법이다.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에 있었을 때다. 이봉창이 그를 찾아왔다. 말로만 듣던 임시정부를 찾아 백범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다. 그의 딱한 처지를 듣고 백범은 선뜻, 당시로서는 거금인 천 원을 그에게 준다. 물론 백범은 이봉창을 처음 대했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백범은 그를 완전히 믿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 믿음을 실제 행동으로 이봉창에게 보였다. 뒷날 이봉창은 "나는 평생에 이렇게 신임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백범 선생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봉창은 계속 백범의 인격에 감화되어갔고 그의 애국심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는 나라를 위해 자기의 한 목숨 버리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백범은 그런 믿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백범의 이와 같은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윤봉길 의사도 이봉창 의사처럼 백범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고 그와 혈맹으로 이어진 관계를 가졌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윤봉길 의사의 장거로 인해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물심양면에 걸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나서고 있는,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지사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김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인이며 그 다음이 신이라고 언제나 말했다. 그래서 그는 첫아들의 이름을 김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김신이라고 했던 것이다.
김구의 인간 신뢰는 그의 성실과 가식 없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순수성은 잘생기지 못한 얼굴 속에 근엄하게 나타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백범은 언제나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같지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순수한 마음가짐과 정직, 그리고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갖는 신뢰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지목되었을 때에 자신이 상민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미천한 사람이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안 될 일이며 쟁쟁한 인물도 조각을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일이 허다한데 내가 무슨 덕망으로 그것을 맡겠소."라고 거절했다. 그 이전에 국무령으로 이동녕, 안창호, 양기탁, 이상룡 등이 지목되었으나 내각 조직도 제대로 못하고 사퇴한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동녕이 "내가 밀어주겠으니 협력해서 일을 잘 해봅시다."라고 했다. 백범은 그제서야 '이동녕 동지의 말을 믿겠소."라고 한 후 국무령 직책을 맡았고 조각에 성공했던 것이다. 남을 믿되, 성실과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끝까지 신뢰하고, 남의 신뢰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는 백범에게서 우리는 신의의 깊은 뜻을 배우게 된다. 불신풍조가 팽배해 있는 오늘날 이와 같은 '신의'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일 것이다.
사제지간을 묶는 신의
사제지간의 애툿한 정의가 메말라가고 있다. 스승은 학문의 전수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보다 성숙한 인격자로서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아끼는 후학일 뿐 아니라 친자식처럼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간의 신의가 아쉽다는 소리가 높다. 이 역시 산업화사회의 이기적인 정신풍토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교문화 전통의 우리나라에서는 사제지간의 신의가 남다른바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인물인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인 강위와의 사제지간의 신의를 보자. 강위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민노행에게서 사사하다가 민노행이 죽은 후 그의 유언을 따라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민노행이 대 서예가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를 찾아 나섰을 때에 추사는 제주도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대단히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노경은 사사되어 비명으로 죽었고, 추사 자신도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귀양길에 있었던 것이다. 25세의 강위는 서책을 짊어지고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가서는 그에게 배움의 뜻을 올린 후 정성껏 귀양지의 뒷바라지를 한다.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스승인 추사의 뒷바라지를 한 후 추사의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오자 그도 스승의 뒤를 따랐다. 그 뒤 3년 후에 다시 추사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자 강위는 한반도의 북단인 북청까지 그를 따라가 정성껏 스승을 모셨다. 그런 연후 추사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다시 그를 따라 추사의 고향으로 간다. 이것이 사제지간의 신의였던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사제지간의 애툿한 정의는 판소리의 대가로 알려진 신재효와 그의 제자 진채선에게도 엿보인다. 신재효는 조선조 말 판소리를 집대성한 명창으로서 '춘향가', '심청가', '토끼타령', '박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 등 여섯 마당을 정리해 제자들에게 전했을 뿐 아니라 '도리화가', '성조가', '광대가', '오섬가', '어부사', '방아타령', '괘씸한 양국놈아' 등의 새작품을 펴낸 대가다. 아전 출신인 신재효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제자 가운데에 진채선이란 여성이 있었다.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왕실의 권위도 선양할 겸, 경복궁 준공기념 대연회를 베풀고 전국의 명창들을 불렀다고 한다. 일종의 판소리 명창 경연대회였다. 이 자리에 신재효는 제자인 진채선을 보냈던 것이다. 진채선은 스승이 지어준 '성조가'와 평소 장기로 삼던 '춘향가'를 불렀는데 그녀의 소리가 전국에서 운집한 내노라 하는 명창들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녀의 창을 듣고 감격한 대원군이 그녀에게 "장하구나 네 선생이 누군고?"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의 지시대로 도포에 갓을 쓰고 합죽선을 든 남장한 진채선이 "해동조선 전라좌도 고창현 북문하에, 십이간 줄행랑의 대문집이요, 성관은 평산 신씨 있을 재 효도 효는 장적의 함자요, 일백 백 근원 원은 친구간의 자호로다."라고 '동리가' 곡조에 맞추어 응답하여 대원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진채선으로 인해 신재효는 삽시에 대원군으로부터 오위장이라는 무관직 벼슬을 얻었고 그 뒤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받았으며 죽기 전에는 가선대부로 올려 받았다.
추사 김정희와 강위의 사제지간의 신의나 신재효와 애제자인 진채선의 애툿한 사제지간의 정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은 진채선은 후일 판소리로 대성하여 여류 국창의 자리를 차지했다. 진채선은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 광대의 효시가 되었다.
기업문화의 바탕에도 신뢰가
최근 들어서면서 기업문화란 말이 기업계에서 폭넓게 나돌고 있다. 기업이 침체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건전한 문화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문화(Corporate Culture)는 8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한 선진산업국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70년대 말부터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된 기업의 생산력 쇠퇴와 무역 역조현상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그 문제점의 하나로 기업문화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성장은 자본과 우수한 장비, 그리고 종업원들의 능력에 맞는 임금지불 등에 걸친 경영전략만 서 있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밖에 종업원들의 문화의식이 기업성쇠의 열쇠가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수한 기업문화란 그 기업체에 속해 있는 전체 사원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긍정적이며 진취적인 정신자세라고 풀이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기업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감, 기업체 종업원들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인도하는 끈끈한 사우정신, 상사와 부하들을 결속하고 있는 깊은 신의 등이 우수한 기업문화의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추고 있는 기업체는 생산과 그 생산성에 따르는 급료지불이라는 노와 사 사이의 단순한 도식이 아닌 정의와 신뢰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체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체와 그렇지 못한 기업체는 크게 다르다. 우수한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기업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활력이 있다. 자신의 일이 회사의 일이다. 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전 사원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의 불편은 전체의 불편으로, 어느 한 부서의 기쁨은 전체의 기쁨으로 확산된다.
인격에서 우러나는 강한 신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나 신뢰는 맹목적인 상호 의존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존중하는 인격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조의 세종과 황희 정승간의 신뢰는 단순한 절대 권력자와 그의 녹봉을 받는 신하라는 주종관계가 형성한 것이 아니다.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인격이 바탕이 된 깊은 신뢰는 죽음도 불사하는 유대를 낳는다.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이봉창 의사 사이에 형성된 죽음을 넘어선 의리는 애국이라는 대의도 있었지만 상호간의 깊은 믿음에서 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빛을 발한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장공 권율 장군의 무공은 이들에 대한 부하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가져온 것이었다. 빈약한 훈련 장비를 갖춘, 사기가 떨어진 군대라도 충무공이나 충장공의 지휘에 들어가면 강한 군졸로 변하는 것이다. 지휘관에 대한 무서운 믿음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가 솟는다.
권율 장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청주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율은 새로 진을 칠 자리를 보기 위해 막료 몇몇을 거느리고 일본군 진지 근처에 나갔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막료들은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장군과 함께 있는 한 죽음도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틀림없이 무슨 수가 생기려니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 놀라지 않았다. 권율은 그 당시 아직 소년이었던 정충신에게 적진에 가서 적장을 만나 "양국이 대병으로 서로 대치할 때에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못하고 이런 속임수로 이기려 하는가. 빨리 길을 열어 나를 돌아가게 하라"고 전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사람의 지시 같으면 이행되기 어려웠겠지만 권장군을 믿는 정충신은 단독으로 일본군 진지를 찾아가서 적장에게 권장군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일본 장수가 흔쾌히 부하들에게 길을 터주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권장군과 그 막료들은 창과 칼이 벽을 이루고 있는 사이를 뚫고 유유히 본진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때에 막료 중 한 사람이 끌고 갔던 말을 잃어버리고 온 것이 알려지자 권장군은 다시 정충신에게 "되돌아가서 말을 찾아달라고 해서 찾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정충신은 다시 적진을 찾아가 말을 찾아달라고 말했고 그들이 내준 말을 되찾아 돌아왔다. 서로 간에 살벌한 살육전을 되풀이하는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믿음은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도 부하들의 충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온 것이다. 임진왜란 시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근해 해전에서 큰 무훈을 세운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등의 활약은 이순신에 대한 깊은 믿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원균의 지휘 아래에서는 별 볼일 없던 장병들도 일단 충무공 산하에 들어오면 용장으로 돌변했다고 한다. 이런 신뢰, 신의가 낳는 기적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조직체라도 상사와 부하들이 서로 깊은 믿음으로 뭉쳐 있으면 어떤 역경이라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포위된 적진 속을 유유히 탈출할 수 있는 담력도 생기게 되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아이디어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소위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Candoism)이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