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간사해서 고마운 걸 모른다.
이미 저물어가는 올 한 해를 잠깐 회상해본다.
3월, 혹시 아이가 학교에서 소변 실수를 할까봐 여벌 옷 한 세트를 담임에게 맡겼다.
(아이는 기저귀를 정말 늦게 뗐다. 6살까지 하고 있었다.^^;;)
돌봄 교실에도 한 세트 갖다 두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나, 여벌 옷의 존재 자체를 잊었다.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다 혼자 등교하도록, 아이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 간다.
"여기서부터는(교문) 혼자 갈 수 있잖아?"
잠깐 뜸들인 다음.
"혼자 갈 수 있지만 그래도 엄마랑 같이 가는 게 더 좋아."
그래서 계속, 교실이 4층이라 3-4층 (복도)입구까지는 데려다 준다.
다른 아이들은 개학 2, 3주면 어느 정도 완성되는 이른바 적응이
우리 아이에겐 한 달은 족히 걸린 듯하다.
한 달이 뭔가. 교과서를 스스로 꺼내온다고 제 입으론 말했으나
실은 4월은 족히 돼서야 그 일이 가능해진 것 같다.
경계선(평균하) 지능에 AD 성향이 좀 있는 아이들도
당장 힘든 것이 이 부분, 사물함에서 교과서 꺼내고 선생님이 말하는 쪽수 펴고 하는 것.
유치원과 가장 다른 것이 교실 이동인데, 정말 걱정이 컸다.
특히 계단이 많아서 행여 엎어져서 큰 사고 날까봐 지금도 걱정한다.
"무릎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멍이 많이 들었어?"
"어, 친구들 하고 가다가 친구들이 나를 넘어지게 했어."
(아마 우르르 가다가 넘어진 듯했다.)
"뭐? 그럼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 옆에 계셨어?"
"어, 가만히 서서 보고 계셨어. 그러곤, ***, 한 번 일어나 보세요, 움직여 보세요, 별로 안 다쳤으니 괜찮아요~, 그러셨어."
이 정도의 '스토리 (재)구성'만 돼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진심이다.
금요일에는 돌봄 교실에 가지 않는다. 5교시 끝날 무렵 내가 데리러 간다.
종이 땡 치자마자 가방 메고 교실을 나온다, 실내화도 안 갈아 신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넘친다.
"엄마, 오늘 ***가 변신하는 공을 가져왔는데, ??를 누르면 ??로 변신하는 거야~
***아, 어떻게 하는지 내가 보여줄게, 그러면서 자기가 시범을 보여주고~~"
잠바는 입는 것보다도(최근부터 지퍼 끼우기 성공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가방 안에 쑤셔 넣는 것이 편하니 그렇게 했으나, 지퍼도 채 잠그지 않았다.
필통 안에는 연필이 한 자루도 없다. 오늘은 짝지가 안 도와준 모양이다.
솔직히, 도움 안 받고(-받아도) 자기 혼자 이 정도라도 해주는 것이 더 고맙다.
"받아쓰기 몇 점 받았어?"
"어, 백 점 받았어~"
진짜로 백점이다. 지난 주에는 80점. 두 문제를 아예 안 썼더라.
받아쓰기는 비단 한글을 외우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발달지체아의 경우, 지시수행이 얼마나 가능하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앉아 있고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 속도에 맞추어 쓰고 하는 것이 문제다.
9월에는 잘 안 되던 것이(심지어 쓰다가 박자를 놓쳐서 울고 ㅠ.ㅠ) 이제는 제법 된다.
아이의 소근육이 약한 엄마들, 우리 아이 필체 보고 힘내시기 바란다.
맥락이 없으면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많다. (5번, "기다렸습니다" '다'는 거의 못 알아볼 수준).
컨디션이 나쁘면 필체는 더 망가진다. 지금 올린 파일이 그렇다.
손에 힘이 정말 없고 시지각 협응, 지각 추론이 진짜 낮지만(작년 65, 올해 59)
한글 읽고 쓴다. 심지어 두 문단, 나아가 짧은 텍스트 독해 가능하다.
뿐더러, 미술 관련 과제를 대부분 다 학교에서 끝낸지 꽤 되었다.
고마워 죽겠다, 왜냐면 내가 미술을 너무 싫어하기(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림, 공작(만들기) 수준 자체가 아니다.
그 과목 시간에 과제를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느냐이다.
흔히 '동작 지능'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원어는 Performance Intelligence이다.
더 정확한 번역어는 사실 '수행 지능'이다.
우리 아이처럼 언어 지능이 평균하(심지어 평균) 수준임에도 수행이 심하게 안 될 때는
확실히 뇌 회로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최대 30점 차이.)
그런데도 이 정도는 해주니 고마운 것이다.
이런 유의 색칠하기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구획'이 되느냐, 이다.
어릴 때는 그 중요성을 몰랐는데, 여기에 엄청난 동작 인지(시지각 협응, 소근육 등)가 요구된다.
이 경우 기특한 건 저 성과물 자체보다 수업 시간에 저 활동을 완수했다는 사실 자체다.
가을-추석 맞이, 점토로 뭐 만들기.
옆 친구와의 '클래스/레벨' 차이가 확 느껴지지만
자기 나름으론 '송편'을 표현한 것이다. 옆에서 짝지가 좀 도와줬겠지만, 그래도 너무 감사한 것이다.
작년에 장애 등록, 특교자 신청하면서 활보 시간도 받았다.
47시간, 초등 입학하여 10시간 더해져 57시간이다.
학교 생활에서는 굳이 필요없다 하셨지만, 이미 사람도 구해졌기 때문에
최대한 학교에서 활용한다.
처음에는 치료실 이동에 쓰려고 했으나(실제로 그렇게 해보기도 했으나) 내가 좀 더 바쁘게 살기로 했다.
활보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후 아이의 교실 이동, 즉 자기 반에서 돌봄 교실 이동을 도와주신다.
겸사겸사, 하교시 아이 책가방 정리, 그날 진도표 사진 찍어 보내주기 등을 해주신다.
총 2년을 받았고, 지금 활보 선생님이 나쁘지 않아 내년에도 어떻게든 최대한 쓰려고 한다.
*
너무 우울한 글만 올려서, 이런 것도 한 번 써봤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는 너무 잘 크고 있는데, 엄마인 제가 요즘 일이 너무 안 풀려
저 자신의 우울을 애한테 투사한 게 아닌가, 반성도 해봅니다...^^;;
[출처] 수치가 아니라 아이를 보자 ([거북맘vs토끼맘]아동심리/언어치료센터/ADHD/틱/발달장애/상담) | 작성자 푸른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