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사람들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양천국’
간암 말기를 앓고 있는 왕심성(이연걸)은 삶에 미련이 없다. 자신의 병을 받아 들인지 오래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당장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21살이 된 자신의 아들 대복(문장)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아이다. 아이는 아프다. 자폐증이다. 아들 대복은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심성은 죽기 전까지 아이에게 하나하나 일상을 가르치려 애쓴다. 계란을 깨는 법,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법,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일하러 다니던 해양수족관에 버스를 타고 가는 법, 무엇보다 자신이 죽고 나서 아이가 혼자서 견디는 법을 가르치려 애쓴다. 통증은 점점 잦아든다. 그 아픔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왕심성은 편치가 못하다. 자신의 병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주변은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대복은 혼자 살 수 있을까. 이 가난의 삶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사람들의 가슴이 촉촉히 젖기 시작한다.
드넓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맑은 해양수족관 안으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대복은 낮은 정신 연령대의 자폐아지만 수영만큼은 베테랑 수준이다. 아이는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물에서 놀 때를 보면 가장 자유로워 보인다. 당연한 것이, 아이에게 물은 곧 엄마의 자궁 속이다. 엄마 뱃속에서 아이는 수영했었다. 가장 편하고 평화로웠으며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았던 기간이다. 아빠 왕심성은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안다. 아이의 엄마(고원원)는 끝내 좌절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처럼 수영을 잘했지만 결국 물에서 죽었다. 심성은 수족관 주인(동총)에게 어느 날 속 마음을 털어 놓는다. “애 엄마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난 그녀를 이해해요. 이건 이겨내기 쉬운 고통이 아니니까요.”
특이하고 놀라운 것은 왕심성을 비롯해서 그를 사모하는 가게집 여자(주원원)든, 수족관 주인이든, 아니면 아들 대복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서커스 단원 여성이든(계륜미) 결코 ‘징징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잘 울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울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이것 역시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며 일반적인 사람들 보다 약간 더 불행한 일을 겪는 인물들의 얘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요란을 떨 필요가 있겠느냐며 차분하게 물러 앉는 식이다. <해양천국>의 미덕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란요리를 가르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가 처음으로 냄비 모서리에 계란을 깨뜨리는 장면! 아이는 계란이 깨지는 게 신기하다. 늘 수족관, 곧 엄마 자궁 속으로 퇴행하려 했던 다 큰 아이는 처음으로 세상이 그 밖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은 모든 것이 파란(破卵)에서 시작된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변화의 파란(波瀾)이 이는 법이다. 물결이 일어나는 법이다.
희생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일상은 그것 때문에 매번 고투의 연속이기 십상이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행위는 세상을 따뜻하게 순환시킨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성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하지만 영화 <해양천국>은 잠깐 울게 만드는 영화만이 아니라는 데 특징이 있다. 일단 영화를 보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한다. <해양천국>은 우리시대의 사라져 가는 부성에 대한 울림과 그 진동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 큰 주제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사랑하는 것, 그 행위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삶의 변화는 구체적인 것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 사회가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은 사회 전체의 복지가 아니라 각 개인의 구체적 행복에서부터 시작돼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요즘 들어 꽤나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은 부성애 코드의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작품들을 볼 때마다 항상 감동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어머니의 사랑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마치 카운트다운이 진행되듯 하루하루 생이 다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그저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위한 시간만을 보냈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련했고 그런 아들이 홀로 남아서도 떳떳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은 애달프게 보였으며 물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죽기 직전까지 ‘거북이’가 되어줬고 또 영원히 아들을 위한 거북이가 될 것을 약속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위대하게 보였다. 이런 헌신적인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고 있었던 영화 <해양천국>. 아버지의 그런 노력들은 결실을 맺었고, 그의 아들은 비록 아버지라는 거대한 버팀목을 잃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들을 얻게 됐다.
영화 <말아톤>에도 나오는 대사였지만 자폐증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소원은 자식보다 하루만 늦게 죽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되는 숙제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복지란 장애아를 낳았든 후천적으로 장애아를 양육하게 된 부모든 누구나가 자녀를 맘 놓고 낳아서 양육하는 문제를 책임져 질 수 있는 그런 사회라면 감히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함께 동반 자살까지 하는 그런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부모의 가슴 아픈 심정을 세 아이의 엄마인 나도 가슴 절절히 다시금 생각 해 보게 된다. 만약 우리 아이 셋 중 하나가 아주 사소한 장애라도 가지고 태어났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함께 평생을 해야 된다는 책임감에 결코 행복한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런 자폐증 소재는 캐릭터의 순수함과 드라마적 감동이 필수 요건으로 따라오게 되지만, 눈물을 쏟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이니까 말이다. 모든 부모들은 위대하며 그들에게 바친다는 맺음말처럼,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며, 그 분들의 따뜻함과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영화 <해양천국>.
언젠가 우연히 본 뉴스에 자페아를 운전석에 태운 엄마가 아이의 산만함으로 교통사고를 내 홧김에 자신의 5살 된 딸을 목 졸라 죽였다는 뉴스를 보고 그 엄마를 욕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뉴스의 댓글에 자폐아를 가진 어느 엄마의 글귀가 더 더욱 기억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기 딸을 죽였을까? 당신들은 욕할 수 있겠지만 난 충분히 이해하고 나도 그런 생각을 시시때대로 한다” 고 작성해놓았더라.
그렇다 우린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기에, 그런 장애아를 두지 않았기에 함부로 그들을 욕해서는 안된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녀와 함께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장애아의 부모를 위해서 하루빨리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의 길로 한걸음 더 나아가길 간절히 바라며 다시 한번 건강한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베풀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