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2일(월)
새벽부터 귀를 울리는 이상한 소리. 부지런한 언니는 조깅하러 나갔는지 안 보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스피커에서 울리는 독경소리도 아니고. 궁금해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다. 가보니 바로 옆에 학원이 있었다. 40명쯤 되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한 소절을 낭송하면 학생들이 따라서 읽는데 처음에는 이 나라 언어인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보니 영어책이다. 영어를 억양을 완전히 무시한 채 스님 독경 외우듯이 읽고 있으니 알 수가 있나. 나 역시 중학교 때 열심히 영어선생님을 따라 읽었는데 외국인이 보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지 않았을까? 선생님도 그 선생님과 닮았다. 긴 내용을 다 외워서 혼자만 잘난 척 하는. 그 때는 다 이렇게 생각했다. 영어책을 다 외우면 영어가 된다고.
끝나자마자 가방에 책을 넣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곳은 사설 영어학원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공부하고 가는 곳이었다. 찰리호텔에서 운영한다는 말도 있는데 너무 인기가 있어 학생들이 몰리는 바람에 앞 건물에 하나를 더 열어 두 개가 있다.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영어독경을 수시로 들으며 지내야 했다. 어쨌거나 예전에 비해 무지 높아진 학구열을 보니 미얀마의 미래가 밝게 느껴졌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가 보니 미얀마에 와서 처음으로 뷔페식으로 차려진 제대로 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배낭여행자 숙소다운 느낌으로 세계 각곡에서 온 여행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였는데 마침 독일에서 온 부부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우린 15일 동안 미얀마를 여행하고 있는데 오늘 트레킹을 마치면 내일 메익쏜으로 떠나요.”
“메익쏜? 우린 그곳을 모르는데 어떤 곳인가요?”
“정말 몰라요? 정말 멋진 곳으로 소개되어있는데.”
우린 한달 동안인데도 한참 북쪽에 있는 그런 곳은 아예 제꺼버렸는데 15일 여행에 그곳을 간다니. 내가 가진 책에는 전혀 언급이 안 되어 있어 알 수가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여행자는 가이드북에 안내 된 대로 다니는 수밖에 없다.
아침부터 트레킹 떠나는 사람들로 마당이 북적거린다.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반일투어, 일일투어, 1박투어 등이 있는데 우리는 첫날이고 하여 8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2시에 돌아오는 샨빌리지 반일투어를 신청하였다. 요금은 1인당 6천원이다. 마침 프랑스 아가씨 두 명이 신청하여 4명이 미얀마 가이드와 함께 기분좋게 출발하였다.
이 투어는 샨족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것이다. 날씨도 좋고 심신이 쾌한데다 시골길을 걸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마을길을 걸으면서 이들의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일하는 사람을 만나면 거들어도 주고 동네 꼬마들을 만나면 어울려 놀기도 하면서 계속 걸어 나갔다. 샨족은 우리가 보기에는 버마족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지만 쓰는 언어도 다르고 집도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다고 한다. 집은 대부분의 열대지방 처럼 2층에 기거하고 1층은 농기구 저장고나 그늘막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의 뜻을 가진 ‘밍글라바?’ 대신에 ‘마이쏜카?’를 연발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면 표정없이 바라보던 사람도 금방 미소를 띠며 ‘마이쏜카?’하고 답한다.
프랑스인 실린과 엘자는 37세의 미혼들로 같은 호텔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이들은 도시에서 자라 시골물정을 전혀 모르는지 나비 한 마리만 보아도 사진을 찍고, 소, 고양이, 심지어는 수박나무도 처음 보았다며 사진을 찍는다. 나도 소를 찍었더니 언니가 한마디 한다.
“소 첨 봐. 소를 뭐하러 찍니?”
“그래도 여기 소는 우리 소하고 좀 다르잖아.”
“다르긴 뭐가 다른데. 뿔 두 개에 왕방울만한 눈, 코뚜레 한 것 까지 똑같구먼.”
하긴 이것저것 다 찍으면 돌아가서 정리하기만 힘들지. 가려서 찍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양이나 농작물은 찍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느 집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노란 옥수수와 분홍색 가사를 입고 걸어오는 승려들은 여지없이 내 카메라에 찍혔다.
12시쯤 되어 어느 마을의 가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이미 다른 숙소에서 온 여행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크고 우람한 타마린 나무 그늘에서 샨누들과 맥주를 시켰다. 그런데 샨누들과 함께 우리것과 흡사한 갓김치가 나왔다. 먹어보니 진짜 갓김치였다. 색깔이 검은데다 짜서 실린과 엘자는 손도 안대고 우린 오랜만에 먹어보는 김치맛이라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 실린과 엘자가 우리를 외계인처럼 처다보았다.
가게 겸 식당을 하고 있는 이 집 역시 샨족의 집으로 할 일도 없고 하여 한번 둘러보았다. 온몸에 때가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뒤로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방을 들여다보았더니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신 듯 한 할아버지 한분이 나를 쳐다보며 힘겹게 웃었다. 드릴게 사탕밖에 없어서 하나 드렸더니 힘없는 목소리고 ‘땡큐!’하며 손을 내미는데 손이 뼈밖에 없다. 손을 한번 잡아드리고 나왔다.
“르 씨엘 블루~, ”
프랑스 아가씨들과 내가 아는 샹송을 총 동원하여 흥얼거리며 몇 개의 마을을 더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건물이 있어 기웃거렸더니 타나카 분칠을 한 내 나이쯤 돼 보이는 선생님이 나와서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살아돌아오신 것만큼 손을 잡고 반가워한다. 이름이 킨샨뮤에라는 이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선생이라고 하자 한사코 나를 교실로 끌고 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안내를 해 주었다.
불을 전혀 밝히지 않은 교실은 긴 일자모양인데 한 교실에 6개의 학년이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한 학년이 20명쯤 되는 아이들은 칸막이도 제대로 되지 않은 교실에서 제각각 선생님을 따라 공부하는데 목소리가 터져라 따라 읽는 반, 조용히 쓰기를 하는 반, 노래를 부르는 반 등 정신이 없다. 우리 같으면 벌써 넋이 반쯤 나갔을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니 환경에 인간이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지 알겠다.
더 재미있는 것은 킨샨뮤에 선생님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차례로 반을 돌면서 소개를 해주는데 소음에 묻혀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아이들은 외국인이 오자 더 큰소리로 신나게 공부를 하였다. 그런 아이들을 의자에 올려 배꼽인사를 하게 한 후 트윈클 트윈클 리들스타~ 영어노래를 부르게 하고 1부터 10까지 영어로 숫자를 세게 하였다. 마치 내가 교육시찰을 나온 장학사나 유명인사라도 되는 것 같다.
“유길초, 빨리 안 나와!”
밖에서 들어오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는 언니와 실린, 엘자에게 미안하여 나가려고 하자 킨샨뮤에가 팔을 붙들고 방명록에 뭔가 기록을 해달라 한다. 받아보니 도네이션 명단이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이제까지의 당당했던 태도와는 달리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은 또 뭔가? 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꼭 쓰이기를 바란다며 1만원을 기부하고 서둘러 나왔다.
오는 길에 멋있는 챨리네 리버스 롯지라는 팻말이 있어서 들어가보니 챨리네 방갈로였다. 호텔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찰리 가족의 비즈니스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멋있는 계곡과 어우러진 방갈로 몇 채와 챨리네 가족이 기거하는 집과 멋있는 카페가 있었다. 외진 지역이라 손님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마침 이곳에서 챨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카페에서 딸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이는 들어보이지만 아직 정정한 찰리의 여유있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만 하였다.
“같이 좀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찰리를 대신해서 영어가 유창한 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챨리의 아버지는 중국인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이곳 여자와 결혼하여 6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원래는 남칸쿡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챨리가 15세 되던 해에 전가족이 이곳 씨뻐로 이주했다고 한다. 종교도 불교가 아닌 기독교라 이름도 챨리라고 하였다. 어쨌든 쾌적하고 저렴한 숙소제공에 다양한 트레킹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니 돈은 저절로 굴러 들어올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로 자식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느긋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롤모델이리라.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고 로비로 내려가 내일 보트트립과 껄로행 버스표를 예매하였다. 마침 한국 대학생을 둘을 만나서 오랜만에 한국말로 여행담을 나누었다. 둘 다 건장하고 잘생겼다. 이들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두 달 동안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1992년부터 배낭여행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 때 자기네는 4살이었다고 한다. ‘아,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나니!’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이 연세에도 배낭여행을 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 통하는 젊은이들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다.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 샨펠리스로 갔다. 걸어서 15분 거리인데 다른 도시에 비해 이곳은 메인도로가 걷기에 좋지 않은 편이다. 차량에 우마차도 많고 차도와 인도가 분명치 않아 위험한데다 먼지도 심하다.
샨펠리스는 어떻게 이런 장소에 궁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 시골동네에 있었다. 아무리 봐도 왕이 사는 궁전이 있을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만난 안주인은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아들과 큰집을 지키면서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과거의 영화가 이어졌다면 지금 왕자, 왕비 대접받으며 호화롭게 살텐데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어쩌다 찾아오는 관광객들과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면서 집만큼이나 허물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분은 한국의 문화일보 기자가 취재하여 실은 신문을 스크랩하여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더 이상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그분의 이야기는 계속 들을 수 있었다.
샨펠리스의 마지막 왕이었던 사오짜생 왕의 이야기는 그 부인에 의해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는데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흥미롭다. 영국으로 유학을 간 사오짜생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잉게 사전트라는 영국의 한 아가씨를 사귀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귀국길에 올랐는데 그는 자신이 왕자임을 계속 숨겼다고 한다. 그녀는 공항에 내려서야 왕자를 환영하는 인파에 놀라 자신이 누구랑 만나고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 펠리스에서 살게 되었는데 행복도 잠시, 밀려드는 외세에 굴복하여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황태자비는 본국으로 돌아가 재혼을 하여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잉게 사전트는 이 이야기를 ‘Twilight Over Burma : My Life as a Shan Princess’로 출판하였다. 여기서 ‘Twilight’란 두 개의 빛, 즉 어둠과 밝음, 낮과 밤의 의미라고 하는데 잉게 사전트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저물어가는 왕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쓸쓸히 늙어가는 안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나오는데 왠지 인간의 부귀영화가 덧없다는 말이 뼈져리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 분은 우리가 안 보일때까지 서서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찾아오는 손님 모두에게 이렇게하진 않을텐데 왜 우리에게 이렇듯 더 호의적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어? 이상하다. 어제 분명히 여기 어디선가 팔았는데.”
“뭘 사려고 그러세요?”
“구운 옥수수가 먹고 싶어.”
언니는 쌀 1kg을 사서 들고 오는 길에 계속 두리번거렸다. 걷다보니 챨리호텔이다.
“먼저 들어가 있어. 혼자 가서 사올테니까.”
“밤이 다 되었는데 혼자 어딜 나간다는 거예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나간다. 10분도 넘게 기다렸더니 옥수수 두 개를 들고 나타난다. 나도 무엇이든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고야마는 언니의 의지를 본받고 싶다. 옥수수를 먹으면서 밥을 지었다. 된장국도 끓였다. 양배추, 감자, 양파, 마늘, 고추를 넣었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있다. 역시 이역만리에서도 진가를 발휘하는 우리의 된장이었다.
반일 투어 비용 : 12,000원
도네이션 : 10,000원
가이드 팁 : 5,000원
샨팰리스 도네이션 : 10,000원
낭쉐버스 예약 : 33,000원
쌀1kg : 850원
옥수수 2개 : 600원
계란, 야채 : 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