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1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이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안식일 충돌
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될수록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이 심화됩니다. 누가복음에서만 살펴도 이미 5:17에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고,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러 죄인들과 교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충돌을 빚었습니다. 이번에는 안식일에 관해서 두 번이나 부딪칩니다. 본문에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여섯 번 등장해서 이 충돌의 직접적인 원인이 안식일임을 암시합니다. 그 중에 안식일에 관한 질문이 세 번 나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의 질문이고, 두 번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 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 규례에 관한 바른 해석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 과연 누가 그 뜻을 바르게 실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충돌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음으로 발발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십니다. 율법도 배고픈 자들을 배려하여 다른 사람이 남겨놓은 밭의 이삭을 따서 먹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3:25을 보십시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합니다(2).
원래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계명은 복잡한 세부 규정이 없습니다. 단순하게 일하지 말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일하지 말라”가 안식일 계명의 핵심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여 안식을 누리라고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5:12-15은 안식일 계명을 주신 또 다른 동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기 20장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다면, 신명기 5장은 그 날의 구원을 기억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안식일 계명에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질서와 구원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의 창조와 구원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우리가 일을 해서 보탤 그 무엇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완전한 창조와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하여도 일곱째 날에는 일하지 않음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의탁하여 진정한 안식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안식일 계명의 의미가 사라지고 안식일 준수에 대한 복잡한 전통과 규례만이 남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를 율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정당한 신학적 반성에 이릅니다. 이 반성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결단으로 이어졌고, 율법의 세부조항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의 본질과 의미와 정신이 사라지고 문자적인 세부 규정에 얽매이는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안식일 계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하지 말라는 단순한 하나님의 명령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의 금지규정으로 정하고, 거기에 각각 6개의 세부조항까지 두어서 총 234가지의 안식일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의도와 달리, 안식일은 무엇을 하면 안 되는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안 된다는 규정이 234가지나 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눌리고 억압되고 정죄를 당했겠습니까? 지키는 사람들은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 의를 자랑했겠습니까?
이들이 정한 39가지의 금지규정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씨를 심거나 재배하는 모든 행위는 씨 뿌리는 노동으로 간주해서 금지되었고, 땅을 경작하는 행위는 갈아엎는 노동으로 간주하여 금지했습니다. 곡식을 베는 행위는 수확으로 금지, 그밖에 수확물을 묶는 행위, 곡식을 탈곡하는 행위, 바람으로 껍질을 날리는 키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하는 체질, 곡식 가는 행위, 고운 가루를 얻기 위해 채로 거르는 행위, 물과 가루를 섞어 반죽하는 행위, 빵을 굽거나 음식을 요리하는 행위도 다 금지되었습니다. 양털을 깎고 세척하고 빗질하고 염색해서도 안 되고, 실을 만드거나 베틀에 실을 걸거나 실을 교차시켜 씨실과 날실 만들어도 안 됩니다. 천을 짜도 안 되며, 직물을 잘라도 안 됩니다. 매듭을 묶고 푸는 행위, 옷을 꿰매는 바느질과 옷을 자르는 행위, 동물을 잡는 사냥과 도살과 가죽을 벗기는 일과 가죽을 가공하는 일, 가죽을 평평하게 하거나 재단하는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쓰거나 지워도 안 되고, 건축하거나 파괴하는 행위, 불을 켜거나 끄는 행위, 물건을 운반하는 행위도 다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39가지로 규정하고, 그 안에 또 세부 규정을 6가지나 두어서 234가지의 안식일 금지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세부 규정으로 들어가면 2천 걸음 이상 걸으면 안 되고, 마른 무화과나무 열매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도 안 되고, 한 손으로 든 물건을 다른 손에 옮겨서도 안 됩니다. 지금도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면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가 평일 모드와 다른 안식일 모드로 작동합니다. 안식일에는 아예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되도록 전환됩니다. 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지지 않습니까? 39가지 금지 조항 중에 불을 켜거나 끄지 말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1층에서 버튼과 상관없이 문이 열리고 닫히고, 2층에도 그렇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식으로 올라갑니다. 운전도 하면 안 되므로 안식일에 멀리 갈 일이 있으면 전날에 미리 가서 그곳에서 잡니다. 두루마리 화장지 사용은 천을 찢는 노동행위에 해당하므로, 안식일에는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 티슈를 사용합니다.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도 안 되고 물을 끓여서도 안 됩니다. 신발 끈을 묶거나 목걸이 매듭 묶기 등도 안 됩니다. 글을 쓰는 행위가 금지되었으므로 컴퓨터로 타이핑을 해서도 안 되고, 전화번호 입력도 안 됩니다. 지금도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이런 안식일 준수 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안식일 시행 세칙에 따르면, 지금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밀 이삭을 잘라 꺾은 행위는 추수에 해당하고, 손바닥에 놓고 비빈 것은 타작, 비벼서 껍질을 깐 다음 불어서 그 껍질을 날려 보내면 키질, 입에 털어 넣고 씹으면 안식일에 음식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네 가지나 규정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비난하며 묻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이에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반론합니다. 3-5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먹고 일행들에게도 그 진설병을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 규정이 있음에도 절박한 다윗의 형편을 고려하여 그 규정을 초월하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마태복음은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2:1-8을 보십시오. 누가복음에 없는 구절이 5-7입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주님은 다윗 사건을 해석하시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안식일 계명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계명과 제사의 근본정신은 ‘자비’가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제사의 근본정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의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비와 제사가 충돌한다면, 제사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에 담긴 자비와 은혜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배고팠을 때, 진설병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설병 규정보다 그 규정에 담긴 자비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은 행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긴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죄를 범했다고 하시면서 “인자는 성전보다 더 크며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안 그래도 중풍 병자에게 네 죄를 사한다는 신성모독의 발언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경건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주시하고 있는데, 자신이 성전보다 크며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 규정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가장 큰 권위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의 주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해석과 권위를 박살 내고 있으니 얼마나 분노했으며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주목하고 감시하고 있는데, 또 다른 안식일 충돌이 발생합니다. 6-7을 보십시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여기 ‘엿본다’는 말은 악인이 의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기다리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당시 안식일 규례는 생사가 갈리는 일, 출산과 같은 일에는 의료행위가 허락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응급처치만 가능하고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칠 것으로 예상하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자비를 실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고발하고 죽이기 위해 아프고 병든 자를 미끼로 사용하고 안식일 계명을 이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종교의 이름과 경건의 명목으로 이렇게 악행을 행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들의 의도를 아시는 주님은 손 마른 자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고, 주목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11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는데,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이라도 짐승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그냥 놔두지 않고 건집니다.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병들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안식일 규정을 따지면서 고치지 않고 그대로 고통 가운데 지내게 하냐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재산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악함입니다.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보다 크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칩니다. 그를 고치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아시면서 의도적으로 고치어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하십니다. 안식일에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 선한 일을 행함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십니다. 그 은혜로 평생 불구로 살던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온전해졌습니다. 잃어버렸던 건강을 되찾고 안식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율법주의의 묵은 포도주에 길들어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서로 의논합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마태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마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가복음 3:4-6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잠잠했습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알면서도 대답하면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왔던 안식일 규례가 다 무너지고 안식일의 주인 노릇을 해왔던 권위도 다 상실됩니다. 그래서 잠잠합니다. 비겁한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분노하십니다.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병자의 고통에는 조금의 관심이 없습니다. 약자의 눈물에는 하등의 마음 씀이 없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자가 나음을 입고 고침을 받았는데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선을 행하기는커녕 죄 없는 자를 어떻게 고소할까,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어떻게 죽일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성경에 박식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들이 했던 짓입니다. 이들은 금식, 정결 의식, 안식일 준수를 엄격히 지켰지만, 정작 그 근본정신과 의미를 몰랐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몰랐습니다. 율법주의자였지만, 율법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완악한 이들을 보십시오. 왜 주님이 이들에게 탄식하시고 분노하십니까? 이들이 자신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잘못 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문을 닫아놓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금지 조항은 굉장히 강력한 신앙의 확인방법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묶여 있으면 금지를 통해서 나아가야 할 적극적이고 선한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과 취지를 잃어버리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규정해놓고 자신의 경건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금지보다 중요한 내용이 자비와 긍휼의 실천이며 사랑의 선행입니다.
미가서 6장 말씀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6-7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무엇이 참된 신앙입니까?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자비와 긍휼을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인자와 겸손과 자비와 긍휼이 빠지고 자기 의만 가득한 텅 빈 종교인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