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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애수를 입는다
목숨 건 도박, 결투
19세기 말엽, 미국 서부 지역에서는 결투가 반목과 이견 있는 사람 간에 결론을 내는 수단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쌍방 간에 결투 장소와 시간, 무기를 협의한 뒤 약속된 시간에 참관자 1명씩을 대동하고 나타난다. 그런 뒤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일정 걸음을 걸은 다음 상대방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총을 반발만 쏘아 상대방을 쓰러뜨렸으며 확인 사살은 하지 않았다. 즉 '맞추는 자'가 승리한 자로 합의된 것이기 때문에 맞추는 데 의미가 있지 상대방을 살인하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총상은 매우 치명적이었던 까닭에 대부분의 패자는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미국인의 결투는 17∼18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귀족들 간의 1대1 승부, 혹은 18세기경 1대 1 육상 경주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7∼18세기경 유럽에서는 귀족들 간에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상대방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1대1로 진검 승부를 가리는 일이 유행하였다. 하나님이 진실한 자의 편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데서 생긴 풍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는 하인 중에서 선발한 선수끼리 1대1로 육상 경주를 벌이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이 경주에 참가하는 선수는 주로 마부 중에서 선발됐으며 주인의 마차 옆에서 함께 달리는 것으로 훈련을 대신 했다. 또 이 같은 1대1 경주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걸렸으나 상금은 대부분 이긴 선수의 주인인 귀족들이 차지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1대1 경주는 그 뒤 19세기 들어 산업 혁명으로 도시화가 진척되자 대도시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일반인들이 참가해 돈을 걸고 즐기는 도박성 대중오락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풍습이 미국에서는 19세기 초엽, 결투로 변형되어 유행한 것이다. 미국에서의 결투는 목숨 걸린 도박이었기에 '치사함'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빨리 정확하게 총을 쏘는 사람들이 승리하였다. 반칙해서 이긴 사람은 평생 '야비한 인간',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투에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앤드류 잭슨(1767∼1845)과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돋보였다. 잭슨은 대통령이 되기 직전 14회나 결투를 하여 승리했는데, 그는 상대방의 표적 초점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넓은 망토를 걸쳐 입고 나타나 모두 승리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링컨은 총으로 결투하자는 상대방의 제안에, 자신의 큰 키를 감안하여 칼로 싸우자고 역제안함으로써 결투 자체를 무산시켰다고 전한다.
오리 궁둥이 댄스
무희들이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유명한 '캉캉'은 프랑스에서 유래한 활기차고 대담한 춤이다. 1830년대 파리의 무도장에서는 '카드리유'라는 사교춤이 유행했는데, 남녀 4∼5쌍이 정사각형으로 서서 마주 보며 일정하게 규정된 대형으로 춤추었다. 카드리유는 '사교'가 '눈요깃감'으로 변형된 형태로 1840년대 유흥가 술집 무대에 등장했다. 활기찬 4분의 2박자 음악과 일제히 다리를 치켜 올려 속옷과 다리를 드러내는 동작은 금세 호색한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유명한 캉캉 춤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의 캉캉은 여성 4명 또는 남성 2명과 여성 2명이 한 조가 되어 춤추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맨살 다리와 속옷을 보여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오리가 궁둥이를 흔들 듯 엉덩이를 까 보이는 독특한 동작이 화제가 되었고, 여기에서 캉캉이란 춤 이름이 비롯되었다. '캉캉'(cancan)이란 말은 '오리'라는 뜻의 프랑스어 'canard'를 애교스럽게 부른 것이다.
이 무렵 자크 오펜바흐(1819∼1880)를 비롯한 작곡가들이 경쾌한 풍자 음악을 작곡하여 캉캉의 유행에 단단히 한몫 했다. 오늘날 파리 '리도쇼'의 명물인 캉캉 춤(프랜치 캉캉)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백 주년 축제 때 흥행사인 지드르가 사교댄스인 카드리유와 당시 유행하던 캉캉 춤을 호화롭게 변형시켜 선보인 것이다.
지드르는 보다 확실히 화제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호색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속옷을 입지 않은 무용수의 섹스를 순간을 순간적으로 엿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차올리기', '엉덩이 걷어 올리기', '넓적다리 벌리기'라고 불리는 도약은 어느 것이나 스커트 속을 아슬아슬하게 엿보게 하려는 계산에서 시도되었다.
특히 지드르는 4명이 아닌 수십 명의 무희들이 집단으로 대열을 이루어 캉캉 춤을 추게 함으로써 호색적인 분위기에 장엄미까지 추구하였다. 이 캉캉 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이런 열기에 힘입어 '물랭루주'나 '타바랑' 등의 다른 유명한 카바레(댄스 홀)에서도 다투어 캉캉 춤을 무대 메뉴로 등장시켰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는 독특한 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이것은 옛날 이 곳이 풍차가 줄지어 있던 시골이라는 점에 착안해 지은 이름이었다. 현재 댄스 홀 '발뒤 물랭루주'(Bal du Moulin Rouge)에서는 캉캉 춤 외에도 인기 연예인의 쇼가 날마다 공연되고 있다.
기차 여행과 추리 소설
19세기 영국이 산업 혁명을 드높이 외쳤을 때, 대도시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에 따라 빈민촌이 급증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생활은 대체로 가난했다. 어린이까지 나서서 밤늦도록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도 사정도 좋지 못해서 빨래는 물론 식수도 제대로 확보하기 힘들었다. 공중목욕탕과 공동 세탁실이 마련되긴 했지만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들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절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 1860년대부터 차츰 생활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 무렵 토요일에 반일 휴가를 얻었으며, 큰 회사에서는 매해 14일의 유급 휴가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철도의 보급과 함께 여가를 내어 여행을 즐기는 가족이 차츰 늘어나게 되었다. 철도 회사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관광 특별 열차를 운영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바야흐로 '철도 여행'은 대중 레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후 철도망이 확대되고 철도 회사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승객을 끌기 위하여 운임 인하 다툼이 벌어졌다. 또한 주말이라든가 휴일에는 값싼 3등 차표를 발행하거나 특별 열차를 증편하여 해안이나 농촌, 특별한 행사가 있는 장소로 사람들을 대량 운송하였다.
한편, 농촌의 노동자는 당일치기 왕복 차표를 사서 도시로의 1일 여행을 즐겼다. 이렇게 해서 바스, 브리튼 같은 온천 지대나 해안의 행락지는 상류 계급에서 중산 계급으로 이용 계층이 확대되었고, 1870년대가 되자 일부나마 노동자 계급도 찾아 들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철도는 영국 대중 사회의 형성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지적 수준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철도는 20세기 들어 또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이른바 고급형 '특급 열차'가 새로운 여행 패턴으로 인기를 끌면서 '기차여행의 낭만'이 유행한 것이다. 20세기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도 특급 열차 바람이 불었으며,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오리엔트행 침대 열차가 연일 운행되었다. 1905년에는 유럽과 러시아, 극동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됨으로써 기차 여행객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기차 여행의 열기와 탐정 소설의 유행에 힘입어 '철도 미스터리'라는 신선한 추리 소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철도 미스터리'의 유행은 영국 작가 프리먼 크로포츠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본격적인 추리 소설의 황금 시대를 맞고 있어서 홈스를 비롯한 숱한 명탐정들이 멋진 추리 솜씨를 발휘하여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 무렵에 철도 기사를 퇴직한 크로포츠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무능력자 취급을 받던 경찰관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또한 사건 현장을 '열차'로 선정하고 '알리바이'를 사건의 열쇠로 삼았다.
그가 1920년 처음 발표한 <나무통>은 화물 열차에 선적된 궤짝의 내용물이 어떻게 바꿔치기 되는가를 긴박감 있게 전개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처녀작의 성공에 마음이 흡족해진 크로포츠는 <폰슨 사건>, <프로테 공원의 비밀>, (존 매길 경의 마지막 여행>, <열차에서의 죽음> 등등 장편소설을 연이어 발표하여 철도 추리 소설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후 유명한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끊임없이 이동하는 열차의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즐겨 작품 소개로 삼아 영국 추리 소설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핫도그와 햄버거의 유래
패스트푸드는 미국에서 생성된 음식 문화다. 시간을 돈으로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관념이 '셀프 서비스' 문화와 함께 빨리 먹을 수 있는 편리한 음식을 낳은 것인데, 패스트푸드의 대표적인 예가 핫도그(hot dog)와 햄버거(hamburger)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핫도그라는 소시지, 즉 프랑크는 185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축산 협동조합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만들어 놓고 보니 모양이 독일의 사냥개 닥스훈트(dachshund)와 닮아서 '독'(dog)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큰 소시지를 그대로 접시 위에 올려놓고 썰어 먹었으며 사워크라우트라는 시큼한 맛의 절인 배추를 곁들였다. 19세기 말엽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먹었는데, 어떤 파티장에서 프랑크의 기름이 자꾸 손에 묻어 귀찮자 빵 위에 얹어서 먹은 것이 변형되어 오늘의 '핫도그'가 됐다고 한다. 이후 이 간식은 프로 야구 경기로 인해 길에서도 먹을 수 있는 간편한 패스트푸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1900년 뉴욕 야구 경기장에서 한 장사꾼이 '새로 나온 핫(hot), 핫(hot)'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따끈한 '독' 소시지를 팔았는데, 이것이 의외로 히트한 것이다. 핫도그는 그 자리에서 먹거나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편의성이 돋보였기에 곧 운동장의 별식이 되었다. 그러자 다른 상인들도 핫도그를 팔았고, 출출한 배를 간단히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커피와 함께 짝으로 사 먹는 유행이 시작되었다. '핫도그'라는 이름은 이처럼 소시지를 따끈한 상태에서 먹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햄버거도 독일 음식 문화의 소산이다. 15세기경 함부르크 사람들은 잘게 저민 질 나쁜 쇠고기에 양념을 넣어 맛을 낸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가난한 계층의 기본 식사였다. 1888년 영국에서는 류머티스나 관절염에 함부르크 스테이크가 좋다 하여 인기 있는 요리로 유행하기도 했으며, 이것이 19세기 말 독일 이민의 물결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햄버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햄버거가 등장하였다. 이때 '햄버거 스테이크'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먹는 양식도 변형되었다.
상인들은 핫도그처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도록 빵 사이에 저민 고기를 넣어 샌드위치처럼 팔았고, 마음 바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서서 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햄버거 스테이크'는 '햄버거'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햄버거는 함부르크 스테이크가 미국화된 요리로, 접시 위에 올려놓고 칼로 썰어 먹는 양식이 격식 없이 그냥 먹는 간편 식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의 대대적인 유행은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나타났다.
1948년 영화배우가 되는데 실패한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널드라는 형제가 햄버거 가게를 차렸다. 당시 햄버거 가게는 손님들이 주문을 해 오면 음식을 만들어 파는 형식이었으나, 맥도널드 형제가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는 미리 만들어 놓은 햄버거를 손님들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내놓는 새로운 판매 전략을 취했다. 이른바 '퀵 서비스' 개념을 도입한 판매 방식이었다. 이 같은 방식은 큰 인기를 끌어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때 밀크쉐이크 회사 대리점을 하고 있던 크록이라는 사람이 맥도널드 형제에게 상표와 제조 기술 등을 팔 것을 요청하였고, 1961년 맥도널드 햄버거의 사업권을 27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 후 맥도널드 형제는 사업에서 은퇴했으나 맥도널드라는 햄버거 브랜드는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석 식품 업체인 미국의 맥도널드사는 햄버거를 판매하여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는데, 맥도널드의 세계적인 유행에는 치밀한 음식 문화 분석이 뒷받침되어 있다. 즉, 햄버거의 주원료는 쇠고기이지만 나라에 따라 재료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전 인구의 83%가 힌두교도인 까닭에 소를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인도에서는 쇠고기 대신 닭고기나 양고기를 쓰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고기를 쓰기도 한다.
곰 인형의 아버지, 루즈벨트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는 갖가지 곰 인형이 유행하였는데, 모든 곰 인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로봇처럼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앉힐 수도 있는 이 곰 인형은 묘하게도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관점에서 탄생했으며 그 배경엔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 무렵은 열강이 약소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때로 세계 곳곳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비교적 평화롭던 시대가 힘이 지배하는 시대로 변해 가던 과도기로, 곰 인형은 이런 강자에의 동경 심리에서 비롯된 유행이었다.
서양에서 곰은 미련한 동물이 아니라, 힘세고 영리한 강자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초기의 곰 인형은 긴 다리와 털 복숭이 같은 긴 털을 지닌 야만적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곰 인형 유행은 독일의 스테이프(Steiff)사가 선도했다. 스테이프사는 1902년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형태의 곰 인형을 대량 생산했으며, 1905년 당시 코끼리 인형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동그란 검은색 단추 눈을 곰 인형에 그대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곰 인형유행에 더욱 불을 당겼고 이후 곰 인형의 표준이 되었다. 독일의 빙·허먼, 미국의 아이디얼·콜롬비아, 영국의 채드밸리·파넬·딘스 등등 다른 회사에서 생산된 많은 곰 인형들이 스테이프의 특징을 그대로 모방해 만들어졌다.
이런 형태의 곰 인형을 미국에서는 '테디 베어'(Teddy Bears)라 불렀다. '테디'는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의 애칭으로, 테디 베어의 유행은 1902년의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테디는 1902년 11월 미시시피 주를 방문했을 때 초청자의 새끼 곰 사냥권유를 거부하였는데, 이것을 <워싱턴 스타> 지의 시사 만화가가 풍자 만평으로 신문에 실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무심코 보아 넘겼던 그 만평을, 브루클린의 장난감 가게 주인만은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테디의 곰 사랑 정신에 감동해 당시 가게에 막 진열된 곰인형에 '테디 베어'라는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테디 베어는 반응이 좋았으며, 이후 테디의 인기가 급격히 높아져 감에 따라 그에 비례해 테디 베어 또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테디는 미국의 제26대 대통령(1901∼1909)으로 재임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력으로 미국을 이끌었는데, 그의 판단 잣대는 '전체 국민의 이익'이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국민의 입장에 서서 정책을 펴나갔다. 철도, 석유, 고무, 소맥분 등 전 분야에 걸쳐 독과점의 폐해를 낳았던 43개 독점 기업을 제소하여 '트러스트 파괴자'자는 별명을 얻었으며, 국유림화를 강력히 추진해 석유, 석탄 산지와 공원, 수력 발전 용지까지 후세를 위하여 보존하려 했다.
그는 앞서 재임한 3명의 대통령이 추진한 것보다 빠른 기간에 넓은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였다. 다시 말해, 테디는 강력한 국력을 위해 노력했고, 자연 환경 보호에 앞장섰던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에는 곰이 많았기에 그의 정책 추진은 곰 인형 유행과 연결되었다. 국민을 위한 봉사가 국민의 사랑으로 이어져 친밀감 있는 인형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며, 인형의 모습 또한 한결 일반적으로 브라운색을 띤 앉은뱅이 곰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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