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머니와 서울대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 거리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꽃처럼 떠다니고 있다. 내가 다녔던 때보다는 늦게 등교를 하는가보다.
어제는 광역버스를 처음 타봤다. 버스도 쾌적하고 앉아서 편하게 을지로까지 갔다. 남산일호터널을 지나 명동입구를 지날 때는 옛날 고연전이 끝나고 데모를 하던 길을 지나갔다. 보신각을 지날 때는 그뒤에 있던 지하다방이 생각나서 열심히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열명 남짓 앉거나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사서 입었던 화신백화점은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후 첫 등교날 내리는 정류장을 놓쳐서 을지로입구에서 종로쪽으로 뛰다가 넘어진 곳이 조흥은행앞이었는데 지금은 신한은행이 되어있는듯 하다. 아버지가 시내를 구경시켜주시고 조흥은행 옥상에 나를 데리고 올라간 적이 생각난다. 아마 이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고 큰 사람이 되라는 격려였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마포로 가서 횟집에서 초등학교동창들을 사십삼년만에 만났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싶었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그런 주제를 피하는듯 했다. 한명은 대기업에 이사로 한명은 중고차 딜러로 한명은 용역업체원으로 있다.
이차는 노래방엘 갔는데 모두들 노래를 잘해서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는 담배를 필 곳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는 실내에서 담배를 마구 피워댔다.
모임을 마치고 친구가 택시를 잡아줘서 고마왔다. 고마움은 잠시였고 이 기사양반이 광폭운전을 시작했다. 시내에서 아마 구십마일을 넘나들며 빨간 불도 통과하고 차선을 마치 장애물경주를 하듯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옛날 아버지는 이런 기사를 만나면 꼭 신경질을 내시며 천천히 가라고 하셨다.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싸움이 나고...
아버지의 성격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가리지않고 뛰어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나는 몹시 못마땅했고 오히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나는 소극적으로 문제에서 떨어져 살아왔다.
한국에 오니 아버지생각이 많이 난다. 너무 똑똑하고 불같은 성격으로 굵고 짧게 사셨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의 단단하면서도 시원한 목소리가 이제는 흐린 회색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 둘에 돌아가셨고 이제 사십년이 흘렀다. 그는 나에게 감히 오를 수 없는 태산이었다. 그 앞에서 나자신을 비교하고 깊은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삶을 내것과 비교를 하지 않는다. 나는 내자신의 산을 만들고 또 오른다. 그것은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위험한 길이다. 이제 정상이 보인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도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충실했던 편이다. 지금 잠시 뒤를 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중얼거려본다.
꿈길로만 다니다가 세상으로 나와보았다.
헌집줄게 새집주라 놀던 옛날의 골목길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교실속에서 수줍게 웃던 아이들을 만난다.
머나먼 길을 돌아왔다고 연민의 눈으로 나를 본다.
자리에 누어서 눈을 감으면 수십년전의 허무함이 기억난다.
과연 내가 이세상에 살아갈 수 있을까.
연탄가스로 죽어버린 이쁜 내 친구
실연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사촌형
그들의 영혼은 찾을 길이 없다.
길을 걷다가보면 발을 헛디딘다.
사십년만에 만난 친구를 보면 말이 헛나온다.
그래도 나 스스로를 감싸고 중얼거린다.
잘 견뎠어.
잘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