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라는 말을 하는데 현재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으로만 해석하면 안 될 듯하다. 한 사건에 있어서 생성되고나서 이후 그것이 어떻게 시기마다 해석되고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나서 오늘날 관점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일전 최치원을 바라보는 최익한의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는데, 최치원에 대해서도 그에 대한 기록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씌여졌던 시점, 조선조 들어와서 그의 배향을 둘러썬 유학자들의 주장이 나왔던 시점 등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
최익한은 이를 고려하면서 글을 썼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최익한이 북한에서 최치원에 대해 쓴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때 글과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왕건을 비밀리 협찬(밀찬)한 것을 인정하고, 견훤에 대해 반박한 글도 최치원이 썼다고 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새로운 자료가 나왔거나, 그 주제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자신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였거나, 시세에 따라 스스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최익한은 최치원에 대해 새로운 자료를 본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글에서 도움을 받지도 않았다.
사실 이 글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첫째는 최치원의 가계가 변변치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신라 때 인물로서 자세히 가계를 알 수 있는 인물이 별로 없는데도 고려시대의 문묘에 종향될 인물이면 당연히 많은 내용이 알려졌을 텐데도 별로 기록이 없는 것은 가계의 문제로 보았다. 이는 최치원의 가계가 뛰어나지 않다는 점을 활용하려고 하는 지나친 추론인 듯하다.
둘째 최치원이 유학간 것은 신라 조정에서 공식으로 파견한 유학생이나 빈공생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개인의 힘과 결심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당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순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셋째 최치원이 상선을 타고 당나라에 유학한 것은 신라 골품제도를 반대하는 그의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최치원이 골품제의 한계를 비판할 수는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더우가 유학하던 시기를 첫걸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넷째 토황소격문에 대한 평가인데,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이름을 떨쳤지만 당나라 착취제도를 반대하는 농민폭동의 수령이며 혁명적 의거인데 최치원이 그 나라 통치 계급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런 글을 쓴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황소의 반란을 혁명적 의거라고 보거나 이를 진압하는 글을 쓴 것을 정치적 의식이 어렸기 때문으로 본 것은 지나치게 이념에 집착한 분석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왕건을 위한 글을 쓰거나 견훤에게 대답하여 보낸 격문을 쓴 것을 최치원이 했다고 수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이 부분을 비판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인데... 실제로는 예전의 비판의식이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또한 이는 당시 봉건적 도덕에 비추어 보아서는 한 개 절조없는 신하로 규정하지 아니할 것인가?라고 반문하고는 유교의 주종적 윤리에 자기를 구속시키는 학자가 아니고 오직 천의와 민심을 좇아 자기의 향배를 결정하는 극히 자유스러운 정치관을 가진 철인, 또는 신라왕조와 운명을 같이할 귀족이 아니고 소위 ‘신하도 임금을 선택하는’ 권리를 주장한 평민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였다. 이데올로기가 너무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익한은 15년만에 이렇게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는 무엇보다도 북한 정권하에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에서는 고구려 고려를 정통으로 볼테니 그 때문에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조선명장전>에서는 백제,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곧 평론가(이를테면 역사가)들이 당의 힘을 빌어 동족국가를 정복한 신라와 김유신을 비판하였지만, 최익한은 당시는 삼국이 동족국가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동족상잔이 아니고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는 인민들을 구원하였다고 보았다. 상당히 합리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단순히 고구려와 고려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 때문만은 아닌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세에 따른 적극적인 상을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신라 전승기의 명장과 신라 쇠퇴기의 학자의 역할은 다르게 판단한 것일까?
또한 최치원을 후세 편협한 유학자들의 비난을 일축하면서 그가 결코 조국과 인민을 잊어버린 은둔주의자나 신선주의자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왕건 일파와 계속적으로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증명된다고 하여 ‘밀찬’을 오히려 그 증거로서 활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문학성, 사상성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인물을 평가하는 잣대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고려라는 새롭게 성장하는 국가의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의도 역시 없지는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