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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대열 기무분야 동기생들의 이야기-문두식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수록할 대열의 현역시절 활약 약사를 작성하기 위해 병과별 해당 동기들의 대표집필을 통해 제공받은 내용으로서, 책자발간 이전에도 모든 동기생들이 함께 보면서 아! 그랬었구나! 하고 공감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아, 회고담으로 전재(轉載)해 올립니다.
아래 글은 공식구분의 병과는 아니지만 특수 분야 기무부대에서 활약한 동기생들을 대표해 사령관을 역임했던 문두식 동기가 작성한 것으로, 여타 동기생들의 상세한 근무기록은 물론, 기무사에서 퇴역한 동기생을 중심으로 공헌했던 활약상을 세세하게 부각해 올려주어서, 대열동기생 전체의 자부심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비교적 장문이지만 여기 공간이 자유로운 대열 카페에선 다 올리고, 책자애 수록할 때에는 기무부대 근무 동기생들의 이력과 활약상의 개관을 묶어 약사로 하고, 나머지 필자 문두식 동기 자신의 근무이야기 부분은 별도 개인 회고담으로 구분 편집될 것입니다. 이 점을 양해하면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註) 편집위원 김명수-
육사 27기 동기 기무사 근무 기록
문두식
1. 기무사를 거쳐 간 동기생들
27기 동기생 가운데 기무사(보안사 포함)에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은 가나다 순으로 김부명, 김용석, 김장수, 김준섭, 문두식, 박정학, 박종규, 송영근, 양태호,양주, 정재수, 제정관, 홍갑식, 황종구 등 총 14명이다.
이들 중 끝까지 기무사에 근무하다가 퇴역한 동기는 문두식, 박정학이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한 동기는 문두식과 송영근이다.
박종규 동기가 행정부처 사무관으로 갔고, 김장수가 소령 때 육군대학을 마치고 9사단에 연대 작전주임으로 갔다. 여타 김부명, 김용석, 김준섭, 제정관, 홍갑식은 중령 진급을 전후하여 야전 대대장으로 모두 진출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기무사를 거쳐 간 동기생들은 모두 훌륭한 모범 자원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씩 기무사 근무경력을 부대전입 순서별로 살펴보면,
◉ 양주, 정재수, 황종구, 양태호:
양주, 정재수, 황종구 동기가 중위 시절(1972~73년)에 잠깐 보안사에 근무하다가 야전으로 돌아간 바 있었고, 양태호 동기가 1973년에 김종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자 전속부관으로 근무한 후 1974년에 대위 진급과 동시에 고등군사반 입교로 부대를 떠났음.
◉ 홍갑식 : 1975년에 보안사에 전입하여 2사단 보안부대 반장, 보안학교 교관, 기획관리실 기획장교, 인사처 장교계장을 역임하고 1982년 8월 대대장으로 진출하면서 부대를 떠남.
◉ 김장수 : 1976년 전방 중대장을 마치고 보안사에 전입하여 26사단 보안반장, 7공수여단 반장을 마치고 육군대학에 입교하면서 부대를 떠남.
◉ 박종규 : 1976년 보안부대 전입하여 2군단 보안부대 반장으로 재직하다가 1978년 행정부처 사무관 발탁으로 부대를 떠남.
◉ 문두식 : 1979년 8월 소령으로 보안사 전입, 대공처 공작과 보직을 시작으로 중령, 대령으로 진급하는 과정에서 김포공항분실장. 1사단 보안부대장, 보안사 최초 주미대사관 무관보좌관. 연합사-수도군단-합참-서울지구 등 기무부대장을 거쳐, 1996년~1999년 사이 사령부 2,3처장과 참모장에 보직되면서 1996년 장군진급 발표 동시 국방부 기무부대장을 근무하고 2001년 10월부터 2003년 4월 퇴임 시까지 기무사령관을 역임함
◉ 김부명 : 1980년 8월에 노태우 보안사령관(당시 호칭) 수석부관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입교하면서 부대를 떠남.
◉ 김용석 : 1981년 2월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보안사에 전입하여 정보처 정치 계장, 보안처 동향분석 장교를 마치고 1982년 8월 대대장으로 야전 진출하면서 부대를 떠남.
◉ 박정학 : 1981년 2월 육군대학을 마치고 보안사에 전입, 정보처 일반정부부처 정보수집과 언론담당 계장으로 근무한 후, 중령 대령으로의 진급과정에서 연합사 보안부대 운용장교, 정보처 2과장, 2처 차장, 2군단 보안부대장, 연합사 보안부대장, 사령부 2처장 등을 거쳐, 1995년 준장 진급과 동시 육군본부 기무부대장과 1997년 1처장 근무 후 1998년에 전역함
◉ 김준섭 : 1981년 8월 박준병 보안사령관 수석부관으로 전입하였다가 1982년 8월 야전 대대장으로 진출하면서 부대를 떠남.
◉ 제정관 : 1981년 8월에 보안사에 전입, 정보처 외사계장을 역임하고 1982년 8월 야전 대대장으로 진출하면서 부대를 떠남.
◉ 송영근 : 2003년 4월에 문두식의 후임으로 제35대 사령관에 취임, 2005년까지 근무함.
2. 기무사 근무 동기생들의 역할과 공헌
기무사를 거쳐 간 동기생들의 기간 중 역할과 공헌도는, 일생을 기무사에 근무하고 전역한 박정학과 문두식, 그리고 35대 사령관을 역임한 송영근의 경우를 중심으로 기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박정학
▲ 근무 기록
-1981년 2월 육군대학을 마치고 보안사에 전입, 정보처 일반 정부 부처 정보수집과 언론 담당 계장으로 근무
-1982년 연합사 보안부대 운용장교로 근무
-1988년 정보처 2과장으로 근무
-1988년 대령 진급과 동시에 2처 차장, 2군단 보안부대장, 연합사 보안부대장
-1994년 2처장
-1995년 준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본부 기무부대장
-1997년 1처장으로 근무하고 98년 전역
▲ 재직 시 보람 있게 추진했던 일
1) 해외 6.25 참전 용사 초청 행사 추진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6.25 참전용사 재방한 사업 활성화에 기여했다.
당시에는 주 1회 대통령께 직보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건의하여 채택된 것이다.
당시에는 예산 등의 문제 때문에 향군회 등에서 소규모, 소극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었는데 이미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고 있던 1980년대 중반에 ‘우리 국가 홍보비를 많이 쓰는데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현재의 발전상을 보여주면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발적인 홍보대사가 될 것이므로 국가홍보비를 엄청 줄이면서 박 대통령 때부터의 성공적 경제발전을 홍보하는 데 크게 효과적이다’고 건의하여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0년에 방한했던 영국군 참전용사 스트레천(일등병 근무)이 “한국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습니다. 나는 내가 근무한 1년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 채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크게 번영한 한국을 보고 한국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한테 감사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있는 인생>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2) 통일 관련 활동 단체들을 국익에 부합하게 정립
1980년대 중반 당시에는 지금의 통일부(당시는 통일원)가 독립부처로 격상된 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할 때라 통일·평화 운동단체가 난립하여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다보니 상당수의 좌경화 단체들도 끼어들어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에 통일부를 중심으로 통일·평화 운동단체를 체계화하여 바른 단체에는 정부가 지원을 함으로써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대통령께 건의하여 바로 반영 되었다.
그 후,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 좌경 통일·평화 운동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차단됨으로써 활동을 침체시키는 데 기여했다.
3) 청와대 비서실 요원들의 일탈에 대해 직보
권력구조상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에 대한 직언은 매우 어렵지만, 대통령 가족과 청와대 비서관들의 비위를 직보하여 공직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일은 매우 민감하여 대통령께서도 ‘다시 확인’ 등의 지시를 함으로써 담당 수석비서관들에게 몇 번을 가서 증거와 함께 사실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 형제와 권력기관의 핵심인 청와대 비서관들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음으로써 전체 공직기강을 바루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 문두식
▲ 근무 기록
-1979년 8월 소령으로 보안사 전입, 9월에 대공처 공작과 역용공작장교 보직
-1982년 중령 진급과 동시 김포 공항 분실장. 83년 1사단 보안부대장
-1985년 대전 보안부대 대공과장
-1986년 3월 보안사 최초로 주미 대사관 파견(무관 보좌관) 미 국방성 공로 훈장 수상
-1991년 연합사 기무부대장
-1992년 수도군단 기무부대장
-1993년 전라북도 기무부대장
-1994년 합동참모본부 기무부대장
-1995년 서울 기무부대장
-1996년 기무사령부 2처장
-1996년 12월 장군 진급 발표와 동시에 국방부 기무부대장
-1998년 3월 1처장
-1999년 10월 참모장
-2001년 10월 기무사령관을 역임하고 2003년 4월 퇴임
▲ 재직 시 보람 있게 추진했던 일
1) 간첩 김00 검거
기무사에 전입하여 2년 만인 1981년9월 연세대학생 간첩 김00 일당을 검거.
그는 1981년 여름 방학 때 일본 아오모리(靑森) 해안에서 북한 공작선으로 월북 한 달간 간첩 교육을 받고 귀환. 당시 전혀 알지 못했던 주체사상을 최초로 집중 교육받고 귀환한 간첩이었음.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금 2천 9백만원을 수령하고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음. 노무현 정부에서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모든 간첩에게 진정한 간첩인지, 수사기관의 압력을 못 이겨 허위 자백에 의한 것인지를 조사했었는데 대부분의 간첩들이 자신은 결백했다고 주장했으나 내가 검거했던 간첩은 본인이 간첩이었다고 시인했다는 말을 들었음.
2) 1984년 10월 북한의 실상 알리기 활동
1984년 여름 망원동과 일산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이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요청하여 전두환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10월에 쌀과 의약품, 의류를 판문점 인근 대성동 마을에서 인수함. 당시 보병 제1 사단 보안부대장으로 현지에 근무하던 중이어서 중요한 보안 문제를 현장 에서 조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보고 들은 현실을 KBS 2TV에 나가 장병교육용 자료를 촬영하여 전군에 전파하였음. 쌀을 싣고 온 화물차가 매우 낡아 쇠막대기를 돌려 시동을 걸고 타이어가 낡아 허옇게 실밥이 보였던 기억이 남.
3) 민중당 이석기 검거
이석기는 원래 중부지역당 간 사건에서 주범 000의 하부 망이었다. 모든 조직원이 검거되었으나 이석기만 도주했고 모든 수사기관이 노력했으나 검거에 실패했는데, 기무사에서 검거했음. 순수 민간인이었지만, 그의 누나가 국방부 고위직에 근무하면서 도피 자금을 지속 지원하고 있어 군 관련 용의자였기에 2002년 9월 기무사에서 검거하여 경찰에 이첩하여 수사를 통해 재판에 회부 했음. 참고로 이석기는 2심 재판 도중 노무현 정부에서 사면 복권되었다가 민중당으로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국정원에 의해 다시 구속되어 수감 중에 있음.
4) 보훈 예산을 대폭 증액
2001년 당시 김대중 정부는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을 시행하여 민주화 유공자들에게 현금으로 2~3억 정도의 보상을 하였는데, 6.25나 월남전 참전 전사자, 상이군경, 참전 용사는 상대적으로 보상이 낮아, 실정을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 2002년 당시까지 6.25 전사자의 총 원호 보상액은 7천만 원 정도로 매우 낮았음. 김대중 대통령은 ‘호국영령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의 뜻을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보훈단체에 잘 전달해 달라. 다음 해에 예산을 대폭 늘릴 테니 지켜 보아달라.’는 당부가 있었고, 이듬해에 보훈 예산이 대폭 증액되었는데 일례로 최초로 참전 수당이 5만원 지급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30만 원으로 늘었음.
5) 병영 내무반 현대화 기여
당시 65만 명의 군에서 1년에 자살자가 100여 명 발생하여 원인을 분석 하고 미치는 영향을 대통령에게 보고. 그리고 당시 내무반 상태가 매우 불 비하여 여름에는 야간에도 섭씨 30도 이상으로 매우 열악하였음. 옥상에 가림막을 하고 물을 뿌려도 온도를 낮추지 못했음. 주간에 강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야간에 충분한 휴식이 되지 못해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사고 요인 이 된다는 점과 전방 지역의 화장실 50% 정도가 재래식이라는 점 등을 사진 첨부하여 보고하여 분대 단위 내무반 구조로 개선하기 위해 그해 말 내무반 개선 예산 1조 8천억을 반영하였음.
6) 군인 연금 정상화 기여
1998년도 IMF를 맞아 대폭 감소 되었던 공무원 급여와 연금이 2001년에 경제가 정상화 되면서 대부분 원래대로 회복되었는데 국방부에서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여 예비역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발생했음. 예를 들어 30 년을 복무하고 2년 전에 퇴역한 대령이 동일한 연수를 근무하고 지금 퇴역한 대령에 비해 20~30만 원을 덜 받게 된 것이었음. 이를 안 예비역 들이 남성대에 골프를 하러 온 전직 000 장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음. 모든 상황을 대통령께 보고하니 절차를 거쳐 정상화 하 도록 되었음.
7) 기무사 이전 사업 추진
기무사의 모체부대였던 특무대와 방첩대는 옥인동에 있다가 강창성 보안 사령관 시절 소격동으로 이전하여 유지해 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군부대 가 청와대 면전에 있어 부담스럽다는 여론 때문에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음.
대통령과 총리,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 등 NSC 멤버를 직접 방문하여 당 위성을 설득하여 국방장관의 허락하에 과천으로 이전하도록 23만 평 이상 을 매입하고 후임자들에 의해 이전이 완료되도록 예산을 모두 반영함으로써 현재 위치로 이전할 수 있게 했음.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과 운동하며 예산 을 확보했었음.
8) 주한 미군 보호 활동
2002년 여름에 한일 월드컵이 열렸음. 광화문 광장에 무려 7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민이 모여 응원을 펼쳐 장관이었지만 당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군은 긴장했다. 왜냐하면 당시 의정부에서 훈련하던 미군 장갑차에 여자 중학생 2명이 치여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가 맹렬했는데 하나 70만 응원 관중이 바로 옆에 주한 미 대사관의 담을 넘어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음. 당시 수시로 연합사령관을 방문하여 전국 미군 기지가 위치한 지역의 주민 동태를 알리고 친한 화 활동을 전개하도록 지역의 행정 기관장과 교류하도록 조치했음. 그래서 연합사령관은 ‘같이 갑시다’라는 구호를 언제나 강조했음. 아울러서 주한 미군 모범 용사 200명을 선발하여 매년 년 말에 2박 3일 우리나라의 명소를 관광하도록 조치했음. 경비는 사회의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밀레니엄 클럽’ 회원들의 성금으로 치렀고 뒷바라지는 기무사에서 저렴하게 주선했다. 이 사업은 한동안 본인이 사령관을 퇴직한 후에도 계속되어 삼성, SK 등 굴지의 기업에서 후원하여 실시했으나 근래에는 없어졌음.
9) 기무사의 개혁
기무사는 해왔던 업적에 비해 항상 욕을 많이 먹는 부대임. 대한민국 역 사에서 미군정 당국에 의해 공산주의자를 타도하기 위해 특무대가 만들어 졌고, 특무대는 해방 이후부터 사회를 어지럽혀 온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기 시작하여, 결정적으로 숙군작업을 주도함으로써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음.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 남한을 침공하면 남노당 20만 명이 호응하여 쉽게 통일된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특무대를 중심으로 숙군작업을 실시하여 남노당의 봉기를 차단 봉쇄했음.
5.16 혁명 직후의 혼란함을 극복하는데 공헌하고, 10.26 사태의 혼란을 넘어 고속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하는데, 욕을 먹는 데는 이유 가 있었음. 그것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있다 보니 그것이 힘이 되어 특권의식을 갖게 되어 주변에 위화감을 주고 통치자의 뜻을 따르다 보니 음지에서 정치에 간여하게 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음.
그러나 시대는 바뀌어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기무사도 진정으로 국가와 군에 봉사하는 예절 바른 겸손한 부대가 되어야만 했음.
1999년에 전 부대원이 참모장인 나부터 1주일씩 하급 직원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하며 다짐했음. 모토가 “군복을 입을 때는 야전군보다 더 야전성이 있어야 하고 사복을 입었을 때는 최고의 신사처럼 행동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될 수 없어 크게 두 가지를 추진했다.
첫째, 전문성 함양을 위해 교육을 강화했음. 군의 교육기관에 적극 참여하고 각 군 대학 교육과정에서 50% 이하의 성적을 받는다면 부대에서 퇴출 시켰음. 정보 역량 강화를 위해 대위급 간부 전원을 정보학교 어학 과정에 순차적 으로 입교시켰음. 암호, 음어 생산 능력 향상을 위해 해외에 박사과정 유학을 보내고, 석사 과정도 다수 보냈으며, 우수자원에게는 해외 연수를 보냈음. 수사 능력 향상을 위해 국정원 교육과정, 미국 FBI 과정, 미국 OSI 과정에도 적극 보냈음. 속담에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하지 않는가! 우수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음.
둘째, 공수 교육 도입이었다. 기무 부대원도 자신의 신분이 군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야전성 함양을 위해 새롭게 전입하는 부대원은 현역이나 군무원은 물론이고 여성 군무원까지도 7월에 특전사 교육대에 입소하여 공수 낙하까지 마쳐야 정식으로 부대원이 되도록 했음. 이는 인성 함양을 위한 강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부대원들에게 어려움을 주었을지라도 자긍심을 높이고 정예화하는데 기여 했다고 생각함. 결론적으로 기무사의 개혁은 겸손한 인품과 전문성을 함양하는 데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10) 기무사의 국제화를 통한 선진화 사업
기무사령부 참모장과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항상 나의 과제는 기무사를 서구 선진 국가의 군사 정보기관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그 기관들을 방문하여 같이 회의하고 그들의 발전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계에 우리의 기무사와 유사한 기관은 모두 있었다.
첫째, 미국 육군의 INSCOM 사령부였다. 미군은 방첩기관이 각 군으로 분리되어 육군은 INSCOM, 해군은 NCIS, 공군은 OSI로 구분되어있었다. 해·공군의 기관은 정보는 물론, 일반 범죄까지 수사하지만, 미국 육군은 우리 군처럼 기무와 헌병으로 역할이 구분되어있고, INSCOM이 우리의 기무사와 기능이 유사했다. 나는 참모장으로 INSCOM을 방문하여 매해 호 교차 방문하여 회의를 통해 업무를 발전시켜나가자고 했다. 거기에서 나는 그들이 군의 전산망에 불법 침투하는 외부망을 즉각 경고하는 CERT를 배우고 돌아와 우리 군에 적용했고, 을지 연습을 통해 훈련했는데 우리 군의 관계자들은 그 실용성에 모두 감탄했음. 을지연습 기간에는 연합사 라포테 사령관에게 협조를 구해 탱고 벙커에 대한 전 통신망을 감청했다. 물론 외부 침투한 흔적은 없었다.
둘째, 독일의 MAD에 갔다. 어느 기관이나 하는 일은 비슷했다. 보안, 방첩, 방산 보호 등이었으므로 업무 토의는 순조로웠다. 2000년 5월 쾰른에 있는 국방성을 방문하여 오전 오후 업무 토론을 하고 저녁은 라인강을 내려다보는 중국 식당에서 그들에게 만찬을 대접했다. 회의를 정례화하여 다음 해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왔다. 독일의 MAD에서 우리가 특별히 배우고자 했던 것은 통일과정에서 어떻게 동독의 군을 해체하고 일부는 받아들이는 분류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MAD의 참모장은 준장이었는데 별도로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서로 영어가 서툴렀지만, 의사소통은 더 잘되었다.
셋째, 프랑스의 DPSD를 방문했다. 그들의 사무실은 파리 시내 한가운데 민가 같기도 하고 관청 같기도 한 건물이었다. 준비한 토론 자료를 가지고 충실히 회의했다. 기무사령부로서는 모든 게 처음인 국제회의였기에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DPSD 역시 동양의 떠오르는 강소국에 관심이 많아 다음 해에 기무사를 방문해 왔다. 그들의 전통은 멀리 나폴레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역사성을 강조했다.
넷째, 미국 CIA였다. 규모나 전통이나 하는 일에서 우리와는 격이 맞지 않았으나 오히려 CIA에서 사령관인 나를 정식으로 초대하여 방문하게 된 것이다. 정식 초대를 받다 보니 주한 미 대사관 육군 무관이 수행원이 되어 같이 가면서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CIA에서 무려 네 시간을 CIA의 부국장으로부터 북한의 핵 능력, 재래식 군사력, 전 세계의 테러 문제 등에 관해 그야말로 기탄없는 설명과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실력이 모자람을 실감했지만,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다섯째는 중국의 보위부였다. 2002년 가을에 중국 보위부의 초청으로 북경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중국 대사,무관과 식사하며 대화를 하다 보니 상호 교환 초청을 하게 된 것이었다. 북경에 가서 회의를 통해 중국군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특공부대의 무술 훈련, 북경군구 예하 사단의 내무반, 심지어 취사장까지 공개하며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업무토의는 그들의 보위부와 우리의 업무에 공통점이 많지 않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방첩이나 보안보다는 군에 대한 감찰업무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천안문 광장, 자금성, 만리장성을 시찰했는데 우리 일행이 가는 곳에 경호 경비를 철저히 하여 주변 관광객을 멀리하여 역시 공산주의 국가라는 점을 실감했다.
국방부에 들러 정보본부장과 면담했는데 100평은 되어 보이는 큰 회의실에 단둘이 앉아 주로 북한 관련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이나 미 국은 중국이 북한을 움직여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는데 실제 북한은 중국의 말을 거의 듣지 않는다.’고 애로를 이야기했다. 커다란 벽에는 아미산을 수놓은 아름답고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걸려있는데 호화롭지만 내실은 없어 보였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서안에 가니 그곳 군구사령관이 마중 나와 점심을 했다. 대 연회장에 연예인들이 나와 아리랑, 도라지 타령을 연주하며 공연을 하는데 지나치다 싶었다. 진시황릉과 박물관을 보면서 고대 중국의 발전된 문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북경의 군사박물관에서 주로 개발하는 로켓을 설명받았다. 방문 기념으로 당대의 명필이 쓴 손자병법을 선물 받았다. 회의를 통해 업무의 발전은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했으나 우호 증진, 상호 이해는 충분히 했고, 내가 사령관을 마치고 떠난 후에 중국 보위부장이 기무사를 방문하여 회의를 주고받았다.
11) 군사력 건설 비리 차단
역사이래 가장 큰 군사력 건설사업이 김대중 정부 당시 추진되었다. AEGIS 함 건조, 잠수함 2차 사업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무엇보다도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이 추진되었다. 차세대 전투기 구매는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무기 도입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검토한 결과 미국 보잉사의 F-15, 프랑스의 라팔, 유럽 공통 개발 EURO FIGHTER의 3개 기종을 놓고 경쟁했다. 그런데 공군 대령 1명이 프랑스의 라팔이 가장 좋은데 국방부는 F-15를 사려 한다고 저녁 아홉 시 TV 뉴스에 얼굴을 가리고 나와 폭로하듯이 발표했다. 불법이었으므로 당장 저녁에 장관의 구두 재가를 받고 연행하여 헌병과 합동으로 사법처리 했다. 그는 반미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었다. 기종이 F-15로 결정이 나자 장관께 보고하고 보잉의 생산 공장이 있는 Saint Louis를 방문했다. 부회장을 만나 우리나라에서 대형 방산 구매 후에는 언제나 추문이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처리해야 하는 만큼 회사에서도 어떠한 청탁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방부에서 시민 옴부즈맨 제도를 시행하여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결과적으로 F-15 도입 사업은 조그마한 잡음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12) 간첩 검거를 위한 미국 출장
1982년 2월에 미국 출장을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동료 소령 한 명과 2급 군무원 1명과 함께. 영어도 서툴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지도 못 하는데. 목적은 LA에 있는 간첩을 처리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 육군참모총장 장00과 외무부장관 최00을 안내하여 평양을 방문하는 등 친북 활동을 하고 당시에도 북한을 위해 일하는 교포 미국 시민이었다. 국제 여행 경험이 없어 모두 현금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한 달간 LA, WASHINGTON D.C, NEWYORK을 다니면서 대상자를 만나 그간의 친북 활동 내용을 진 술 받고 다시는 친북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태극기를 걸어놓고 맹세 하게 하고 마무리 지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하게 할 수 있는지 여부 를 문의하기 위해 한국계 변호사에게 법률 의뢰를 했는데 방대하게 자료 조사 결과 미국시민임으로 불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변호사 비용이 2,000$이었는데 부족하여 신분을 밝히고 한국에 돌아가 송금하겠다고 했 더니 자기 부친도 육사 5기라면서 200$만 받겠다고 하여 신세를 톡톡히 졌던 기억이 난다.
◉ 송영근
▲ 개 요
- 2003년 4월 제35대 기무사령관. 당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최초로 임명된 기무사령관인지라 당연히 대통령은 강력한 ‘기무사 개혁’을 주문
- 개혁위원을 만들어 개혁안의 골자를 마련한 후, 십여 차례의 계급·직책별
자유토론을 거쳐 수정, 보완함으로써 전 부대원의 공감이 형성된 개혁안 만듦
- 통상 개혁 계획은 소수의 전문 인원이 중심이 되어 완성된 안을 Top-Down
으로 시행하는 것이 통례인데 전 부대원의 공감이 형성되지 않으면 추진의 동력이 떨어져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Bottom-up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부대원의 전적인 공감 속에 강력히 추진
- 개혁의 기본은 기무사의 새로운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 수십 년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 있는 곳에 기무와 헌병이 있다’는
세간의 평처럼 기무사에 대한 국민과 군의 인식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음.
- 핵심은 기무사에 부여된 임무와 기능을 올바로(正) 시행해 나가는 것, 따라서 사령관 지휘 중점을 ‘바를 正’ 하나로 내걸고 올바른 충성·명예·봉사(기무훈)를 꾸준히 강조하고 독려
▲ 재직 시 보람있게 추진했던 일
1)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어느 날 대통령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여 올라갔더니 국가보안법의 폐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며 이것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는 민정수석만이 배석하였는데 식사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민정수석은 나에게 ‘총대를 메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으나 나는 이 문제는 반대 입장이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국회 입법과정에서 폐지안이 저지됨으로서 참여정부는 뜻을 이룰 수 없었고, 지금 정부에서도 국회에서의 논란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
2) 군 사법개혁 추진 저지
당시 참여정부에서는 사법개혁을 국정과제로 설정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군사법 계획이 민정수석실에서 강력히 추진하였고, 국방부에서는 법무관리관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핵심은 각 군에 속해 있는 군검찰단을 국방부 독립검찰청으로 승격시켜 모든 검찰 업무를 독립적으로 총괄하는 제도로 군지휘관의 사법권을 완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런 기도를 사전파악 하는 군 수뇌부에 적절히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군무회의 의결을 저지시키고 추진을 무산시켰다. (이 때문에 민정실에 찍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민정수석과 민정비서관에게 탄압을 많이 받았다.)
3) 전시작전권 전환추진 시기 지연
전시작전권 조기 전환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인수인계 계획에 최상위 추진 목표로 제시된 정책이었다. 대통령은 임기 내 전작권 환수를 해야겠다며 의견을 물었다. 즉, 전세계에서 작전권을 갖지 못한 대통령은 나밖에 없다며 주권의 문제이고 국민 자존심의 문제임을 강조하면서 임기 내 추진을 강조했다. 나는 이것은 한미 공동으로 행사되는 작전권이지 연합사령관 단독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며, 우선 우리의 적전 능력이 최소한의 자주적 방어능력을 갖춘 후에 추진해야 한다며 시기를 못 박고 추진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조언을 드리고 나왔다. 이후 국방부 정책실장, 합참작전본부장 등과 뜻을 같이하여 임기 내에 전작권 전환을 주도했던 NSC 차장을 설득하여 2012년 4월 17일로 일단 연기 시킨 바 있으며, 이후 MB정부에서 이를 2015년 12월 1일로 재차 연기하였고, 박근혜 정부에서 조건에 입각한 전작권 전환으로 개념을 재정립하여 시기를 못 박지 않고 재차 연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이때는 내가 국회의원이었으며, 당시 장관과 긴밀히 협조하였다.) 현 정부에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ARL 내에 환수해 오려고 계속 추진해오고 있으나 미국 측의 소극적 입장으로 임기 내 추진은 어려워 보인다.
4) 자이툰부대 이라크 파견 적극 지원
미국이 한국에 전투부대를 이라크 다국적군에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당시 정부 내에서는 격렬한 찬반 토론이 계속되었다. 최초에는 정부 여당 내에서 파견 반대 여론이 더 우세하였으나 우리 군의 국제화가 꼭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나는 적절한 첩보 제공과 NSC 설득으로 사단 규모(자이툰 사단)의 병력파견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으며 자이툰부대의 파견으로 국가 위상이 크게 제고된 바 있다.
5) 장군인사권 청와대 회수 제동
당시 정부에서는 군이 육군 위주(육방부)로 운영되어 3군 간의 불균형이 심각하고, 대통령이 통수권을 발휘하려면 장군인사권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군에서는 100%를 가지고 와 결재를 강요하여 통수권 발휘에 제한을 준다고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장군인사를 150~200% 올려 대통령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검토를 거듭하고 있었다.
6) 기무사 과천 이전 확정
기무사의 과천 이전은 전임 지휘관들이 추진하여 거의 확정 단계에 이르렀으나 대통령이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재검토 지시’ 함으로써 다른 곳으로 이전 검토하도록 장관 지시가 내려왔다. 장·차관들 워크숍을 과천 공무원 연수원에서 열었는데 이때 차량으로 남태령을 넘어 공무원연수원으로 가는 길에 500여 개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과천시장이 주동하여 반대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대통령이 과천 이동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하였고, 이를 시민사회수석실에서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과천 이동의 불가피성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여 수석을 설득했고, 수석은 대통령에게 이 문제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것으로 보여 진다고 보고하여 없던 일로 마무리되고 계속 추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7) 정보수당 현실화
부임 후, 파악해보니 부대원들에게 지급되는 정보 수당이 현실에 비해 너무 부족함을 발견하였다. 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정보 수당 현실화 필요성에 대해 세부적으로 검토한 보고서를 국정원장에게 직접 보고하여 동의를 구한 후, 기획관리실장과 긴밀히 협조하여 수당 인상을 확정 지었다. 꽤 큰 폭으로 인상하기로 최초 협의되었으나 추후 검찰, 경찰 등 관련기관과 같이 추진할 수밖에 없어 최초 기대만큼은 안 되었으나 그래도 오랜만의 상당액이 인상되어 부대원들에게 혜택을 주게 되었다.
8) 기무사 발전 중장기 계획 수립
기무사는 현행 업무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10~20년 후를 내다보고 역량과 기능을 보강해 나가지 않으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입각하여 기무사 종합발전 계획을 약 6개월여에 걸쳐 완성하였다. 사이버 역량 강화에 주안을 두고 각 부대원의 전문성을 제고시키는데 주안을 둔 매우 진취적인 계획이 완성되어 장관에게 보고하고 극찬을 받았으나 추후,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9) 기 타
적발 기무보다는 예방 기무에 주안을 둔 현장 업무를 강조하고 추진하여 지휘관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부대원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의무 보고 (보고량 통제) 제도를 폐지하였고, 불필요한 인사개입을 엄정히 차단, 눈치 보기 출퇴근, 불필요 야근 등을 불식시키고 재실 등 폐지, 정문 자유 출입, 하계휴가 연장(9일), 전투체육 활성화(210 체육시설 이용) 등 적극 추진하여 부대원의 복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
2021.8.2. 문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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