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년∼1689년) 본관은 은진(恩津).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출생.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자랐다.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권신이었으며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이다. 사후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계속 집권하면서 해동 성인(聖人),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 율곡 이이, 김장생도 듣지 못한 칭호였다. 특히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다. 1607년 외가가 있는 충청도 옥천군에서 사옹원 봉사를 지낸 송갑조(宋甲祚)와 부인 선산 곽씨(善山 郭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6세가 되는 163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1625년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韓山 李氏)와 혼인하였으며 이 무렵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 참봉(경릉의 관리인)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직했다. 1634년 다시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있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게 되는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지만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왔지만 금방 사직하였다. 효종은 송시열을 조정에 잡아두고자 사직 인사를 올리려는 송시열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고 송시열은 사모관대를 벗어 정청 위에 얹어놓고 낙향했다. 막나가는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도 인식했는지 돌아가서 사과했다. 이후 효종은 10년 가까이 송시열에게 조정에 나올 것을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응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송준길이 조정에 자주 있었지만 송준길도 걸핏하면 낙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효종 7년 스승인 김집 사후 장문의 상소를 통해 다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오랑캐들에게 침략당해 국력이 약해졌지만 춘추대의를 지키자는 입장이었다. 옛날 고려가 송나라와 통했듯이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南明)과 통해야 민심(정확히는 사대부 민심)이 효종을 따를 것이라는 의리론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의리만 강조하는 이상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남명은 남송보다 더하게 망해버렸다. 이는 다분히 식자의 명분론이었다. 상식적으로 남명 정권이 겨우 버티던 현실을 생각해보면 남명과 통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조선과 연락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명 정권은 주유랑 대에 끝났다. 한때는 운남에서 광둥까지 유지했으나 1656년을 끝으로 동중국해 지역을 상실하는데 효종 7년의 일이었다. 최소 효종 7년 이후에는 남명과의 통교가 불가능한데 이를 송시열이 모를리는 없어 보인다. 조선의 유림들은 남명 정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지 주유랑이 죽자 사적으로 통곡하고 난리가 나서 청나라와 외교 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여기에 설령 남명이 광둥까지 점거한 시절이라 할지라도 어려웠다. 만일 청나라에 발각되면 또다시 침략당해서 어떤 상황을 맞이할지 뻔하며 병자호란보다 위험도도 높다. 남명과의 통교는 누가 봐도 미친 짓이고 그걸 모를리 없는 송시열은 당연히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소신이 있기에 차마 청나라에 조아리며 굽히지 않았을뿐 송시열을 비롯 유학자들의 대의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게 학자이면서 각종 정치와 행정 현안을 겸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행정 실무 각종 현안에서 현실론자였다. 효종 9년이 되어서야 송준길이 조정에 자리를 잡았다. 동년 겨울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에 응답하여 상경했고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송시열이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기유독대를 보면 효종이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송시열은 "전하께서 덕을 잘 쌓으시고 학문을 익히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랑 현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기유독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악대설화」 후반부의 내용에는 송시열이 '양병과 양민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묻는 효종의 질문에 '재력을 사치 등에 낭비하지 말고 군수로 돌리며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을 없애고 3명 중 1명은 병사로 만들되 나머지 2명은 포(布)를 통해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면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뒤이어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세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왕이 스스로 사심(私心)을 없애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실제 현실에서는 내수사 혁파 주장과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북벌 실행하기가 어려우니 양민(養民)을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게 보다 가깝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위의 해석에서 나아가서 오히려 효종도 북벌을 진심으로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북벌을 이용했을 뿐이며 송시열은 여기에 말려서 이용당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송시열로서는 일단 북벌이라는 명분 자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위에 언급한 신중론을 펼치는 수준에서 효종과 협력해야 했으며 이것이 바로 효종이 노린 결과라는 것이다. 효종 생전에는 효종이 북벌이라는 명분을 이용해서 송시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효종이 사망한 뒤에는 송시열이 효종의 위명과 명분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서인의 중심적 인물로서 남인의 중심적 인물인 윤선도와 기나긴 논쟁을 벌인다. 그 발단은 "예송논쟁"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장렬왕후)가 몇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서인은 기년설, 즉 "1년만 입으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설, "3년동안 입어야 된다"라고 한 것이다. 송시열은 기년설이 명분에 맞다고 주장했다. 예송논쟁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이는 왕의 정통성의 문제와 엮인 복잡한 문제였다. 영의정 정태화는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의 예를 따르려 했지만, 윤휴는 《의례》에 따라 효종이 장남은 아니되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참최복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하였고 여러 신하들에 의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시백이 문제를 정태화에게 물었고,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물어봤는데, 송시열은 4종지설(四種之說)을 꺼내든다. 4종지설은 《의례》에 적혀있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를 4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송시열은 효종이 체이부정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체를 이었으나 적자가 아니라는 주장으로 왕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것이었다. 갑인예송(갑인환국) 좌찬성에 올랐으나 남인은 송시열이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고 규탄했고 송시열은 낙향했다. 정계 복귀해서 우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남인인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이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몇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에 예조에서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려 현종의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논리를 따르자면 기년복이 아니라 9개월, 즉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자 예조는 현종에게 '기년복이 아니라 대공복이 맞습니다' 라고 다시 보고를 올렸는데 현종이 격노하여 예조 관료들을 파직시킨다. 이에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서인 대신과 대간들은 그럼 예법에 안맞는다고 반대를 했지만 현종은 서인인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보내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3일만에 2차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에 삼는 등 서인들에 대한 피바람을 일으키진 않았으니 아들 숙종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후 현종은 두 달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뒤를 이은 숙종이 왕의 행장에 송시열이 행패부려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문장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송시열의 제자들이 차마 그럴 순 없다고 반대했다. 분노한 숙종은 서인을 모조리 내쫓고 송시열도 논의를 잘못 이끈 죄를 물어 거제로 귀양 보내 버리니 갑인환국이다. 귀양 생활 중에 송시열은 청남 계통의 꾸준한 고묘 안율 요청 때문에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4.3. 경신환국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은 반전을 꾀하였다. 숙종 1년, 서인인 숙종의 외할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왕의 당숙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와 간음하여 자식을 낳았다"고 고변한 홍수의 변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무고였고 오히려 김우명이 강상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몰리자 대비인 명성왕후가 자신의 친정을 위해 소복을 입고 대전으로 들어가 자진하겠다 소동을 벌였고 결국 복창군과 복평군이 유배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때 허목 등 남인 강경파는 대비인 명성왕후를 비판하는 장계를 올려 숙종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숙종 6년 경신년에 숙종은 허적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리고 허적에게도 궤장이 수여된다. 그러나 숙종은 군부 주요 인물들을 서인 중심으로 바꾸었다.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의 지도자가 모두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어영청은 김석주가 이전부터 차지하고 있었으니, 중앙군의 대부분이 서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여기에 삼복의 옥이 일어났다. 남인 허견과 서인 김석주와 동시에 친분이 있었던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과 종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김석주가 탁남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확대시켰다. 이 고변으로 허견은 능지처사, 복선군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허적은 관작을 삭탈되고 곧이어 사사, 윤휴는 위리안치되는 등 남인이 대거 실각하게 되었다. 빈 자리는 서인이 대거 차지하게 되었고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송시열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자 귀양 생활이 풀리고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원로 대신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숙종과 명성왕후는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며 송시열을 구슬렸고 김수항은 나라의 대소사를 법규에 연연하지 말고 송시열에게 물어 처리하자는 의견을 올려 윤허를 받기도 했다. 이후 송시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김석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처우를 둘러싸고 친구 윤선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윤증과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서인 대분열 사태를 맞게 된다. 허새는 남인 중에서도 불만이 대단하던 자였다. 남인이었지만 연좌제 문제로 고생하다가 김익훈에게 포섭된 김환이 그에게 자신이 역모를 일으켜 복평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그는 권대운, 오정위, 민암을 비롯한 남인의 거두들이 자신과 한패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역모를 꾸미려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인의 거물들이 그와 한패였다는 것은 무리를 크게 만들기 위한 거짓이었다. 이에 실망한 김석주와 김익훈은 전익대란 남인이 민암, 유명견을 비롯한 남인 거물들과 역모를 꾸몄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로 했는데 포섭된 김환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무리수를 두어 전익대 명의의 고변서를 자기네들이 직접 만들어서 승정원에 올린다. 하지만 전익대가 무고를 실토하면서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러자 젊은 서인들이 권신인 김석주는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대신 김익훈을 증거 조작, 체통 손상, 밀계 혐의로 탄핵했다. 그런데 김석주는 당시에 서슬퍼런 숙종도 눈치를 볼정도의 실세거물이었고(숙종의 외숙이었다.) 송시열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으며 학통적으로도 스승의 친손이었다. 사실상 숙종이 당시 정치적으로나 학통적으로 핵심격인 박새체, 송시열, 윤증 3인을 불러 모은건 왕인 자신에게도 난처한 실세인 김석주를 떠념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숙종은 권모술수에 능했고 당파를 쪼개 서로 대립시키면서 신권을 약화시키는등 절대 왕권을 휘두르길 즐겼는데 이는 경신환국 이전의 청남과 탁남의 대립에서도 보여주던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김석주의 처분 문제는 숙종에게 서인을 분열시키기 좋은 기회였다. 송시열과 김석주의 관계를 모를리 없는 숙종은 자기가 처리하면 되는 사건을 박세채, 송시열을 이용하려 구태여 불러들여서 물었고 숙종이 원하는 대답 중 처벌에 대한 의견은 박세채를 통해 끌어내게 되는데 결국 숙종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김익훈은 내 스승의 아비의 친손으로 형제와 같은 자인데 도움이 못되어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며 회피해 물러나게 된다. 이때 먼저 온 박세채는 문제있다고 하면서 정확하게 결론을 내지 않고는 다른 사람들이 올 때 이야기 하자면서 끌었고, 이후 송시열이 왔을 때에 젊은 관료들이 찾아가서 이 사건을 질문하니, 송시열이 관련자를 듣지 못 한 상태에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고위급 대신들이 관련자들을 전하게 되자 숙종의 계략임을 눈치챈 송시열은 아차 싶어서 답변을 회피하고 자리를 급히 물러나 다시 낙향한다. 이후 윤증이 와서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고, 박세채가 이에 동조하는등 숙종이 떠넘긴 처리문제로 이후 처분이 갈리게 되었다. 김익훈은 스승 김장생과 김집(송시열은 김장생과 김집 부자에게 수학하였다.)의 친손이였고, 김석주는 자신을 효종의 역신이라고 지칭하며 몰아세우고 조선제일의 예학자라는 명성에도 금이 가게한 남인을 몰아내준 생명의 은인이였다. 또한 당시 숙종은 김석주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서인정권 유지를 위하여서는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더욱 맹렬하게 김익훈의 처벌을 주청했고 이에 재야의 박세채가 크게 호응한다. 거기에 윤증, 남구만, 조지겸, 유득일, 유집일, 오도일, 한태동 등의 신료들이 지지하면서 소론이란 새로운 무리가 결성된다. 그리고 이에 대립하여 송시열을 추종하는 김만기, 김만중 형제, 김수항, 김수흥 형제, 민유중, 민정중 형제, 이단하, 이민서, 이사명 등은 노론이라 불리게 된다. 이때는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대거 소론에 합세하면서 소론이 압도적인 세를 자랑하게 된다. 김석주는 격노했고 오도일을 비롯한 소론의 젊은 수뇌부들을 숙종을 위협하여 강원도 영동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한편 박세채는 글만 읽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양반이 쇠를 금이라 부르고 도적을 아들이라 일컫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수항 등 노론이 합세하여 거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석주가 51세를 일기로 급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은 노론, 소론이 분당되긴 했어도 범 서인이라 칭할 만했는데 이후 회니시비 사건이 송시열의 제자 최신에 의해 조정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노론, 소론 분쟁은 격화된다. 숙종의 권모술수와 환국정치에 환멸을 느끼곤 이후 정계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던 중, 숙종이 28세의 나이로 장희빈에게서 아들(훗날의 경종)을 얻었다. 경종의 탄생은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이 백일도 안된 후궁의 아들을 이례적으로 갑자기 무리하게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서는 장희빈과 남인 세력, 그리고 숭선군, 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지적한 박세채, 남구만, 김만중 등을 유배시키거나 호되게 질책하면서,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조정은, 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이 철종을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를 계획적으로 공론화한다.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 숙종은 "이 자식이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거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거다."라면서 계획대로 걸려든 송시열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대간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 다 고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숙종이 바라던 바였다. 남인 대간은 숙종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고,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신하 박태보, 오두인 등을 사실상 장살하고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송시열이 목표로 지정된다. 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명을 받고 상경 중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대신 금부도사를 내려보내 사사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결국 송시열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정치가로 살면서 학자로 살았던 것을 반영하듯 그가 사약을 들이키면서 죽기 전 제자들에게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와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죽기 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그의 관은 널빤지로 덧대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대게 만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제시(御製詩) 宋夫子 현대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는데. 현대에 정약용이 각광받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존의 주자 중심의 학문 체계를 어느 정도 탈피하고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을 내놔서 이와 비교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비판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 참신하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공자가 한 것도 어찌보면 주나라 시기의 그나마 남아있는 문물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는데... 주자도 그냥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조리 끌어모아 집대성한 다음 본인의 참신한 견해를 바탕으로 정리했을 뿐이지. 마찬가지로 공자도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집대성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새롭게 정리했을 뿐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 정약용이 근대에 주목받은 건 식민 사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학을 의도적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다. 물론 참신한 이론을 펼치는 학자가 현대에 존경받기는 하지만, 인문학 분야에서 기존 학자들의 이론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하고 강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21세기에도 존경받는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상당한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방대한 분량의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좀더 정리된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다.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은 송시열이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항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주자어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설, 역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고전 텍스트의 본래 뜻을 제대로 밝히는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은 험난한 길이다 공자도 그러했듯 송시열의 피땀어린 과정이 있었기에 학문적 근간을 이루는 컨텐츠가 후학들에게 주어져 인류의 지성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게 그러하듯 이렇게 선배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그 바탕이 이루어져야 어느 때 누구 라도 오늘날 혹자의 주장 처럼 참신한(?) 해석도 주장할수 있는것이다. 송시열은 이러한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정리할 학문적 필요성을 느끼고 그의 나이 73세때인 거제도 유배시절에 그의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어류를 집중적으로 교감하여 그 가운데 주자 문인들의 뒤섞인 기록을 정돈하고 번거롭고 중복되는 내용을 산삭(刪削)하며 류(類)에 맞게 문목(問目)을 재분류하여 편집하였다. 이는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주자어류가 송시열에 의해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유학자로서 새로운 체계와 해석을 주체적으로 진행할 만큼 주자학 연구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드러낸 학문적 결실로서, 주자대전을 연구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더불어 주자학의 표준을 정립하는 주자학 연구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송시열은 자신의 작업을 권상하와 이희조등의 제자들에게 계승하도록 당부했고, 그 유지에 따라 구시경 이기홍등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생전에 30책으로 정리한 주자어류소분 정본(淨本)을 교정하면서 부첨지(附籤紙)를 붙였으나, 산실되어 18세기부터는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최근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송시열의 9대손인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 선생의 문충사(文忠祠)에서 발견되었다. 사단칠정을 이(理)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원리주의적 성향의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적으로는 정적이 많은 편 이었는데 송시열은 주로 당하다가 참다 못해 반격을 하는 패턴 이었지 먼저 누구에게 시비를 건 적은 비교적 적었다. 원칙의 대립이었지 당쟁을 폄하 하듯이 단순한 감정 싸움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 원만하게 잘지냈으며 악감정이 전혀 없었으나 예송논쟁 당시 난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선빵 극딜을 당한 이후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송시열의 예송 논쟁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당시 유교적 관점으로서나 공격 당할 요소가 많았다는 점은 고려해야할 것이다.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송시열이 보수적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시대가 어려우면 보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건 자주 있는 일이다. 거기에 남송으로 쫓겨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 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 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원래 유교가 그렇듯 정치학이자 실천학이라 더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좋다. 사대와 소중화는 당시 포악한 불의에 대한 의로운 저항이자 미개한 오랑캐와 구분되기 위한 사상적 정통성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이념의 기초로 세운 성리학은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한과 혈맹으로 맺어진 명나라와의 관계등이 융합되어 단순히 그 이전의 사상적 학문적 성격만의 성리학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 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 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의 그것에 겹쳐보고 있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성리학 영향이 강해서 육상산의 학설까지 받아들이는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주륙화회론에 입각한 이기일물론이다. 그런데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온 인물이 바로 이황과 이이다. 이 둘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여 이기일물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덕의 이기일물론을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이 둘은 남인과 서인의 사상적인 뿌리가 되는 조선 후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거두였다. 또한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붕당의 대립 과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이이와 성혼 문묘 종사 운동이 숙종 때 마무리 될 때까지 남인은 이황의 적통이자 성리학의 주류로 자부하면서 이이의 학통을 이단으로 치부하였다. 특히《효종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님남인이 서인의 문묘 종사 운동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의 주장이 육상산과 같고 폐해가 불교와 같다고 강하게 비판하여 서인의 학통을 사실상 부정하였다. 게다가 숙종 초기 영남남인의 산림인 이현일이 이이를 공세적으로 비판한 것은 기존 영남남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였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조선의 사상계가 교조화되고 상대의 학설과 학통을 이단으로 부정하는 흐름이었음을 봐야한다. 이는 송시열 이전부터 있었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남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를 온전히 송시열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면 과연 송시열만 그랬는지, 당대의 흐름이 어땠는지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 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가르치고자 했는데 송시열이 남자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고 오히려 남자들에게 가르치는 주자학을 여자들에게도 가르친, 꽤나 선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여자는 무학이 상덕'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되었을망정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작해 볼 때 당대 송시열의 사상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 며느리, 손자 며느리, 조카 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책을. 그것도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손수 써서 보냈다.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장 수준이 아니었고 현종 대에는 실제로 여포수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은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 다른 지방의 백성들보다 군사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당시 서북 지방은 징병을 폐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다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다시한번 말하지만 송시열은 여인들이 문 밖으로 나와서 그것도 전투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적인 남녀 평등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남녀 유별로 인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통념, 즉 이러한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므로 부녀자들의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수사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 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송시열은 대동법보다는 내수사 폐지와 공납의 양을 축소하는 등을 통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쉽게 말해서 송시열은 작은 정부, 세금을 줄이고, 정부의 규모를 축소를 주장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되고 효과가 좋자 가장 찬성한 사람도 송시열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무척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흔히 부정적이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좋게 봐주어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호포제 시행론은 서인 산림이 먼저다. 산림의 유계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 등 대간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련글 다만 유계와 산림의 호포론이 송시열, 송준길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 하는 견해도 있다. 송시열이 적극 호포제 도입에 나섰다면 김육의 대동법처럼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포제는 일단락하고, 이외에도 송시열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말은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므로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발언으로 어떤 이의 성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을 깊게 살펴야 한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10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 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 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송시열의 행보 가운데에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 대한 추앙,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된 최명길과 이경석에 대한 비판, 반청사상을 근거로 한 북벌 등을 두고 송시열을 수구적인 친명사대주의자라는 주장도 있다. 옹호 측에서는 당시 반청사상의 보편성을 들어 송시열을 옹호한다. 효종대의 북벌론 기조는 숙종 때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실제로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위적으로 언젠가는 행해야 하는 것이었고, 청은 그로 인해 어쨌든 운명적으로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그만큼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화라는 가치는 소중했다. 숭정제에 대한 추앙은 당시 유별날 것 없는 행보였다. 명이 사라진후 당파불문하고 조선 지식인들에게 깊숙히 자리잡은 '조선중화 사상'에서 중국, 중화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요순의 정치와 공맹의 학문이 자리한 문명에 가까운 개념이다. 조선에게 명은 중화의 원류인 중국땅의 마지막 문명국이었고 멸망후 중화를 대표하는 기제로 남았다. 망한 명의 후광을 사용해서 청은 야만이자 오랑캐의 나라로, 조선은 문명이자 중화의 나라로 보는건 어느 사대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중화의 마지막 황제가 숭정제다. 실학자들도 반청사상을 강하게 드러낸 경우가 많다. 우리 동방의 백성이 털끝 하나 황제(만력제)께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다. 청은 오랑캐지만 그 아래 백성들과 명문가들은 오랑캐가 아니다. 이를 알아야 한다. 만약 다시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우리가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한다면 20년 동안 힘써 중국(만주족 오랑캐말고 그 아래 지배받는 중국인들)을 배운 다음에 함께 논의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몽상적인 북벌을 비판했던 박제가의 북학의 외편 존주론을 거칠게 요약한 것이다. 중국이란 무엇인가? 요순우탕의 정치와 공자, 안자, 자사, 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이 중국인데 그것들은 이미 동국(조선)에 옮겨와 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밭도랑에 씨 뿌리고 심는 데에 편리한 방법이 있어서 오곡이 무성하게 하는 것은 옛날 어진 벼슬아치가 남겨준 은혜고, 문장의 예술에 해박하고 아름다운 재능이 있어서 비속하게 하지 않은 것은 옛날 이름난 선비의 여운이다. 이제 마땅히 중국에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은 곧 이것일 뿐이다. 그 밖에는 곧 굳세고 세차며 사나운 풍습과 간사하고 교묘하며 기이하게 속이는 기술로 예속을 망치고 인심을 방탕하게 하는 것으로서 옛 임금이 힘쓰던 바가 아니니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다산시문집의 정약용이 남긴 글이다. 비판 측에서는 "당대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당대의 일반인의 수준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평가대상의 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잣대는 전혀 변호의 대상이 될수 없으며 당대의 반청사상과 북벌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이용한 것은 분명 서인과 그 필두 송시열이고 이것은 심각하게 비합리적이고 시대착오적 과오로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를 가져온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학자라고 해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실학자도 유학자이다. 다만 실학이 등장하게 된 시초를 따져보면 서인 위주의 일당 독재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인 송시열 중심의 주자 성리학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부터이다. 수구 꼴통 성리학자 이미지는 송시열의 생전 시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길 송시열이 상경하자 송시열이 화폐와 돼지 사육을 폐지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그 때 송시열은 상경해서 그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상업을 발전을 위해 화폐 유통을 촉진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조세의 금납화를 제시했다. 거기에 더해, 돼지 사육 역시 소를 죽이는 폐단을 감소시키므로 오히려 권장해 마땅하다는 주장을 했다. 위에서 언급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분명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논어나 맹자에 여자를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없다. 또한 송시열이 조선 조정에서 했던 말의 상당수가 수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대동법 도입에 대해서 논의했을 때, 송시열은 왕이 덜먹고 덜쓰면 된다고 말하면서 내수사 폐지를 건의했다. 내수사는 왕의 금고이다. 왕의 금고를 폐지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4.2. 인간성 문제 정치적, 학문적 위치와 별개로, 당시의 대유학자라는 지위를 가진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였다. 이경석에게 저지른 수이강 사건과 윤선거 묘갈명의 술이부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건 모두 타인을 비난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 비난을 대놓고 한 게 아니라 치졸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돌려 까거나 아예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실상 욕설 비문을 써줘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생전의 송시열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은 사람들을 대부분 적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송시열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숙종한테 저지른 비난. 숙종이 태어날 때는 그의 탄생을 신하들 중 혼자서만 축하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오죽하면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송시열은 숙종이 종묘에 제향되고 자손이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다며 대놓고 그를 깔 지경이었다. 급기야 경종이 태어났을 때는 같은 서인들조차 몸을 사리는 가운데 그의 원자책봉을 혼자서만 반대하며, 이미 숙종이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어 엎으려 할 정도로 날뛰다가 결국 사사당했다. 그나마 경종은 장자라고는 하나 후궁 소생으로 트집을 잡을 명분이 있었다지만, 숙종은 현종의 적장남이자 유일한 아들로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정통성을 가진 임금이였다. 그런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지 못할만정 사소한 트집을 잡은 건 확실히 신하로서 오만한 모습이다.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이경석이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경석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이경석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경석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 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 이경석이 궤장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성상(聖上)의 교서(敎書)에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경인년(1650년, 효종 1년) 2월에 있었던 일은 은미(隱微)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는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결정되는 판이라, 비록 임시로 국란을 모면하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해(利害)를 따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수방관하여 아무런 상관도 하지도 않았으니 그 표정이 마치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 보기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主上)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붙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고(壽而康) 마침내는 우리 성상에게 그런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앞에서 이미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끝에 와서는 곧 훌륭함을 공에게 돌렸으니,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훌륭하다. 숭정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계동일(季冬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이경석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송시열이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 수이강은 송나라 때 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 거렸다는 고사를 들어 이경석이 삼전도비의 비문을 쓴 것이 손적과 같은 아첨행위라고 매도한 것이다. 삼전도비 항목에 나와있지만 당시 청 태종은 비문 내용을 조선이 어떻게 짓는지 봐서 조선을 다시 손봐줄 꼬투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비문을 써야 했던 것이니, 절대 손적과 이경석이 같은 평가를 받을수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경석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조롱을 받으면서도 백헌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음에서 미루어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학자로써 수치스러운 일을 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경석이 이 사건을 가지고 얼마나 대인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이경석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이경석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이경석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이경석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실록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상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 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씀이겠는가.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실록 대체로 이·김 양공(兩公)은, 혹은 훈덕(勳德)으로 혹은 절의(節義)로 세상의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양 조정에서 예우가 특별하여 이같은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래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었다. 경석은 시열의 뜻을 몰랐으므로, 힘껏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성대한 예전을 받아들였다.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청하자, 시열이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대체로 비꼬는 뜻이 없지 않았다.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개수실록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이었는데, 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소를 올려 오지 않으면서 손적(孫覿)에 빗대어 경석을 모욕했다. 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대제학으로서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기 때문에 시열이 소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현종 10년 4월 14일,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