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는 예뻐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예쁜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세련미도 청순함도 모두 본인의 것이 되었다.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를 갖게 된 배우 한은정. |
“어떤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오늘.”
‘오랜만의 외출인데 어떤 이야기를 드려야 하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촬영은 어떻게 하지?’ ‘한은정, 어떤 사람이지, 지금?’ 새롭게 다잡아가고 싶은 시점이라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숨 가쁘게 진행한 촬영을 끝낸 후 마주앉은 한은정의 얼굴이 투명해졌다. 편안한 소재의 사이즈가 넉넉한 옷과 편안한 신발.
화려한 귀고리와 목걸이 등 액세서리도 모두 떼어내고 나니 진짜 한은정의 얼굴만 오롯하게 드러난다. 세련된 스타일과 포즈로 뷰티파인더를 꽉꽉 채우던 여배우의 민낯이 새삼스럽게 아름답다.
데뷔 13년, 활동을 하든 하지 않든 그녀는 꾸준히 자기관리를 한다. ‘항상 준비를 하자’는 주의라서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신경 씁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모르잖아요.”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 있을 때도 그녀는 엄격한 자기관리의 시간을 보낸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숫자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작품을 위한 시간을 보내왔다. 최근 1인 소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임감이 더욱 커졌다. 연기할 때, 정신없이 바쁠 때가 제일 살아있는 것 같고 행복해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아요. 오늘도 되게 행복하네요.(웃음)”
그녀는 세련된 외모로 굳어지는 본인의 이미지를 병적으로 거부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차가운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갖춘 사람이 왜 굳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무장해제한 그녀가 뿜어내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아우라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무려 13년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지만,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보인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아 보였다. 제가 나누는 이야기들, 생각들. 삶을 바라보는 눈에 깊이가 생겼으면 좋겠고요. 화보 촬영도 인터뷰도, 조금은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명확한 일을 찾았고, 이것이 가장 반짝거리는 본인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본인의 매력에 안주하지 않고, 더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다.
한은정. 똑 부러지는 이미지의 차가운 도시 여자. 연기력보다는 예쁘고 새침한 페이스로 주목받은 사람. 부담 없이 다가가기엔 어쩐지 멈칫하게 되는 도도한 이미지. 미스 유니버시티 선발대회 1등이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니, 그녀의 이미지가 이렇게 국한되는 것이 어긋난 일도 아니다. 남의 애인을 탐하거나 안하무인의 부잣집 딸로 시선을 먼저 끌던 캐릭터는 더 이상 그녀의 몫이 아니다. 데뷔 초에는 저도 결과물이 좋은 것, 내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등등 이것저것 따지기에 바빴거든요. 그런데 배우는 그게 아니잖아요. 사극, 시대극 모두 정말 재미있어요.”
역할 하나만 보고 작업을 해오니, 어느새 현대물도 사극도 잘 어울리는 배우가 되어 있다. 섹시한 이미지만으로 편안하게 가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매번 본인의 틀을 깨는 작업을 해왔다. 건강하고 섹시한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지 않아요? 보통 그녀를 두고 섹시하다고만 생각하는데, 연기도 정말 잘하잖아요. 그녀의 사고나 가치관도 멋있고요. 그런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랑을 찾아서 결혼으로 안정을 취하는 쪽과 새로운 자아를 찾아서 혼자 뚜벅뚜벅 걸어 가보는 쪽. 그래서 친구들도 성향에 맞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한은정은 후자다.
그런데 저는 그쪽 부류는 아닌 것 같아요. 일을 안 하면 아픈 체질이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거든요. 요즘은 일 생각밖에 없어요. 다음에 어떤 작품 할까. 결혼은 생각도 없어요. 연애도 그렇고.(웃음) ” 최근 1인 소속사로 새로운 시작을 하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제대로 맞이하고 있다. 7년 동안 함께한 매니저와 함께 시작한 일이다.
이제 회사의 주인이자 배우이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사실 여유가 없기도 하단다. 인터뷰 내내 느껴지던 어딘지 모를 진지함은 최근에 생긴 이런 변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역할이라도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제가 작품을 쉴 때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거나 돌아다니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연예인분들 많이 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저는 귀찮아서 안 하거든요.(웃음) 넌 대체 뭐하고 사느냐고 묻는 분들이 항상 많아요. 저는 그냥 나름대로 혼자 운동도 하고 여행도 하고 그렇게 지내는데 말이죠.” 때론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는 사람이 있다. 말보다는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한은정이 인터뷰가 끝나고 얼른 집으로 가야 한단다. 힘든 촬영 끝냈으니 맛있는 거 먹으라고 했더니, 몸매 관리는 항상 해야 한다나. 한은정이 건넨 초록색 사랑 한은정은 30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버스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아프리카 앙골라 캄부타 마을을 다녀왔다. 2년 전의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 그 한 번의 경험이 그녀의 인생관을, 생각을, 가치관을 뒤흔들어놓았다. 봉사 다녀온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죠. 그때 보았던 특별한 아이들이 처한 처참한 환경들이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의 눈을 잊을 수가 없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들쥐를 잡아먹는 아이들, 지뢰에 팔을 다친 아이들, 관습처럼 어른들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들. 한은정은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특별한 아이들을 보았다.
한동안은 빵도 못 먹었어요.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요.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행동에 생색이란 없다. 한 끼의 양식이 아닌 트랙터를 선물하고 온 것만 봐도 그녀의 봉사가 진짜 봉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따 ‘따봉한’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랑의 트랙터는 작년에도 올해도 그곳 사람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있을 것이다.
앙골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자라난 초록색 작물이 있다면, 그것은 한은정의 따뜻한 마음이 만들어낸 따뜻한 초록색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