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이광수 1-1 1932
제 1 장
야학을 마치고 돌아온 허숭(許崇)은 두 팔을 깍지를 껴서 베개 삼아 베고 행리에 기대어서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노라면, 모기들이 앵앵 하고 모깃불 연기를 피하여 돌아가는 소리가 멀었다 가까웠다 하는 것이 들린다. 인제는 음력으로 칠월에도 백중을 지나서, 밤만 들면 바람결이 선들선들하는 맛이 난다.
이태 동안이나 서울 장안에만 있어서 모깃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허숭은 고향에서 모깃소리를 다시 듣는 것도 대단히 반가웠다.
[어쩌면 유순이가 그렇게 크고 어여뻐졌을까.]
하고 숭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럴 때에 숭의 앞에는 유순(兪順)의 모양이 나타났다. 그는 통통하다고 할 만하게 몸이 실한 여자였다. 낯은 자외선이 강한 산지방의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한 빛이 도나 눈과 코와 입이 다 분명하고, 그리고도 부드러운 맛을 잃지 아니한 처녀다. 달빛에 볼 때에는 그 얼굴이 달빛 그것인 것같이 아름다웠다. 흠을 잡자면 그의 손이 거친 것이겠다. 김을 매고 물일을 하니, 도회 여자의 손과 같이 옥가루로 빚은 듯 한 맛은 있을 수 없다. 뻣뻣한 베치마에 베적삼, 그 여자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그는 맨발이었다. 발등이 까맣게 볕에 그을렸다. 그의 손도, 팔목도, 목도, 짧은 고쟁이와 더 짧은 치마 밑으로 보이는 종아리도 다 볕에 그을렸다. 마치 여름의 햇빛이 그의 아름답고 건강한 살을 탐내어 빈틈만 있으면 가서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허숭은 유순을 정선(貞善)과 비겨 보았다. 정선은 숭이가 가정교사로 있는 윤참판 집 딸이다. 정선은 몸이 가냘프고 살이 투명할 듯이 희고 더구나 손은 쥐면 으스러져 버릴 것같이 작고 말랑말랑한 여자다. 그는 숙명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미인이었다.
물론 정선은 숭에게는 달 가운데 사는 항아(姮娥)다. 시골, 부모도 재산도 없는 가난뱅이 청년인 숭, 윤참판 집 줄행랑에 한 방을 얻어서 보통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숭으로서는 정선 같은 양반집, 미인 외딸은 우러러보기에도 벅찬 처지였다.
그러나 유순이 같은 여자면 숭의 손에 들 수도 있다. 지금 처지로는 유순의 부모도 숭이에게 딸을 주기를 주저할 것이지마는, 그래도 학교나 졸업하고 나면 혹시 숭을 사윗감으로 자격을 붙일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숭은 자기 신세를 생각하여 한숨을 쉬었다.
숭은 이 동네에서는 잘산다는 말을 듣던 집이었다. 숭의 아버지 겸(謙)은 옛날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출신으로 신민회 사건이니, 북간도 사건이니, 서간도 사건이니, 만세 사건이니 하는 형사 사건에는 빼놓지 않고 걸려들어서 헌병대 시절부터, 경무총감부 시절부터 붙들려 다니기를 시작하여 징역을 진 것만이 전후 팔 년, 경찰서와 검사국에 들어 있던 날짜를 모두 합하면 십여 년이나 죄수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에 옥바라지를 하고 나니, 가산이 말이 못되어 숭의 학비는커녕 집을 보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겸은 남은 논마지기, 밭날갈이를 온통 금융조합에 갖다 바치고, 평생에 해보지도 못한 장사를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저당한 토지만 잃어버리고, 홧김에 술만 먹다가 어디서 장질부사를 묻혀서 자기도 죽고 아내도 죽고 숭의 누이동생 하나도 죽고, 숭이 한 몸뚱이만 댕그렇게 남은 것이다.
현재의 숭에게는 집 한 간 없다. 지금 숭이 잠시 와서 머무는 집은 숭의 당숙 성(誠)의 집이다.
유순의 집은 이 집에서 등성이 하나 넘어가서 있다. 순의 부모는 순전한 농부다. 순의 아버지 진희(鎭熙)는 아직도 젊었거니와 그 늙은 조부 유초시는 글을 공부하여 초시까지 한 사람이다. 원래 이 동네는 수백 년래로 허 씨가 살고, 등성이 너머 동네에는 유 씨가 살았는데, 허 씨나 유 씨나 다 이 시골에서는 과거장이나 하고 기와집간이나 쓰고 살아왔다. 그러나 유초시의 말을 빌리면,
[갑오경장 이후에야 글이나 양반이 다 쓸데 있나.]
하여 이 두 동네도 점점 쇠퇴하여서,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관을 벗어 버리고 수건을 동이고, 책과 붓대를 집어던지고 호미를 들고 들로 나갔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여전히 옛 영화를 생각하여 관을 쓰고 꿇어앉은 이도 한둘은 있고, 또 숭의 아버지 모양으로 ‘개화에 나서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다니다가 옥살이를 하는 이도 이삼 인은 있었다. 이를테면 유순의 집은 약아서 제 실속을 하는 패의 대표요, 허숭의 집은 세상일을 합네, 학교를 다닙네 하고 날뛰는 패의 대표였다.
예정한 일주일의 야학이 끝나고 내일은 허숭이가 서울로 올라간다는 마지막 날 야학에, 허숭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남은 교재를 가르치고, 또 강연 비슷하게 여러 가지 권유를 하였다.
야학은 부인반과 남자반 둘로 갈렸었다. 부인 반에는 숭의 아주머니 할머니뻘 되는 사람도 있고, 숭의 누이뻘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숭이가 설명하는 위생 이야기,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 해가 도는 게 아니라 땅이 돌아간다는 이야기, 비행기 전기등 이야기, 무엇이 비가 되고 무엇이 눈이 되는 이야기 같은 것을 다 신기하게 들었다.
[그 원 그럴까.]
하고 혹 의심 내는 이도 있었으나 반대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남자반은 이와 달라서 질문하는 이도 있고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대관절, 어째서 차차 세상이 살아가기가 어려워만 지나.]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요새는 대학교 조립(졸업)을 하고도 직업을 못 얻는대.]
하는 세상 소식 잘 아는 이도 있었다.
[너도 그만큼 공부했으면 인제는 장가도 들고 살림을 시작해야지, 공부만 하면 무엇 하니?]
하고 할아버지뻘, 아저씨뻘 되는 이가 말을 듣다 말고 교사인 숭에게 뚱딴지 훈계를 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허씨 들인 중에 간혹 등 너머 유 씨 네들도 와서 섞였다. 여자 반에도 그러하여서 유순이도 이렇게 와 섞인 이 중의 하나였다.
유순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마는 야학에 출석하였다. 그는 가장 정성 있게 듣는 이 중의 하나였다.
내일이면 떠나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허숭은 자연 서운한 맘이 생겼다. 숭은 이야기하는 중에도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순을 바라보았다. 순의 눈도 숭의 눈과 가끔 마주쳤다. 숭은 이야기를 끝내기가 싫었다.
남녀반의 야학이 끝난 뒤에, 늙은 느티나무 밑에 남자들만 수십 명이 모여서 숭의 송별연을 열었다. 참외도 사오고 술도 사오고 옥수수도 삶아 오고, 모두 둘러앉아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너 이번 가면 또 언제 올래?]
[글쎄요, 내년에나 오지요.]
[조립이 언제야?]
[내후년입니다.]
[법과라지?]
[네.]
[그거 조립하문 경찰서장이나 되나?]
[……]
[군 서기도 되겠지. 군수는 얼른 안 될걸.]
[변호사를 하면 돈을 잘 버나 보더라마는― 그건 또 시험이 있다지?]
[네.]
[걔야 재주가 있으니까 변호사도 되겠지.]
[변호사는 사뭇 돈을 벌데.]
[돈벌이는 의사가 제일이야.]
[큰돈이야 그저 금광을 하나 얻어야.]
[조선에야 돈이 있어야 벌지. 물 마른 것 모양으로 바짝 마른걸.]
[우리네같이 땅이나 파먹는 놈이야 십 원짜리 지전 한 장 손에 쥐어 볼 수 있다구.]
[자, 채미 한 개 더 먹지.]
[아압, 밤이 꽤 깊었는걸.]
이러한 회화였다. 숭은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혹은 낯도 후끈하고, 혹은 한숨도 쉬었다. 그러나 숭은 이 무지한 듯한 사람들이 한없이 정답고 귀중하였다. 그들의 말 속에는 한없는 호의가 있는 듯하였다. 저 인사성 있고, 눈치 밝고 쏙쏙 뺀 도회 사람들보다 도리어 사람다움이 많은 것이 반가웠다.
이 밤에 숭은 협동조합 이야기를 하여 다수의 찬성을 얻었으나, 조직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새벽차를 타려고 가방과 담요를 들고 당숙의 집을 떠나, 길가 풀숲에 우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정거장을 향하고 나갈 때에, 무너미로 갈리는 길에서 숭은 깜짝 놀랐다.
[내야요.]
하고 나서는 유순을 본 까닭이었다. 숭은 하도 의외여서 깜짝 놀랐다가 부지불식간에 유순의 손을 잡았다.
[언제 와요?]
[내년 여름에 오께.]
하고 숭은, 자기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기대어 선 유순의 머리를 쓸었다. 떠날 때에 순은 숭에게 삶은 옥수수 네 자루를 싼 수건을 주었다.
숭이가 탄 기차가 새벽 남빛 어둠 속으로 씩씩거리고 지나 무너미 모루를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순은 손을 내어두르며 눈물을 지었다.
숭은 무너미 모루를 돌아갈 때에 행여나 순이가 보일까 하고 승강대에 나와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벽빛은 반 마일이나 떨어져 산그늘에 서 있는 처녀의 몸을 숭의 눈에서 감추었다. 숭은 순이가 섰으리라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하여 손을 두르며,
[순이, 내 내년 여름에 오께.]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차는 살여울의 철교를 건넌다. ‘살여울!’ 어떻게 정다운 이름이냐, 하고 숭은 철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여름밤을 머금은 검은 물. 눈이 그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초가을의 특색인 골안개가 뽀얗게 엉긴 것이 보인다. 촉촉하게 젖은 땅 위에,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내이고 흘러가는 물 위에 꿈같이 덮인 뽀얀 안개,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 가운데 가장 인정다운 아름다움의 하나다.
살여울의 좌우 옆은 살여울 물을 대어서 된 논이다. 한 마지기에 넉 섬씩이나 나는 논이다. 본래는 그것은 풀이 무성한 벌판이었을 것이다. 혹은 하늘이 아니 보이는 수풀이었을 것이다. 사슴과 여우가 뛰노는 처녀림 속으로 살여울의 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지금도 흰 하늘이 고개라는 고개가 있지 아니하냐. 그 고개를 나서서야 비로소 흰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라고, 숭은 어려서 그 아버지에게 설명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을 숭의 조상들이― 아마 순의 조상들과 함께 개척한 것이다. 그 나무들을 다 찍어 내고 나무뿌리를 파내고, 살여울 물을 대느라고 보를 만들고, 그리고 그야말로 피와 땀을 섞어서 갈아 놓은 것이다. 그 논에서 나는 쌀을 먹고 숭의 조상과 순의 조상이 대대로 살고 즐기던 것이다. 순과 숭의 뼈나 살이나 피나 다 이 흙에서, 조상의 피땀을 섞은 이 흙에서 움돋고 자라고 피어난 꽃이 아니냐.
그러나 이 논들은 이제는 대부분이 숭이나 순의 집 것이 아니다. 무슨 회사, 무슨 은행, 무슨 조합, 무슨 농장으로 다 들어가고 말았다. 이제는 숭의 고향인 살여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뿌리를 끊긴 풀과 같이 되었다. 골안개 속에서 한가하게 평화롭게 울려오던 닭 개짐승, 마소의 소리도 금년에 훨씬 줄었다. 수효만 준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서는 한가함과 평화로움이 떠나갔다. 괴롭고 고달프고 원망스러웠다.
차가 가는 대로 숭은 가고 오는 산과 들과 촌락을 바라보았다. 알을 밴 벼와, 누렇게 고개를 숙인 조와 피와,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는 용사와 같은 수수를 보았다. 새벽 물을 길어 이고 가는 여자들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물 묻은 물동이를 비치어 금빛을 발하였다. 물동이를 인 여자는 한 손으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쳐내어 버리고, 한 손으로는 짧은 적삼 밑으로 나오려는 젖을 가리었다. 기차가 우렁차게 달리는 소리를 듣고, 빨강댕이 아이들이 만세를 부르고 내달았다. 긴 장마를 겪은 초가집들은 마치 긴 여름일을 치른 농부들 모양으로 기운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속이 썩은 모양으로 지붕의 영도 꺼멓게 썩었다. 그 집들 속에는 가난에 부대끼고, 벼룩 빈대에 부대끼고, 빚에 졸리고, 병에 졸리고,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뭉개는 것이다.
정거장에를 왔다. 역장과 차장과 역부와, 순사의 모자의 붉은 테와, 면장인 듯 한 파나마 쓴 신사와, 서울로 가는 듯싶은 바스켓 든 여학생과, 그의 부모인 듯싶은 주름 잡힌 내외와…….
호각 소리가 나고 고동 소리가 나고…… .
큰 도회와 작은 정거장을 지나 숭은 배고픔을 깨달았다. 순이가 싸다 준 옥수수를 꺼내었다. 두 이삭을 뜯어 먹고는 좀 창피한 듯 하여 도로 싸놓았다.
경성 역에 내린 때에는 숭은 꿈에서 깬 것 같았다. 바쁜 택시의 떼, 미친년 같은 버스, 장난감 같은 인력거, 얼음 가루를 팔팔 날리는 싸늘한 사람들.
숭은 전차를 타고 삼청동 윤참판의 집으로 들어왔다. 방에 짐을 놓고 큰사랑에 가니, 윤참판은 없고 웬 갓 쓴 사람만 이삼 인이 앉았다. 작은사랑에 가니 윤참판의 맏아들 인선(仁善)도 없다. 돌아 나오다가 찌개 뚝배기를 든 어멈을 하나 만났다.
[학생 서방님 오셨어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맏서방님이 대단히 편찮으시답니다. 영감마님도 안에 계세요.]
한다. 원체 일개 가정교사, 시골학생 하나가 다녀왔기로 윤참판 집에 대하여서는 이웃집 고양이 하나 들어온 이상의 중요성이 있지 아니할 것이다. 더구나 맏아들 인선이 중병으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이 판에, 온 집안이 난가가 된 이 판에 허숭이 따위가 왔대야 아랑곳할 사람은 밥 갖다 주는 어멈 하나밖에 없다.
허숭은 어멈을 통하여 인선의 병 증상을 들었다.
원래 인선은 체질이 허약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인선이가 난 지 몇 달이 아니 되어서 폐병으로 죽었다. 본래 폐병이 있는 이가 아이를 낳고는 죽은 것이었다. 인선은 그 어머니의 체질을 받아 살빛이 희고, 피부가 엷고, 여자같이 부드럽고, 가슴이 좁고, 몸이 가늘고 길었다. 미남자는 미남자지마는 퍽 약하였다. 그러나 재주는 있어서 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았다.
인선과는 반대로, 그 아내는 몸이 건강하고 또 육감적인 여자였다. 숭도 그를 가끔 보았거니와 눈웃음을 치고 교태가 있는 여자였다. 인선의 친구들은 인선이가 아내 때문에 몸이 늘 허약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던 것이 인선이가 금년에 석왕사에 피서를 갔다가 설사병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부터는 신열이 나고 소화불량이 되고 잠을 못 잤다. 윤참판은 이것을 성화하여 의사도 불러 대고 한방의도 불러 대었으나 병은 낫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약 일주일 전에 어느 유명하다는 (지리산에서 이십 년 공부했다는) 한방의를 불러다가 보인 결과, 녹용과 무슨 뽕나무 뿌리 같은 약과를 달여 먹였다. 이것을 먹고 병자는 전신이 뻘겋게 달고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고 웃고 날뛰었다. 그러기를 일주야나 한 뒤에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여서 잠이 들었으나, 그로부터 영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 한다고 한다.
지금도 사랑에는 갓 쓰고 때 묻은 두루마기 입은 무슨 진사, 무슨 사과 하는 한방의가 이삼 인이나 모여 앉아서, 서로 금목수화토 오행을 토론하고 갑을병정의 육갑을 주장하여 병인 머리 둘 방향을 날을 따라 고치고, 약 달이는 물을, 혹은 동쪽에서 혹은 서쪽에서 방위를 가리어 길어 오게 하고, 혹은 약물을 붓는 시간을 묘시니 진시니 하여 큰 문제나 되는 듯이 논쟁을 하였다.
약을 달일 때에도 제가 처방한 것은 제가 지키고 앉아서 달이고, 그 곁에는 심부름하는 계집애 종이 시중들고 섰었다. 갓 쓴 의원은 그 계집애더러 담배를 붙여 들이라고 연해 명령하였다.
인선은 윤참판의 맏아들일 뿐더러 어려서 어미 잃은 아들이요, 또 허약한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맘에 늘 두었다. 더구나 윤참판이 나이 환갑을 지나면서부터는 재산에 관한 사무, 가사에 관한 사무를 거의 다 인선에게 맡기고, 자기는 다만 최고 권위자로 비토권만 가지고 있었다. 인선도 다른 부잣집 아들 모양으로 허랑방탕하지 아니하고 적어도 돈 아낄 줄을 알았다. 윤참판에게는 그 아들의 돈 아낄 줄 아는 것이 가장 기쁘고 믿음성 있는 일이었다.
이러하던 인선이가 앓는 것을 보는 윤참판은 화를 내어 조석도 잘 아니 먹고 담배와 술만 마시었다.
허숭이가 돌아온 이튿날 아침에 큰사랑에 가서 윤참판을 만나 절을 하였다. 윤참판은,
[오, 댕겨왔냐.]
한마디를 하고는, 돌아앉은 갓 쓴 의원들에게,
[어디 그 약이 효험이 있나.]
하고 화를 내었다.
또 의원들 간에는 상초가 어떻고 하초가 어떻고, 명문이 어떻고 수기니 화기니 하는, 말하는 자기들도 잘 알지 못하는 토론이 시작되었다.
마루의 약탕관에서는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가 나고, 덮은 종이를 통하여 야릇한 향기를 가진 김이 올랐다. 날은 맑고 더웠다.
인삼도 녹용도 쓸데없이, 허숭이가 온 지 닷새 만의 새벽에, 인선은 마침내 죽어 버렸다. 인선이가 위태하단 말을 듣고 초저녁부터 친척들이 모여들어서 안팎이 웅성웅성하였다. 그 중에는 참판의 삼종형이요 사회에 명망이 높은 한은(漢隱) 선생이라고 세상이 일컫는 이도 오고, 또 죽은 이의 재종 삼종 되는, 혹은 일본 유학도 하고, 혹은 구미 유학도 한 젊은이들도 오고, 또 숭이 알지 못하는 사내들과 부인들도 왔다. 또 허숭과는 고등보통학교 선배 동창이요, 지금 경성제대 법과에 다니는 김갑진(金甲鎭)이라는 학생도 왔다. 갑진은 칠조약 때에 관계있어 남작을 받은 김남규(金南圭)의 아들로서 보통학교 시대부터 교만한 수재로 이름이 높았다. 다만 그 아버지 남규가 주색과 투기사업에 돈을 다 깝살리고, 마침내는 파산을 당하고 또 사기로 몰려 불기소는 되었으나, 남작 예우는 정지되고 죽었기 때문에 갑진은 가난하고 또 습작(襲爵)도 못 하였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와 윤참판과 막역한 친구이던 인연으로 윤참판이 학비를 대어서 지금까지 공부를 시키고, 그러한 까닭으로 마치 친척이나 다름없이 세배 때나 기타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윤참판 집안에도 출입하였다.
인선이가 죽은 뒤로, 사람들의 시선― 부러워하는 듯 한 시선은 윤참판의 딸 정선에게로 쏠렸다.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선의 모양은 더욱 아름다움을 더한 듯하였다.
정선은 윤참판의 둘째 아내의 몸에 난 딸이다. 정선의 어머니는 윤참판이 전라감사로 갔을 때에 도내에 제일 부호라는 말을 듣던 남원 김 승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얻은 아내로, 인물이 아름답기로 재산을 많이 가져오기로 유명한 부인이다. 그때 서울에서는 윤참판이 돈을 탐내어서 시골 상놈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라고 비웃었거니와, 그 비웃음은 사실에 가까웠다.
이 김씨 부인은 만석을 가져왔다고도 하고, 오천 석을 가져왔다고도 하거니와, 어쨌으나 윤참판이 전라감사 이태에 약 만 석의 재산이 불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 중에는 뇌물 받은 것, 확정한 것도 있겠지마는, 적어도 그 중에 삼분지 이는 김씨 부인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김씨 부인에게 장가를 듦으로, 또는 전라감사를 다녀옴으로부터 윤참판은 일약 장안에서 부명을 듣게 되었고, 세상이 바뀌고 호남 철도가 개통됨으로부터는 곡가와 지가가 몇 갑절을 올라서 윤참판의 재산은 무섭게 늘었다.
김씨 부인은, 그러나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놓고 아직 사십이 다 못 되어서 죽었다. 아들은 얼마 아니 하여 죽고,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것이 정선이다. 정선은 그 모습이 천연 그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살이 희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죽은 오라버니와 같이 허약한 빛이 없고, 부드러운 중에도 단단한 맛이 있었다. 코가 너무 오똑하고, 눈에 젖은 빛을 띠어 여염집 처녀로는 너무 애교가 있는 것이 흠이면 흠이랄까.
정선은 숙명에서도 두어 번 수석을 한 일이 있고, 이화전문학교 음악과에 들어간 뒤에도 미인, 수재의 평이 높다. 천만장자요, 양반의 따님이었다, 미인이었다, 수재였다, 그 어머니가 친정에서 가지고 온 재산의 적어도 한 부분은 상속할 수 있다는 정론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들 가진 사람, 재주 있는 청년의 시선이 그리로 모일 것은 물론인데다가, 이제 윤참판의 맏아들 인선이 죽으니, 윤참판의 평소의 성미로 보아서 이 딸의 남편이 될 사위가 윤참판의 작은아들 예선이 자랄 때까지 윤참판 집에 채를 잡을 것이 분명한 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정선의 몸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가 이러한 정선의 남편이 되는 행운의 제비를 뽑을 것인가―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중대 문제였다.
아들이 운명하는 것을 본 윤 참판은 사랑으로 뛰어나와서, 갓 쓴 의원이며 음양객들을 모두 몰아내었다.
[이놈들, 아무것도 모르고 내 아들 죽인 놈들!]
하고 호령하는 서슬에 갓 쓴 무리들은 혼이 나서 쫓겨 나갔다. 나가다가 한 사람이 돌아와서,
[집으로 갈 노자나 주시지요.]
하고 애걸하였으나, 윤참판은,
[저놈들이 또 기어들어와! 네, 저놈들 몰아내어라.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서 저놈들 깡그리 묶어 가게 하여라.]
하는 바람에 다시 입도 벙긋 못 하고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윤참판은 화로에 놓인 약탕관을 집어던졌다. 약탕관은 사랑 마당에, 끓는 검은 물을 토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문 뒤에 붙어 섰던 허숭은 윤참판의 성난 것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윤참판의 앞에 나서며,
[무어라고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조상하는 인사를 하였다.
[응, 인선이 죽었어.]
하고 윤참판은 허숭을 바라보았다. 허숭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귀신같은 놈들 잘 내쫓으셨습니다.]
하고 안으로서 나오는 것은 김갑진이었다. 갑진은 안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이러한 때에도, 그는 J자 붙인 검은 세루대학 정복을 입고 손에 ‘大學’이라는 모장 붙인 사각모자를 들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인선이가 죽었다.]
하고 윤참판은 갑진을 보고도 같은 소리를 하였다.
[글쎄올시다, 그런 변고가 없습니다. 그 귀신같은 놈들이 독약을 먹여서 그랬습니다. 애초에 제 말씀대로 입원을 시키셨더면 이런 일은 없는 것을 그랬습니다. 그런 귀신같은 놈들이 사람이나 잡지 무엇을 압니까.]
하고 갑진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단정적으로, 훈계적으로 말을 한다. 안하 무인한 그의 성격을 발로한다.
[왜 의사는 안 보였다든?]
하고 윤참판은 갑진의 말에 항변한다.
[의사 놈들은 무얼 안 다더냐. 돈이나 뺏으려 들지.]
[애초에 조선 의사를 부르시기가 잘못이지요. 그깟 놈들, 조선 놈들이 무얼 압니까. 요보놈들이 무얼 알아요? 등촌 박사나 이등 박사 같은 이를 청해 보셔야지요. 생사람을 때려잡았습니다.]
하고 갑진은 여전히 호기를 부린다.
윤참판은 갑진을 한번 흘겨보고 일어나서 무어라고 누구를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허숭은 차마 갑진의 말을 들을 수가 없어서,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하고 갑진을 나무랐다.
[왜? 자네 따위 사립학교 부스러기나 다니는 놈들은 가장 애국자인 체하고, 흥, 그런 보성전문학교 교수 따위가 무얼 알어? 대학에 오면 일 년 급에 붙지 못할 것들이. 자네도 그런 학교에나 댕기려거든 남의 집 행랑 구석에서 식은 밥이나 죽이지 말고, 가서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이나 파. 괘이시리 아니꼽게 놀고먹을 궁리 말고…….]
하고는 입을 삐죽, 고개를 끄떡 하고 나가 버린다. 아마 밤을 새웠으니까 졸려서 어디로 자러 가는 모양이었다.
허숭은 그만한 소리는 갑진에게서 밤낮 듣는 것이니까 별로 노엽게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서울 사람, 시골놈, 양반, 상놈이 아직도 남았구나.’
하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한숨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허숭의 맘은 자못 편안치를 못하였다. ‘행랑구석에서 남의 집 식은 밥이나 죽이고’ 하는 것이나, ‘아니꼽게 놀고먹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나, ‘조상 적부터 파먹던 땅이나 파!’ 하는 것이나, 갑진의 이런 말들은 갑진이가 생각하고 한 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의 경멸적인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허숭의 가슴을 찌르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 파기가 싫어서 아니꼽게 놀고먹어 보겠다고 시골 남녀 학생들이 서울로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선조 대대로 피땀 흘려 갈아 오던 논과 밭과 산― 그 속에서는 땀만 뿌리면 밥과 옷과 채소와 모든 생명의 필수품이 다 나오는 것이다― 을, 혹은 고리대금에 저당을 잡히고, 혹은 팔고 해서까지 서울로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나, 자녀를 보내는 부모나, 그 유일한 동기는 땅을 파지 아니하고 놀고먹자는 것이다. 얼굴이 검고 손이 크고 살이 거칠고 발도 크고, 눈이 유순하고 몸이 왁살스러운, 대체로 농촌의 자연에서 근육노동을 하던 집 자식이 분명한 청년 남녀가, 몸에 잘 어울리지 아니하는 도회식 옷을 입고 도회의 거리로 돌아다니는 꼴― 아무리 제 깐에는 도회식으로 차린다고 값진 옷을 입더라도, 원 도회 사람의 눈에는 ‘시골 무지렁이, 시골뜨기’ 하는 빛이 보여 골계(滑稽)에 가까운 인상을 주는, 그러한 청년 남녀들이 땅을 팔아 가지고, 부모는 굶기면서 종로로, 동아, 삼월, 정자 옥으로, 카페로, 피땀 묻은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일종의 비참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지 아니하냐.
그렇게까지 해서 전문학교나 대학을 마친다 하자. 그리고는 무엇을 하여 먹나. 놀고먹어 보자던 소망도, 벼슬깨나, 회사원, 은행원이나 해먹자던 소망도 이 직업난에 다 달하지 못하고, 얻은 것이 졸업장과, 고등 소비생활의 습관과 욕망과, 꽤 다수의 결핵병, 화류병, 자연 속에서 생장한 체질로서 부자연한 도시생활에 들어오기 때문에 생기는 건강의 장애와― 이것뿐이 아닌가. 조상 적부터 해먹던 땅을 파자니 싫고, 직업은 없고, 그야말로 놀고먹자던 것이 놀고 굶게 되지 아니하는가.
[나는 그 중의 하나다.]
하고 숭은 낙심이 되었다. 도리어 갑진의 기고만장한 어리석음이 유리한 듯도 하였다.
안으로서는 이따금 세 줄기 여자의 곡성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정선의 소리요, 또 하나는 죽은 인선의 아내 조정옥(趙廷玉)의 소리였다. 그리고 하나는 아마 인선의 계모의 소리일 것이다.
인선의 아내 조정옥은 재동 조판서 라면 지금도 양반계급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이의 손녀요, 남작 조남익(趙南翊)의 딸이다. 재동여자고보를 졸업하고, 또 기모노에 하카마를 입고 제이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왕직 인연으로 동경도 한 일 년 다녀온 여자다. 윤참판 집은 아들 복은 없어도 미인 복이 있다는 말을 듣느니만치 정옥은 미인이었다. 다만 위에 말하였거니와 그가 눈웃음을 치고 여염집 부녀로는 너무 애교가 많았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에는― 가정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보통학교나 고등보통학교, 또 고등여학교나― 개인주의, 이기주의 이상의 아무 자극과 훈련이 없었다. 애국이라는 말은 원래 조선 교육에서 찾을 수가 없거니와, 전 인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라든지, 또 삼세 중생을 다 동포로 알고 은인으로 알아 그것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여 봉사하는 석가모니의 사상이라든지, 또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 사람의 불행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그들에게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더하여 주기 위하여 네 몸을 희생하라는 말이라든지, 또는 실제적 훈련이 라든지는 받아 보지 못하고, 기껏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든지, 남편을 수종하라든지, 돈을 아껴 쓰라든지, 자녀를 사랑하고 깨끗이 거두라든지 이러한 개인주의 내지 가족주의 이상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친정인 조 남작 집은 가정이 문란하기로 이름이 있는 집이요, 그의 시집인 윤참판 집도 금전에 대한 규모밖에는 아무 높은, 깊은, 넓은 인생의 이상이 없는 집이요, 정옥이가 교제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정옥과 어슷비슷한 개인주의자, 이기적 향락주의자 들이었다.
이러한 정옥이가 삼십이 넘을락 말락해서 남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정옥은 절제를 잃었다. 그의 남편의 숨이 넘어간 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슬픔이 더하였다. 그는 마침내 완전히 절제력을 잃어 통곡하였다. 방바닥을 두드리고 풀어 놓은 머리채로 목을 매려 들고 한없이 울었다.
[언니, 언니.]
하고 올케를 말리던 정선도 같이 울었다. 집안 어른들이,
[아버님 계신데 그렇게 우는 법이 아니다.]
하고 책망하였으나 정옥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요새 계집애들은 저래서 병야. 부모도 모르고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늙은 부인들은 정선의 흉을 보았다. 그 늙은 부인들은 자기네가 젊었을 때에 지키던 엄격한 풍기가 깨어지는 것을 슬퍼하고, ‘요새 계집애’들의 방종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윤참판의 슬픔은 돈이 구제할 수 있었다. 돈은 윤참판의 삼위일체 신 중에 제일위다. 첫째가 돈, 둘째가 계집, 셋째가 아들. 비록 인선이가 죽었다 하더라도 아직 미거하나마 예선이가 있고, 또 돈이 있지 아니하냐. 백만 원 가까운 돈을 주고 받아들이고 지키고 하는 사무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밑에 부리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사람도 유만부동이다. 은행 통장이나 도장이라도 맡길 만한 사람은 인선이 밖에 없었는데, 이 충실한 사무원 하나를 잃은 것이 아들을 잃은 데 지지 않을 큰 타격이었다. 그래도 윤참판은 아들의 장례가 끝나자 곧 예사대로 생활을 계속하고 사무를 계속하였다. 비록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은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인선의 처 정옥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이러한 가정에 자라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여자로, 특별한 천품이나 있기 전에는, 남편과의 재미와 새 옷 만드는 낙밖에 있을 수 없지 아니하냐. 새 옷도 남편을 위하여 입는 것이 주라 하면, 남편 인선을 잃은 정옥에게는 슬픔 캄캄함 막막함밖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늙은이의 마누라인 시어머니(학교시대에는 서너 반 윗동 무다)라 하여 속으로 멸시하던 이가 도리어 청승스러운 청상과부라고 자기를 멸시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식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잊기도 하련마는 정옥은 일남 일녀를 낳아 다 말도 하기 전에 죽이고, 한 번 낙태를 하고는 다시 소생이 없었다.
무시로 정옥의 방에서 들리는 울음소리― 그것은 차마 못 들을 것이었다. 그를 위로하는 이로는 오직 정선이가 있을 뿐이나, 구월 새 학기가 되어서 정선이 마저 낮에는 온종일 학교에 가게 되어서부터는 정옥은 혼자 한없이 울 뿐이었다. 친정이나 가까우면 거기라도 가련마는 그의 친정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돌아가고, 간댔자 난봉 오빠와 올케가 있을 뿐이었다.
허숭은 그럭저럭 이 집에는 없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한 가지 두 가지 심부름을 시켜 본 윤 참판은 차차 숭을 신임하게 되어, 은행 예금, 서류 정리, 통신을 맡게 되어, 마치 윤참판의 비서 모양으로 되고, 마침내는 가장 비밀한 장부까지도 맡아서 아들이라는 자격을 제하고는 인선이가 보던 사무 전부를 맡게 되었다. 윤참판은 숭을 줄행랑에서 옮겨서 인선이가 있던 작은사랑에 있게 하고, 하인들도 차차 ‘시골 서방님’이니 ‘학생’이니 하는 칭호를 고쳐서 작은사랑 서방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은 이 복잡한 사무가 공부에는 방해를 줌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늙은 윤참판의 신임이 결코 불쾌하지는 아니하였다. 더구나 예전 같으면 인사를 해도 잘 받지도 아니하던 문객들까지도 이제는 제 편에서 먼저 인사를 하는 양이 통쾌도 하였다.
하루는 큰사랑에서 윤참판의 지휘로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김갑진이가 들어왔다. 갑진은 일본식으로 윤참판의 앞에 인사를 하고는,
[자네 요새 승격했네그려.]
하고 장부를 기입하고 앉아있는 숭을 보고 빈정거렸다. 숭은 여전히 붓을 움직이며 픽 웃었다.
[이놈을 반토(사무장)로 쓰십시오?]
하고 갑진은 윤참판을 향하였다. 윤참판은,
[내 비서관이다.]
하고 빙그레 웃었다.
[명년에 내 판사 되거든, 재판소 서기로 써줄까.]
하고 갑진은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시골놈이 양반 댁 청지기가 되면 명정(銘旌)에 고이고 위패에 고이지 않나.]
하고 갑진은 여전히 빈정대었다.
장부가 다 끝난 뒤에 숭은 갑진을 끌고 작은사랑으로 왔다. 갑진은 작은사랑에 숭의 모자와 외투가 걸리고 책상이 놓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숭이가 작은사랑으로 승차한 것을 처음 보는 것이다.
[이게 자네 방인가?]
하고 갑진은 눈이 둥글했다. 그는 진정으로 놀란 것이었다.
[아니, 인선 군 방이지. 방이 비니까 날더러 같이 있으라 시데그려.]
하고,
[왜 섰어? 앉게그려.]
하고 갑진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갑진은 숭이가 앉으라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숭이가 행랑으로부터 이 방에 올라오게 된 것을 보고 놀란 갑진의 심장은 용이히 진정되지를 아니하였다. 과연 윤참판의 말마따나 숭은 반토나 청지기가 아니라 ‘비서관’ 대우였다.
‘그러나 설마―.’
하고 갑진은 숭을 바라보았다. 숭의 손발이 크고 얼굴이 좀 거친 맛이 있는 것이 비록 시골티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시골 사람을 낮추 보는 갑진의 눈에도 숭은 당당한 대장부였다.
체격뿐 아니라 숭의 두뇌(이것은 갑진이가 심히 존중하는 것이었다)는 고보시대부터 좋기로 이름이 있었다. 또 숭은 풋볼 선수(이것은 갑진이가 부러워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요, 일본말을 썩 잘하였다(이것은 갑진이가 심히 존중하는 것이었다). 만일 숭도 갑진과 같이 대학에를 다닌다 하면, 갑진은 시골 상놈이라는 것밖에는 숭을 낮추 볼 아무 조건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갑진의 눈에는 조선 사람이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낮게 보이고, 값없이 보였다. 그래서 숭을 사립전문학교 생도라고 보면 자기보다 한없이 떨어지게 보였다.
‘그러나 설마, 윤참판이 허숭이로 정선의 사위야 삼을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갑진은 한 번 더 숭을 바라보았다.
‘나, 김갑진을 두고 누가 정선의 남편이 되랴.’
이렇게 갑진은 속으로 믿어 왔던 것이다. 대학만 졸업하는 날이면 자기는 정선과 혼인을 하고, 그리 되면 정선은 적더라도 천 석 하나는 가지고 올 것이요, 또 그리고, 또 그리고― 이렇게 다 셈 쳐 놓았던 것이다. 혹시 갑진에게 청혼하는 집이 있더라도 갑진이가,
[아, 나는 아직 혼인할 생각 없소. 공부하는 사람이 혼인이 무슨 혼인이오?]
하고 뽐낸 것도 다 이러한 배짱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갑진에게 있어서는, 가난한 귀족의 아들인 그에게 있어서는 혼인이란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자야 어디는 없느냐. 카페에 가도 수두룩하고 여학생을 후려내더라도 미처 주체를 못 할 형편이다. 오직 돈 있는 아내― 그것이 갑진에게는 가장 귀하고 또 필요품이었다.
그런데 윤참판 집 작은사랑을 독차지한 대장부 허숭을 대할 때에는 갑진의 분홍빛 장래에는 일종의 회색 안개가 낌을 아니 깨달을 수 없었다.
[자네 한턱내야겠네그려.]
하고 갑진은 소침한 기운을 억지로 회복하여 농치는 웃음을 웃으며 숭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한턱? 줄행랑에서 이리로 승차한 턱인가?]
하고 숭도 웃었다.
[암, 자네 조상 적에야 윤참판 집에 오면 정하배할 처지 아닌가. 이만하면 자네 고향에 가면 소분(掃墳)해야겠네 그려.]
하는 갑진의 말은 농담을 지나서 일종의 독기를 품었다.
[마찬가지지.]
하고 숭도 농담으로 대꾸를 하였다.
[무엇이 마찬가지어?]
[우리 조상같이 시골 사는 상놈은 자네네 같은 양반집에 정하 배를 하였지마는, 그 대신에 자네네 같은 양반은 호인의 집에 정하 배를 하였거든. 지금은 일본 사람의 집에 정하 배를 하고…… 안 그런가.]
갑진의 얼굴에 떠돌던 빈정거리는 웃음이 사라지고 낯빛은 파랗게 질리려 하였다.
[갑진 군, 자네는 너무도 양반에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야. 지금 우리 조선 사람은 모조리 세계적 시골뜨기요 상놈이 아닌가. 그런데 이 조그마한 조선, 몇 명 안 되는 조선 사람 중에서 양반은 다 무엇이고 상놈은 다 무엇인가. 서울 사람은 다 무엇이고 시골 사람은 다 무엇인가. 또 관립학교는 다 무엇이고 사립학교는 다 무엇인가. 김갑진이나 허숭이나 다 한 가지 이름밖에 없는 것일세― ‘조선 사람’이라는.]
[상놈인 걸 어쩌나. 자네 같은 사람은 특별하지만 시골놈은 원체 무지하거든. 내 흉하고, 또 시골놈들이란 지방열이 강해서, 서울 사람이라면 미워하고 배척한단 말야. 안 그런가. ○○학교로 보더라도 교장이 시골놈이니깐으로 교원들도 시골놈이 많거든. ○○은행도 안 그런가. ○○신문사도 안 그런가. 그러니깐으로 시골놈들이 고약한 게지, 우리네 서울 사람 탓이 아니란 말야. 그야말로 인식 착오, 자네의 인식 착올세, 인식 착오.]
하고 갑진의 말은 연설 구조다.
[그건 말 안 되는 말야. ○○학교에 시골 사람이 많다고 하나, ○○학교에는 서울 사람뿐이 아닌가. ○○은행에는 시골 사람이 있던가. ○○신문사에는 대부분이 서울 사람이 아닌가. 그러면 그 기관들이 다 서울 사람들의 지방열로 나온 기관이란 말인가. 자네 눈에는 시골 사람만 눈에 띄는 게지. 서울 사람들만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이고, 시골 사람이 한두 사람 섞이면 아마 수상하게 보이는 겔세. 아마 옛날부터 조정에는 시골 상놈은 하나도 아니 섞이고, 뉘 집 자식이라고 알 만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다가, 보학에 들지 아니한 시골 사람이 하나 옥관자라도 얻어 붙이면 변괴로나 알던 그 인습이 남아 있는 게지. 그렇지만 자네 같은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까지 그런 생각을 가져서 쓰겠나. 자네와 나와 같이 친한 경우에야 무슨 말을 하기로 허물이 있겠나마는 시골놈, 상놈 하고 입버릇이 되어 말하면 민족 통일상 불미한 영향을 준단 말야. 자네나 내나, 더구나 자네와 같이 귀족의 혈통을 받은 사람이 나서서 양반이니 상놈이니, 서울놈이니 시골놈이니 하는 걸 단연히 깨뜨리고 오직 조선 사람이라는 한 이름 밑에 서로 사랑하도록 힘써야 될 것 아닌가.]
숭의 말에는 정성과 열이 있었다.
갑진은 눈을 멀뚱멀뚱하고 듣고 앉았었다. 숭은 그가 의외에 빈정대지도 않고 듣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러나 숭의 말이 다 끝난 뒤에 갑진은,
[인제 시조 다 했니? 이런 전 쑥이. 누굴 보고 강의를 하는 게냐, 훈계를 하는 게냐.]
익선동 한(韓) 선생이라면 다만 배재학당 계통과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에게만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내 중등 이상 학교 학생 간에는 아는 이가 많았다. 그는 본래 배재고보에 영어 교사로 있다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와 있게 된, 그러면서도 여전히 배재와 이화에 영작문 시간을 맡아 보는 한 오십 된 사람이다. 그는 계통적으로 공부한 학력이 없기 때문에 전문학교에도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등보통학교에서도 교원 자격이 없다. 그래서 월급이 싸다.
한 선생의 이름은 민교(民敎)다. 그는 한민교라는 그 이름이 표시하는 대로, 조선 청년의 교육자로도 일생의 사업을 삼는 이다. 그는 일찍 동경에서 중학교를 마치고는 정칙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역사, 정치, 철학 이러한 책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는 그러한 조선 사람이 밟는 경로를 밟아 감옥에도 들어가고, 만주에도 가고, 교사도 되고, 예수교인도 되었다. 그가 줄곧 교사 노릇을 하기는 최근 십 년간이다.
한 선생의 집은 익선동 꼬불꼬불한 뒷골목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이다. 대문이 한 간, 행랑 겸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한 간, 안방이 간 반, 건넌방이 한 간, 그런데 웬일인지 마루만은 넓어서 삼 간, 그리고는 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뒷간 아울러 두 간, 그리고 장독대, 손바닥만 한 마당, 부엌이 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익선동 조그만 초가집이라면 한 선생 집이다.
방이 좁고 내객은 많으니까 턱없이 넓은 삼 간 마루에는 당치도 아니한 유리분합을 들였다. 이 방을 놀러 다니는 학생들은 한 선생네 양실이라고 일컫는다. 딴은 양실이다. 조선식 방은 아니니까 양실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하나씩 기부한 교의가 너덧 개 있다. 혹은 졸업하고 가면서 제가 앉던 교의, 혹은 초전골 고물전에서 사온 교의, 그러니까 둘도 같은 것은 없고 형형색색이다. 나무만으로 된 놈, 무늬 있는 헝겊을 씌운 놈, 가죽으로 된 놈, 그 중의 한 개는 아주 빨간 우단으로 싼 놈까지 있다.
선생의 부인은 벌써 백발이 다 된 할머니다. 선생보다 사오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가족이라고는 내외밖에는 금년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딸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은 기미년에 의전에 다니다가 해외로 달아나서 이따금 편지가 있을 뿐이었다.
허숭도 물론 이 집에 다니는 학생 중의 하나다. 김갑진도 배재 시대 관계로 가끔 놀러 온다. 이화의 여학생들도 간혹 놀러 온다.
하루는 한 선생 집에 만찬회가 열려서 학생이 십여 명이나 모였다. 눈 오는 어느 날, 한 선생네 양실에는 방울만한 난로가 석탄불이 달아서 방이 우럭우럭하고, 난로 뚜껑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하얀 김이 소리를 지르고 올랐다.
부엌에서는 한 선생의 부인이 이웃집 행랑어멈을 임시로 청하여 다가 음식을 만들고, 한 선생의 딸 정란(廷蘭)은 들며 나며 심부름을 하고 있다. 이때에,
[문 열어라.]
하는 이는 한 선생이다.
[아버지.]
하고 정란은 앞치마로 손을 씻으며 뛰어나간다.
[아이, 아버지 외투에 눈 봐요.]
하고 정란은 하얀 조그만 손으로 한 선생의 외투 가슴과 어깨에 앉은 눈을 떤다.
[아직 아무도 안 오셨니?]
하고 한 선생은 쿵쿵 하고 발에 묻은 눈을 떤다.
[어느 새에.]
하고 정란은 아버지의 모자를 받고 신끈을 끄른다.
[내 끄르마.]
[아녜요, 내 끄를게요.]
한 선생은 양실에 들어가서 외투를 벗어 정란에게 주고, 정란이가 오늘 손님을 위하여 애써 차려 놓은 방을 둘러보고 만족한 듯이 웃었다.
정란은 아버지의 책상과 이 양실을 아버지의 뜻에 맞도록 차려 놓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알았다. 분합문의 문장은 정란이가 손수 자수한 것이었다. 아직 솜씨는 서투르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는 정성을 담은 것이다. 한 선생은 딸의 그 정성을 잘 알아줄 만한 아버지였다.
또 정란은 나무때기 교의에는 수놓은 방석을 만들어 깔았고, 테이블에는 테이블보를 수놓아 깔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책상(이것은 또 집에 어울리지 않게 큰 서양식 데스크였다)에는 잉크병 놓는 쿠션, 팔 짚는 쿠션, 필통 놓는 쿠션, 벼루 놓는 쿠션 등 큰 것, 작은 것 귀찮으리만치 많은 쿠션이 있었다. 정란의 생각에는 난로 뚜껑에까지 무엇을 짜서 깔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무지한 난로는 정란이가 정성들여 만든 예술품을 탐내어 집어먹었을 것이다.
한 선생이 정란이가 아버지를 위해서 난로 앞에 놓은, 나무때기 팔 놓는 의자에 앉았다. 수척한 한 선생에게는 바깥날이 추웠던 것이다.
[과히 덥지 아니하냐.]
하고 한 선생은 난로 문을 열어 보며, 안방에서 아버지의 조선옷을 내어 아랫목에 깔고 있는 정란에게 물었다.
[아녜요, 바로 아까 육십오 도던데.]
하고 양실로 뛰어나와서 아버지 책상에 놓은 한란계를 본다.
[칠십 도야.]
하고 정란은 웃는다.
[건넌방 문을 좀 열어 놓아요?]
하고 아버지 뜻을 묻는다.
한 선생은 퍽 수척하였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은 들어갔다. 약간 벗어진 머리는 반나마 희었다. 오직 그 눈만이 힘 있게 빛난다. 본래는 건장한 체격이던 것은 그의 골격에만 남았다. 그는 일생의 고생― 가난의 고생, 방랑의 고생, 감옥의 고생, 노심초사의 고생, 교사 노릇의 고생, 청년과 담화하는 데 고생으로 몸은 수척하고 용모에는 약간 피곤한 빛을 띠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와 일생을 같이한 부인도 일찍 그가 낙심하거나 화를 내거나 성을 내는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언제나 태연하고 천연하였다. 그는 도무지 감정을 움직이는 빛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야멸차거나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딸을 사랑하고 친구와 후배를 사랑하였다. 더구나 그는 조선이란 것을 뜨겁게 사랑하였다. 그의 책상머리 벽에는 조선 지도가 붙고, 책상 위에는 언제든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같은 조선의 역사나 또는 조선 사람의 문집을 놓고 있었다. 그는 매일 반드시 단 한 페이지라도 조선에 관한 무엇을 읽는 것으로 규칙을 삼고 있었다.
손님들이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손님은 다 학생들이었다. 맨 처음 온 이가 경성대학 문과에 다니는 김상철(金相哲)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보성전문, 고등상업, 고등공업 등 정모와 정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고, 이화전문의 여학생이 둘이 왔다. 한 여학생은 미인이라고 할 만하였으나, 한 여학생은 체조 선생이라고 할 만하게 다부지게 생긴 여자였다. 그들은 심순례(沈順禮), 정서분(鄭西芬)이라는 이름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시계 바늘이 여섯 시를 가리킬 때에 세비로 입은 두 청년이 왔다. 하나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혈색이 좋은, 눈이 어글어글한 서양식 하이칼라 신사요, 하나는 키가 작고 몸이 가냘프고 눈만 몹시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건영(李健永) 박사와 윤명섭이라는 발명가였다.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자, 변변치 않지마는 다들 자시오.]
하고 한 선생이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오래간만에 조선 디너를 먹습니다.]
하고 미국으로부터 십여 년 만에 새로 돌아온 이건영은 극히 감격한 모양으로 감사하는 인사를 하였다.
[미국 계실 때에도 조선 음식을 잡수실 기회가 있어요?]
하고 체조 교사같이 생긴 정서분이가 입을 열었다.
[예스, 프롬 타임 투타임(예, 이따금).]
하고 이 박사는 분명한 악센트로, 영어로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조선말로,
[서방(캘리포니아 등지)에 있을 때에는 우리 동포 가정에서 조선 음식을 먹을 기회가 있습니다. 김치도, 그렇지마는 이렇게 김치 맛이 안 나요. 선생님 댁 김치 맛납니다.]
하면서 김칫국을 떠서 맛나게 먹는다.
[김치 맛이 아마 조선 음식에 있어서는 가장 조선 정신이 있지요.]
하고 대학 문과에서 조선 극을 전공하는 김상철이 유머러스한 말을 한다.
[브라보우!]
하고 이박사가 영어로 외치고,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릿(민족정신)이란 말씀이 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도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 선생이 갈비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이크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는다.
[딴은 음식에도 각각 국민성이 드러나는 모양이지요.]
하고 또 한 학생이,
[일본 요리의 대표는 사시미(어회)지요. 청요리의 대표는 만두, 양요리의 대표는 암만해도 토스티드 치킨(닭고기 구운 것)이지요.]
[여기는 토스티드 하앗(염통 구운 것)이 있습니다, 하하.]
하고 이건영 박사는 염통 구운 것을 한 점을 집어 먹으며, 서분과 순례 두 여자를 본다. 순례의 입에는 눈에 띌 듯 말 듯 적은 웃음이 피었다가 번개같이 스러진다.
[김 군, 어째 오늘 그렇게 얌전하오?]
하고 한 선생이 김갑진을 바라본다.
[제야 언제는 얌전하지 않습니까.]
하고 커다란 배추김치를 입에 넣고 버적버적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씹는다.
[이 사람은 변덕쟁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어느 동창이 웃는다. 다들 따라 웃는다. 사람들, 더구나 처음 보는 두 손님의 시선이 갑진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하고 갑진은 입에 물었던 밥을 김칫국과 아울러 삼키며,
[그런데 미국 유학생들은 왜들 다 쑥이 야요? 그놈들 영어 한마디 변변히 하는 놈도 없으니 웬일 야요?]
하고 아주 천연스럽게 이 박사를 본다. 이 박사는 하도 의외의 말에 눈이 뚱그래지고, 순례는 제가 창피한 꼴이나 당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린다. 다른 학생들은 픽픽 웃는다.
[이 사람아.]
하고 허숭이가 갑진의 옆구리를 찌른다.
[선생님, 제 말이 잘못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픽픽 웃으니.]
하고 갑진은 더욱 천연스럽다.
[그야 미국 유학생이라고 다 공부를 잘하겠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지.]
하고 한 선생도 빙그레 웃는다.
[어디, 미국서 박사니 무엇이니 해 가지고 온 사람치고 무어 아는 사람은 어디 있고, 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요? 다들 쑥이지.]
하고 갑진은 이 박사를 바라보며,
[아마 이 박사는 안 그러하시겠지마는.]
하고 그도 웃는다. 다들 웃는다.
[미국도 하버드나 예일 같은 대학은 그래도 괜찮다지요?]
하고 갑진은 여전히 미국을 낮추 보는 주의자다.
[프린스턴 대학도.]
하고 갑진은 이박사가 프린스턴 출신인 것을 생각하고 한마디를 첨부한다. 다들 갑진의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모른다.
이 박사는 아직도, 이 경우에 무슨 말을 해야 옳을는지 몰라서, 마치 방망이로 되게 얻어맞은 사람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양으로 우두커니 앉아서 밥만 먹는다.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하고 갑진만 혼자서 기운이 나서,
[그 박사 논문이란 것들을 보니까는, 우리들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작문한 것만 밖에 더해요? 그런 논문으로 박사를 한다면 이 애들도 박사 다 됐게요.]
하고 동창들을 가리킨다.
[그건 또 싸구려 박사라고 있다네.]
하고 연극 학생 김상철이가 한마디 던진다.
갑진의 말로 해서 깨어진 흥은 용이하게 회복할 도리가 없었다. 마치 탈선하여 철교에서 떨어진 열차와 같아서 원상회복은 절망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밥도 거진 끝이 났다.
한 선생은 밥숟가락을 주발 위에 뉘어 놓고 인사말을 시작하여 이 파열된 원탁회의를 계속하려 하였다.
[오늘 저녁 여러분을 오시게 한 것은 다들 아시겠지마는, 존경할 만한 친구 두 분을 소개하기 위함이외다. 한 분은 이건영 박사, 또 한 분은 윤명섭 씨. 이 박사는 배재고보를 졸업하시고 미국으로 가셔서 스탠포드 대학에서 에이 비, 프린스턴 대학에서 엠 에이와 피 에이치 디 학위를 얻으셨습니다. 전공은 윤리학과 교육학, 그리고 예일 대학에서 신학사의 학위도 얻으셨습니다. 놀라운 독학자시요, 또 십여 년을 고학으로 공부하신 이입니다. 우리 조선에 이러한 큰 학자와 일꾼을 얻은 것은 참으로 큰 힘이요, 기쁨입니다.]
이 말에 이 박사는 한 선생과 여러 사람을 향하여 골고루 목례한다. 갑진은 코가 밥상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다.
[또 이 윤명섭 씨는.]
하고 한 선생은 눈에 일층 빛을 내며,
[윤명섭 씨는, 조선에서는 보통학교도 고등보통학교도 다닌 일이 없으십니다. 그 대신, 윤명섭 씨는 종교와 실인생의 학문을 하셨습니다. 윤명섭 씨는 혹은 농가의 머슴이 되시고, 혹은 상점의 사환, 혹은 도장을 새기고, 혹은 인력거를 끌고, 혹은 자동차 운전수가 되어 어디까지든지 희망과 자신의 신앙으로 조선을 위하여 무슨 큰 공헌을 하려고 힘을 쓰셨습니다. 윤명섭 씨는 ‘모세의 지팡이’를 구하는 것으로 인생의 임무를 삼으신다고 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다를 치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를 치면 샘물이 솟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지팡입니다. 그렇게 믿고 힘쓴 결과로 윤명섭 씨는 벌써 삼십여 종의 발명을 하여 전매 특허권을 얻으셨고, 그보다도 세계를 놀랠 만한 대발명, 그것은 아직 비밀이나 거의 완성된 대발명을 하시는 중입니다. 금후 일 년이면 이 발명이 아주 완성되어서, 다만 세계의 학계를 놀라게 할 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생활에 대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발명가를 낳은 것을 민족의 자랑으로 기쁨으로 알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동의 시선은 윤명섭의 초라한, 조그마한 몸으로 쏠렸다.
한 선생은 무엇을 적은 종잇조각을 꺼내어 들고,
[나는 이 윤명섭 씨의 일상생활 좌우명을 여러분께 읽어 드리려 합니다. 내가 깊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께도 그 감동을 나누려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맹세한 나의 일상생활
일, 아침에 삼 분간 기도(자리 속에서 하루의 계획).
이, 밤에 삼 분간 점고, 그날을 반성하여 기도, 성경 낭독.
삼, 과거의 고생을 생각하여 삼 분간 묵상(위인의 과거를 생각), 더욱 분투를 결심, 모든 이의 은혜를 잊지 아니할 것.
사, 사명― 이상과 희망을 실현하기에 노력하고 평생 노력하고 평생 생각할 일.
오, 연구와 범사에 충실할 일.
육, 기회로 생각하면 주저치 말고 할 일.
칠, 물건을 살적에는 삼 분간 생각할 일.
팔, 건강에 주의할 일.
나의 시간
일, 학교 수업 일곱 시간.
이, 통학, 식사, 편지 회답, 기타 세 시간.
삼, 학교 학과 복습 예습 세 시간.
사, 돈벌이 세 시간.
오, 발명 연구 네 시간.
육, 수면 네 시간. 도합 스물네 시간.
일요일은 교회, 오락, 독서, 방문.
이러합니다.]
한 선생의 이 박사와 윤명섭 소개가 끝나자, 일동은 이상하게 고요한 침묵 속에 있었다. 저마다,
‘나도 한 가지 조선을 위해서 무슨 큰일을 해야겠다. 그리하자면 이 씨나 윤 씨와 같은, 또는 한 선생과 같은 극기, 헌신, 분투의 생활을 해야겠다.’
하는 심히 단순한, 그러나 심히 감격 깊은 생각을 하였다.
‘옳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고 허숭은 생각하였다.
‘농민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몸만 가지고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입는 것을 입고, 그리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사는 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한 농민의 심부름을 하여 주자. 편지도 대신 써주고, 주재소, 면소에도 대신 다녀 주고 그러면서 글도 가르치고 소비조합도 만들어 주고, 뒷간, 부엌 소제도 하여 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
이러한 평소의 결심을 한 번 더 굳게 하였다. 대규모로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여러 사람을 지휘하면서, 신문에 크게 선전을 하면서 빛나게 하자는 꿈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나부터 하자!’
하는 한 선생의 슬로건의 맛을 더욱 한번 깨달은 것같이 느꼈다.
대학에서 극 연구를 하는 김상철이나, 이전에서 음악을 배우는 심순례나, 다 저대로 조선 사람의 생활을 돕기에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한 번 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조선 민중예술― 가장 가난한 조선 민중을 기쁘게 할 만한 소설과 극과 음악을 지어 내는 것, 이것도 한 선생의 말에 의하건댄 큰일이요, 필요한 일이요, 새로운 조선을 짓는 데 각각 한 주추요, 기둥이었다.
김갑진은 우선 명재판관이 되어 이름을 높이고 다음에 조선에 일등 가는 변호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인권을 옹호하는 큰 인물이 되자는 것으로 자기의 천직을 삼는다고 하였다. 한 선생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조선에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무릇 조선과 조선 사람을 생각하여 저를 희생하고 하는 일이면, 그리하고 그것을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조직 하에서 하는 일이면 다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부패하고 마비된 양반 계급에서 갑진과 같이 활기 있고 야심 있는 청년을 찾은 것을 한 선생은 기뻐하였다.
심순례의 맘은 차라리 윤명섭에게로 끌렸다. 만일 어느 편으로 끌린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나 정서분의 맘은 단정적으로 이건영 박사에게로 끌렸다.
순례의 맘이 명섭에게로 끌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개 그의 아버지는 본래 가난한 집 유복자로서, 그 어머니조차 일찍 여의고 외가로 고모의 집으로 불쌍하게 자라나서 종로 어느 지물전에 사환으로 다니다가, 점원이 되었다가 그가 삼십이나 되어서 월수로 돈을 좀 얻어 가지고 독립하여 지물전을 내어서, 이래 근 이십 년간 신용과 근검과 저축으로 볏백이나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치부책에 치부를 할 만한 글밖에 몰랐다.
그는 술도 아니 먹고, 놀러도 아니 다니고, 재산이 생긴 뒤에도 첩도 아니 얻고(종로 상인은 열에 아홉은 중년에 돈이 생기면 첩을 얻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가게와 안방을 세계로 삼고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순례의 어머니 역시 그 남편과 근검, 저축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의 동무들이 모두 금비녈세, 비취비녈세, 하부다 일세, 굿일세, 물맞으럴세 하건마는 그는 소화불량(그의 본병이었다)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 그리고는 시흥 사는 친정에도 큰일이나 있기 전에는 가지 아니하였다. 오직 내외가 늦게 얻은 딸 순례 하나를 기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래서 순례는 여자 보통학교,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거쳐서, 남들은 그만하면 시집을 보내라는 것도 물리치고 순례에게 음악 재주가 있다고 하여 이화전문학교의 음악과에 넣은 것이었다.
[내야 음악이 무엇인지 전문학교가 무엇인지 아오? 그저 재산 물려 줄 것도 없으니깐 두루 나중에 무슨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굶어 죽지나 말라고 자격이나 하나 얻어 주려고 그러지요.]
하는 것이 순례의 아버지의 순례 전문교육에 대한 의견이었다.
이러한 자립, 근검, 절제하는 가정에서 자라난 순례는 예술적 천품을 가지면서도, 마치 시골 농가에서 세상모르고 귀히 자라난 처녀와 같이 모양 낼 줄도 모르고, 말 숱도 없고, 천연스럽고 정숙스러웠다. 처음 보면 무언하고 유치한 것도 같지마는, 속에는 예술가의 예민한 감정이 있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순례는 호화로운 이박사보다도 저와 같이 검소하고 겸손한, 어찌 보면 못생긴 듯 한 명섭이가 도리어 맘을 끈 것이었다.
순례는 아직 학교 선생 외에는(그것도 교실에서만), 일찍 남자와 교제해 본 일이 없었다. 있었다면 전차 차장일까. 간혹 그의 뒤를 따르는 남자 학생들이 없음이 아니었지마는 그는 천연하게 본체만체하였다. 그 남학생들은 얼마를 따라다니고 건드려 보다가는 실망하고 달아났다.
순례가 한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이화에 들어가서부터였다. 순례는 이화에 들어가서 비로소 조선 사람 남자 선생을 대해 보았다. 그전에는 보통학교에서나 고등보통학교에서나 늘 조선 남자 선생 담임 밑에 있을 기회가 없었다.
순례는 그 부모에게 한 선생 말을 하였다.
[아주 점잖으시고, 엄하시고도 친절하시고, 잘 가르치시고, 또 사회에 명망도 높대.]
이것이 순례가 그 부모에게 한, 한 선생에 대한 보고였다. 그 부모는 교육계나 사회에 나와 다니는 인물을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딸 순례를 믿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한번은 순례의 아버지가 한 선생을 찾아가서 딸의 장래를 부탁하였다.
[제야 장사나 해먹는 놈이 무얼 압니까. 그저 공부가 좋다니, 자식이라고 그것 하나밖에 없구 해서, 학교에를 보냅지요.]
하고 순례의 아버지는 한 선생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얼굴이 둥그레 하고 눈이 크고 턱이 둥글고, 아래와 위에 조선식 수염이 나고, 골격이 크고 뚱뚱하다고 할 만한 조선 사람 타입의 신사였다.
한 선생도 순례 아버지의 꾸밈없는, 순 조선식인 성격에 많이 호감을 가졌다. 조선식 겸손, 조선식 위엄, 조선식 대범, 조선식 자존심, 조선식 점잖음(태연하기 산 같은 것)― 이런 것은 근래에 바깥바람 쏘인 젊은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 선생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청년 남녀들의 일본 도금, 서양 도금의 경망하고 조급하고, 감정의 움직임이 양철 냄비식이요, 저만 알고, 잔소리 많고, 위신 없는 양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순례의 아버지의 이 간단한 말 속에는, 순례가 학교에 있는 동안 잘 감독하고 훈육할 것과, 또 부모에게는―---특히 옛날 조선식 부모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가 되는 혼인까지도 맡아서 해달라는 뜻이 품겨 있었다.
한 선생은 순례 아버지의 청을 쾌하게 받았다.
며칠 뒤에 순례 아버지는 한 선생 집에 강원도에서 온 것이라 하여 꿀 한 항아리를 보내었다. 한 선생이 담배도 아니 먹고 술도 아니 먹는다는 말을 들은 순례 아버지는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로 꿀을 보낸 것이었다. 오늘 이 박사와 윤명섭을 주빈으로 이 만찬회를 베푼 데는 순례의 신랑 될 이를 고르는 뜻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한 선생의 심중에 있는 후보자는 누구던가. 그것은 이건영 박사였다. 한 선생은 순례를 지극히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자기가 지극히 믿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건영은 배재에 있을 때에 가장 재주 있고 얌전하기로 한 선생의 사랑을 받은 학생이요, 또 서양 간 뒤에도 몇 대학에 있는 동안에 항상 뛰어나는 성적을 가졌을 뿐더러 일찍 남녀 간에든지 무엇에든지 좋지 못한 풍문을 낸 일이 없었고, 또 그 학식이나 표현능력으로 말하면 그곳 일류 신문과 잡지에 여러 번 기서(奇書)하여 칭찬을 받을 정도였었다. 그래서 한 선생은 이 박사를 일변 보전이나 연전이나, 이전의 교수로 추천하는 동시에 순례의 남편을 삼았으면 하고 내념에 생각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 한 선생은 건영과 단둘이 만나서 순례에게 대한 인상을 물었다. 건영은 백 퍼센트로 좋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건영의 청으로 순례는 건영과 십여 차나 만나 단둘이서 이야기할 기회도 얻었다. 이삼 차는 단둘이서 호텔에서 저녁도 같이 먹고, 극장에서 활동사진도 보았다.
순례는 그리 뛰어난 미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아버지와 같이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눈이 조선식 인자하고 유순함을 보이고 피부가 희고 윤택하고 사지가 어울리고, 특히 손과 코가 아름다웠다. 건영의 말을 듣건댄 그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가장 좋고, 그보다도 맘이 가장 아름다웠다.
순례는 일찍 누구와 다툰 일이 없고, 큰소리 한 일이 없고, 많이 웃지도 아니하고, 우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조선의 선인들과 같이 좀처럼 희로애락을 낯색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마치 부처의 모양과 같이 항상 빙그레 웃는 낯이었다. 그의 말은,
[네.]
[아니오.]
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옛날 조선의 딸이었다.
[순례의 값과 아름다움은 아는 사람만 알지.]
하는 한 선생의 말에, 건영은,
[참 그렇습니다. 이건영이 저 하나만 압니다.]
하였다.
1-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