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 시기 미군은 인민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오산전투, 천안전투 등을 벌였으나, 신통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7월 8일 밤 「미 제24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예하 부대에 하달하고 이른바 금강방어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금강방어전을 위해 미군 제34연대는 7월 9일 오전 10시 무렵 봉황초등학교 운동장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민과 청년방위대원을 동원하여 공산성과 금강 남측 야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요. 국군 제17연대 소속의 일부 병력과 공주경찰, 형무소 특경대원들이 왕촌 살구쟁이에서 공주형무소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학살한 것은 바로 7월 9일이었습니다.
12일 새벽부터 인민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미군은 12일 밤 11시경 금강다리를 폭파하고, 모든 병력을 금강 남안지역으로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주읍내는 7월 14일 아침 검상동(현재의 농공단지) 지역으로 침투한 인민군 제4보병사단 병력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인민군은 오곡동 인근에서 갈곳을 몰라 우왕좌왕하던 100여명에 가까운 미군들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답니다. 인민군들은 공주읍내로 진입할 때 미군 포로들을 굴비엮듯이 엮어 끌고 들어왔답니다. 이 광경을 본 공주사람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북쪽으로 퇴각한 것은 1950년 추석(9월 26일?) 무렵이었습니다.
아뭏튼지 공주가 다시 수복되면서 ‘평온’을 되찾기는 했으나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습니다. 전쟁 직후 시기 공주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팍팍했습니다. 공주 산성시장에는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 생존을 위해 거리로 나선 노점상과 행상, 거지와 상이군인들로 넘쳐났습니다. 산성시장에 군수물자나 양키물건들이 공공연히 거래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회고에 따르면 전쟁 이후 제민천 다리 밑은 물론이고 공산성 얼음창고(잠종 보관창고)에도 거지들이 득실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산성 성안마을 사람들은 전쟁 이후 오히려 호경기를 맞이했답니다.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지자 과거, 즉 군영(軍營) 시절부터 뱃일에 익숙했던 성안마을 사람들은 차량을 실어나르는 도선(渡船)과 여러 척의 나룻배를 급조하여 시내사람과 차량을 실어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행인들을 실어나르는 나룻배 숫자는 대략 2-30척 정도였는데, 배 주인은 각기 달랐답니다. 성안마을 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뱃일을 한 성안마을 사람은 대략 4-50여 명 정도였고, 어떤 이들은 이때 번돈으로 집과 땅을 장만하는 등 돈벌이가 제법 쏠쏠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휴전 직후 영명학교 학생들이 끊어진 다리를 밑에서 나룻배를 타고 찍은 사진입니다. 멀리 트럭을 싣고 강을 건너는 도선의 모습이 보이지요. 곰골사랑님이 올리신 사진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끝에 올린 사진은 금강교를 재건한뒤 개통식과 초도식을 올릴때 찍은 사진인데, 당시 운집한 인파, 대단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