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을 양성하면서 답답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양성을 담당하는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본디 가르치고 기르는 처지에서는 배우는 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깨치고 성숙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려고 애를 씁니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예수님께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분께서도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부르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마귀를 쫓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악령에 시달리는 아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하는가 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에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놀랍습니다.
한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비록 철없고 부족하지만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 그분의 권능이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정녕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2코린 12,9)해야 할 철부지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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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세리나 죄인과 같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가까이 하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 곧 되찾은 양(3-7절 참조), 되찾은 은전(8-10절 참조),
되찾은 아들(11-32절 참조)에 대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이야기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잃었던 당신 자녀를
다시 찾았을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큰 기쁨을 전하십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밤낮으로 길을 헤매며 애쓰는 목자,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심 안에 머물며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착한 목자,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심장마저 꿰찔리시어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께서는 또한 성체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고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오늘 하루, 예수 성심과 하나 되어 그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세상의 모든 사제가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
주님의 착한 목자로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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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신명기 7,6-11 요한 1서 4,7-16 마태오 11,25-30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 때입니다. 평화방송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는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을 입력하면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의 성령의 은사는 ‘지혜’였고, 성령의 열매는 ‘절제’였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꼭 필요한 은사와 열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건강과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좋게 보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덤으로 건강과 장수를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신부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와 지식도 필요하지만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은 ‘판단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많습니다. ‘절제’ 또한 제게 필요한 열매였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성화되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2년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저에게 ‘사목 체험’을 나눠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들 앞에서 체험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 사제들은 저의 허물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장 신부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본당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의 사목 체험은 교구 사목국에도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께 일해 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 사제’로 3년을 일하였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강사 신부님들을 섭외하면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3년간 월례연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마음’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와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