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 / 롬 10:1-8
수많은 거북이들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을 향해 기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를 향해 기어가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닷가와는 정반대 방향인 사막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어가는 주변에는 뒤집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거북이들도 있고,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열아래서 말라죽은 거북이들과 그 뼈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지만 거북이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사막을 향해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곧 뼈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이 자연과환경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할 뿐입니다. '방향만 돌려서 해안가로 기어가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 거북이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죽음을 향해,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태평양 어느 무인도에서 핵실험이 있었습니다. 이 실험 후에 거북이들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해변으로 나와서 알을 낳은 후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야, 거북이들아 방향을 틀어라, 조금만이라도 틀어라. 그러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 제 마음의 외침에 대해 거북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시청한 것이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제 머리 속에 그 장면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이 마치 이 거북이들과 같이, 사는 방향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외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영적으로 올바른 길로 가야하는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9~11장은 유대인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특권과 복,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소수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측면의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유대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에 가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베풀어주신 이적과 기사는 엄청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기도 하셨고, 선지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종일 손을 벌려 부르시고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매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 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바꾸면, 스스로 자원해서 지옥을 선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옥을 자원해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불신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 삼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너무 마음 아파,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구하는 바’ 기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구하는 바’(유도키아)는 원래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을 ‘기쁘게 한 것’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TV를 통해 사람을 구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때 구조원들은 무너진 건물사이를 다니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건물 속에서 생존자들이 발견될 때마다 박수를 치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심정으로 자기 동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고 힘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여러 가지 문제들을 놓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과 사업, 교회와 나라’를 위해, 또는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때로는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들 중에서 가장 귀한 기도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기도’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먼저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한 핏줄이기에 먼저 기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울 역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자기 동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삼상 12:23절상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따라서 이와 같이 가족과 친척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3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릇된 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고, 율법을 가르치고 배웠으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유대인만큼 종교적인 민족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위하여 재산과 목숨을 바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 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나옵니다. 의는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들도 자기들이 옳다는 자기의 의, 인간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서로 다릅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구원해 주는 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로 구원 얻으려 했기에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내긴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수학한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믿었기에,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갖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기의 열심이 그릇된 열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픈 마음을 안고,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를 의롭게 하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침’(텔로스)은 ‘완성, 목표, 끝마침’의 다양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①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아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② 예수님은 율법의 목표입니다. 율법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성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정교사와 같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님을 통해 완전한 사랑의 법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마침이 되는 자리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시는 자리에는 율법의 역할이 마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려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한 후에 그의 의를 성도에게 덧입혀 줌으로,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5-6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두 길이 있습니다. 곧 구원의 길이 둘 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적인 구원의 길이 있고, 은혜의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는 구원과 하나님이 거저 주는 구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노력해서 얻는 구원을 율법으로 얻는 구원, 행위구원이라 하고, 하나님이 거저 주는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라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두 다 죄인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면, 성경이 틀린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순순히 응하지 않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면서, 계속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게 바벨탑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힘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탑을 허물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와 많은 종교들과 사상들이 있지만, 율법주의는 기독교에 가장 큰 해를 끼친 사상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행위종교)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레 18:5을 인용했습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행하면 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행하면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실이지만 문제는, 아무도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사람이 없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려고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부터 난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고 하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7-8절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또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모셔 올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과 네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종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신 30:11-13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법은 어려운 일을 행하거나 먼 곳에 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늘에 올라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바다 건너편이나 무저갱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 법에 순종하려고 바다를 건너거나, 무저갱에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과 바다’는 ‘찾기 어려운 곳’을 말합니다. 신 30:11-13절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① 하나님이 준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②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증거를 주었기에, 다른 증거들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③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자신의 뜻을 충분히 계시해주었기에, 그들에게 다른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의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 신 30:14절을 인용했습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모세는 믿음의 법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곳, 곧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먼 곳을 찾아다닙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또한 온갖 종류의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으며, 가장 가까운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하늘이나 무저갱(지옥)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큰 이적을 행하거나 많은 재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구원의 길이 먼데 있지 않고, 마음과 입에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전한 믿음의 말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듣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서 구원자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무저갱에 내려가서 중보자를 모셔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구원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가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요 1:12). 이처럼 믿음의 종교는 행위의 종교처럼 구원을 위해 어려운 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종교가 요구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단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쉽게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 많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회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크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구원의 길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못된 일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죄와 타협하고 삽니다. 깨끗하고 완전한 것 같지만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지 스스로도 잘 모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가 끝날 무렵 성도들에게 다음 주 예배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여러분, 다음 주에는 거짓말하는 죄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마가복음 17장을 미리 읽고 오세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목사님은 교회에 모인 성도들을 보며 물었습니다. “주중에 마가복음 17장을 읽어 오신 분은 손 한 번 들어주시겠습니까?” 거의 모든 성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씁쓸한 미소를 띠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제 거짓말하는 죄에 대해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탄이 선한 사람을 노릴 때 사용하는 7가지 덫이 있습니다. 1.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괜찮아. 2. 아직 젊으니까 교회는 나이가 들어서 나가도 괜찮아. 3. 이번 한 번 정도는 아주 작은 것이니까 괜찮아. 4.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괜찮아. 5. 이번 딱 한번이니까 괜찮아. 6.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이번에는 괜찮아. 7. 이것은 분명 나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일 거야. 지금도 우리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 사탄에게 여러분은 얼마나 많이 당하셨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자기를 합리화하고, 여차하면 죄에 눈 돌릴 수밖에 없는 우리는 모두 다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이쪽이 좋은데 주님은 다른 쪽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시간이나 자기 재산을 내어놓을 각오까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행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행동이 우리 믿음을 증명하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쉬운 길을 제시해 놓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다시 어렵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분명합니다. 주님은 한 사람도 망하지 않고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그 생명과 진리 가운데 거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여 때로 우리 스스로 포기할 때도 있고, 스스로 세상을 향하여 나갈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늘 백성으로, 하늘 백성답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 롬 10:9-15
황수관 박사의 “박사님, 아멘약 주세요”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려갔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과거 대신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는 천상 과거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먼 길에서 돌아오던 날,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온 부모가 과거 시험을 잘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세상 과거도 중요하지만 천상 과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왔습니다.” “아니, 천상과거가 더 중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얼마 후 청년의 집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과거 시험 보라고 보냈더니 예수 귀신이 붙어 왔다고 동네에 소문이 흉흉해졌고 청년은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안이 다시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때부터 한약을 달인다, 무당을 부른다며 난리가 났습니다. 멀쩡한 아들을 벙어리로 만들고 말았으니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부모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입만 떼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 그렇게 3년이 지나서 청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예수 믿으셔야 됩니다.” 그는 벙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했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반가움과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그토록 네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네가 믿는 예수, 우리도 믿어 보자.” 마침내 온 가족이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 받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황수관 박사의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문에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황수관 박사는 3대 째 예수를 믿는 가문에서 자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야말로 ‘예수 이름으로 복 받은 가문’이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비즈니스 위크지 발표에 의하면 ‘코카콜라’ 이름에 84조의 가치가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77조, ‘IBM’은 61조나 된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지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감독 이름에 2조 4천억 원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영화 제작에 그의 이름만 들어가도 그만큼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사람이나, 기업을 대표하기에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이름입니다. 사람이나 기업, 브랜드의 이름도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야말로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랄프 왈도 에머슨(Emerson)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믿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제일먼저 믿음이 어느 수준인가?에 제일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믿음을 확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도 믿음을 먼저 확인하십니다. 우리에게 상 주실 때도 믿음이 있는가 살펴보십니다. 이처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믿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부분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믿음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쥐라고 망상하고 있던 사나이가 마침내 정신병원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원 출입문에서 발이 땅에 달라붙어 버렸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의사가 이상해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왜 그러고 서 계시오?" "바루바루 저기 고양이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쥐가 아니라는 걸 아셨지 않소?"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믿지만 고양이 쪽에서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믿음이 있습니다. 헛된 것에 대한 믿음과 참된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으로 믿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데도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보다도 더 직장을 신뢰합니다. 그도 어느 날 직장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말 것입니다. 재물이나 재산을 마음속으로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는 어떤 믿음을 품고 살아야만 할까요? 어떻게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믿음을 드러내며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보일 수 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진실한 믿음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기꺼이 주님이라고 부르십니까? 예수님께 여러분의 인생의 주권을 맡기고 사십니까?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세 가지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동의,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삼박자를 갖추어야 합니다. 언제나 참다운 신앙에는 그 세 가지 요소, 진리에 대한 지식과 동의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신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요소들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서는 믿음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신앙이란 단순히 진리의 지적인 앎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인정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이 없을 수 있습니다. 지식과 동의 위에 신뢰가 뒤따라야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증거하며 그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여러분 그 사실에 대하여 압니까? 그 사건이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실이라고 동의합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마지막 날에 그렇게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을 때 영적인 죽음에서 일으키시며, 새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 본문에서는 마음으로 동의할 뿐 아니라, 입술로도 동의할 것을 강조합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신뢰할 뿐 아니라, 입술로도 믿음을 표현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소유한 우리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믿음으로 누리며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조선조 영조때 이재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습니다. 어머니는 이재가 12살 되던 해 시동생인 당대의 정치가 이만성에게 데리고 가서 올바르게 키워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며칠 후 이만성은 "공부를 안 해 매를 들어 때렸는데 그만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재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가르치다 그런걸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만성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나를 얼마나 믿고 맡기나 보려고 했다"고 하며 이재를 열심히 키워 대학자가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재의 어머니 같은 믿음을 주님께 품고 있습니까? 그만큼 주님을 신뢰합니까?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을 고백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복된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 주신 은혜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첫째,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은 구원받은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에 죽게 되었든지 불에 갇혀 죽게 되었든지, 병에 들어 죽게 되었든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때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 사람들이 어떤 죽음의 위기에서 예수를 믿고 구출을 받게 되었습니까? 엡2 장에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미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으나 영적인 생명이 죽어 비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시체가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겉으로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새생명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영생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 집의 개가 앞집의 토끼를 물고 흔들고 있었습니다. 혹시 해서 앞집의 토끼장을 들여다보니 비어 있었습니다. 앞집의 토끼가 틀림없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앞 집 남자가 보통 괴팍한 사람이 아닌데, 자기의 애완용 토끼를 개가 물어 죽인 것을 알면 문제가 보통 커지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얼른 죽은 토끼를 빼앗아 샴푸로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향수까지 뿌려서 살그머니 토끼장에 넣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왔더니 또 개가 그 토끼를 물고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기겁을 하고 얼른 빼앗아 똑같이 해 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궁금해서 그 집 앞으로 지나가는데 앞집 남자가 토끼장 앞에서 서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글쎄, 토끼가 죽어서 뜰에 묻어 놓았는데 어떤 미친놈이 어떻게 알고 두 번씩이나 파내서 죽은 토끼를 샴푸로 목욕을 시켜서 향수까지 발라 토끼장에 넣어 놓았지 뭡니까? 참 이상하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죽은 토끼를 깨끗이 씻어 향수를 뿌려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생명을 살려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구원받아 새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둘째,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은 의에 이르는 삶입니다. 사람마다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이 더럽게 되고, 영혼이 더럽혀집니다. 그의 삶속에 죄가 많은 저주를 불러옵니다. 아무리 양심적으로 산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서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그의 죄가 마음을 더럽게 만들고 영혼을 더럽게 만들어 숨고 싶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항상 따라다니며 발목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죄가 절망을 안겨주고 죄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방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의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탄이 정죄하여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주님께서 의롭다하셨는데 감히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흰 눈보다 더 정결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셋째,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은 부끄러움(수치)을 당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악을 일삼는 백성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다투며 향하여 노하는 자들도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원수와 방탕한 백성들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최고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지은 죄가 만인 앞에 드러나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이들의 모습이 티브이에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같이 얼굴을 가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부패하고 부정한 행위가 폭로되어 수치를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러운 욕심이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리석음이 드러나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죄가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지만,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 앞에서 일생동안의 모든 죄가 드러나며, 심판을 받는 것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수치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런 망신을 당하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살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죄가 가려짐을 받습니다. 허물과 실수도 다 덮어 주십니다. 대신 믿음으로 하는 작은 헌신도 기억하시고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수치대신 상급으로, 면류관으로 아름답게 빛나게 하십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수치를 당할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아름답게 빛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불의와 부도덕, 불순종 등으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으나,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나아가면, 주님이 여러분의 믿음을 받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수치를 당할까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모든 부끄러움을 다 덮어 주십니다.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넷째,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하십니다. 새번역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니 얼마나 부요하십니까? 그런데 그 주님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으시고 부요하십니다.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넉넉하게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공산당 정권에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때 아들이 찾아 왔습니다. "집은 다 편안하냐? 어머니는 건강하고, 먹을 것은 충분히 있고?" "예 아버지 건강하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충분히 있고요, 왜냐며는 우리 아버지는 부자이니까요." 옆에 있던 간수가 크게 웃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부자라고 하니, 범브란트의 아내가 틀림없이 재혼하여 새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말한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항상 하나님 아버지가 부자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부요하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오래 전 평안북도 정주에 살던 가난하고 천하게 살던 머슴이 열병을 앓았습니다. 이웃에 살던 크리스천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가지라며 전도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완강히 거부했던 머슴은 나중에 외국인 선교사의 방문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날 이 머슴의 열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진짜 ‘유익한 일’이 후세에 나타났습니다. 이 가난한 머슴의 아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선교사가 미국 유학을 보내주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으로 아름답게 성숙하여 1946년에 연세대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백낙준 박사입니다.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구절입니다. 어떤 죄인이든 상관이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옆에 달린 오른편 십자가의 강도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는데 차별이 없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에 구원 받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차별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구원에는 연령의 차별도 없습니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가 주되심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절대조건은 마음으로 예수를 주로 믿고, 입술을 통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를 부를 때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신앙으로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를 만날 것이요, 주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작은 마을에, 벤 후퍼(Hooper)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작은 체구였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녀들이 벤 후퍼와 어울려 노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놀리며 멸시했습니다. 동네에서 따돌림과 멸시를 받으며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사람을 그대로 잘 받아주는 목사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후퍼는 목사가 어떤 분일까 호기심에 교회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가서 뒷자리에 앉았다가 축도할 때 살짝 나와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있다가 나오는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벌써 교인들이 늘어서 있었고, 담임목사와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며 아는 체 하였습니다. 순간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이때 목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겠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지!” 목사의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은 더욱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목사는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목사의 말을 뒤로 한 채 후퍼는 급하게 빠져 나가는데, 목사가 다시 그의 등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하게 살아야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벤 후퍼는 테네시 주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날, 젊은 목사를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날이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이며 구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14-15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면 구원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먼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런데 그런 결과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통해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과 “실천”을 통해 반복되는 생산의 역사입니다. 엄청난 소식이 여기에 있지마는 전하는 자가 없다면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들어도 믿지 않으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기쁨과 평안을 불안과 염려와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15절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를 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요 아름다운 발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기 전에 누군가 여러분을 전도해 준 분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든지 아니면 형제든지, 친구나 이웃이든지 누군가에 의하여 여러분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고마운 분입니다. 생명의 은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듣는 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변화와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복음을 듣게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단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참 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어 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수치를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부요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믿음을 충만하게 하고, 그 믿음을 주님 앞에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마음에 구세주로 모시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면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이 되어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 롬 10:16-21
무대 앞에 드리워졌던 커튼이 제켜지면서 연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연극의 실제 장면들만을 관심이 있을 뿐, 연극이 무대에 올리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준비과정들이 있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른 생각해 보더라도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려면 극작가가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주제에 대한 극본을 쓰고 싶은 갈망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갈망과 모티브를 토대로 대강의 줄거리가 엮어지고 마침내 대본이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대본을 토대로 등장인물들의 실제적인 역할 배정이 있고, 안배된 배역을 따라 연습에 연습을 거친 후, 비로소 관객들이 보는 가운데서 연극은 무대 위에서 실연되었을 것입니다. 어찌 배우들뿐이겠습니까? 무대장치, 촬영진 조명 분장 등 수 많은 지원팀들의 지원으로 연극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는 이웃집 김 집사가 내게 예수 믿어라 해서 내가 예수 믿은 것 같지만, 복음이 내 귀에 들려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와 같이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복음인 것입니다. 고난 길 헤치고 내게 찾아온 복음에 대해서는 복음 자체로만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얻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롬 10:10절 말씀같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들어야 믿고 시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앞 절 말씀인 로마서 10:14-15절에 복된 소식을 전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발걸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습하는 의미로 지난 주 본문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롬 10:14-15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는 4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어찌 부르리요, 어찌 믿으리요, 어찌 들으리요, 어찌 전파하리요?”입니다. 이 말씀의 4가지 질문은 논리적 물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맨 뒤에서부터 생각해보면, 복음을 누가 전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며, 듣지 못하였으니 아무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믿지도 않았으니 누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겠는가?하는 논리입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누가 주님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를 부른다는 것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어떻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는데, 이는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믿음을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는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뿐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통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파자’란 어떤 특별한 직책이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을 통칭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복음을 전하는 자, 곧 메신저의 권위는 스스로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메신저는 보내심을 입은 자로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집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한 특별한 관계와 목적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지 않았는데 누가 갈수 있으며, 전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듣지도 못했는데 누가 믿을 수 있겠으며, 믿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부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제일 요건은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천사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먼저 구원받은 우리에게 맡겨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백성으로서 두 가지 직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1) 천국배우라는 직업의식입니다. 일류 영화배우는 대본을 기억함은 물론이고 그 대사에 감정과 표정까지도 작가의 뜻을 100%로 연기합니다. 그러나 촬영 중 NG를 내면 웃음거리는 될지언정 작가의 뜻은 나타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의 배우"로 불러주셨는데 천국대본인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가운데 감정과 표정까지도 천국배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NG를 내고 있으면 다음에는 배역을 맡기지 않습니다. 2) 천국 마당쇠(종, 하인)라는 직업의식입니다. 대감 집의 마당쇠는 대감을 위하여 살아가는 종입니다. 대감의 명령 앞에 언제나 "예"만 있습니다. 종은 두 가지가 없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지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인격이 없습니다. 대감의 의지와 인격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마당쇠"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의지와 인격은 죽고, 대신 내 안에 예수님의 의지와 인격만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감 되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천국 마당쇠입니다. 우리의 대감 되시는 예수님의 의지와 인격에 맞추어 연기하는 일류 천국 탤런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고 명하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충실한 천국 마당쇠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천국 마당쇠가 되어야 합니까? 주인이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절하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합니다. 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까? 하나님 말씀 가운데도 수많은 발자국들이 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신앙의 발자국이 있는가 하면, 아름답다고 찬사를 받는 수많은 믿음의 발자국들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러 가던 아브라함의 순종의 발자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던 모세의 능력의 발자국,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정복하는 여호수아의 믿음의 발자국, 삼년 육개월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고 달려가던 엘리야의 능력의 발자국, 다 아름다운 발자국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교회 존재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불이 타오름으로 존재하는 것같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할까요? 1) 본문에서 인용하자면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비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율법에 매여 복음에 눈이 뜨여지지 못하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것이고 복음은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하는 발은 얼마나 신바람이 나며,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곧 생명을 구원하는 발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는데 천사를 사용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세례요한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그를 가리키어 하시는 말씀이 요 1:6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복음이 오늘 내게 전해진 경로를 추적해 보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바울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고, 그 복음이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선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한국 땅 제물포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선교사는 미국의 언더우드 목사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한국선교 준비 기간으로서 1) 1865년 중국 산동 반도에서 선교 중인 토마스 목사가 황해도 서해안에 와서 3개월 전도함, 2) 1866년 영국 선교사 토마스 목사 정식 입국하려다 대동강에서 피살 순교 당함, 3) 1876년 로스선교사가 만주에 있는 한국인 이응찬에게 세례 베풀었음, 4) 1884년 10월 20일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알렌 의사 부부가 개신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들어와 1886년에 왕실 병원 제중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함, 그러나 대한민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는 언더우드입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너는 왜 못 가느냐?’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못 가는가?’ 그는 단 한 번도 복음을 못 들어 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의 우선순위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한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 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여, 조선땅과 조선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35년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사역을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시작으로 하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깨워나갔습니다. 그리고 1912. 9. 1. 평양에서 예수교 장로회 첫 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더우드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축복의 삶을 허락 해 주신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가족은 현재 5대까지 이 나라 위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한국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설립된 경로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실로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복음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생명을 희생하게 하고 고난의 길을 걷게 했습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한 우리의 사명 때문인 것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전쟁영화가 있습니다. 밀러 대위는 7명의 대원을 데리고,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독일군 지역 깊숙이 들어갑니다. 라이언을 살리고는, 밀러 대위와 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죽어 가는 밀러 대위가 라이언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우리 8명이 목숨을 버리고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내 목숨과 나의 사랑하는 자들의 목숨을 버리고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복음이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데, 이 믿음이 어디서 나옵니까? 어느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우리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외출할 옷도 없고, 아이들 과외비도 없다’고 불평을 하니, 남편이 하는 말이 ‘여자가 뭐 그리 말이 많노? 돈 없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지’ 하더랍니다. 가끔 믿음 없는 교인이 ‘자기는 살 재미도 없고, 교회 생활에 기쁨도 없고, 기도도 하기 싫고, 감사한 것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 분이 여러 가지가 없다고 하소연했지만, 이 분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구원의 확신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다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이 없다면 다 없는 것이요, 믿음이 있다면 다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 어디서 옵니까? 16-17절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어야 구원을 얻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들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나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8-20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8-20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계시하였지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구원이란 게 참 가깝고도 먼 것인 것 같아요.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내가 듣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요, 축복 중에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 일으켜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도 복음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19-20절에 이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문의하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전도자를 통하여 찾아가셨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거절한 복음을 이방인인 우리가 대신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21절 ‘이스라엘을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복음을 믿어야 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 대해서도 항상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도 쉽게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래 전에 국민일보에서 실린 서울 상계동에 있는 어느 교회 여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제일 부끄러운 것이 전도하지 아니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도하려고 해도 용기도 나지 않고 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서 ‘네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는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는 ‘가진 재물도 없고 지식도 없는데 어떻게 나누어주지’라는 생각에 한동안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나누어 주라.’는 두 번째 음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 외에는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미리 내게 꼼꼼한 뜨개질 솜씨와 정갈하게 만두 빚는 솜씨를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달란트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이웃집에 사는 아이들의 체형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예쁜 조끼를 짜서 선물했습니다. 또 정성스레 빚은 만두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살포시 쪄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과 함께 이웃집에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주치던 한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쪽에서 먼저 ‘아줌마, 교회 다니시죠. 저 좀 데려가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생애에 가장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집으로 가자고 해서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주며, 말씀으로 위로하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우울증은 말끔히 치유되었고, 이제는 그녀도 남편과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가 가진 지극히 작은 것을 나눔으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들이 주님과 친숙하게 살아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길 원하십니다. 가이드포스트는 88세의 흑인 노파 ‘오세올라 매카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미시시피주 ‘해티스버그’에서 평생을 손빨래로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열두 살 때 자기를 양육해준 이모가 병들자 6학년에서 학교를 중퇴하고, 소녀가장이 되어 어머니 때부터 이어온 가업인 세탁소를 이어받아, 기계세탁이 아니라 손으로 빨아 다려서 납품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늘 즐겁게 찬송을 부르며 빨래를 하고 다리미질을 했습니다. 심한 신경통이 손에 와서 일할 수 없게 될 때까지 12세부터 86세까지 74년 동안이나 남의 빨래를 하였습니다. 매카티 할머니의 기쁨은 두 가지였다고 간증합니다. 하나는 교회에 나가 매 주일 선교 헌금을 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행에 들러 약간의 저금을 하는 것입니다. 74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예금을 찾지 않고 저금만 하였는데, 86세 때 예금 전액을 찾아 교회에 선교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매카티 노인은 ‘대통령의 장한 시민상’을 받게 되어 생전 처음으로 미시시피주 밖을 여행하여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났고, UN의 초청을 받아 뉴욕을 구경했습니다. 매카티 씨는 ‘감사할머니’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그 심한 노동과 가난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매카티 할머니는 잠자리 들기 전 늘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이 땅에 외롭고 쓸쓸한 인생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따뜻한 사랑을 전하는 데 나를 써 주옵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 가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들이 오늘도 필요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전파하는 이가 있어야 듣는 이가 있는 것입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그래서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복음을 들고 강을 넘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3-6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복음 전도를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마음에 담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되 옥토에 떨어져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 이 시간에도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용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 땅에 선포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