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차원의 세계. 3
밝은 달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었지만 유이리는 이를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 온지 벌써 한 달.
이 세계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만 무거워져갔다. 소드마스터가 산재하는 곳. 이 집을 벗어난다면 무사히 하루를 넘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온날 남궁상욱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마제린의 가호가 아닐 수 없었다.
신성마법을 사용한다면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사용에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사술로 취급되어서는 곤란했다.
‘이 상태로는 돌아갈 방법을 찾을 길이 없지 않은가.’
“후~~”
유이리는 나오는 한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내가 이곳에 온 것이지?’
이곳에 와서 한 달간 고민한 내용이지만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마제린께 조언을 구해도 대답이 없었다. 마제린여신이 관여할 수 없는 곳인가 생각해 보았으나 그도 아니었다. 간간히 사용해 보는 신성마법의 행해짐 그 증거였다. 마제린여신이 관여할 수 없는 곳이라면 신성마법이 행해질 턱이 없는 것이다.
“아우~~ 복잡해~~”
유이리는 복잡한 생각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두 쌍둥이는 이미 잠들었는지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유이리는 발이 가는대로 움직였다. 밝은 보름달은 그녀가 가는 길을 밝게 비춰줬다.
“하! 하앗”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힘찬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건물을 돌아 나가자 달빛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궁상욱이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기묘한 움직임과 함께 수많은 검광을 만들어 냈고, 그가 흘리는 땀방울은 달빛에 반사되어 빛을 내었다.
춤으로 보기에는 그 동작이 너무나도 힘이 넘치고 박력이 있었고,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보자니 너무도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한 다경의 시간이 지나 검무가 끝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궁상욱이 얼이 빠진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유이리를 발견하였다. 남궁상욱은 흠칫 놀라며 유이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소?”
약간은 화가 난 목소리로 남궁상욱이 말했다.
“예? 아마도 한다경쯤이요? 그나저나 굉장해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움직임이었어요.”
버럭 화를 내려던 남궁상욱은 유이리의 탄성에 화낼 타이밍을 잃었다. 게다가 자신의 검무를 칭찬하니 기분 또한 좋아졌다.
보아하니 타인의 수련을 훔쳐봐서는 안 된다는 무림의 불문율도 모르는 듯 했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지적해 줄 것은 지적해 줘야 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무공수련을 지켜보다 오해라도 사면 큰일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흠흠. 소저. 모르고 있었나본데, 타인의 수련을 훔쳐봐서는 곤란하다오.”
“예? 그……. 그런가요? 죄송해요. 모르고 한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 죄송해요.”
남궁상욱의 말에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느낌에 유이리는 거듭 사죄를 했다. 뭔가 더 말을 하려던 남궁상욱 역시 유이리가 이렇듯 사죄를 하자
조용히 이 일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아무리 여자에게 냉정하다 하여도 남궁상욱 역시 남자. 미모의 여인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사죄를 하자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함을 느꼈다.
“아니오. 이곳에서는 별 문제가 없소. 다만 세가외의 사람들에게는 주의를 하시구려.”
“예.”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어쩐 일이시오?”
“바람이나 쐴까하고요.”
그렇게 말을 꺼낸 유이리는 어느새 오후께 있었던 연무장의 일까지 말을 하였다. 꼭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꺼내게 되었다.
편안한 느낌? 어쩌면 가장 정확한 느낌이지도 몰랐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홀로 있는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은 내밀어준 공자.
차가운 듯 보이는 표정 뒤에 숨겨진 배려와 친절, 가식 없는 행동.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구려. 그럼 본세가의 무공을 익혀 보겠소?”
“예? 하……. 하지만.”
“본 세가는 창술에 대해서는 그다지 조회가 깊지 못하기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간단한 내공심법과 기초적인 신법, 그리고 약간의 권각술을 익힌다면 도움이 될게요.”
“고맙습니다.”
유이리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비록 십년을 넘게 수련해왔으나 무엇인가 부족함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비록 선두에 나서서 싸우는 전사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보좌해야하는 용사에게 누가되는 일은 피해야 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자신이 모시는 용사가 해를 입는 것. 마제린여신의 사제에게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강한 자들이 많은 곳, 혹시나 이곳에서 용사를 만나 그를 보좌하게 된다면 자신의 빈약한 전투력은 큰 장해물이 될 수 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오.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도 그렇군요. 아버님의 의녀가 되었으니, 앞으로 오라버니라 불러야 하겠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욱오라버니.”
유이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시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남궁상현 역시 오래간만에 듣는 ‘오라버니’라는 소리에 희열을 느꼈으나 무엇인가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남궁상욱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받자, 유이리가 고개를 들어 남궁상욱을 째려보았다.
“제가 동생으로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것입니까?”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느닷없는 유이리의 말에 남궁상욱은 당황했다. 자신이 유이리를 동생으로 부족이 여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남궁상욱의 당황하는 얼굴을 본 유이리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동생에게 대하 듯 말을 놓아주십시오.”
“...... 그래……. 알겠…….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마. 너도 나를 오라버니라 생각한다면 앞으로 편하게 대하도록 해라. 그리고 네 칭호 말인데......”
“?”
“오라버니도 좋지만 가가 라고 불러주겠니? 나는 너를 유매로 부르도록 하겠다.”
“...... 오라버니가 그러길 원하신다면 그러도록 하죠. 남궁가가.”
유이리의 말에 남궁상욱은 오른 주먹을 불끈쥔 채 달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라 불리울 때 느꼈던 부족함이 채워지는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말이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유이리 역시 나름대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아로 신전에 버려진 아이. 루시아 대사제와 로이 신관전사장이 부모로써 길러주었고, 다른 수도자들이 형제자매가 되어주었었으나, 친형제부모와는 다른 장벽이 존재했다.
물론 남궁부부도 피로써 이어진 친 부모가 아니었고, 남궁상욱 역시 친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나, 신전의 사람들보다는 더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떠나게 될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때가 올 때까지는 진짜 가족처럼 지내고자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좋다. 거기서 무한보(無限步). 이후 천뇌봉수(天籟封守). 섬룡단극(閃龍斷戟).”
남궁상욱의 지시에 따라 유이리는 힘차게 몸을 놀리며 창을 휘둘렀다. 그녀의 앞에는 가상의 적이 위치했다. 그녀가 무한보를 밟으며 물러나자 성급히 따라 붙으며 공격을 해왔다. 유이리는 천뇌봉수를 이용해 상대의 예복을 꺽은 뒤 섬룡단극으로 상대의 목을 노렸다.
“핫!”
힘찬 기합과 함께 유이리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거기까지.”
유이리는 창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지난 두 달간 배운 창궁대연신공을 이용해 호흡을 안정시켰다. 유이리의 앞에는 남궁상욱이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많이 좋아졌구나.”
“남궁가가 덕이에요.”
“초식의 습득은 나무랄 대가 없다. 앞으로는 그 변초에 대해 배우도록 하자.”
“변초라뇨?”
“음. 조금 복잡한 설명이 되겠구나. 네가 지금 배우는 초식은 상대가 일정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 가정한 공수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전에서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움직임을 해줄 것 이라고는 바랄수가 없지. 즉 현제의 초식은 그 틀만 유지하면서 다양한 상대의 행동에 대응을 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음. 그러니까 섬룡단극에서 최종지르기를 할 때 상대의 움직임이나 그 빈틈을 따라 공격 괴도나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정확하다.”
유이리에게 무공을 가르친지 벌써 두 달째. 유이리는 남궁상욱이 가르치는 무공을 쑥쑥 흡수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기재라 부름에 부족함이 없는 오성이었다. 그러나 내공은 기묘할 정도로 늘지 않았다.
남궁상욱이 남궁성현을 찾아가 유이리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고, 허락을 구하자 남궁성현은 매우 기뻐하며 허락했다.
그리고 내공심법을 일반무사들에게 가르치는 심법이 아닌 가문사람들만이 전수를 받는 창궁대연신공을 허락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도록 내공을 쌓기는커녕 기의 흐름을 잡아내질 못했다.
‘이상하군. 초식의 습득이나 이해도를 보면 사봉 중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오성을 지니고 있어. 그러대 어째서 내공 쪽에서는 초보 이하의 능력을 보이지?’
남궁상욱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이리의 창이 집중이 분산된 틈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검을 들어 창을 막아낸 남궁상욱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으나 겉으로 표시할 수는 없었다.
“멋진 변초였다. 응용력이 뛰어나구나.”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나 남궁상욱의 칭찬에도 유이리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남궁상욱을 올려다보았다.
“남궁가가. 방금은 변초가 아니라 정초대로 한 공격이었어요.”
유이리의 말을 듣는 순간 남궁상욱의 등에는 또 한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그것역시 훌륭한 변초다. 그러니까 말이지. 아! 그래! 실전에서는 정초대로 공격하는 사람이 전무하다고 봐도 좋다.
당연히 변초와 허초를 섞은 공격을 할 것이라 생각들을 하지. 그런 상대에게 변초도 허초도 없는 공격을 한다고 생각을 해봐라. 그것 자체가 훌륭한 변초가 된다니까.”
남궁상욱은 두 손을 흔들어가며 유이리를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불신에 가득찬 유이리의 눈빛은 변할 줄 몰랐다.
“아! 그러니까 일종의 심리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니까. 그래! 맞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초식이지.”
남궁상욱의 필사적인 설명에 유이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알았어요. 호호호호호.”
유이리의 웃음에 남궁상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의 광경을 무림인이 보았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의 별호가 무엇인가.
바로 빙옥소검왕(氷玉小劍王)으로 불리는 무림 최고의 얼음공자였다. 특히 여인들에게는 그 차가움이 배가되기로 유명한 그였다.
그런 그가 여인의 앞에서 저리도 긴 말을 하고, 얼굴까지 붉어지다니. 다른 무림의 동도들이 봤으면 기절초풍할 일을 유이리 앞에서는 서슴없이 하였다.
그럼에도 남궁상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 둘이 있는 동안의 일이었으니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일도 없고, 유이리 역시 입이 가벼운 여자가 아니었다. 다만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탑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덟 개의 눈동자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남궁상욱의 유일한 실책이었다.
“허허. 저 아이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오게 기른 포근한 외모의 노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구나. 상욱이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얼마만인지. 허허허.”
“본 세가의 위세에도 주눅 듦이 없고, 예의바르고 기품 있는 행동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외거대 방파의 핏줄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부인의 말에 남궁영의 미소가 더욱 짖어졌다.
“허허허. 우리 며느리의 맘에 꼭 들은 모양이구나.”
“제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상욱이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랬다. 사실 결혼을 시키고자 했다면 언제든 가능했다. 천하제일가인 남궁세가의 안주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넘치고도 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본인의 의사였기에 일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나 큰 며느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남궁세가는 만만한곳이 아니었다. 유이리는 비록 그 가문을 알 수 없고, 아직 확실한 신상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미모와 기품, 그리고 지혜만큼은 남궁세가의 안주인이 됨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 어머니. 저 소저. 아니 형수에게 다른 여동생은 없답니까?”
얼이 빠져라 유이리를 바라보고 있던 청년이 허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남궁성현을 꼭 빼닮은 청년으로 남궁상욱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보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다만 몸의 행동이나 표정이 가벼워보이는 면이 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매력을 높여주었다.
“상민아. 네 기분은 충분히 이해는 한다만 새 아이 앞에서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거라. 또한 아직 형수라 부르지는 말거라. 지금은 아버지가 의녀로만 받아들인 상태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허부인의 단호한 말에 남궁상민은 입이 한 치는 튀어나왔으나 별다른 말은 안했다. 그러나 남궁영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며늘아가.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니. 그리고 며느리감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의녀라니. 나는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저 아이의 가문은 멸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의녀로 맞이한 것은 저 칠칠치 못한 녀석 때문입니다. 일단 마음이 있는 듯 하나, 나서지를 못하고 있어서요. 그러니 일단 가족과 같은 편한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가까워지도록 만들려는 이유입니다.”
허부인의 말에 남궁영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허허허. 누가 지아비 자식이 아니랄까봐. 허허허. 그래. 그래서 손자며느리를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암.”
“아니. 아버님. 거기서 저는 왜 나옵니까?”
남궁성현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남궁영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예끼 이 녀석아.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이냐. 너희들이 어떻게 성혼했는지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허허.”
남궁영의 말에 남궁성현과 허부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들의 성혼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참마흉살 허상죽의 엄호와 허미란의 적극적인 대시에 남궁성현이 무너진 케이스였다. 남궁영은 자식의 젊었을 적의 모습과 똑같은 손주녀석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며느리와 같이 여인이 대담하게 청혼을 해오는 경우는 정말이지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경우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 할아비도 손자며느리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구나.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