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6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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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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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tlJA6M5Sn0 (김민수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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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세상 앞에 서야겠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주말 힐링 피정에 참석하셨던 한 수녀님 기억이 생생합니다. 2박3일간 저희와 함께 숙식하시며 피정하신 수녀님께서는 시골 영감 수도자들이 외딴 바닷가에서 알콩달콩, 아옹다옹, 깔깔깔깔,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에 느낀 바가 많으셨나 봅니다. 식탁에서 하시는 말씀, “우리 공동체 식사 시간도 이렇게 재미있었으면...”
깜짝 놀란 저는 수녀님께 여쭈었습니다. “아니, 왜요? 수녀님? 수녀님네는 식사 시간이 어쩐데요? 많이 썰렁한가요?” “썰렁한 걸 넘어서 완전 시베리아예요. 소화가 잘 안 될 지경이예요.”
저는 농담 겸 위로 겸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수녀님,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사실 저희도 별반 다를 바 없어요. 도진개진이예요. 수녀님들 떠나시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 염원하는 충만하고 역동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적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해 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 그래서 구성원 모두 소화가 잘 되고 건강한 공동체, 상호 간의 용서와 친교, 희생과 나눔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 주인공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는 공동체, 그래서 공동체 존재 자체로 세상의 등불이요 희망이요, 치유의 원동력인 공동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딱 그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루카 복음 7장 21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들의 물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공동체적 삶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역동적 치유의 현장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목격합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의 시달림으로 인해 오랜 세월 고통당하던 이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해방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이를 통해 그분의 메시아성을 명료하게 인식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날의 특별한 질병, 사랑의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친교와 일치로 충만한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보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를 건설해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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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2)일단 살아있어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태리에서도 우리와 거의 유사한 속담이 있군요. “살아있는 당나귀가 죽은 의사보다 낫다.”
물론 너무나 암담한 현실, 죽음보다 더 처절한 삶을 하루하루 이어가시는 분들에게 정말 송구스런 말씀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살아있어야 희망도 지니고, 일단 숨 쉬고 있어야 회개와 !!하고,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느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구분됩니다. 물론 구약시대 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쳤고, 구원에로의 초대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고, 죽음의 시대였고, 기다림의 시대였습니수님의 육화강생을 통해 시작된 신약시대는 더 이상 기다림이 필요 없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은총의 시대입니다. 진정한 생명의 시대이고, 빛의 시대, 구원의 새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무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아버지 하느님으로 고백하며 삶을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신약시대 태어난 것, 얼마나 큰 축복이요 행운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았던 죽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원한 생명의 문제가 예수님으로 인해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시대 아무리 난다 긴다 했던 정승이라 할지라도 신약시대 보잘 것 없는 우리보다 못합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큰 인물이고, 참으로 대단한 신앙인이었고, 대예언자였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구약의 인물이었습니다.
조금 봐주자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와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을 연결하고 있는 사다리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신약의 땅, 구원의 땅, 약속의 땅,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축복의 땅에 넘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준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신약의 백성이라는 것, 죽음의 땅에서 파스카의 다리를 건너 생명의 땅으로 건너왔다는 것, 매일 하느님 나라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구원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행복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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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dhgJKIU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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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보다 먼저 등대를 찾아야 하는 이유: 예수님보다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시어 사람들이 그분께로 오는 길을 닦게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침묵’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침묵’이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침묵시키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노력하면 침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는 김상운 씨가 방송일을 할 때 실제 접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우리에게 한없이 떠들며 두려움을 주는데도 그 목소리를 잠재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뱀에게 계속 물립니다. 뱀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아의 목소리를 끊으려고 노력하면 끊어질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새들이 사라져 봄이 되었는데도 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인 제목입니다.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최근 50년간 북미에서만 새들이 32억 마리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인간 때문인데, 인간으로 인한 온난화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먹이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충제로 새들의 먹이인 곤충을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뿌린 살충제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귀찮은 벌레들을 죽이기 위해 쓴 살충제가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줄 알았지만 결국 피해는 인간 자신이 본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곤충들이 있습니다. 그 곤충들을 내 힘으로 죽이면 괴롭힘도 없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죽습니다. 사실 나는 자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평온했을 때가 있습니다. 아빠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가 정착할 항구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항구가 있는 배는 바다에서도 고요합니다. 그러나 표류하는 배라면 생존을 위해 매우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항구 없는 배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영원한 항구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죽음 뒤는 책임져줄 수 없는 불완전한 간이역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저를 침묵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 잡념이 사라져서 잠도 잘 오고 다음 날도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자신을 보며 주님께서 더 울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 부모까지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항구를 알려주는 등대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희아 씨에게는 구세군 보육원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한 수녀님이 유학 와서 첫 해를 공부하고 너무 힘들어 되돌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알프스의 산자락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에델바이스’를 보게 해 주시면 한 해 더 해보고 아니면 돌아오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알프스를 걸으며 에델바이스만 찾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떠나기 전날 밤에 다음 날 출발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인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녀님, 저기 봐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수녀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알프스산 꼭대기에 둥그렇게 구름이 걷혀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아, 에델바이스가 알프스의 별이란 뜻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부부터 시작하여 석사까지 모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요해질 수 없습니다. 수녀님이 알프스로 가서 산행할 때 침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로 초대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스케일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광야로 불러내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까지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항구를 찾지 못한 배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항구로 이끌어 참 평화를 줍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나 항구에 머무는 사람은 또 누군가의 등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등대를 통해 항구를 발견하면 ‘감사’로 그 항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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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24-30 :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하신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몰려갔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절)고 물으신다. 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불모지 광야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의 무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러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들리는 갈대란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흔들리는 생각을 가진 인물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여자와 같은 사람, 비단 옷을 입은 왕궁의 궁인들과 같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러 건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세례자 요한이었다. 이 세례자 요한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신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26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절)고 하신다. 어떻게 요한은 모든 예언자보다 큰 인물일 수 있을까? 예수님도 예언자아삼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신명 18,15.18)이라 말하고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사도 3,23)이라고 한 그 예언자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자기와 태생 조건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본성이 다른 분과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느님과 인간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을 하느님과 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귿링 보러나간 것은 예언자이며 성인이다. 예언자보다 더 존귀한 자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라고 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에 앞서 올 분이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28절) 어째서 그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세례자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삶들은 더 이상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연인의 자식의 차이이다.
지금 내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앞에 충실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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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4-27)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속 풍조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 또는 세속의 처세술에 능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라는 말씀은, “처세술 같은 것이나 배우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즉 “하느님 말씀은 세속의 처세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은 구원을 위한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자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헤로데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세례자 요한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고운 옷을 입은 사람,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세속적으로 성공해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는 말씀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왕궁으로 가면 된다.”, 즉 “세속의 부귀영화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은 외면하고 세속의 부귀영화만 추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간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전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도록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은 ‘위대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이 한 일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자들이 하지 못했던 일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아의 일과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일입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이 말씀은 당신이 곧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신성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8-30)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메시아와 함께 살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의 수는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5)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몇이나 ‘참된 회개’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도(요한 3,17)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라는 말씀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이라는 말은,‘하느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였다.’는 ‘믿었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요한의 증언과 인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은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차별 당하는 사람도 없고,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는 말씀은,“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위선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고, 회개하면 받게 될 구원도 거부한 것입니다.) 회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또 구원받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이 은총일 수는 없습니다. 은총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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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란 감이 가을이 깊어 빨갛게 되면 늙어간다고 하지 않고 익어간다고 합니다. 잘 익은 감은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늙어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익어간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는 것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던 시메온과 한나는 신앙인으로 잘 익어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대사제들과 헤로데는 추하게 늙어갔습니다. 예전에 선배 사제들과 모임을 가질 때입니다. 젊은 사제였던 저는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무척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사제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아침이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사제로서 잘 익어가셨습니다. 어느덧 저도 다음 날 아침미사를 생각하며 일찍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의 눈에 잘 익어가는 사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시골 고모부 댁으로 갔습니다. 고모부는 사촌들을 부를 때면 ‘세례명’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이름도 있지만 세례명이 ‘본명(本名)’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명으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친척 어르신들도 제게 ‘본명’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저는 늘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에 오면 3가지 이름을 가지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서 부르던 이름, 미국에서 정한 이름, 그리고 세례명이 있습니다. 이중에 본명은 ‘세례명’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2년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준비합니다. 21세기의 교회는 많은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각 지역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합니다. 예전 공소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은 해결 될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인 본명을 불렀습니다. 주일에는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본당까지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신앙의 단순함을 회복하는 것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지름 길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광야로 나갔습니까?’ 재물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 있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예언자를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것들을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 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구름 뒤에 비추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이 바라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낮은 자세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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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부끄러운 고백>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평가를 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이러한 극찬 뒤에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이중적인 평가를 두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에 대해 한번 묵상하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신자분들과 함께 지내오면서, 그리고 특히 고해 성사를 드리면서 저는 사제란 “생노병사”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 혼인, 그리고 사회적인 경사, 기쁜 일, 보람된 일 등을 통해 “생”의 기쁨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늙어가면서 더 이상 성당에 오지 못하는 여러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방문하면서 “노”의 수고에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육체적인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안수를 주고, 영혼의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사죄경을 외우면서 “병”에 참여하고, 생물학적인, 그리고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사”에 참여합니다. 그렇게 사제는 하루에도 수십 번 다양한 신자들의 갖은 희노애락에 함께 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저는 눈물이 많습니다. 저 자신의 허물, 잘못을 돌아보며 그 죄스러움에 자주 울게 됩니다. 그런데, 어제 판공성사를 드리며 처음으로 저 자신이 아니라, 성사보시는 그 분의 아픔, 하느님께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먹고 살기 위해,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는 그 고백에...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습니다.
‘이 분을 그렇게 치열하게... 그렇게 간절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이것이 뭔가? 이렇게 쉽게, 안일하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생각에 하느님께 죄송했고, 무엇보다도, 그 분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가끔은 하느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욕망, 인간적인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면, 하느님께 ‘하느님 왜 이리 힘들어야 합니까? 남들은 대충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왜?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입니까?’ 라고 말씀하십시오. 떼를 쓰십시오. 형제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사를 드리던 내내, 그리고 강론을 준비하던 내내, 신학교에서 어느 선배가 한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다 정작 자신의 영혼을 구하지 못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참으로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둘러보면 반듯이 넘겨짚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신앙에 맛들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보조자로 있으면서 정작 제 자신의 신앙 문제, 제 자신의 삶의 문제를 성찰하지 않고 지낸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잘 안내한다고 해도, 제 자신이 그분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대할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비참한 인간으로 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앞서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안내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풂으로써 그분의 신원이 빛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소리였을 뿐 그는 “복음”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헤로데 앞에서 정의를 외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순교 안에 십자가의 신비가 담겨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그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수를 알고 깨달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늘나라에서 더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안내자일 뿐이지, 그리스도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다시 제 얘기로 돌아갑니다. 저도 안내자입니다. 늘 부족하게 하느님 앞에 미안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그런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안내자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안내자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충실히 해야 함을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충실하지 못했음을... 너무 안일하게 하느님의 은총을 다루었고, 제 맘대로만, 욕심대로만 살았음을 고백하며 여러분의 너그러운 용서를 청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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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나귀의 소명>
필리핀에서 양성교육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의탁하는 수도사제의 삶을 추구하리라 다짐하면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는 말씀을 서품 성구로 선택했습니다. 첫 미사를 드리며 공동체와 많은 분 앞에서 강론할 때 가장 많이 한 비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불러주신 당나귀입니다. 저는 제 등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저를 드러내기 위해 두 다리를 함부로 치켜세워 등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땅에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당나귀는 되지 않으렵니다. 제 등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며 저는 주님께서 쓰시고자 불러주신 당나귀의 삶을 충실히 살겠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면서 지나간 제 삶을 돌아봅니다. 그때 공동체 앞에서 다짐했던 말처럼 예수님을 등에 업고 충실하게 살았다기보다, 오히려 제 등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치는 사람들의 박수를 저를 향한 것인양 착각하며 예수님을 잊고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음을 반성합니다.
겸손한 사람이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신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알고 실행하며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고르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사람의 삶이 아닐까요 ? 제가 예수님을 업고 열심히 나아갈 때, 그리고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불러주신 당나귀로서 제 삶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예수님은 오늘 요한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을 제게도 들려주실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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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헌철 펠릭스 신부님]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추운 날씨와 더불어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많은 분들이 한해에 대한 반성도 하면서 내년에는 올해와는 다르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벌써부터 가지곤 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내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주변의 분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많은 듯 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 덕분에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도 내년을 위한 새로운 결심을, 우리를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를 통해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본당의 한 자매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타로 점 한 번만 보면 안될까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냥 재미삼아서요” 자매님을 바라보며 웃으며 이야기 했습니다. “혹시나 좋은 일 있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요? 맞지요?” 자매님이 슬쩍 웃고 마시더군요.
마음속으로는 이해가 되더군요. 사는게 힘들고 아들은 취직도 안되고, 주머니에 여유도 없고, 성전 건립 봉헌금에 대한 부담도 있고,... 그래서 혹시나 내년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하는 심정이라는 것을 저 또한 공감해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이셨겠지요.
앞일을 미리 안다는 것.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을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위해 이런 저런 기회와 행운을 찾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정말 우리에게 정확한 미래에 대해서 알려만 준다면 아마도 그 사람을 찾아 온갖 일들을 다 할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는 말라기 예언서 3장 1절에서 말하는 사람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메신저 이며, 사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자였으며, 회개하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라고 외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한 세례자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지목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당시의 많은 이들에게 “혹시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스스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면서 구세주 오실 길을 준비하는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찬사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며, 요한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보다 더 고귀한 품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예언자라면 우리는 그 희망의 열매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복된 존재들임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백성과 세리들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였고,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레자 요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 예언자였습니다. 그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복된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이며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림 3 주간, 우리들의 제대 앞에는 3개의 촛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초의 색깔이 점점 옅어져 가듯이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도 회개를 통해 예수님 맞이하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희망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변화가 그 희망을 현실로 이끄는 힘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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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루카 7,24-30(대림 3주 목)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라는 질문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성취를 통해 당신의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야?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예언자냐? 그렇다.”(루카 7,24-26)
이는 그는 “예언자”라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밝히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그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6-27)
이는 그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메시아에 앞서 와서 길을 닦으러 온 사자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후에 산에서 내려왔을 때,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8)
이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주지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구약의 한계에 속한 인물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이’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쌀쌀한 찬 겨울, 우리는 대림을 지내면서 어디에 나와 있는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광야에 나와 있는지, 왕궁에 나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러 나와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나와 있는지를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만나고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무엇을 찾고 누구를 보았는지 말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지, 헐벗은 옷을 걸친 예언자인지, 혹은 세상에서 큰 자인지, 하느님 나라의 작은 자인지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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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루카 7,24)
주님!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끌려 나아갑니다.
오시기에, 오시는 임에 끌려 나아갑니다.
떠나야 당신을 만날 수 있기에, 힘껏 저 자신을 박차고 떠나갑니다.
의심도 흔들림도, 화려함도 껍데기도 벗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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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7,24)
<판공성사!>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말라기 3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소명이 주님이신 예수님의 길을 닦아놓는 소명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소명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러자 백성과 세리와 창녀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번 각자의 모습을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은 잘 닦여 있는지?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탄생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청소는 잘 되었는지? 여전히 싸우고 있고, 용서하지 못하고 있고,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은 아닌지?
오늘부터 며칠 동안 근처에 있는 성당에 판공성사를 주러 갑니다. 판공성사가 단순히 하나의 율법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닦는 구원 행위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잘 준비해 성사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5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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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만나거든>
루카 7,24-30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사람을 만나거든>
착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착하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착하게 키워야지
고운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고우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곱게 다듬어야지
맑은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맑으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맑게 씻어내야지
밝은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밝으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밝게 빛내야지
바른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바르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바르게 펴야지
따뜻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따뜻하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따뜻하게 나눠야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아름다우신 분께 감사하며
나를 아름답게 가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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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기도 중에 너무 많은 분심으로 힘들다는 사람을 자주 만납니다. 그때 제가 주로 하는 조언은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분심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십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찾아보십시오.”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주님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분심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네가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면서 의지가 없어서 우울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정신의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보려는 노력이 자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어둠 속에만 머물려는 유혹은 생각보다 큽니다. 그 유혹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주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주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실행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그들보다 훌륭하며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영광은 복음에 따라 사는 이들의 영광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드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을 예언자로, 예언자보다 위에 있는 인물로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율법에 따른 의로움에서 그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이며,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온갖 축복과 선물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나누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믿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의지를 세워서 보려고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도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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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내 환경이, 조건이 모두 엉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이 나를 피하지 않고 다가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앉은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 지금의 힘듦을 스스로 극복해낼 때 보이는 나의 자리였습니다.
나의 자리인 꽃자리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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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
예수님과 젊은이 3명이 달리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한발 앞선 사람이 있고, 동시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고, 한발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칭찬받을 사람일까요? 모두가 다 칭찬받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앞길을 닦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며,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각기 역할이 다양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또 인정받고 산다는 것은 즐겁고 뿌듯한 일입니다. 더더욱 사랑받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른 이를 위로해 줄 수 있고, 인정해 주며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이 큰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고(마태21,26),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기 될 것이라고 예언한바 있습니다(루카1,76-78).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3,16-17).하며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7,28).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얼마나 헌신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이요, 선택된 사람이었으니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몽땅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7,28).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 진다해도 그는 결국 오실 ‘가장 작은 이’,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하게 오셨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위로해 주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눈에 드는 삶이 중요합니다. 많이 사랑받기보다 많이 많이 사랑하는 오늘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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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훈련, 사랑의 힘>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요즘 영성생활에 새삼스러이 공감하는 단어가 훈련입니다. 영성 역시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천재라도 평생 한결같이 훈련에 힘쓰는 이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얼마전 강론에 인용했던 기쁨의 훈련, 희망의 훈련, 꿈의 훈련이란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묵상해보니 우리의 수행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고,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평생 훈련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기도도 훈련이고 사랑도 훈련인 것입니다. 훈련은 반복이니 반복 훈련입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는 얼마나 기막히게 좋은 영성훈련인지 깨닫습니다. 기쁨의 훈련, 희망의 훈련, 믿음의 훈련, 사랑의 훈련, 마음 순수의 훈련, 진실의 훈련, 진리의 훈련, 기도의 훈련등 모든 훈련이 망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훈련-‘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로 정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닮기에 사랑의 훈련보다 더 적절한 평생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평생훈련이자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영성훈련중의 훈련이 ‘사랑의 훈련’이요, 영적 힘중의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나 사랑공부, 사랑훈련에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평생 배워야하고 평생 훈련해야할 사랑입니다.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나 무지가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만병은 사랑 결핍에서 기인하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훈련에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열정이 소중합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훈련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달전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을 주제로 연피정시 모토는 ‘사랑이 되기’였습니다. 영어로 하며 더욱 분명히 감지됩니다. 완성이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Becoming Love” 사랑이 되기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존재론적 변화를 뜻합니다. 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압축한 말입니다. 여기서 착안한 기도문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인터넷 강론에는 이미 두 번 올렸지만 수도형제들 앞에서 강론하기는 처음입니다.
대림시기에 맞이하는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하느님께 드린 헌시獻詩’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대림시기에 적절한 마라나타 아람어 대신 “오소서, 주 하느님”으로 시작되는 긴 기도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와 “행복기도”에 이어 세 번째 제 대표 기도문으로 꼽고 싶습니다. 감히 하느님이 되게 해달라니, 도대체 이보다 더 큰 영적 욕심도 없을 것이나, 청정욕(淸淨慾)이기에 하느님도 이해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경청이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섬김이
당신의 친절이
당신의 연민이
당신의 치유가
당신의 지혜가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정의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당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바로 그러하셨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망
이것 하나뿐이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2021.12.8.
기도는 이렇게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던져 놓고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보면 순수한 기도는 반드시, 서서히 응답되기 마련입니다. 얼마전 강론 내용중 공동체 생활중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것도 사랑의 은총이요, 태풍을 미풍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사랑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사랑의 대가大家’, ‘사랑의 달인達人’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사랑의 훈련에 올인한 예언자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노아를 물로 심판할 때처럼 우리에게 결코 분노를 터뜨리지도 우리를 꾸짖지도 않으시겠다고 맹세盟誓하시는 하느님의 결연決然한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사랑할 때 진상眞相을 압니다. 하느님 사랑의 화신化身과도 같은 예수님이시기에 세례자 요한의 진상을 꿰뚫어 직시하십니다. 흡사 얼마전 써놓은 시, 겨울 동안거冬安居중의 겨울나무 같은 이미지의 요한입니다.
“일체의
부수적인
것들은
다 떠나 보내고
사랑의
본질로 남아
동안거冬安居
광야같은
배밭 깊은 고요중에
사랑의
봄꿈을 꾸는
겨울 배나무들
바로
겨울 세상은
이렇게 사는 거다”-2021.12.12
예수님은 광야의 요한은 시류時流냐 유행에 중심없이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며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얼빠진 허영의 사람도 아니라 본질로 꽉찬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 극찬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눈으로 요한의 신원을 정확히 알려 주십니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여기에 결정적인 사랑의 말씀이 뒤따릅니다. 바로 사랑하는 우리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미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를 세례자 요한보다 높게 평가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또한 감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훈련에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힘을 선물하시어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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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iuvxBJ9W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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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 27)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 길을 닦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란
생각하며
잊지 않는
마음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기도로 길을 닦는
사람이 있기에
사랑이 있고
길이 있는 것이다.
정성어린
그 길로
주님께서
오신다.
사랑을 닦으며
우리는 사람의
참모습을 다시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노력하며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할는지를
깨닫게 된다.
사랑이 맑아지면
길도 맑아진다.
길을 닦는
뜨거운 자유
길을 만나는
뜨거운 기쁨이
있다.
모든 길은
하느님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니기서
나의 뜻을
내려놓는다.
뜻을 내려놓는
여정이 길을 닦는
여정이다.
희망과 빛의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생활로
드러난다.
생활을 통하여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닦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사랑을 닦는
대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랑의 길 위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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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도 껍질을 벗듯
누군가를 향합니다.
누군가를 향하기에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고
주님을 만나야 할
우리 내면의
여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만나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만남은
관계맺음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잃어버린
내면의 길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 내면은
반드시 광야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길을 내어야
할 곳은 언제나
우리 마음 안입니다.
길을 닦으며
길은 길다워지며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길의 신비는
만남의 신비입니다.
어떤 사람인지는
어느 길을 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대림시기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하는지를
묻고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길도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이 온통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길을 닦는
겸손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닦고
가다듬어야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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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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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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