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분류
국악의 분류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편화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아악(雅樂)의 원래 뜻은 중국의 제례악(祭禮樂:Chinese ritual music)을 의미하며, 1116년(고려 예종 11)에 한국에 수입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가리킨다. 이 대성아악은 고려와 조선 초까지 궁정에서 행하는 원구(圓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공자묘(孔子廟) 등의 제사와 연향(宴享:국가적 규모의 큰 잔치)에 쓰였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아악에 쓰일 악기가 부족하게 되고 악기간의 조율이 맞지 않아 합주가 어렵게 되었으며, 음악 자체도 옛 제도에 어그러져 불완전한 것이 되었다. 이런 것을 조선 세종 때 박연(朴堧) 등이 중국의 옛 문헌들을 참고하여 중국 주나라 때의 아악에 가깝도록 재현시켰다. 이것이 오늘에 전해지는 아악, 즉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다.
당악(唐樂)은 당나라 음악이라는 뜻이나 당나라 음악은 물론 송나라의 속악(俗樂)까지도 포함한다. 한국에는 통일신라 이후 고려에 걸쳐 유입되었으며, 기존의 음악인 향악(鄕樂)과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악이 중국 고대의 궁중음악이라면 당악은 중국 당 ․송나라 때의 민속음악으로, 《보허자》 《낙양춘》 《수룡음(水龍吟)》 《억취소(憶吹簫)》 《하운봉(夏雲峰)》 등의 곡이 있다. 이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낙양춘》 《보허자》 두 곡뿐이며, 그나마도 향악화되어 있다. 향악은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순수한 재래음악과 당 이전 서역지방에서 들어온 음악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간음악은 포함되지 않으며 주로 궁정과 지식계급에서 사용된 아악과 당악을 제외한 음악을 가리킨다. 즉 《정읍》 《동동(動動)》 《가곡》 《영산회상》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첫째, 아악의 레퍼터리는 문묘악 한 곡뿐이고, 당악의 레퍼터리는 《낙양춘》 《보허자》 두 곡뿐인데, 그나마도 향악화되어 버렸다.
둘째, 향악이란 궁정이나 지식계급에서 쓰던 음악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소위 민간음악은 포함되지 않는다.
셋째, 조선 후기에 생긴 많은 종류의 음악을 모두 향악이라는 단어 하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정악(正樂)은 앞에서 설명한 아악 ․당악 ․향악, 즉 궁정이나 지식계급에서 쓰던 음악을 가리키고, 민속악(民俗樂)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쓰던 음악을 가리킨다. 즉, 정악에는 문묘제례악을 비롯하여 종묘제례악 ․경모궁제례악(景慕宮祭禮樂) 등 제례악과 《여민락(與民樂)》 《낙양춘》 《보허자》 《취타(吹打)》 등의 악곡 및 각 악곡에서 파생된 모든 파생곡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궁중음악이 아닌 민간음악 증에서도 아정한 음악인 영산회상 ․가곡 ․가사 ․시조 등도 포함한다.
정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발생연대가 비교적 길다. ② 문헌상 옛 악보[古樂譜]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③ 음의 장식방법에 과장이 없고 담백 ․아정하다. ④ 여러 악기를 사용하는 합주음악이다. 설혹 독주나 병주곡이라 하여도 이는 합주곡에서 발췌한 것이다. ⑤ 궁정이나 지식계급 사이에서 즐기던 음악이다.
민속악은 정악의 대(對)가 되는 음악으로 일반대중이 즐기던 음악이다. 이에는 산조 ․판소리 ․잡가 ․민요 ․농악 등이 속하는데, 잡가에는 12잡가 ․휘모리잡가 ․서도잡가 ․산타령 ․가야금병창 ․선소리[立唱] 등이 포함된다. 또한 세속음악이 아닌 범패(梵唄)나 무악(巫樂)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민속악의 전체적인 특징은 흥겹고 구성진 가락이 많고 음악마다 지방에 따른 ꡐ토리ꡑ가 적용된다. 장단은 느린 것도 있지만 거의가 빠른 장단이어서 생동하고 싱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음악을 이전의 분류인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으로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차차 흐려졌던 것처럼, 위와 같은 분류도 범패와 같이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종류의 음악이 있기 때문에 모순을 남기고 있다.
국악의 선법
국악에서 흔히 쓰이는 선법(旋法)은 평조와 계면조의 두 가지이다. 이 밖에 우조(羽調)라는 것이 있으나, 그 음의 구조는 평조와 같고 음의 높이만 다를 뿐이다.
평조는 반음이 없는 5음음계의 ꡐ솔(Sol)ꡑ선법으로서, 예를 들면 ꡐ황ꡑ ꡐ태ꡑ ꡐ중ꡑ ꡐ임ꡑ ꡐ남ꡑ의 5음 중 ꡐ황ꡑ에 요성이 있고 ꡐ중ꡑ과 ꡐ남ꡑ에 퇴성을 쓴다. 5음 중 ꡐ남ꡑ은 판소리 ․산조 등에서 이보다 반음 높은 ꡐ무ꡑ가 되기도 한다.
계면조는 18세기 중엽을 이전에는 반음이 없는 5음음계의 ꡐ라(La)ꡑ선법이었다. 그 후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3음 또는 4음음계로 변하였다. 이렇게 변한 계면조는 음악의 장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종묘제례악 중 《정대업(定大業)》은 ꡐ황ꡑ ꡐ협ꡑ ꡐ중ꡑ ꡐ임ꡑ ꡐ무ꡑ의 5음음계를 사용하는데, 그 중 일부는 18세기 말 이후부터 ꡐ황ꡑ을 ꡐ무ꡑ로 내려서 연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ꡐ라ꡑ선법으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관악영산회상(管樂靈山會相)》의 <중영산> 이후도 ꡐ황ꡑ ꡐ협ꡑ ꡐ중ꡑ ꡐ임ꡑ ꡐ무ꡑ의 5음음계 계면조로 되어 있다. 《현악영산회상(絃樂靈山會相)》과 계면조의 가곡 ․시조 등은 주로 ꡐ황ꡑ ꡐ중ꡑ ꡐ임ꡑ의 3가지 음을 많이 사용하며 가끔 ꡐ무ꡑ를 사용하기도 하여 3음 또는 4음의 계면조를 구성한다. 계면조의 음계인 ꡐ황ꡑ ꡐ협ꡑ ꡐ중ꡑ ꡐ임ꡑ ꡐ무ꡑ의 5음 중 ꡐ황ꡑ은 요성을 하고, ꡐ중ꡑ과 ꡐ임ꡑ 사이의 음정은 장2도보다 좁으며, ꡐ임ꡑ은 밑으로 흘려서 퇴성을 한다.
국악악기
한국의 재래 국악기의 분류법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와 같이 그 악기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주요재료에 따라 나누는 방법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의 방식과 같이 그 악기가 어떤 계통의 음악에 편성되는가 하는 그 쓰임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 그리고 현재 널리 통용되는 3분법에 의하여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크게 구분한다.
제작재료에 의한 분류방법은 금부(金部:쇠붙이로 만든 악기, 編鐘 ․特鐘 등) ․석부(石部:돌을 깎아 만든 악기, 編磬 ․特磬 등) ․사부(絲部:共鳴筒에다 명주실로 꼰 줄을 얹어 만든 악기, 거문고 ․가야금 ․奚琴 ․牙箏 등) ․죽부(竹部:대로 만든 악기, 피리 ․젓대 ․唐笛 ․短簫 등) ․포부(匏部:바가지를 재료로 쓴 악기, 笙簧) ․토부(土部:흙으로 구어 만든 악기, 塤 ․缶) ․혁부(革部:대개 둥그런 통에다 가죽을 씌워서 만든 악기, 장구 ․뛰鼓 ․座鼓 ․小鼓 등) ․목부(木部:나무로 만든 악기, 拍 ․送 ․棘) 등인데, 이를 8음이라고도 한다(61종).
음악의 계통에 의한 분류법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온 아악(雅樂)과 통일신라 때 당나라에서 들어온 당악(唐樂), 고유의 전통 향악(鄕樂)을 아부(雅部:아악기) ․당부(唐部:당악기) ․향부(鄕部:향악기)로 65종의 악기가 분류되어 있다. 또 연주법에 의한 분류법은 64종의 악기를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나누고 관악기에는 죽부(竹部) ․목부(木部) ․포부(匏部) ․토부(土部) ․금부(金部)로 분류된 악기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현악기에는 사부(絲部) ․금부로 분류된 악기가 포함되어 다시 찰현(擦絃) ․발현(撥絃) ․타현(打絃) 등의 악기로 세분되어 있다. 끝으로 타악기는 유율(有律) ․무율(無律)로 크게 나누고, 금부 ․석부 ․목부 ․토부 ․혁부로 분류된 악기가 포함되어 있다.
국악기의 발음원리에 의한 분류
20세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분류방법으로, C.작스와 E.M.호른보스텔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① 현명악기:거문고 ․가야금 ․아쟁 ․양금 ․해금(이상 현재 사용) ․금 ․슬 ․대쟁 ․당비파 ․향비파 ․월금 ․수공후 ․와공후 ․소공후(이상 현재 사용하지 않음),
② 공명악기:대금 ․당적 ․단소 ․퉁소 ․향피리 ․세피리 ․당피리 ․태평소 ․생황 ․나발 ․나각 ․훈 ․지 ․약 ․적 ․소(이상 사용) ․중금(사용하지 않음),
③ 체명악기:편종 ․편경 ․징 ․꽹과리 ․자바라 ․박 ․특종 ․특경 ․방향 ․축 ․어 ․부 ․운라(이상 사용),
④ 피명악기:장구 ․용고 ․좌고 ․교방고 ․소고 ․절고 ․진고 ․노고 ․노도(이상 사용) ․갈고 ․응고 ․뇌고 ․영고(이상 사용하지 않음), ⑤ 전명악기:해당악기 없음.
국악기의 음악계통에 의한 분류
악기가 쓰이는 음악 및 유래에 의한 분류로, 향악기(鄕樂器:전래․고유의 향악에 쓰이는 악기)․당악기(唐樂器:중국의 민속음악에 쓰이던 악기)․아악기(雅樂器:중국 상고시대의 궁중음악에 쓰이던 악기)로 나누는 방법이다.
① 아악기:편종․편경․특경․특종․약․소․지․훈․금․슬․건고․응고․뇌고․진고․축․어․부․삭고․영고․영도․도․절고․화․생․우 등, ② 당악기:방향․박․교방고․월금․장구․당비파․해금․대쟁․아쟁․당적․당피리․퉁소․태평소, ③ 향악기: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향피리 등이 있다.
국악기의 재료에 의한 분류
악기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주요 재료로서, 금(金:쇠붙이)․석(石)․사(絲)․죽(竹)․포(匏:바가지)․토(土)․혁(革)․목(木)의 8가지로 나누는 방법이다. 이 8가지 재료를 팔음(八音)이라고 하는데, 8음에 따른 악기는 다음과 같다. ① 금부:편종․특종(特鐘)․방향(方響)․징․꽹과리․나발․자바라․운라(雲읊), ② 석부:편경․특경(特磬), ③ 사부:거문고․가야금․대쟁(大箏)․아쟁(牙箏)․금(琴)․슬(瑟)․향비파(鄕琵琶)․당비파(唐琵琶)․월금(月琴)․해금(奚琴)․와공후(臥뱄茸)․수공후(竪뱄茸)․소공후(小뱄茸)․양금(洋琴), ④ 죽부:대금(大仁)․중금(中仁)․소금(小仁)․당적(唐笛)․단소(短簫)․약․적(暮)․향피리․당피리․세피리․지(附)․소(簫), ⑤ 포부:생황(笙簧), ⑥ 토부:훈(塤)․부(缶)․나각(螺角), ⑦ 혁부:갈고(뛰鼓)․장구[杖鼓]․좌고(座鼓)․용고(龍鼓)․중고(中鼓)․교방고(敎坊鼓)․건고(建鼓)․응고(應鼓)․삭고(朔鼓)․뇌고(雷鼓)․뇌도(雷완)․영고(靈鼓)․영도(靈완).노고(路鼓)․노도(路완)․진고(晋鼓)․절고(節鼓), ⑧ 목부:태평소(太平簫)․박(拍)․축(送)․어(棘)가 있다.
국악의 농현
국악의 농현이란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의 왼손기법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장식법이다. 농현법에는 요성법(搖聲法:vibrato) ․퇴성법(退聲法) ․전성법(轉聲法)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음의 기능이 중심음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선법을 결정하게 된다. 또 이 농현방법에 따라 연주되는 음악이 어떠한 종류의 음악인지를 구별하고, 나아가서는 연주자의 음악성을 나타내고 있을 만큼 중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농현법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국악을 안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요성(搖聲), 즉 vibrato가 많이 붙는 음이 대개 중심음의 역할을 한다. 퇴성(退聲)은 계면조(界面調)일 때는 중심음의 5도 위 음에 붙고, 평조(平調)일 때는 4도 위와 장6도 위의 음에 붙는다.
국악의 율명
국악의 율명은 그 악기 편성에 따라 기준음인 황종(黃鐘)의 위치가 다르다. 즉 거문고나 향피리가 중심이 되는 음악의 율명은 E ♭황종이 된다. 한편 당피리 ․편종 ․편경 등이 편성되는 음악의 율명은 C가 황종이 된다. 서양음악에서의 한 옥타브, 즉 12 반음을 한국음악에서는 12율(律)이라 하고 반(半)음정을 1율(律)이라 한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황종이 E ♭일 때에는 습관적으로 플랫(n)을 사용하고, 황종이 C일 때에는 샤프(h)를 사용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악, 즉 궁중음악에는 플랫이 많이 사용된다. 이 율명을 악보에 기보할 때는, 그 첫자만 떼어서 ꡐ황(黃)ꡑ ꡐ대(大)ꡑ ꡐ태(太)ꡑ 등으로 쓰고, 가운데 음역[中聲]에서 1옥타브 위로 올라가면 율명에 ꡐ청(淸)ꡑ자의 약자인 ꡐ鑽ꡑ 변을 붙여 ꡐ청ꡑ이라 읽고,2옥타브 높으면 ꡐ鑽鑽ꡑ 변을 붙여 ꡐ중청(重淸)ꡑ이라 읽는다.
예를 들면, ꡐ鑽仲ꡑ은 ꡐ청중ꡑ 또는ꡐ청중려ꡑ라고 읽는다. 반대로 1옥타브 낮으면 ꡐ倍ꡑ자의 약자인 ꡐ車ꡑ 변을 붙여 ꡐ탁(濁)ꡑ이라읽고, 2옥타브 낮으면 ꡐ粲ꡑ 변을 붙여 ꡐ배탁ꡑ이라고 읽는다. 예를 들면 ꡐ車林ꡑ은 ꡐ탁임ꡑ 또는 ꡐ탁임종ꡑ, ꡐ粲仲ꡑ은 ꡐ배탁중ꡑ 또는 ꡐ배탁중려ꡑ라고 읽는다. 따라서 청성(淸聲)은 높은 음을, 탁성(濁聲)은 낮은 음을 가리킨다.
국악의 형식
국악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한배에 따른 형식 :국악곡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하나 차차 빨라지는 만(慢:느림) ․중(中:보통) ․삭(數:빠름)의 흐름이 하나의 뚜렷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즉, 《영산회상》의 <상영산(上靈山)>에서 <중영산(中靈山)> <세영산(細靈山)> <가락더리>로의 빠르기의 변화라든지, 가곡의 《초수대엽(初數大葉)》에서 《이수대엽(二數大葉)》 《중거(中擧)》 《평거(平擧)》 《두거(頭擧)》로의 진행형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산조(散調)에서도 ꡐ진양조ꡑ ꡐ중모리ꡑ ꡐ자진모리ꡑ의 빠르기라든지 민요의 느린(긴)소리 다음에 빠른(자진)소리를 잇대어서 부르는 형식 등이 그것이다. 즉 《육자배기》와 《자진육자배기》, 《긴육자배기》와 《자진육자배기》, 《긴농부가》와 《자진농부가》,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 등의 ꡐ긴ꡑ과 ꡐ자진ꡑ 등 빠르기에 따른 형식이 그 예이다.
확대형식 : 같은 곡을 사설을 길게 하여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가곡이나 시조 등의 ꡐ편(編)ꡑ ꡐ엮음ꡑ 등이 이에 속하는데, 시조 중 사설시조는 평시조와 박자 수는 같으나 사설의 글자수가 평시조의 2배 ․3배에 이른다. 가곡에서도 《언편(言編)》 《편락(編樂)》 《편수대엽(編數大葉)》은 기본형인 《이수대엽(二數大葉)》보다 3장 ․5장이 길다. 이러한 ꡐ엮음ꡑ의 형식은 서도소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메기고 받는 형식 : 유절형식(有節形式)으로 된 민요나 반복되는 노동요 등에 많이 나타나는 형식으로, 한 사람이 메기면(call) 여러 사람이 받는다(response). 메기는 부분은 사설과 선율이 다양하나 받는 부분, 즉 후렴구는 거의가 일정 불변이다. 메기는 부분은 대개 세 가지로 변화를 주는데, 그것은 ① 저음(低音)으로부터 시작하는 ꡐ숙여내는 소리ꡑ, ② 중음(中音)으로부터 시작하는 ꡐ평(平)으로 내는 소리ꡑ, ③ 고음(高音)으로부터 시작하는 ꡐ질러내는 소리ꡑ 등이다.
환두형식과 도드리형식 : 도드리라는 말은 ꡐ돌아 들어간다ꡑ는 뜻으로 환입(還入)이라고도 한다. 환입은 《보허자(步虛子)》나 《낙양춘(洛陽春)》 등이 좋은 예가 되는데, 이들 곡은 그 형식에 있어서 A ․B ․C ․B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중 반복되는 B부분을 도드리 또는 환입이라 하고, C는 A 대신 놓았다고 하여서 환두라고 한다. 《영산회상》 중의 <삼현도드리[三絃還入]>와 지름시조, 유절형식으로 된 민요, 반복되는 노동요 등이 이러한 형식이다. 그러나 국악의 곡명 가운데 《밑도드리[尾還入]》 《윗도드리[細還入]》 《양청도드리(兩淸還入]》 《우조가락도드리[羽調加樂還入]》 등의 환입 ․도드리라는 명칭은 이들 곡이 환입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허자》 중 ꡐ환입ꡑ 부분만을 따서 그것을 변주하였다는 뜻이다.
국악의 장단
국악에서 일정한 길이의 리듬형(rhythmic cycle)을 장단이라고 하는데, 한국음악은 장단이 없는 것으로부터 복잡한 장단의 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대개는 일정한 장단에 맞추어 노래하거나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범패는 장구나 북의 장단 없이 부르는 성악곡이고, 《산타령》은 장구와 북의 반주도 있고 그 리듬도 경쾌하지만, 서도의 《앞산타령》을 예외로 친다면 일정한 장단이 없고 들쭉날쭉한 3박과 2박의 혼성으로 되어 있다. 또 《정읍(井邑:일명 壽齊天)》 같은 곡은 일정한 장단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의식진행의 느리고 빠름에 따라 느리게 연주할 수도 있고 빠르게 연주할 수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고수는 장단의 전형적 리듬만 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첫 장단 이외에서는 변화 리듬을 사용하며, ꡐ으이ꡑ ꡐ좋지ꡑ ꡐ좋다ꡑ ꡐ얼시구ꡑ 등의 추임새를 악구(樂句)나 악절 끝에 붙인다.
장구를 치는 원칙적 순서는 ① 합장단[雙], ② 채편[鞭], ③ 북편[鼓], ④ 굴림채[搖]이다. 합장단이란 북편과 채편 양쪽을 동시에 치는 것으로, 고악보에는 쌍(雙)이라 표시되어 있다. 《수제천(壽齊天)》 《여민락(與民樂)》 《삼현영산회상》 중 <상영산>과 같이 한배(곡조의 장단)가 느린 곡에서는 먼저 채편을 치고 다음에 북편을 치는, 즉 ꡐ기덕 쿵ꡑ으로 시작한다. 한배가 느린 곡에서는 그 채편과 북편 사이의 시가(時價)가 그 곡의 한배의 기준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을 ꡐ갈라 친다ꡑ고 한다.
리듬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관사나 전치사가 없는 한국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음악은 강박(强拍)으로 시작하고 약박(弱拍)으로 끝난다.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서양음악은 약박으로 시작하여 강박으로 끝난다.
장구의 채편을 치는 법에는 채로 변죽을 치는 법과 복판을 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복판을 치는 음악은 농악 ․시나위 ․삼현육각이고 그 나머지 음악은 변죽을 치는데, 예외로 가곡 중 ꡐ편락(編樂)ꡑ은 처음 1 ․2장은 변죽을 치다가 3장 끝 부분에 이르러 복판을 치기 시작하여 중여음(中餘音)과 4장까지 계속하고, 5장 중간쯤에서 다시 변죽으로 되돌아가는 변화를 주기도 한다. 이것을 ꡐ편장단(編長短)ꡑ이라 한다.
정악
정악은 곧 아정(雅正)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이라는 말로, 과거 궁중음악의 일부를 포함하여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모든 음악을 지칭하며 속악의 대칭으로 쓰인다. 정악이라는 호칭은 구한말 1909년 ꡐ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ꡑ가 발족하면서부터 표면적으로 공칭화(公稱化)하였다. 정악은 거문고 ․가야금 등 줄[絃]로 된 현악기가 중심이 되며, 여기에 관악기를 곁들여 조주(助奏)하는 형식의 합주로 줄풍류라고 한다. 줄풍류에서는 연례악(宴禮樂)의 일부인 <여민락(與民樂)> <도드리> <영산회상(靈山會相)> 등의 곡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악기로는 거문고 ․가야금 ․양금 ․비파 ․생황 ․단소 ․세피리 ․대금 ․해금 ․장고 등이 많이 쓰이고 있으며 이들의 연주장소를 풍류방 ․율방이라고 한다. 정악으로는 제례악(祭禮樂) ․연례악(宴禮樂) ․군례악(軍禮樂) ․풍류(風流) ․정가(正歌) 등이 있다.
향악
일반적으로 한국의 음악을 당악(唐樂)에 대하여 일컫는 말로, 넓은 의미의 향악은 아악(雅樂) ․당악을 제외한 제례악과 연례악, 또는 정악과 민속음악을 통틀어 이르고 있다. 그러나 옛 문헌에서 볼 수 있는 향악이나 속악(俗樂)은 흔히 정악을 가리키는 수가 많다. 이는 대개 궁중의 소유물로서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불교계통 및 서역계통의 음악이 섞여 있다. 당악곡이 6음계로 되었고 황종(黃鐘)이 다(C)음인데 반하여 향악곡은 5음계로 이루어졌고 황종이 내림마(E♭)로 되어 있다.
향악곡으로 오래된 것을 들면 《정읍(井邑:封濟天)》 《동동(動動)》 및 종묘제향악 중의 향악계 음악 같은 것이 있고, 조선시대 성종(成宗) 연간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향악보집(鄕樂譜集)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가 전해 오고 있다.
당악
원래부터 있었던 향악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오늘날 한국음악에서 당악이라고 할 때, 당나라 음악에서 유래된 것은 없고 거의가 송나라 사악(詞樂)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고려시대에는 향악을 우방악(右坊樂)이라 하고 당악을 좌방악(左坊樂)이라고 하였다. 당악이 한국에 들어온 사실을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로, ꡒ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이 부성(府城)에서 당악을 배웠다ꡓ는 기록이 있다. 이 후 신라가 당의 음악의 영향을 받은 사례는 많지만 그 음악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밝히기가 힘들다.
보허자 (步虛子)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으로 불리기도 하고, 주로 관악기로 편성되어 있어 ꡐ관악보허자ꡑ라고도 한다. 《낙양춘》과 더불어 고려 때 도입된 송대(宋代)의 사악(詞樂)계통의 곡 가운데 하나이다. 악보는 《대악후보(大樂後譜)》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전하며 그 형식은 《낙양춘》과 같은 도드리형식으로 구성음은 모두 6음이고 향악계의 5음계와는 다르다. 관악 《보허자(보허사)》 《밑도드리》 《웃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羽調加樂還入]》 등은 모두 《보허자》의 반주곡이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보허자》는 원곡 7장 중 3개 장(1 ․3 ․4)을 발췌한 것이며 정재(呈才)에 써왔다. 이 곡의 장단형태는 20박(拍) 1각(刻)이 단위가 되며 모두 29각이다. 편성악기는 합악(合樂)일 때는 대금(大芩) ․당적(唐笛) ․당피리 ․해금(奚琴) ․아쟁(牙箏) ․편종(編鐘) ․편경(編磬) ․장구 ․좌고(座鼓) 등이고, 무악(舞樂)일 때는 아쟁 ․편종 ․좌고 등이 제외된다.
이어 고려에 당의 음악이 들어온 것은 제4대 광종(光宗:재위 950~976) 때로, ꡒ당의 악기와 공인을 청하였고, 충숙왕(재위 1314~1330) 때까지도 그 자손들이 이어받았다고 한다ꡓ는 기록이 조선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실려 있다. 한편 《고려사》 <악지(樂志)>의 기록을 보면 송의 사악으로는 《석노교곡파(惜奴嬌曲破)》 《만년환만(萬年歡慢)》 《낙양춘(洛陽春)》 《감황은(感皇恩)》 《수룡음만(水龍吟慢)》 《금전락(金殿樂)》 등 43편이 있다. 이 밖에도 당악정재(唐樂呈才)에 나오는 음악까지를 합하면 더 많은 숫자가 된다.
고려시대는 송나라 사악의 전성기로, 이것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어 1433년(세종 15)에는 30여 곡이 남았고(世宗實錄), 1447년(세종 29)에는 12곡(俗樂譜), 1471년(성종 2)에는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낙양춘(洛陽春)》 등 29곡(經國大典), 1759년(영조 35)에는 《보허자(步虛子)》 《전인자(前引子)》 등 15곡(大樂前譜)이 남았다. 그리고 그 뒤의 《속악원보(俗樂源譜)》(고종 연간)에는 《보허자》와 《낙양춘》 2곡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2곡도 당악의 원형을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로 향악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세종 때 박연(朴堧)을 중심으로 한 중국계 아악의 재정비 여세에 따라 중국계 아악을 좌방이라 하고, 좌방의 당악이 우방의 향악과 합쳐지면서부터 당악은 향악화의 과정을 걷게 되었다.
고악보(古樂譜)의 당악은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으로 되어 일자수음식(一字數音式)의 향악과 달랐으나, 오늘날에는 당악이 향악화하여 일자수음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오늘날 전해지는 당악은 6음계로 되어 있으며 황종(黃鐘)의 음높이가 시(C)음인 점에서 5음계로 되고, 황종의 음높이가 내림마(E♭)인향악곡과 구분된다. 악기편성도 예전에는 당악기만으로 편성되었으나 요즈음은 향악기를 섞어서 편성한다. 그러나 피리만은 어느 경우에나 향피리를 쓰지 않고 당피리를 쓴다.
현재 당악으로 전해지는 것은 《낙양춘》 《보허자》 2곡뿐이며 당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은 《여민락만(與民樂慢)》 《본령(本令)》 《해령(解令)》 등이다. 당악의 악기는 황종(黃鐘)의 음정(音程)이 시(C)인 악기들로서 당적(唐笛) ․퉁소[洞簫] ․당피리[唐禳裏] ․아쟁(牙箏) ․해금(奚琴) ․대쟁(大箏) ․당비파(唐琵琶) ․월금(月琴) ․방향(方響) ․운라(雲羅) 등이 이에 속하나, 대부분 향악기화(鄕樂器化)하여 그 음정도 향악기와 같아 황종이 이 내림마(E♭) 높이이다. 이 중 아직 당악기로서의 음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악기는 당피리 ․방향 ․운라에 지나지 않고, 해금과 월금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ꡒ只用鄕樂(다만 향악에만 쓰인다)ꡓ이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향악기화되었으며, 대쟁과 당비파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아쟁은 《악학궤범》에서 ꡒ옛날에는 당악에 썼고 오늘날에는 향악에도 겸하여 쓴다ꡓ라고 한 바와 같이 현재도 당악식 조율법(唐樂式調律法)과 향악식 조율법(鄕樂式調律法)에 따르고 있다
대표적 음악
낙양춘(洛陽春)
ꡐ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ꡑ이라고도 한다. 《보허자(步虛子)》와 더불어 송나라로부터 전래되어 신하들이 배례(拜禮)할 때 등 의식음악으로 채택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가사가 실려 있고,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악보가 실려 있다. 가사는 ꡒ사창미효황앵어(紗窓未曉黃鶯語) 혜로소잔주(蕙爐燒殘炷) 금유나막도춘한(錦惟羅幕度春寒) 작야리삼경우(昨夜裏三更雨) 수렴한의취경서(繡簾閑倚吹輕絮) 염미산무서(斂眉山無緖) 파화식루향귀홍(把花拭淚向歸鴻) 문래처봉랑불(門來處逢郞不)ꡓ로, 한 구가 5자 ․6자 ․7자로 된 불규칙한 시(詩)이다.
또 미전사(尾前詞)와 미후사(尾後詞:수렴한의취경서 이하)의 2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미후사의 둘째 구 이하 ꡐ염미산무서ꡑ는 미전사의 둘째 구 이하 ꡐ혜로소잔주ꡑ의 선율을 반복한 환입(還入), 즉 ꡐ도드리ꡑ라는 형식으로 짜여 있다. 장단은 16박마다 규칙적으로 박(拍)이 들어가는 규칙적 장단이었으나, 후세로 내려오며 박자가 일정하지 않은 불규칙장단으로 변하였고, 그 가사도 거의 불려지지 않아 순수한 기악곡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근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악사장으로 있던 김기수(金琪洙)가 낙양춘곡에다 가사를 얹어 옛 모습을 재현하였다. 《보허자》와 같고 음계는 황종(黃鐘) ․태주(太做) ․고선(姑洗:고악보에는 夾鐘) ․중려(中呂) ․임종(林鐘) ․남려(南呂) ․응종(應鐘:고악보에는 無射)으로 구성된 7음 음계이고, 악기편성은 당피리가 중심이 되어 대금 ․해금 ․당적 ․아쟁 ․장구 ․좌고 등이며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을 곁들이기도 한다.
좌방악 (左坊樂)
양부악(兩部樂)의 하나로 우방악(右坊樂)의 대(對)가 된다. 고려 때부터 조선 세종 때까지도 ꡒ향악재동(鄕樂在東) 당악재서(唐樂在西)ꡓ라고 하여 향악은 오른쪽에 당악은 왼쪽에 따로 편성하여 교대로 연주하였으나, 박연(朴堧)의 아악재정비에 따라 아악을 좌방이라 하고, 좌방이던 당악은 우방인 향악과 합쳐지게 되었다. 한말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실려 있는 좌방악의 곡목은 제사음악뿐이며, 이러한 제사음악도 1910년 문묘제례를 제외한 모든 제향이 폐지됨에 따라 자연 도태되고, 1932년 악사가 해고됨으로써 아악만을 전공하는 좌방의 악사는 없어지게 되었다.
종묘 재래악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의 향사(享祀)는 역대 음력으로 4맹삭(四孟朔) 즉, 1 ․4 ․7 ․10월과 납향일(臘享日) 등 모두 5회에 걸쳐 받들어 왔으나 근년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5월 첫 일요일에 한번 받들고 있다.
【연혁】 조선의 종묘가 이룩된 것은 1395년(태조 4)이며 이 때의 종묘제례악에는 당악 ․향악 ․아악 등을 두루 써왔다. 1425년(세종 7) 세종대왕은 친히 종묘에 제향하고 환궁한 뒤 이조판서 허조(許稠)에게 ꡒ…종묘대제에 먼저 당악(唐樂)을 쓰고 겨우 종헌(終獻)에서야 향악(鄕樂)을 쓰니 앞으로는 조고 신령(祖考神靈)께서 생시에 익히 들으시던 향악으로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떠할지 맹사성(孟思誠)과 의논하라ꡓ고 하였고, 중국 음악이론가 박연(朴堧)과 사대적(事大的) 유신(儒臣)들의 반대 속에서도 ꡒ우리의 향악을 버릴 수 없다ꡓ라는 굳은 의지로 마침내 1435년(세종 17) 우리의 향악으로 《보태평(保太平)》 11곡(曲)과 《정대업(定大業)》 15곡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에는 제사음악이 아니고 조종(祖宗)의 공덕을 기리고 개국 창업(開國創業)의 어려움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국초(國初)의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을 참작하여 만들었던 것이며, 이것이 종묘의 제례악으로 채택된 것은 1463년(세조 9)이었다. 세조는 ꡒ《정대업》과 《보태평》은 그 성용(聲容)이 성대하므로 종묘에 쓰지 않음은 가석(可惜)타ꡓ(세조실록)하여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간단히 간추려 고치게 한 후 제례악으로 채택케 하였다. 이와 같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보태평》과 《정대업》은 500여 년 동안 전승되면서 변화는 있었지만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다. 《보태평》은 조종(祖宗)의 문덕(文德)을 내용으로 한 것이고 《정대업》은 무공(武功)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의식절차】 종묘제례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두 곳에 악기를 진설하고 식차(式次)에 따라 등가와 헌가에서 교대로 주악하는 것이 문묘(文廟)와 똑같다. 맨 처음 영신례(迎神禮)는 희문곡(熙文曲)을 9번 반복하는데 이를 희문구성(熙文九成)이라 하며 일무(佾舞)는 문무(文舞)이고 헌가에서 주악한다. 두번째는 전폐례(奠幣禮)로서 등가에서 전폐 희문이 연주되고 문무가 행해진다. 세번째는 진찬례(進饌禮)이며 헌가에서 진찬곡이 연주되고 일무는 없다. 네번째는 첫잔을 드리는 초헌례(初獻禮)로 헌관(獻官)이 제1실 신위(神位) 앞으로 가기 전까지는 희문을 연주하고, 그 후부터는 등가에서 《보태평》 11곡을 모두 연주하며 일무는 문무를 춘다. 다음 아헌(亞獻)과 종헌례(終獻禮)는 함께 헌가에서 《정대업》 11곡을 연주하며 일무는 무무(武舞)를 춘다. 일곱번째는 철변두(徹폰豆)의 순서로 등가에서 진찬이 연주되고 마지막 송신례(送神禮)는 헌가에서 진찬을 연주한다.
【무용과 음악】 종묘악의 선법(旋法)은 《보태평》은 청황종조(淸黃鐘調) 치선법(徵旋法:sol선법)으로 되었고, 《정대업》 주음(主音)은 《보태평》과 같으나 선법은 우선법(羽旋法:la선법)으로 작곡되어 한국음계의 고유한 두 가지 특성을 잘 발휘하고 있으며 악곡 구조면에 있어 거의 완벽을 자랑할 만하다. 이에 쓰이는 악기에는, 아악기(雅樂器)로 편종 ․편경 ․축(送), 당악기(唐樂器)로 방향(方響) ․장고 ․아쟁 ․당피리 따위, 그리고 한국 고유의 횡취악기(橫吹樂器)인 대금 등이 있으며 매우 다채롭고 화려한 구색이다. 종묘제례 때 부르는 노래는 종묘악장(宗廟樂章)이라 하며 순한문으로 된 이 노래를 제향 절차에 따라 음악에 맞추어 부른다. 그리고 제향에서는 절차에 따라 춤도 추는데 이 때의 춤을 일무(佾舞)라고 한다.
《보태평》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을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즉, 문무(文舞)라고 하며, 《정대업》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을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즉, 무무(武舞)라고 하는데, 이 일무는 종묘제향에서 음악과 함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무는 왼손에 약(硅),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는 앞의 석 줄은 검(劍), 뒤의 석 줄은 창(槍)을 들고 춘다. 이 일무는 원래는 6일무였지만 지금은 8일무로 64명이 춘다. 종묘제향은 8 ․15광복 전까지 연 4회 실시해 오다가 광복과 함께 한때 자취를 감추었으나 1969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주선으로 다시 부활, 매년 1회 봉행(奉行)하고 있다.
문묘제례악 (文廟祭禮樂)
석전악(釋奠樂), 즉 응안지악(凝安之樂)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문묘악(文廟樂)이라고도 한다.
【연혁】 한국의 문묘제례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 하례사(賀禮使)로 중국 송(宋)나라에 갔던 왕자지(王字之) ․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휘종(徽宗)이 보내준 대성아악(大晟雅樂)에서 비롯된다. 이 대성아악은 환구(窩丘) ․사직(社稷) ․태묘(太廟)의 제향과 더불어 문묘제례에 썼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전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고식(古式)이 어그러져 제례절차 ․악기 ․악장 등이 지극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박연(朴堧)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가 《주례(周禮)》 《통전(通典)》 《율려신서(律呂新書)》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의 정비작업을 벌인 끝에 8음(八音)의 구비, 아악보 찬정(撰定), 새로운 아악의 제정 등 옛 주나라 때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산일(散逸)되어 광해군 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준하여 복구하였으나 연이은 병자호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펴다가 영조 때 비로소 제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성종 때보다 규모가 축소된 것이며, 이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이어진 문묘제례는, 중국 본고장에서는 없어진 지 오래이고 유일하게 한국에만 남아 있다.
【의식절차】 우선 집사(執事)가 연주자들과 일무(佾舞)를 추는 무원(舞員)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제자리에 서면 여러 다른 집사들도 들어와 네 번 절한다. 다음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천조관(薦罪官)이 들어와 동쪽 계하(階下)에서 서쪽을 향하여 선다. 이어 집사의 명령에 따라 등가(登歌) ․헌가(軒架) 관현악단의 음악과 문무(文舞) ․무무(武舞)의 일무가 교차되며 식이 시작된다. 그 순서는 처음 신을 맞아들이는 영신(迎神), 폐백(幣帛:대추나 乾雉)을 드리는 전폐(奠幣), 첫 잔을 올리는 초헌, 아무런 의식 없이 음악만을 연주하는 공악(空樂),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마지막 셋째 잔을 올리는 종헌, 제사지낸 그릇들을 덮는 철변두(撤폰豆),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 축문(祝文)을 불사르는 망료(望燎)의 순서이다.
【음악의 특색】 문묘제례 때 쓰이는 음악, 즉 문묘제례악은 모두 15곡으로 이루어졌다. 이 곡들은 모두 같은 선율형이나, 기음(基音)만을 달리하여 15곡을 만들었다. 곧 12율(十二律)을 각기 궁(宮)으로 삼아 12곡을 만들고, <송신황종궁(送神黃鐘宮)> <송신협종궁(送神夾鐘宮)> <송신임종궁(送神林鐘宮)>의 3곡을 더하며 전체 15궁(15곡)을 만든 것이다. 음계는 7음음계 구성이고, 주음(主音:宮)으로 시작하여 주음으로 끝난다. 형식은 4음이 1구(句)를 이루고 8구가 모여 한 곡을 이루며, 1구의 끝마다 북을 두 번 치기 때문에 구절 떼는 법은 비교적 쉽다. 편성악기는 반드시 8음(八音:8가지의 재료)을 구비해야 하며, 등가(登歌)와 헌가(軒架)라는 관현악단을 가지고 있다. 등가는 헌가보다 높은 뜰에 편성되며, 편종(編鐘) ․편경(編磬) ․금(琴) ․슬(瑟) ․노래[歌] 등 현악기들이 중심이 되고, 음려(陰呂)의 남려궁(南呂宮)을 주로 연주한다. 헌가는 등가보다 낮은 뜰에 편성되며, 노고(路鼓) ․노도(路완) ․진고(晋鼓) ․훈(塤) ․지(附) 등의 관악기 ․타악기 편성이고, 양률(陽律)의 고선궁(姑洗宮)을 주로 쓴다.
【무용적 특색】 문묘제례 때 추는 춤은 일무(佾舞)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데, 일(佾)은 춤을 추기 위해 벌여선 줄이라는 뜻이며, 8명씩 8줄로 벌여선 64명이 춘다. 이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다시 나뉘는데, 문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요, 무무는 무공(武功)을 찬미한 것이다. 무원(舞員)의 복장은 문무가 진현관(進賢冠)에 홍주의(紅周衣) ․남사대(藍絲帶) ․목화(木靴)이고, 무무는 피변관(皮弁冠)에 홍주의 ․남사대 ․목화를 착용한다. 무구(舞具)로는 문무는 왼손에 약(硅)을 들고오른손에는 적(翟)을 들며, 무무는 왼손에 간(干:방패), 오른손에 척(戚:도끼)을 들고 춘다. 춤사위를 보면 문무는 음악이 시작되면 오른발과 함께 양팔을 들어 어깨에 메는 시늉을 하다 바로 허리를 굽히며 양팔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짓는데, 먼저 북쪽을 향하고, 이어 서쪽 ․동쪽, 다시 북쪽의 방향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무무는 종헌과 아헌 때가 약간 다르나, 음악이 시작되면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바꾼 뒤, 양손을 벌려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척으로 간을 내리치는 동작의 반복이다.
국악사(國樂史)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예(禮)와 악(樂)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 왔다. 그래서 국악도 철학 또는 나라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져서 연구되고 체계화되었는데, 《악학궤범(樂學軌範)》 서(序)에서도 ꡒ악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붙인 것이요, 허(虛)에서 발하여 자연(自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느낀 바가 같지 않음에 소리도 같지 않아서… 그 같지 않은 소리를 합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의 인도 여하에 달렸다ꡓ(李惠求 번역)라고 언급하고 있다. 국악의 시대구분은 기술 대상의 분야나 기술방법 등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구분인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현대로 하고, 조선시대와 근대와의 구분은 갑오개혁을 경계로 하였다. 으며, 특히 94년을 ꡐ국악의 해ꡑ로 지정, 다채로운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상고시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상고시대 음악도 각 부족 간에 행하여진 제천의식(祭天儀式)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다. 이에 대하여는 산발적인 고증(考證)에 의하여 어느 정도 규찰되는데, 일례로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예(濊) ․마한(馬韓) ․변한(弁韓) 등에서는 추수할 때나 씨뿌릴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남녀노소가 연일 춤과 노래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베풀어졌을 성대한 가무연(歌舞宴)은 아마 오늘날의 농악무(農樂舞)나 호남지방의 강강술래, 영남지방의 쾌지나칭칭나네 같은 군무(群舞)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변한 ․진한에는 중국의 축(筑)과 비슷한 슬(瑟)이라는 악기가 있었다고 하니, 이와 결부된 속요(俗謠)나 속무(俗舞)가 당연히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초기는 대체로 상고시대 음악의 연속이었으나, 북방국가 특히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됨에 따라 중국의 음악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삼국의 음악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신라의 가야금, 고구려의 거문고, 백제의 가면극을 꼽을 수 있는데, 한국 최고의 현악기인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본받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악사(樂士)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망명하였는데,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예우(禮遇)를 받게 됨에 따라 신라에서 가야금음악이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남쪽 신라의 가야금에 견줄 만한 북쪽 고구려의 거문고는 중국 진(晋)나라에서 보내온 칠현금(七絃琴)을 제2국상(第二國相) 왕산악(王山岳)이 고쳐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왕산악은 무려 100여 곡의 신곡(新曲)을 지어서 연주하였는데, 이것을 듣고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악(器樂)이 발달한 신라 ․고구려에 비하여 백제는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정읍(井邑)》 등 가요와,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오(吳)에서 배워 왔다는 기악무(伎樂舞:假面舞)가 두드러진다.
삼국의 음악은 주변 국가에 전해져 그 우수성을 과시하기도 하였는데, 고구려의 무악(舞樂)은 수 ․당(隋唐)의 궁중에 전파되어 7부기(七部伎) ․9부기 ․10부기에 들었고, 백제의 악사 및 악기들은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의 아악(雅樂)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이 통일되어 하나로 합쳐지자 그 음악은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악기에 있어서는 삼현삼죽(三絃三竹), 즉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의 제도가 확립되었고, 불교의 성가인 범패(梵唄)가 유입되었으며, 금환(金丸) ․월전(月顚) ․산예(奸猊) 등의 5기(五伎)가 연행되었다. 또한 중국계 음악인 당악(唐樂)이 전래되면서 거기에맞는 새로운 악기 ․음악형식 등이 정착하게 되었고 음성서(音聲署)라는 음악 관장기관을 설립하여 음악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의 음악은 거의 신라의 고풍(古風)을 답습한 것이었으나, 광종(光宗) 때 당악이 들어왔고, 예종(睿宗) 때에는 송(宋)의 신악(新樂)과 대성아악(大晟雅樂)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한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이라는 분류방법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 중 향악은 이전부터 전래되던 고유의 음악으로,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대부분 선율이 곱고 아름다운 특징을 가졌다. 이들 곡은 거문고 ․가야금 ․비파 ․대금 ․장구 등 향악기로 연주되었는데, 그 중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서경별곡(西京別曲)》 등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당악은 이미 신라 때 전해진 바 있으나, 당시의 당악이란 1114년(예종 9) 송나라로부터 전해진 사악(詞樂)을 가리킨다. 이 사악은 대개 환두형식(換頭形式)이고, 규칙적 장단이며, 16장단마다(古樂譜에는 八行) 규칙적으로 박(拍)을 쳐 준다. 당비파 ․공후(뱄茸) ․쟁(箏) ․방향(方響) ․생(笙) ․적(笛) 등 당악기로 연주되었으며 그 중 《보허자(步虛子)》 《낙양춘(洛陽春)》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아악은 요즈음도 흔히 쓰는 말인데 그 의미는 옛날의 그것과는 서로 다르다. 즉, 고려 때 아악이라 함은 중국 송나라의 궁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사음악을 가리켰다. 이것이 16년 고려에 전해진 것이며, 이후 원구(窩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등 제사와 궁중의 연향(宴享)에까지 광범위하게 쓰였다. 아악은 선율에 장식음이 없고 리듬이 규칙적이며 각 음의 길이가 일정하기 때문에 화평 정대한 특징을 가졌다. 오늘날 전해지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이 아악에 속한다. 이처럼 고려 때의 음악은 아악 ․향악 ․당악의 3갈래로 확연히 구분되어서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의 음악은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기본정책에 따라 예악(禮樂)을 국시(國是)로 삼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제반 의장(儀章) 및 악제(樂制) 등을 거의 고려의 구제(舊制)에 의존하는 실정이었으나, 차차 국권이 확립되고 정세가 안정되자 신왕조의 위용을 과시하고 이를 찬양하게 하는 하나의 방도로서 많은 새 악곡이 필요하게 되었고, 또한 기존의 곡들도 전반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절실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에 나선 최초의 사람이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이었다.
그는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樂章)을 창작하여 왕권을 찬양하였고 재래음악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정리를 단행하여 조선음악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밖에 태조부터 태종에 이르는 3대에는 악기의 수선 및 신악기의 수입, 악공(樂工)의 중국 유학, 정통아악의 수입 등에 힘써, 세종 때부터는 조선의 음악이 점차 그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게 되었다. 국악사에 있어 세종 초기 및 중기는 아악의 완성시기라고 보는데, 당시 아악은 고려 말 이후 그 제도가 흐트러진 채 그대로 전승되어 오던 실정이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세종은 박연(朴堧) ․정양(鄭穰) ․유사눌(柳思訥)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아악의 제정 및 개정, 아악보의 간행, 아악기의 제작 등의 사업을 폈다.
이러한 기운을 타고 당시의 궁중음악은 한동안 아악 일변도의 현상을 빚기도 하였으나, ꡒ향악을 버릴 수 없다ꡓ는 세종의 뜻이 말년에 이르러 실천되어 이 때부터 향악은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세종이 이룬 위대한 업적 중 두드러진 몇 가지는 조선조 건국의 사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창제 및 《용비어천가》의 일부 악장을 고취곡(鼓吹曲) 선율에 옮긴 《여민락(與民樂)》 창제, 회례연(會禮宴)에 쓰기 위하여 지은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의 창제, 1447년경에 간행된 《속악보(俗樂譜)》의 편찬 등이다. 또한 종래에 중국에서 빌어다 쓰던 기보법(記譜法)을 버리고 정간보(井間譜)라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를 개발한 것도 세종의 업적 중 하나라 하겠다.
세종대의 이러한 발전은 세조대에도 이어졌는데, 전대에 지어진 《정대업》 《보태평》을 종묘제향(宗廟祭享)에 맞게 축소하였으며, 정간보를 보다 쓰기 편리한 16정간으로 개량하였다. 또한 세조 자신도 유량악보의 하나인 오음약보(五音略譜)를 제작하였다. 성종대에는 오래 전부터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비판을 받아온 고려속악에 대한 대폭적인 개작을 단행하였고, 당시 예조판서로서 음률에 밝은 성현(成俔) 등을 기용하여 《악학궤범》이라는 대악서(大樂書)를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93년(성종 24)에 편찬된 이 악서는 음악이론에서부터 악기 ․악기편성법 ․춤, 그리고 여러 가지 의물(儀物)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다루고 있어서, 역대의 어느 악서보다도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얼마 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온갖 사치와 속된 기악(妓樂) ․유악(遊樂) 등이 판을 치게 되자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정악(正樂)은 일조에 그 빛을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악은 궁중의 조회나 연향 ․제사 등에서 형식적으로 연주되는 가운데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다행히 중종 이후 제 궤도를 되찾기는 하였으나, 선조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겹친 환난은 음악을 다시 곤궁으로 몰고 갔다. 병란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악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직업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광해군 ․효종 ․영조 등은 《악학궤범》을 복간하거나, 악기도감(樂器都監)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 등을 설치하여 산실된 악기를 다시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궁중음악이 된서리를 맞고 있는 동안 민간에서는 산조(散調) ․시나위 ․농악 ․잡가 ․시조 ․판소리 등 민속악이 융흥하여 대조를 이루었는데, 음악과 관련된 인형극 ․가면극 등 민속극도 아울러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악보상으로도 평조(平調) ․계면조(界面調)라는 선법(旋法)이 정립되었고, 거문고 ․가야금 등의 주법 ․조율법(調律法)이 통일되었으며, 가곡 ․가사 ․시조 등이 서로 교류하여 나름대로 정착하는 등의 격동기이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1895년 갑오개혁 이후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의 선교사 H.G.언더우드와 H.G.아펜젤러 등 목사들에 의한 서양음악의 유입이다. 이들 목사들은 선교와 더불어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효시로 1900년경부터는 학교에서 창가(唱歌)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어 1909년에는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서양악과(西洋樂科)가 설치되어 성악 ․풍금(오르간)․사현금(바이얼린) 등의 전공을 둠으로써 서양음악 전문교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서양음악과 한국의 전통음악을 구분하기 위하여 전통음악에 ꡐ국악ꡑ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국악은 일제의 침략을 당하여 다시 위기를 맞게 되는데, 갑오개혁 직후에 772명이던 악원(樂院)의 악사가 17년에는 57명으로 대폭 축소된 것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짐작된다. 이 때부터 8․15광복을 맞기까지의 기간은 그야말로 국악의 암흑기였는데, 모든 악공은 흩어졌고, 악기들은 파손되었으며, 국악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는 듯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전통음악을 계승한 곳이 있으니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이습회(肄習會)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 ․협률사(協律社)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등 몇몇 단체이다.
이 단체들은 미약하나마 연주활동을 폈고 소수의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기다리던 광복이 된 후에도 사회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핍박 때문에 모든 것은 여의치 못하였다. 즉 45년에는 제7회 아악생(雅樂生)으로 모집한 25명을 해산시켜야 했고, 48년에는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발족에 따른 일부의 편견으로 1년 이상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조선음악통론》(咸和鎭 저, 1948)과 《판소리 춘향가》(金演洙 편, 48)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 ․창작집 등이 나왔으며, 덕성여대(54) ․서울대학(59) ․한양대학(73) ․이화여대(74) ․국악고등학교(72) 등이 국악교육을 전문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한국국악학회(48) 등 학술단체와 국립국악원 ․국립창극단(65)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65) 등 연주단체가 창단되어서 연주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전통음악과 예능을 보호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62년부터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도를 실시하였고, 매년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음악의 발양(發揚)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특히 94년을 ꡐ국악의 해ꡑ로 지정, 다채로운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음악사
고대로부터 전래된 한국 전통의 음악과 중국 및 서역(西域) 등지에서 전래된 음악을 국악(國樂)이라 하고, 주로 갑오개혁 이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된 찬송가를 비롯한 다른 서양음악 등을 편의상 양악(洋樂)이라고 한다.
⑴ 국악:국악은 사용하는 악기와 곡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아악(雅樂):중국 주(周)나라 때와 그 이전의 음악을 말한다. 1116년(예종 11)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중국아악이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일이다. 아악은 태묘(太廟)․사직(社稷)․선농(先農) 등의 제사(祭祀)와 연향(宴享)에 쓰였고, 이때의 악기로는 편종(編鐘)․편경(編磬)․금(琴)․슬(瑟) 등이 있었다. 특히 세종(世宗)은 박연(朴堧) 등을 독려하여 아악을 크게 중흥시켰고, 유신(儒臣)들의 절대적인 뒷받침으로 한때 찬연대비(燦然大備)하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 때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과 악기도감(樂器都監)을 두고 편종․편경 등의 아악기를 재정비하는 등 아악의 재건에 힘을 기울여 아악이 재생하는 듯했으나, 1910년 제향(祭享)의 폐지와 더불어 아악이 자취를 감추게 되어 지금은 오직 경학원(經學院)과 공자묘(孔子廟) 제향에 그 잔영(殘影)이 남아 있을 뿐이다. ② 당악(唐樂):중국 당(唐)․송(宋)나라 때의 속악(俗樂)의 통칭으로,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ꡒ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에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ꡓ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실린 송나라의 사악(詞樂)에는 석노교(惜奴嬌)․태평년(太平年) 등의 43편이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곡은 낙양춘(洛陽春)과 보허자(步虛子)의 2곡뿐이며, 이것도 당악의 원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향악화(鄕樂化)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이전까지 성하던 당악은 이와 같이 차차 향악 속에 흡수․동화되어 그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③ 향악(鄕樂):고대로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이르나,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서는 당(唐) 이전에 들어온 중국․서역 계통의 외래음악(外來音樂)은 모두 향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한국 고유의 음악은 조선 전기에도 거의 전승된 것이 없고, 고려시대의 향악(고려시대에서는 俗樂이라 했다)도 차차 자취를 감추어 조선 선조(宣祖) 때의 《금합자보(琴合子譜)》에는 겨우 정석가(鄭石歌)․사모곡(思母曲)․한림별곡(翰林別曲) 등이 전할 뿐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속악으로서 조선 후기까지 전승된 것은 정읍사(井邑詞)․동동(動動) 등의 몇 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종(世宗)은 여민락(與民樂)․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을 직접 창작하여 향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④ 속악(俗樂):민중과 더불어 자라온 한국 고유의 민간음악(民間音樂)으로서 가사(歌詞)․시조(詩調)․판소리․민요․잡가(雜歌)․산조(散調)․시나위․농악(農樂:매굿)․무가(巫歌)․범패(梵唄) 등이 이에 속한다. 국악은 또한 아악과 속악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아악은 당악과 향악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정악(正樂)이라 하고, 민간음악 중에서도 아정(雅正)한 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가곡․가사․시조 등을 좁은 의미의 정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악은 궁중 또는 양반계급에서 연주된 음악이며, 속악은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민중의 애환(哀歡)과 더불어 함께 자라온 ꡐ민중음악ꡑ인 것이다. 특히 향악과 속악은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에서 한국음악의 독창성과 우위성을 증명하는 음악이라 하겠다. 국악발전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세종대왕의 업적인데 왕은 1447년(세종 29) 향악을 기보(記譜)하기 위하여 정간보(井間譜:한국 최초의 有量樂譜에 속한다)를 창안하였고, 1449년에는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에 바탕하여 보태평․정대업 등을 창작, 5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연주되고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중심으로 한 호한(豪悍)한 정재(呈才)에 속하는 봉래의(鳳來儀:여민락․致和平 등으로 구성된다)를 제정(制定)하여 성업(聖業)을 이룩하였다. 성종(成宗) 또한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악가(樂歌)를 개작(改作)․개산(改刪)하고 당악기의 일부를 고치는 한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찬정(纂定)하는 등 국악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이룩한 음악은 세조(世祖)가 이어받고, 성종은 다시 이를 정리 집대성(集大成)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궤범을 후세에까지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도 국악은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원각사(圓覺社)․협률사(協律社)․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등을 통해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한편 음악가로는 3대 악성(三大樂聖)으로 꼽히는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박연(朴堧)을 비롯하여 근대의 5명창(名唱)인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김창룡(金昌龍) 등이 있다. 8․15광복 후의 국악은 1951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연구와 연주 활동의 태동(胎動)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의 국악 교육은 1954년에 개설된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가 처음이었으나 1956년에 폐과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 대학원․서울대학․한양대학․전주 비사벌국악고교․이화여자대학․추계예술대학․중앙대학․국악고교 등에서 국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⑵ 양악(洋樂):한국에 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한 것으로, 이 책에는 불완전하나마 양악의 기보법과 지극히 간단한 화성(和聲)에 관한 것이 일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양악이 직접적으로 들어온 것은 1895년 이후, H.G.언더우드, H.G.아펜젤러 등의 선교사에 의하여 전도(傳道)와 더불어 찬송가가 보급되면서부터이며, 특히 1900년(광무 4)에 창설된 시위연대군악대(侍衛聯隊軍樂隊)에 의하여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학교교육에서 창가(唱歌:서양음악)를 가르친 것은 1909년 조양구락부에 서양악과(西洋樂科)를 두면서부터이다. 이것은 양악 전문교육의 효시(嚆矢)이며, 1910년에는 이화여자전문에 음악과를 둠으로써 양악교육은 차차 본궤도에 올랐는데, 그 발전과정은 ① 섭취시기(1884~1945), ② 토착화 시기(1945~62), ③ 현대화 시기(1962~현재) 등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현대화 시기를 1962년 이후로 보는 것은 ꡐ서울국제음악제ꡑ가 이 해에 처음 열렸기 때문이다. 제1․2기에는 김인식(金仁湜)․이상준(李尙俊)․김형준(金亨俊), 독일인 F.에케르트, 백우용(白禹鏞)․정사인(鄭士仁)․김영환(金永煥)․홍난파(洪蘭坡)․현제명(玄濟明) 등의 활약이 매우 컸다. 8․15광복 이후에는 고려교향악단․해군정훈음악대․서울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국제오페라사(社)․국립오페라단․김자경(金慈璟) 오페라단은 물론, 이화여자대학․서울대학․연세대학․경희대학․한양대학 등의 음악대학을 통하여 양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또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윤이상(尹伊桑),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 피아니스트 김영욱(金永旭)․백건우(白建宇), 지휘자 정명훈(鄭明勳), 소프라노 조수미(曺秀美) 등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세계적 음악가가 속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