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과 영향
해담 조남승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어제가 중복이고 내일이 대서(大暑)이고 보니 더위가 정말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숲속의 나무들은 우린 지금이 한철이라면서 진초록의 옷깃을 한들거리며 그렇게 더우면 시원한 녹음을 찾아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난 아침을 먹자마자 밀짚모자를 쓰고 한손엔 스틱, 또 한손엔 부채를 들고 집 앞 공원의 산을 찾아 나섰다. 정상에 오르니 청량한 바람결이 품안에 안겨와 기분이 상쾌해졌다.
매일 그랬던 것처럼 제일 큰 소나무에 다가가 두 손으로 소나무를 잡고 발의 앞 뒷부분을 번갈아가며 몸을 들어 올려 종아리운동을 하였다.
운동을 하다 보니 머지않은 거리에 부녀자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연세가 제일 높아 보이는 할머니께서 새댁시절의 시집살이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형제가 많은 집안에 맏며느리로 들어가 산후 조리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눈만 뜨면 논과 밭을 헤매며 몸이 부서져라 농사일을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게다가 날만 새면 진종일 모질게 퍼부어대는 시어머니의 지청구와 악담 때문에 귀가 절고 가슴에 응어리가 쌓여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저런 인간을 퍼 내질러 놓고 미역국을 먹었나?’ 라며 친가의 부모를 흉보고 욕하면서 친정을 멸시하는 말까지 하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식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정말 가슴이 미어지고 열불이 치밀어 올라 숨이 안 쉬어지더라니까. 바보같이 말대꾸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낸 것이 분하고 한이 맺혀 가슴에 대못이 박혀있어! 이 나이 먹도록 그놈의 시집살이 하던 생각만 나면 밤새 잠이 안 온다니까...” 라면서 목소리를 높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녀자들의 주고받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운동은 하는 둥 마는 둥 얘기소리에 푹 빠져버렸다. 한참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주고받다가는, 배고픈 보릿고개 설움을 해결하고 경제발전을 시킨 박정희 대통령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하였다. 누군가 “아니 박정희대통령 동상 좀 저 광화문이나 남산어디다가 멋지게 세워놨으면 쓰겠어.” 라고 하자 모두가 좋은 생각이라고 찬동을 하였다.
그 순간 시집살이가 심했다던 할머니가 다시 언권을 잡고 나섰다. 그는“사실 박대통령이 정말 잘하긴 잘했는데 공산주의나라였다면 그렇게 잘할 수 있었겠어?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대한민국을 만들어 놓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잖았으면 그 당시 우리나라도 김일성의 공산국가가 돼가지고, 우리도 지금 북한처럼 인권이란 하나도 없는 가난한세상에서 살고 있을 걸” 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좌중들은 너도나도 “맞아, 맞아, 그러고 보니 두 분 동상을 나란히 세워야 되겠네.” 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들은 이제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당리당략만을 위해 막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난 속으로 ‘그 할머니 참 보통은 아니네.’라는 생각을 하다말고, 달갑잖은 정치얘기에 그만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젊은 시절 시어머니의 악담에 지금 것 가슴에 한이 맺혀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숲속 그늘에 은근히 숨어 앉은 바위를 향해 걸었다. 바윗돌은 언제나 침묵으로 존재감을 지키며 자리를 내어준다. 난 돌 위에 편안히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말의 힘과 영향’ 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말과 말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인간관계속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말로 표현하여 의사소통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람은 보통 하루에 수 만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한다. 물론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직업이나 설교를 하는 성직자들은 더 많은 말들을 하게 될 것이다.
말은 음성언어만이 아니라 문자언어와 눈빛이나 표정, 손짓과 몸짓 등 신체의 동작으로 의사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보디랭귀지(body language)등이 있다.
또한 말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나 인터넷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하는가 하면, SNS를 통하여 여러 사람이나 불특정 일반대중을 상대로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또 글을 통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해내고 있는 작가들의 말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이나 자신에 대하여 혼잣말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어느 종교이거나 기도를 올릴 때도 자신의 염원(念願)을 말로 표현하여 기도를 한다. 결국 기도도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의사전달을 위해 갖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지만, ‘침묵은 최상의 언어’ 란 말처럼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눈만 뜨면 말과 말의 대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생에 있어 인연이란 바로 말로 시작되어 말로 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말에 담겨있는 철학적 내용에 따라 그 힘과 영향의 폭이나 존속성의 가치가 좌우된다. 그 가치에 따라 말에 담겨있는 사상과 철학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면면히 이어지는가 하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흐지부지 사라지게 되기도 한다. 또 말을 주고받는 순간 귀에 담기지 않고 기억에 남지 않는 존재의가치자체가 없는 일상적인 말들도 있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억양이나 표정에 따라 다 각각 다르게 들리고 다른 감정으로 전해져온다. 만약 전화통화시 아주 밝은 목소리로 반갑게 받는 것과, 귀찮다는 듯이 며칠 굶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받는 것은 상대편의 가슴에 다가오는 감정이 천지차이일 수밖에 없다.
온 인류의 평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위대한 말.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려 몸이 많이 아프거나,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러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사람에게 ‘살 수 있고 재기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따뜻하고 힘찬 격려와 사랑이 담긴 위안의 말,
올바른 삶의 길을 일탈하여 어둠의 뒷골목을 헤매는 타락의 늪에 빠진 사람에게 맑은 영혼을 되찾아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성스럽고 자비로운 말. 더 잘할 수 있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힘찬 응원의 말. 잘못했을 때 진정으로 충고해주는 신의가 담긴 우정의 말.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게 이끄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지도자의 비전(vision)이 담긴 말.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과 같이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말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 좋은 말들은 다 어디에 두고, 가슴에 대못을 박아 평생 동안 지울 수 없게 만드는 한이 맺히는 말.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가시 돋친 말.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악의(惡意)서린 말. 다시는 만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게 되고 마는 증오심이 가득담긴 얼음장 같이 차가운 말.
삶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모멸감을 안겨주는 비정하고 저주스러운 말. 중상모략, 이간질, 음해, 허무맹랑한 괴담과 유언(流言) 등, 정말 유치하기 그지없고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흉하고 악한 갖은 요설과 온갖 독설들을 거침없이 쏟아냄으로써 귀가 시끄럽고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사람의 말이 하나의 소음으로 타락한 실정이고 보니 참으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흥하고 망하는 것은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란 말의 내용, 억양, 표정 등에 따라 그 말의 파동과 파장에 의해 좋은 에너지가 전해지는가 하면, 나쁜 악성바이러스와 같이 좋지 못한 영향이 미치게 되기도 한다.
자신과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국가와 국민, 더 나아가 세계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담아 정성(精誠)을 다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여기서 성(誠)자는 말씀언(言)자와 이룰 성(成)자로 조합되어 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말이 씨가 된다.’ 고 말들을 한다.
잘되고 흥하는 가정은 식구들의 사용하는 말들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며 사랑과 정이 듬뿍 담겨있다. 이와 반대로 정이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족들의 말투가 퉁명스럽고 핀잔이나 지청구를 하듯, 말들을 아름답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그 가정의 분위기와 미래는 어찌되어갈까?
또 사용하는 말들이 부정적이고 원망과 낙심이 가득담긴 절망적인 말들만을 입에 담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가정은 파멸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모든 일들이 꼬이고 헝클어짐으로써,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되어 결국 불행을 맞이하게 되고 말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나라이건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가의 일을 하는 공인(公人)들이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국리민복과 국가발전을 뒤로한 채, 각각의 진영을 이루어 자기진영의 잇속만을 앞세워 서로가 생트집을 잡아 괴이하고 삿된 말로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며, 귀에 거슬리는 막말과 볼썽사나운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정쟁(政爭)만을 일삼고 있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과연 어떻게 되어갈까?
한마디로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말이 말로서 그 기능과 가치를 실현하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신뢰성 없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니, 과연 인간으로서의 기본덕목인 염치(廉恥)란 게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언필칭 국가의 주권자라고 소리높이는 국민들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맹목적인 팬덤(Fandom)을 이루어, 초록동색(草綠同色)으로 연대를 하여 공사(公私)와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 모르고, 정치권의 진영논리에 편승하여 오직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권의 인사들에게는 아무리 큰 잘못이 있어도, 추호의 비판도 없이 온갖 궤변으로 변명하고 감싸면서 무조건 응원을 하고 나선다면, 그 나라의 정치가 정상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되어갈 수 있겠는가?
이에 반하여, 팬 심의 순수성을 잃은 채 자신이 지지하는 반대진영에게는 아무리 잘하는 점이 있어도, 칭찬이나 격려는 고사하고 오히려 꼬투리를 잡아 비판으로 일관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사소한 흠집이라도 들추어내 마구 흔들어 대면서 부정적인 팬덤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면, 그 나라의 정치판은 결국 헤어날 수 없는 진흙탕의 수렁에 빠져 들게 되고 말 것이다.
국가 사회적으로 공공의 이익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좀 더 이성적으로 품격을 지키면서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비판과,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진정 없다는 말인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바로 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망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면,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중상모략을 집어치우고 서로를 배려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면서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최선의 방안을 돌출해낼 줄 아는 성숙된 대화의 문화가 정착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가정도 흥하고 나라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고운 말씨는 유아기 때부터 습관이 되어야
가정의 화목은 물론 정치와 국민의 화합은 바로 언어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와 경제의 발전도 그 나라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선량한 언어문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선량한 언어문화의 정착이 절실한 실정이다. 좋은 언어의 습관은 어린 아기가 옹알이를 할 때부터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말만을 듣고 자라야한다. 그래야만 예쁘고 착한 말을 배우게 되고 좋은 언어습관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어린이가 있는 집안의 어른들은 말을 하는데 있어서 각별히 조심을 하여야 한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인다 할지라도, 감정을 표출하면서 윽박지르거나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하는 것은 자식을 파멸의 길로 밀어 넣는 행위로서 절대로 삼가야한다.
프랑스의 작가 J. 주베르(Joseph Joubert)는 “아이들에겐 꾸지람보다는 좋은 본보기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Children need models than critics.)” 라는 말을 하였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먼저, 선한 말을 하는 습관으로 모범적인 본을 보이는 생활을 하는 것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말을 배우는 유아기 때부터 고운 말씨와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첫걸음이요, 가장 효과 있는 교육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녀가 잘했을 땐 지체 없이 칭찬을 하여 앞으로도 계속 잘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어야 한다. 반면에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아낌없는 격려와 지도를 통하여 의욕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황금 천 냥이 귀한 것이 아니고(黃金千兩 未爲貴/황금천냥 미위귀), 덕 있는 사람의 좋은 말 한마디를 듣는 것이 천금보다 나은 것이다(得人一語 勝千金/득인일어 승천금).” 라는 구절이 있다.
덕본재말(德本財末)의 귀한정신을 소홀히 한 채, 자식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만이 부모의 역할이란 착각에 빠진 나머지, 오직 물질에만 삶의 가치를 두고 호주머니 채우기와 재산불리기에 올인(all-in)하며 살아가는 딱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질보다는 올바른 언어습관을 길들여 주고, 평생 동안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귀한 말 한마디를 가슴에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도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운 말씨의 길들이기는 수행(修行)의 근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만 뜨면 사용하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성인현자(聖人賢者)들은 일찍이 말에 대하여 천금보다도 귀한 말들을 많이 남겼다.
인생의 바이블인 성경(잠언18장20절)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라는 구절이 있다.
또 같은 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라는 귀한 말씀이 실려 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과보(果報)는 자기가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이며, 선하고 따뜻한 사랑과 희망이 담긴 말을 해야 된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 말의 힘과 영향에 의해 사람의 생사가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자신이 한 말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따라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는 글이다.
지혜로운 삶의 보고인 주역의 64괘중 27번째 산뢰이괘(山雷頤卦)에서도 “만물을 기르고 성인을 기르며 수양을 하는 데는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愼言節食/신언절식).” 라고 하였다.
말은 내면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마음을 길들이고 생각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그러니 언어를 삼가 하는 것은 실로 마음을 닦는 근본인 것이다.
악언을 일삼다 보면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정신적인 치명상을 입히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거칠어지고 비열하게 만든다. 나아가 악담을 할 땐 자연히 인상을 쓰게 됨으로써, 관상까지 좋지 못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어 운명까지 나쁜 방향으로 바뀌어가게 되고 만다.
이에 반하여,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이 담긴 말로 위로하고 격려를 하다보면, 나 자신도 보람과 함께 내면에 큰 힘이 생기고 희열에 넘쳐 행복감을 갖게 된다.
아무리 난폭한 마음에 지배를 당하여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화하고 고운 말을 하려고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 또한 평온해지고 선량해지게 된다.
실로 우리가 고운 말을 일상화 하다보면 마음 또한 착하게 되기 마련이다. 고운 말씨가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을 변함없이 이어갈 수 있게 이끌어준다.
그래서 고운 말씨를 길들이고 습관화 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 하나의 수행(修行)인 것이요, 행복을 가꾸어가는 비결인 것이다.
고운 말과 바른 말을 하려면 말하기 전에 침묵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내면에서 침묵의 여과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은 거칠고 가벼워서 하나의 소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침묵에 대한 속담 중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en).” 란 말이 있다. 우리 모두 침묵의 미덕을 근본으로 하여 겸손하고 예의바른 아름다운 말투(A beautiful tone of speech)를 습관화하자.
풍도(馮道)의 설시(舌詩)를 가슴에 담고 살자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무엇보다도 믿을 신(信)자와 같이 말에 믿음이 실려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으려면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말은 정말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는 자신의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고 하였다. 또 논어 이인편에 보면, 공자가 말하기를 “말을 함부로 내지 아니한 것은 궁행(躬行/자신이 한 말을 몸으로 실천하여 행함)하는 데에 미치지 못할까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언지불출 치궁지불체야).” 라고 하였다.
맹자 역시 “사람이 말을 쉽게 하는 것은 그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人之易其言也 無責耳矣/인지이기언야 무책이의)” 라고 하였다. 말은 책임이 뒤따라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니만큼,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책임이란 바로 확실한 근거에 의해 말을 하고, 말을 한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공맹(孔孟)은 근거 없는 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며, 말만 앞세우고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였던 것이다.
옛 중국 후주(後周)의 평장사로 송나라를 섬겨 노국공에 봉해진 범노공 질(質)이란 사람이 인사 청탁을 하는 조카에게 단호히 거절하면서 열두 가지의 훈계를 하였다.
그 내용 중 여섯째로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 많음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다. 진실로 추기(樞機/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말을 뜻함)를 삼가지 않으면 재액(災厄)이 이로부터 시작된다. 옳으니 그르니 하며 헐뜯고 기리는 것은 몸에 허물이 되기에 알맞다.”라고 훈계하였다.
이 내용은 소학(小學)에 실려 있는 글로서, 입은 곧 재앙의 문인 것이니 괜히 남의 잘잘못을 논하며 조심성 없이 말을 가볍게 함부로 많이 하다보면, 혀끝으로 재액을 불러일으켜 결국 무서운 결과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므로 헛된 말을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당나라 말에서부터 5대 10국의 대혼란 시대에 30년이 넘도록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무려 2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재상을 지낸 처세의 달인인 풍도(馮道)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파란만장한 정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위관직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입은 재앙의 문이고(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가는 곳 마다 몸이 편안하게 되리라(安身處處宇/안신처처우).” 라는 그가 지은 설시(舌詩)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 일생동안 언제어디에서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려면 풍도(馮道)의 설시(舌詩)를 가슴에 담고 중구신언(重口愼言)을 습관화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악은 숨겨주고 선은 드러내라
유대인에게 탈무드가 있다면 중국인에겐 증광현문(增廣賢文)이 란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일언기출 사마난추(一言旣出 駟馬難追)’ 란 말이 있다. 이는 한 마디의 말이 입 밖으로 나가 떠나고 나면, 네 필이 끄는 마차로 뒤쫓아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편에서도 공자의 수제자(首弟子)인 자공(子貢)역시 위와 똑 같은 뜻으로 사불급설(駟不及舌)이란 말을 하였다.
예로부터 무족지언 천리행(無足之言 千里行)이라 하였다. 더구나 인터넷과 SNS가 발달된 요즘 같은 세상엔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지구촌 전체에 퍼져나가게 되고 만다. 또 세상엔 비밀이 없다. 단둘이 하는 말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다.
일찍이 노자는 “함부로 말을 가볍게 많이 하면 자주 궁지에 몰리게 되니, 속을 비워 마음속에 담아두고 중용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다언삭궁 불여수중).” 라고 하였다. 곧 무거움과 고요함은 가볍고 소란스러움의 근본이니, 말 또한 경솔하게 함부로 떠들어대지 말고 고요히 무언자중(無言自重)의 정신으로 중용지도를 지키며, 삼사일언(三思一言)을 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채근담에 “남의 작은 허물을 책하지 말고(不責人小過/불책인소과),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不發人陰私/불발인음사), 남의 지난날 잘못을 생각하지 말라(不念人舊惡/불염인구악). 이 세 가지사항은 덕을 기를 수 있으며(三者 可以養德/삼자 가이양덕), 또한 해를 멀리할 수 있다(亦可以遠害/역가이원해).” 라는 글이 있다.
맹자도 “남의 좋지 않은 일을 말하면 거기에 따라올 후환을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남의 잘못이나 나쁜 점을 보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기분상하지 않게 조심성을 가지고 성의를 다하여 조용히 충언으로 일깨워주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남의 약점을 세상에 떠들어대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비난하고, 남의 잘못과 사생활을 들추어 폭로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면, 상대로부터 원한을 사고 질시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 중용에 있는 “악은 숨겨주고 선은 드러내라(隱惡而揚善/은악이양선).” 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한다.
십불선업(十不善業)
법구경(法句經) 도장품(刀杖品)에 “남이 듣기 싫은 거친 말을 하지 말고(不當麤言/부당추언), 말할 때는 마땅히 응보를 두려워해야 한다(言當畏報/언당외보), 악이 가면 재앙이 오는 것이니(惡往禍來/악왕화래)...” 라는 구절이 있다.
또 불교경전의 모음집인 숫타니 파타(sutta-nipāta)에 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라고 하였다.
말이 거칠게 나가면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게 됨으로서 말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이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말을 하면 반듯이 그에 대한 보복이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항상 불선언사(不善言辭)를 삼가도록 해야 한다.
불교에 십불선업(十不善業)이라 하여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열 가지의 악업이 있다. 곧 살생(殺生/의도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투도(偸盜/도둑질, 사기, 횡령), 사음(邪淫/배우자 외의 사람과 부정한 성행위), 망어(妄語/속일목적의 거짓말), 기어(綺語/삿된 말, 도리에 어긋나고 진실이 아닌 교묘하게 꾸민 날조된 허식의 말, 희롱하는 말), 양설(兩舌/이간질, 고자질), 악구(惡口/욕설, 악담, 비방, 모욕, 괴롭힘, 악성댓글), 탐욕(貪慾/욕심, 남의 물건 재산을 취득하고자함), 진에(瞋恚/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화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짓), 사견(邪見/삿되게 보고 그릇된 견해를 일으킴)을 말한다.
이 열 가지사항의 앞에 아니할 불(不)자만 넣으면 바로 십선업(十善業)이 된다. 그런데 이 열 가지의 십불선업(十不善業) 중에서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 가지나 된다.
이를 보면, 사람이 일생동안 제일 많이 짓는 죄업이 바로 입으로 짓게 되는 구업(口業)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가 구업(口業)과 언어폭력에 대한 경계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기에 불교의 기본경전이라 할 수 있는 반야심경 못지않게 모든 불교행사에서 자주 독송하는 천수경의 첫머리에서도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이란 주문을 먼저 고한다.
이는 ‘평소 구업(口業)을 많이 지은 깨끗하지 못한 입으로 어찌 진언을 독송 하겠나이까? 그러니 구업을 참회하여 그 입을 청정하게 한 다음 진언(眞言)을 하겠습니다.’ 라는 뜻이 담겨있다.
또 천수경 중에 입으로 지은 죄를 참회하는 내용이 있다. 나도 지금 것 살아오면서 수없이 지어온 구업(口業)을 뉘우치면서, 앞으로 구업을 더 쌓아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뜻을 담아,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의 크고 중한 네 가지의 죄업(罪業)을 지금 이 시간 모두 일심(一心)으로 참회하고자한다.
망어중죄(妄語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기어중죄(綺語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양설중죄(兩舌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
악구중죄(惡口重罪) 금일참회(今日懺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