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온 보따리 장사부대
이종서(서울대 박사과정)
옛날에 중국 상인단의 두목(두강)으로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고려의 예성강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다. 하두강은 그녀의 남편에게 내기바둑을 걸어 일부러 지고는 다시 두 곱을 걸었다. 남편은 입맛을 붙이고 부인을 걸었다. 하두강은 단번에 이기고 부인을 배에 싣고 갔다. 남편은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노래를 지었다.
한편, 그 부인은 옷매무새를 견고하게 하였으므로 하두강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을 실은 배가 바다에 들어섰을 때, 뱃머리가 돌고 가지 않았다. 점을 치니 `정절 있는 부인이 신명을 감동시켰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파선하리라’는 점괘가 나와 두려워 돌려보냈다. 부인 역시 노래를 지었는데 후편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가 세상에 불리게 된 사연을 알리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다른 면에서 보면 중국 상인이 고려에 와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무역선의 최종 정박지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규보는 “조수가 들고 나니 오가는 배는 머리와 꼬리가 잇대었어라. 아침에 이 다락(예성강루)밑을 지나면 한낮이 채 못 되어 남만(남방의 이국)의 하늘에 들어가는구나!”라고 노래할 정도로 벽란도는 번창했다. 이들 벽란도에 정박한 무역선은 어떠한 위험을 겪으며 고려에 왔을까? 선주와 상인들은 대개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무엇을 팔고 무엇을 사 갔을까?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
고려시대에 바다에서 배를 추진시키는 기구는 노와 돛뿐이었는데 노는 근해의 짧은 거리나 좁은 해협을 항해하는 데는 유용하였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 먼 거리를 가기에는 무리였고, 역풍이라도 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선은 온전히 돛에 의지하여 먼 거리를 항해하였다. 그리고 돛을 빌어 배를 가게 하는 것은 계절에 따라 한편으로만 부는 계절풍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오는 무역선들은 주로 절강성의 명주(현재의 닝보)에서 출발하여 연해를 따라 북상하다가 정동으로 방향을 잡아 우리나라 흑산도를 경유, 예성강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올 때는 남서풍을 타고, 갈 때는 북동풍을 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월별 평균 풍향을 보면, 겨울(12- 2월)에는 북서풍이 많이 불고, 여름(6- 8월)에는 남동풍과 남서풍이 많이 분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는 풍향의 변화가 몹시 심하다. 이 때문에 정확히 일치하는 바람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당시 사람들은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로 해결하였으니, 여덟 방향의 바람 가운데 정면에서 부는 역풍만 아니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었다. 이해를 위하여 고려 전기 송나라 사신을 따라 왔던 무역선 한 척을 기록대로 복원해 보자.
길이는 대략 30여 미터이고 깊이는 9미터, 너비 5.5미터이다.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V자형으로 가파르게 좁아들었다. 이렇게 하면 밑이 넓은 배보다 심하게 흔들리는 대신 쉽게 전복되지 않아 큰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돛대는 둘인데 앞의 것은 24미터, 뒤의 것은 30미터이다. 돛의 너비는 50폭으로 양 옆에는 풀로 짠 날개 모양의 돛인 뜸을 별도로 두었다. 큰 돛대 꼭대기에는 야호범이라는 풍향 조절용의 작은 돛을 달았다. 야호범이란 이름은 들여우와 같이 조화가 많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뱃머리(이물) 양 기둥 사이의 바퀴에는 약 150미터 길이의 닻줄을 감았다. 선미(고물)에는 중심키 하나와 보조키 셋을 달았다. 그리고 양쪽에 5개씩 노 10개를 정착하였다. 쌀 2천가마를 실을 수 있고 승선인원은 모두 60명이다. 이 배는 다른 배들에 비해 특별히 큰 것이 아니다.
상인들은 바람이 바로 뒤에서 불면 고정 돛을 높이 올렸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흔히 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양 옆의 뜸을 펼쳐 이리 저리 움직여 방향을 잡았다. 뜸과 키를 이용하면 비록 옆에서 부는 바람을 타더라도 갈지자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강하거나 약하면 야호범을 조정하여 속도를 조절하였다. 역풍이 불거나 돌풍에 밀리게 되면 돛과 뜸을 황급히 내리고 닻을 던져 배를 고정시켰다. 조류가 급히 흘러 배가 밀리거나 암초사이를 지날 때는 온 선원들이 노에 매달려 정확하게 길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 명주에서 출발한 배들은 대력 10일에서 20일이면 고려에 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계절풍이 돕고 항해술이 발달했다 해도 그것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봄 가을 기압이 바뀔 때면 느닷없이 돌풍이 일었고 여름에는 태풍이 엄습하여 돛대를 부러뜨리거나 배를 한쪽으로 급하게 기울였다. 거기에다 큰 물결이 일어 배를 쳐 전복시켰다. 또한 겨울바람은 지나치게 거세어 항로를 바로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배들이 물속에 가라앉거나 남방으로 떠밀렸다. 사신을 실은 배조차 상당수 파선하여 국가 예물을 잃은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익사했다. 고려 말 정몽주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깨어져 표류하다 간신히 구원되었는데, 이 때 10명의 사절단 가운데 겨우 2명만이 살아 남았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특별히 경험 많은 선원들을 채용했을 사절단의 배가 종종 난파했을 정도이니 그보다 낡고 규모가 작은 상인들의 배는 더욱 위험하였다.
따라서 상인들은 반드시 좋은 바람을 기다려 출항하였는데, 올 때는 대개 하지 무렵부터 부는 부드러운 북풍을 타고, 갈 때는 음력 8, 9월 무렵의 아직 거세지지 않은 남풍을 탔다. 그러나 때로는 해가 바뀌도록 알맞은 바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갈 때가 올 때보다 어려움이 심하였다. 가을에는 바람이 변덕스러워, 바다로 나갔다가도 역풍에 떠밀려 되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하두강도 바로 이 역풍에 곤욕을 치렀다고 짐작된다. 결국 2년 혹은 3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여 끝내는 고려에서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는 상인도 있었다.
황해를 가로질러
송나라에서 오는 항로로는 우선 산둥반도 북단의 등주를 떠나 동쪽으로 황해도 북부에 이른 다음 장산곶을 돌아 예성강으로 들어오는 북로가 있었다. 이 길은 거리도 짧고 큰 위험도 없었으며 비록 난파하더라도 어쨌든 해안에 도착할 확률이 컸다. 다만 장산곶을 돌 때, 물결이 급하여 파선할 위험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북로로 가는 배들은 장산곶 부근에 이르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이 곧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이다.
이렇듯 좋은 항해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왕래하는 배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대신 남로의 교통이 활발해졌다. 거란, 여진 등 송나라에 적대적인 북방민족이 중국 북쪽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로를 이용하면 자칫 그 경내로 들어갈 위험이 컸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강남 개발이 진척되어 중요한 물산은 대개 그 곳에서 산출되었다. 동남아시아나 인도, 아라비아의 물품을 실은 배들도 강남의 항구들에 기착하였다. 따라서 고려에 오는 상선들은 대개 강남에서 물품을 싣고 출발하였으니, 출발지로는 명주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길은 북로에 비해 거리가 배나 되었다. 바다 또한 위험하였다.
서해는 깊이와 바닥의 구성물질, 해류에 실린 먼지 등으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낸다. 선원들은 바다 빛깔을 보고 출항지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짚어낼 수 있었다. 명주에서 출발한 배는 백수양에서 황수양, 흑수양의 순으로 바다를 지났다.
백수양은 양쯔강의 앞바다로 희뿌연 민물이 다량 흘러들고 수심이 얕아 흰 빛을 띠었다. 중국에 가는 배는 바다 빛깔이 희게 변하면 목적지에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수양은 누런빛을 띠는 데서 얻은 이름이다. 서해를 보통 황해라 하는 것은 이 황수양으로 서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몽고 고비사막에서 봄날이면 강한 서풍이 불어 황토 먼지(황사)를 날리는데 그것이 두텁게 쌓인 대지 위로 황하가 흘러 이렇게 된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되지 않을 일을 `백년하청`이라 하는 것은 황하의 물 빛깔이 결코 맑게 될 수 없음을 빗댄 말이다.
이 바다에 이르면 선원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이는 물빛이 사람을 현혹시켜서가 아니라 바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황하에서 유입된 많은 토사는 물줄기를 따라 천여 리를 흘러내리다가 마지막에 군데군데 모래 언덕을 높이 쌓아 놓았다. 그런데 물빛이 누렇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배가 이 위를 스쳐 키가 부러지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밑창이 V자형으로 좁아든 형태였으므로 얹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곧 전복될 판이었다. 그래서 황수양을 지날 때면 추를 드리워 깊이를 재면서 조심조심 나가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여행기에는, “배가 갑자기 모래톱 위로 올라가기에 엉겁결에 돛을 내렸더니 돛대가 두 동강이 났다”,“낮에 세 개의 보조키가 부러졌고 밤에 중심키가 또 부러졌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이곳의 위험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려운 황수양을 지나면 이번에는 바다가 점점 검은 빛을 띠게 된다. 이는 깊이가 깊어지면서 햇빛이 투과하지 못하여 생긴 현상인데 깊은 만큼 파도 또한 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바다를 끝이 없다는 뜻에서 ‘무저곡’이라 불렀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곳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물빛은 어둠이 깊이 파고들어 검기가 먹과 같다.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는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치는 것이 산들이 치솟는 듯하다.
배가 파도 위로 오르면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청할 뿐이다. 그러다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파도의 높이가 하늘을 가려,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만 남는다.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밥알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흑수양을 거의 지나면 물빛이 차차 맑고 푸른빛을 띠게 된다. 이 바다에 이르면 뱃사람들은 그간의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축하하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맑고 푸른 물빛은 고려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대개 흑산도 부근의 바다가 이에 해당하는데, 현재에도 인천 앞바다의 누런 물빛이 만리포나 변산에 이르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선은 흑산도를 스쳐 군산도(군산은 조선말까지만 해도 섬이었다)에 이른 다음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다.
도중에 태안반도 부근의 사나운 조류만 조심하면 이제 벽란도에 도착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뛰어난 조선술, 빈약한 해외진출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품은 주로 송나라 상인들이 실어 날랐다. 이들은 중국과 남방의 물화를 싣고와 고려의 물건과 교역해 갔다. 물론 고려 상인도 중국에 진출하였고, 일본 상인도 가끔 드나들었지만, 송나라 상인의 활동에 비하면 미약하였다.
그렇다고 고려의 선박건조기술이 송나라에 뒤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배는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튼튼하기로 해외에 정평이 나 있었다. 고려 후기 고려. 원 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섰다가 돌풍을 만났을 때에도, 중국 배는 다 부서졌지만 고려의 배만은 온전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조선술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하지 못한 원인은 주로 국내의 시장 규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는 값비싼 물화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에서 소비하는 해외의 산물은 대개 지배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치품에 국한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에는 대규모 선단을 운영할 정도의 상업자본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송나라에서는 재정안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대외무역을 장려하였으며, 상업자본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조선술이 뛰어난데다 나침반의 발명 등으로 항해술 또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앞 시기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인도와 동남아의 물품을 실어 날랐던 것과 달리 이제는 송나라의 선단이 멀리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간의 무역은 주로 송나라 상인의 손을 빌어 이루어졌다. 이들의 방문 기록을 통계로 보면 260여 년 동안 약 130여회에 걸쳐 총인원 5천 명 정도가 내왕하였다. 남아 있는 기록이 이 정도이니 기록에 빠진 것과 밀무역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송나라 상인이 대부분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상인단이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식국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다. 대식국은 아라비아를 일컫는 이름으로 1024년(현종 15)과 이듬해, 그리고 1040년(정종 6)에 와서 열대 특산의 몰약, 베트남 남부지방의 향료, 수은 등을 바쳤다. 이들의 방문은 세 차례에 그쳤는데, 이는 이익이 작아 굳이 내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송나라 상인의 중계로 고려 물품을 계속 사갔고, 이러한 과정에서 ‘코리아’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단장수 왕서방과 고려인삼
벽란도에 도착한 상인들은 대개 사헌무역의 방식으로 물화를 교환하였다. 사헌무역이란 물건을 왕에게 바치면 왕은 대가를 사여해 주는 교역방식이다. 고려에서는 외국 상인을 일종의 사적인 사절단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지고 온 것을 모두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궁중이나 관에서 필요로 하는 좋은 물품만 바치고 나머지는 시장을 열어 팔도록 하였으므로 민간인도 해외의 물품을 살 수 있었다.
송나라 상인이 가져온 물품을 대금으로 환산하면, 비단류가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할 것이다. 당시 송나라의 수출품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과 자기였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에 뒤지지 않는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만큼 자기 수입은 소량에 그치고 주로 비단을 수입하였다. 재수 없는 어느 송나라 상인은 비단을 무려 6천여 필이나 고려 관청에 떼였으니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양을 싣고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단 다음으로는 차와 약재를 들 수 있다.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귀족과 승려 간에 퍼졌으므로 양질의 중국차를 많이 수입하였다. 또한 중국 의서에 따라 약을 처방했으므로 중국 및 남방의 약재를 수입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문종이 중풍에 걸려 송나라에 약재를 요청했을 때, 100여 가지를 보내온 사례를 볼 수 있다.
서적 또한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고려 지배층은 문화적 욕구에서 송나라에서 펴낸 책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일었다.
고려인은 송나라에서 유출이 금지된 지도와 지리서까지 사오려 하였으며, 송나라 상인들은 우방국 고려에 판다는 명목으로 책을 싣고는 슬쩍 북방의 적국 요나라로 들어가 10배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서적을 둘러싸고 국제 정보전이 벌어졌던 셈이다. 악기와 음악도 수입되어 고려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다양한 상품들이 수입되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향료, 향목, 칠기, 남방의 과일, 물소뿔, 상아, 비취, 마노, 수정, 호박 등 다양하다. 재상가에서 기르던 공작도 여기에 추가될 것이며 앵무새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그러면 고려에서는 무엇으로 이들 물화를 사들였을까? 당시 국내에서는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지 않았으므로 물품으로 대금을 지급하였다. 일종의 구상무역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나간 것은 삼베와 인삼이었다. 삼베는 국내에서 화폐 대용으로 사용한 품목인 만큼 매우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모시는 질이 좋아 한 번에 몇 만 필 단위로 수출되었다. 인삼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약초서인(신농본초경)에 이미 상품의 약재로 정평이 나서 송나라 상인에게 큰 이익을 남겨 주었다.
종이, 먹 등도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려의 종이는 매우 질긴데다 백옥같이 희고 윤이 나 최상품으로 간주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좋은 종이를 평할 때 “고려 종이 같다”고 할 정도였다. 먹도 많이 수출하였는데 종이와 달리 큰 호평은 받지 못하였다. 색은 칠흑같이 검으나 광택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동파는 “고려먹을 가는 것은 숯을 가는 것 같다”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고려먹은 입자가 미세하고 색이 검은 장점이 있어, 중국 먹과 혼합하면 좋은 먹이 되었으므로 수출이 끊이지 않았다. 수출품 명단에서는 이밖에도 잣, 연적, 자수정, 돗자리, 칠, 부채, 나전칠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귀족의 사치품 수입과 금. 은의 유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는 무역수지면에서 적자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발달한 문화와 값비싼 사치품을 주로 수입한 반면, 수출품은 인삼을 제외하면 별로 고가품이라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수출로 수입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국제 거래에서 화폐로 대용하던 금, 은 등의 귀금속으로 적자분을 메워야 했다. 국내의 재화가 송나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상당량의 금, 은을 비축했던 것 같다. 문종 때 흥왕사에 세운 금탑은 무려 427근의 은으로 속을 대고 금 144근으로 겉을 입혔다. 한 근이 600그램이니, 은이 256.2킬로그램, 금이 86.4킬로그램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다. 또 몽고의 1차 침입 때, 그들을 달래려고 보낸 금과 은이 각각 140여 근과 3천4백여근이었다. 정부에서는 금 수백 킬로그램과 은 수천 킬로그램 정도는 늘 확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금, 은은 거의가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었다. 공물의 양을 정한 규정 가운데 ‘황금10량, 은 2근’이라는 기록이 있고, 금과 은이 나는 고장은 특별히 관리하여 별도로 많은 수량을 수취하였다. 고려 지배층은 백성들이 애써 바친 금, 은으로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적자분을 메워 나갈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신분별 소비 제한’이라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일례로 최승로의 주장을 들어 보자. 그는 “신라 때는 귀천의 구별을 위해 백성이 중국산 비단을 입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관리들이 충분히 입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재력만 있으면 중국 비단을 입으니, 가난하면 비록 벼슬이 높아도 갖출 수 없습니다. 관리들만 중국비단을 입게 하고 평민은 거친 국산 명주만 허락합시다”라고 건의하였다. 아마도 고려에 들어와서는 소비에 제한을 두지 않아 수입비단 값이 꽤나 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신분간의 귀천을 밝힌다는 명분하에 피지배층의 소비를 규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