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44
(중종 5)
** 기묘사화(2)
이미 기득권 세력이 되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반정 공신의 훈구파는 조광조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를 갈고 칼도 갈고 있었다. 조광조의 지지자였던 중종 역시 자신을 왕위에 올린 공신인 훈구파를 공격하는
조광조 일파의 과격성과, 끊임없이 왕인 자신에게 修己를 통하여 성인군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급진 과격성에
염증을 내고 있던 참이었다.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 훈구파는 후궁, 경빈(敬嬪) 박씨로 하여금 중종에게
조광조 등을 무고하도록 하고, 궁녀를 시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써서 벌레들이
갉아먹게 한 다음 그 나뭇잎을 따다가 중종에게 바치는 등, 주변 상황이 조광조에게 이상하게? 돌아갔다.
또한 훈구파 대신들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宮에 들어가 중종을 만나서 조광조 세력이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하니..
마침내 중종은 훈구파 중신들의 탄핵을 수렴하여 조광조 일파를 징계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기묘년에 일어났다 하여 己卯士禍라고 한다.
* 走肖爲王(주초위왕)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주 초는 조(趙)의 파자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조광조가 왕이 될 역모를 꾸민다는 증거로
이 잎을 따다가 중종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정암 조광조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더불어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불린다.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다.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은 건 반대파가 조작한 ‘가짜뉴스’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 때의 일이다.
이 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尹自任)ㆍ박세희(朴世熹) 등
대부분의 개혁 세력은 투옥되어 사약을 받거나 유배된다.
조광조는 김정ㆍ김식ㆍ김구와 함께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鄭光弼, 1462~1538년)의 적극적인 간언으로 목숨은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된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金詮)ㆍ남곤ㆍ이유청(李惟淸) 등이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이 된 후,
그들에 의하여 기묘년 12월에 사사된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詩로 남겼다.
愛君如愛父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땅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 <임금을 향한 붉은 내 마음 환히 비추리라>
조광조가 생을 마친 유배지 화순에는 遺墟碑와 함께 그를 기리는 '竹樹書院'이 세워져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조광조는 사약을 가져 온 금부도사로부터 조정에서 자신을 漢나라 때의 왕망(王莽)에 비유한다는 말을 듣고,
“왕망은 사사로운 욕심을 취한 자가 아닌가?”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한다.
힘으로 백성을 억압하여 다스리는 覇道政治를 지양하고 교화를 통한 각 개인의 자율성을 제고하려는
왕도 정치를 지향한 그의 정치 노선이 반대파(훈구파)들로 인하여 크게 왜곡되었던 것이다.
사적인 욕심을 누르고 도덕적인 심성을 키워 모든 백성이 함께 잘 살아가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한 자신이 사약을 앞에 놓고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을 충족시킨 '왕망'에
비유되었다는 사실에 삶과 정치에 대한 허망함을 느꼈으리라..
<조선왕조실록> 45
(중종 6)
* 풍운아 趙光祖를 재조명하며.
조광조는 중종과 對面 한 번 갖지 못하고 유배의 길에 올랐는데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길이 되고 말았음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조광조는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인물로, 반듯하고 사심이 없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재라면 천민이라도 등용하고 어느 누구라도 노력하여 실력을 갖추면 입신할 수 있다는
王政治下의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린아같은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도 스스로 修己하고 계도하도록 하여 요순시대같은 나라를 만들고자 온갖 정열을
쏟아부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의 냉정함을 헤아리지 못한 실수와 王政治下 에서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간과한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만 것이다. 거기에 중종의 군왕으로써의 자질 부족 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채 유배지에서 죽게될 때, 그의 나이 38세라!
이렇게 아까운 인재 한사람이 사라져갔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그토록 아끼던 중종이 그가 너무 커지자 부담스러웠나?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무수한 신료들을 뚜렸한 명분도 없이 모두 죽여버리니,
오죽하면 史官들조차 중종이 임금에 맞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취지의 촌평을 남겼을까?
조광조와 그의 개혁동지들 모두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자, 반대파인 훈구파 정국공신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갔다.
민심은 흉흉하여 각종 고변과 익명서가 난무하였으며, 임금에게 직언해야 할 대간마저 중심을 잃고
권력만을 좆으니,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이자 중종의 실패였다.
조광조가 죽고 난 후 조정은 南袞(남곤)이 제일의 실력자가 되어 좌지우지하게되는데..
이런 와중에 기존의 훈구파와는 또 다른 인물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가 김안로이다.
김안로는 명석하고 언변이 좋을뿐아니라 매사에 해결책을 잘 제시함으로써 차기 또는 차차기를 이끌
인물로 주목을 받았는데 급기야는 자신의 아들을 중종의 딸(공주)과 혼인시킴으로써 중종의 총애에
사돈까지 맺게되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그러나, 好事多魔라 하였던가?..
南袞(남곤)은 김안로를 위험인물로 보고 그를 소인배와 기타 이유로 몰아 귀양을 보냈는데,
김안로도 그 운이 다했는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으니 무상한 것이 권력이렸다.
그나마 남곤은 눈을 감으면서 조광조를 죽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중종, 인종, 명종 시대는 이렇게 조광조의 등장과 퇴장, 김안로, 문정왕후, 윤원형, 윤임 등의
피 터지는 권력싸움이 벌어지던 시대인데 (TV 史劇 “여인천하”에서 잘들 보셨을터, 지금도 볼 수있음.^^),
그러한 권력싸움의 정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
<조선왕조실록> 46
(중종 7)
** 중종의 죽음
南袞이 죽고난 며칠 후, 세자의 생일에 궐에서 해괴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꼬리가 반쯤 잘리고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 한마리가 동궁 숙소 근처에서 발견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13세의 세자는 쥐띠였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灼鼠의 變)”이라 한다.
조정에서는 누군가 세자를 저주하여 벌인 일로 간주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대왕대비가 당시 세도를 부리던 경빈 朴씨(박원종의 수양 딸)를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뚜렸한 증거도 없이 경빈 박씨는 아들 복성군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된다.
이 당시에 음모와 모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정왕후와 김안로가 있었는데
이 둘 중, 누군가 벌인 일을 경빈 박씨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한편, 유배에 처해있던 김안로는 南袞의 죽음과 '灼鼠의 變'(불에 탄 쥐의 사건),
그리고 마음에 드는 신하를 원하는 중종의 뜻에 따라 조정으로 복귀했고,
타고난 권모술수를 발휘해 중종의 신임을 얻고 곧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김안로는 심정 등, 반대파들을 누명을 씌워 모두 사사하고, 새로운 사건을 조작하여
귀양가 있는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까지 사사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러한 김안로에게 신경쓰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이는 중종의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와
그의 친동생들인 윤원로와 윤원형이었다.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야심이 두려워 문정왕후를 폐위하고 윤원형 등을 없애려다 자신의 자식의
혼인 잔치석 상에서 체포되어 여러가지 죄목으로 유배에 처해지고 결국은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만다.
(후에 灼鼠의 變은 경빈 박씨가 아닌 김안로와 그의 아들, 며느리가 벌인 것으로 밝혀지고..)
중종은 어렸을 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이 대신들에 의해 끌려 내려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으로서, 평생 왕권 유지를 위해 항상 곁에 강력한 후원자 겸 심복을 두었다.
그러나, 그 후원자가 지나치게 컸다 싶으면 또 다른 신하들과 모의해 그 후원자를 가차 없이 제거해버리는
용인술을 썼고,(以夷制夷) 이러한 간특한 방법으로 중종은 39년 간이나 제자리(왕위)를 지켰다.
중종은 서슬퍼런 박원종 그늘 뒤에서 초기 시절을 보냈고,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왕위를 보존하다가
조광조를 죽였으며, 다시 김안로에게 힘을 몰아주는 방법으로 왕위를 지키다가 다시 김안로를 내쳤는데,
이때 죽은 사람이 오히려 연산군 때보다 많았다고 한다.
임금치고는 간특하기가 참으로 자식(광해군)을 질투한 선조와 비견될 만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왕위를 지킨 것 말고는 백성이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논 일이 없이
1544년 57세(재위 39년)로 병들어 죽었다.
(조광조 같은 인재를 계속 중용했더라면 今세기 들어 聖君으로 남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