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삼년전, 은나라에서 돌아온 이후로 계집이라고는 쳐다도 보지 않던 화령이다. 헌데, 그런 화령이 직접 은교를 찾아갔다.
게다가, 술먹고 취해 널브러진 그녀를 직접 안아다 침상까지 옮겼다니.. 절대로, 너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화령.
설마-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것이냐.'
. . . . . .
"전하, 전하답지 않은 행동이셨습니다. 감히, 황제폐하의 후궁을 직접 안아다 침상에 눞히시다니요."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것은 아니다."
"허나, 전하의 행동은 충분히 그분에게.."
"피곤하구나. 너도 그만 들어가 쉬어라."
자신의 오랜 지기이자 호위무사인 수에게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한번 흔들고서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달아나 버리는 화령.
그런 화령을 보며,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수였다.
'그 때.. 은나라에서 만난 그 계집과 헤어진 후, 왕후마마와도 얼마못가 헤어진 전하신데.. 왠일로 여인에게 그런 행동을 하신걸까?
아무리 황제폐하의 둘도없는 동생이신 의왕전하시지만..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갈만한 행동이 아닌데..'
. . . . . .
위나라 수도 영위에 위치한 하룡객점.
척 보기에도 기품이 넘쳐흐르는 한 여인이 불안한 얼굴로 연신 객점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그녀를 모시는 시녀인 듯 보이는 소녀도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유시(17시~19시)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그와 동시에 면사포를 뒤집어쓴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입구에서 두리번 거리다가 이내 불안한 시선으로 객점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 은밀히 속삭였다.
"일단, 위에 잡아논 방으로 가지요. 연교님."
. . . . . .
"그래도 여장은 의외였습니다, 비한."
"이런모습으로 찾아뵙게되 송구하옵니다, 공주님. 소신이 외교사절단으로 위나라를 자주 방문했던 탓에 얼굴이 많이 알려져있어
함부로 얼굴을 내밀고 다닐 처지가 못되어.."
"후훗- 그렇지만,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사실, 비한 얼굴이 좀 눈에 띄어요? 비한과 은교가 같이있을때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두 사람 다 너무 눈에 띄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번에 봤을때보다 심하게 야윈얼굴을 하고서 애써 웃음짓는 화향공주를 비한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신유태자에게 듣기로는 남양으로 피신해오면서도 자신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며, 밤마다 죄책감에 울부짖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모시던 시녀 한명만 데리고 위나라로 말을 몰아 가버렸다고 했다.
이미 거멓게 패인 눈과 더 옴폭하게 패여 들어가는 그녀의 보조개가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휴- 공주님. 아무래도.."
"비한. 비한이 은교를 구하러 직접 위나라로 올걸 알았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말을 몬거에요."
"은교는 제가 알아서 구할테니, 부디 공주님께서는 그만 남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공주님같은 분이 계실곳이 못됩니다."
"제발! 제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마세요."
"공주님!"
"당신을 돕고싶어요. 은교 구하는일에..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 싶어서.. 이리 비한공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부디, 당신을 돕는것을 허락해 주셔요."
. . . . . .
신성전(申成殿).
무에게 화령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왠지 모르게 무척 심난하여 계속 술을 들이키고 있던 사령에게 유상궁이 뫼가 들어있다고 알렸다.
사령은 술을 내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심난한 마음을 숨기고 언제나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래. 알아보았느냐, 뫼?"
"네, 주나라 간자를 통해 은밀히 알아보았는데.. 화향공주와 충렬태자의 혼인이 파기된 이유는 화향공주가 처녀가 아니라서랍니다."
"뭐라? 화향공주가 처녀가 아니라서 혼인을 파했다? 확실한것이냐?"
"주나라 궁에 심어둔 믿을만한 사람을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일이 있었으면, 공주만 내치면 될것을.. 어째서 굳이 남해황제와 그의 일가들을 내치고 동맹까지 파기했을까?"
"저- 폐하.. 양양황제가 남해황제와 그의 식솔들을 쫒아낼 때, 남해황제의 후궁 중 한명은 그대로 주나라에 남도록 명령했다 합니다.
이 점이 석연치않아 뭔가 있는듯하여 사방으로 조사중입니다만.. 아직은.."
"그 후궁이 누구라더냐?"
"워낙 주나라 궁에서도 쉬쉬하는 일이라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해황제의 다섯번째 후궁인 향비윤씨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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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녹상서사 김유문의 집.
"아니아니! 이게 누구신가! 비한이 아닌가?! 연락도 없이 예까지는 어인 발걸음이신가?"
위나라에서 녹장서사라는 꽤 높은 관직을 맡고있는 김유문의 아들 김한선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지기 비한을 반갑게 맞았다.
비한의 나이 열 여덟.
남해황제의 명령을 받고 위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우연히 객점에서 만나 술한잔 하던것이 인연이 되어 한선과 지기의
연을 맺은지 벌써 오년이었다.
"조국에 큰 일이 터져 그대와 더 이상 길게 담소를 나눌 시간이 없네. 다름이 아니라, 그대에게 청할것이 있어 이렇게 잠시 들렀네."
"휴- 은나라 소식은 나도 들었네. 애통한 그대의 마음을 감히 위로해 줄 엄두조차 나지 않는구만.. 헌데, 내게 청할것이란게 무엇인가?"
"이 아이가.. 내 누이인데.. 수도인 은영이 점령당하기 전까지 곁에서 공주마마를 뫼셨네. 자네도 알겠지? 얼마전 포로로
끌려온 난향공주."
"난향공주? 아- 이번에 황제폐하께 첩지를 받았다는 그 천하절색이란 소문이 자자한 공주를 말하는 거구만."
한선의 말에 비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후궁이라니.. 벌써, 그녀에게 후궁첩지를 내렸단 말인가? 혹..
혹, 벌써 그녀의 몸을 취한것이 아닌가?
시리도록 차갑게 굳어진 그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연교(화향공주)가 불안한 마음에 얼른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아챘다.
'나중을.. 나중을 생각하셔요, 비한.'
"이 아이가 공주께서 적적하실까 밤낮으로 걱정하며, 그 옛정을 못잊고 다시 공주마마를 뫼시고 싶다 하도 청을 하길래..
나도 개인적으로 그 공주와 친분이 있는데..
아는사람 하나 없는 궁에서 어찌 지내실까.. 걱정도 되고.. 하여, 이 아이를 궁으로 보내 곁에서 공주마마를 다시 뫼시게 해주었으면 해서."
"흐음~ 헌데, 자네의 여동생이 궁에서 궁녀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의외구만, 그려. 자네집도 꽤나 유명한 재상댁이 아니었는가?"
"공주께서 이 아이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셔서. 시간이 없네. 도와줄 수 있겠는가?"
"..물론이네. 궁녀 하나 들여보내는건 일도 아니지. 맡겨만두게. 보름안에 입궁시켜줌세."
. . . . . .
'도대체 심심해서 견딜수가 없구만!'
화령이 놓고간 몇병을 술로 무료함을 달래며 그래도 몇일동안 잘 버텨오던 은교는 술이 다 떨어지자 드디어 폭팔직전에
이르렀다. 정신적 고통도 이런 정신적 고통이 없었다.
'않되겠다. 이렇게 살아선 속병들어 돌아가기도 전에 답답증으로 죽고말꺼야. 그리구, 지금 나는 바깓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체, 하루종일 이 궁에 쳐박혀 있어야 하잖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구.
밖에 나가면.. 아무래도 위나라 정세와 은나라 소식.. 그리고, 어쩌면 신유오라버니나 비한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꺼야.
좀 자존심 상하긴 해도.. 일단은.. 그 황제를 만나봐야겠어.'
"그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갈것이니, 길을 안내해 주세요."
"마마, 송구하오나 그 사람이 어느분을 지칭하시는건지.."
"누구긴 누구겠어요. 황제죠."
절대로 내뱉기 싫은 말을 억지로 휙 내뱉고는 몇일 째 폐인처럼 잔뜩 헝클어놓았던 머리를 대충 비단끈으로 동여매었다.
"저- 마마. 송구하오나, 그런 모습으로는 황제폐하를 알현할 수 없사옵니다."
평소에 왠만하면 그녀의 일에 별 간섭하지 않던 김상궁이 시녀들을 불러 그녀의 머리와 옷새무새를 매만지게 했다.
마음같아서는 '그런놈 만나러 가는데 단장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신히 참았다.
이윽고, 어느정도 공주의 모습이 갖춰지자 김상궁은 은교를 신성전으로 안내했다.
"유상궁, 난향비마마께오서 폐하를 뵙고싶다 청하시네."
"아- 난향비마마.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인은 신성전 외 모든 궁의 인사와 살림을 맡아보고 있는 유상궁이라 하옵니다.
헌데, 마마.. 송구하오나, 지금은 폐하를 뵐 수 없을 듯 하옵니다."
"왜죠? 안에 없나요?"
"저- 그게 아니오라.. 지금 안에 중요한 분이 들어계셔서 그분과 말씀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는.."
"아.. 그럼 다음에 다시오죠, 뭐."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고, 은교에게 고하는 유상궁을 향해 은교는 어색한 웃음을 한번 지어준 뒤 발걸음을 떼려했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절대 열리지 않을것만 같던 사령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령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이곳까지는 무슨일이지, 난향비?"
"아- 뭐.. 좀 드릴말씀이 있어서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자리에 앉아있던 뫼를 향해 그만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뫼가 그의 옆을 지나갈 때 그에게만 들리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향비가 자결했다는 말이 난향비의 귀에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단속 단단히 잘 하도록." |
#14
원탁에 마주앉은 두 사람. 은교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령의 시선을 어색한 듯 피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폐..하께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자신을 처음으로 폐하라 칭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것도 잠시 이내 그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그 청이 무엇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그러니까.. 위나라 황실의 여자들은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은나라에서는.. 황궁 사람들이 출궁을 하는것이
어느정도 자유로웠거든요. 음.. 저는 자주 출궁을 했고.. 또.. 출궁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여기서만 있으니까 답답증이 나고..
이곳은.. 우리 조국이랑 다르고.. 어.. 또.. 그리고.. 구경할만한 것도 없고.. 또.. 어.. 그리고.."
"난향비, 네 어미를 사랑하나?"
별로 사이도 좋지 않은 그에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청을 하던 은교는 그녀의 말따위는 처음부터 듣고있지 않았다는 듯
그가 갑자기 내뱉은 뜬금없는 질문에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의 이루고자 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띈 체 그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그건 왜 뭍습니까?"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 갑자기 그런건 왜.. 아니, 그러니까.. 뭐.. 이 세상에 자기 부모를 사랑 않하는 자식도 있답니까? 그리 당연한 걸 굳이
말로 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승질이 팍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를뻔 했던 은교는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한동안 의미모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사령은 이내 그녀에게서 눈을 거두고 무심한 투로 물었다.
"그래서, 그대의 청이 무엇인가?"
"아-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저.. 아.. 소첩이 소원이 있는데요.. 음.. 출궁 한번만 했으면 좋겠어요. 가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내가 널 어찌 믿고 내보내지?"
"저, 절대로 도망가지 않아요!"
"네 부모조차 내팽개치고 도망가던 그대가 아닌가? 그런 그대가 더 이상 무엇이 무서워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겠는가?"
"그럼 호위무사를 붙이면 되잖아요!"
"그대가 도망치던 날에는 근처에 호위무사가 없었나? 그 호위무사를 다 뚫고 용감무쌍하게 도망가던 그대가 아닌가?"
한 마디도 지지않는 사령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은교는 이내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사령을 향해 씽긋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목석같은 남자 사령조차 그 아찔함에 움찔거렸다.
"호호호, 폐하께서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대가 도망가던 날은 내가 없었나?"
"적어도 그 날은 제 옆에 계시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제 옆에 꼭 붙으셔서 도망못가게 저를 감시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네!"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사령을 보며 눈을 빛내는 은교의 눈빛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결국, 위나라 최고의 목석 사령. 그녀 앞에서 무너지다..
"이틀 후, 미시까지 신성전으로 오라. 단, 두 시진만이야."
"꺄아아악! 감사하옵니다, 폐하! 호호, 만세를 누리소서~"
오랜만에 소녀처럼 깔깔 웃는표정으로 차를 홀짝이는 은교를 보며, 사령은 무언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뭔가 기쁜 것 같으면서도 아련하고 그리운..
한참동안, 멍하게 그런 은교를 바라보던 사령은 이내 은교가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난향비."
"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혹시라도 황제가 변덕을 부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령을 바라보는 은교. 그리고, 그런 은교의 시선을 즐기듯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꺼내는 사령이었다.
"내가 그대의 소원을 하나 들어줬으니.. 그대도 나의 소원을 하나쯤은 성취해 주어야겠지?"
'흥! 어지간히 거래를 좋아하시는 황제시구만. 남자가 째째하게 이 정도 가지고 계산 들먹이다니. 흥이다, 정말 흥이야!'
"어머, 폐하! 위나라의 포로로 잡혀있어 힘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소녀 따위가 어찌 폐하의 크신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대만이 이루어 줄 수 있는 소원이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령. 결국, 은교는 '어휴! 이 바보! 멍청하게 저 능구렁이 같은 황제의 덫에 걸려들었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를 향해 말해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앞으로, 그대의 처소에서 침수들겠소. 아주 간단한 소원이지.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지, 난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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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전.
그날 밤, 살짝 작은 기대감을 안고 오랜만에 은교의 처소를 찾은 사령.
그러나..
"소, 송구하오나.. 폐하.. 저.. 마마께오서는 이미 침수드셨사온데.."
'어쭈, 이거봐라?'
사령이 자신을 취할까봐 재빨리 침수든 은교를 보며, 사령의 당황스러움과 함께 그 깜찍함에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띄우며,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뭐- 어찌되었든, 앞으로 그대와 함께 할 날들은 많으니.. 오늘은 내가 져주겠소, 난향비."
아기같이 새근새근 작은숨을 내쉬며 잠든 은교의 홍조어린 뺨을 슬며시 쓸어보는 것. 사령은 그날 밤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5
오랫만에 해보는 바깥나들이에 한껏 들뜬 은교는 '위나라 정세와 은나라 소식을 알아보자'라는 본뜻은 까맣게 잊은체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구경하기 시작했다.
반면, 그냥 지방 귀족자제들이나 입는 수수한 비단옷을 걸치고 나왔건만.. 역시 그 수려한 외모와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까지
감출 수 없는 위나라 지존(地尊) 사령.
그는 그에게 잔뜩 사심어린 눈길을 보내대는 여인네들 때문에 밀려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른체 은교 옆에 서서 걷고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배가 고파오던차에 은교의 눈에 들어오는 '은나라 요리 전문.'이라고 크게 써있는 건물이
포착됐다. 겉은 약간 허름했지만, 맛있는 곳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위나라에서 은나라 요리점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오래전부터, 항상 서로 으르렁 거리가만 해왔으니..
폐.. 아니.. 저기.."
은교는 '폐하'라는 호칭을 입에 담으려다 주위에 시선들을 의식하고는 그를 어찌 부를까 이리저리 고심하고 있는데..
그 모습에 피식 한번 웃고는 은교에게 자신의 이름을 거리낌없이 말해주는 사령이었다.
"사령이라 불러."
"아- 네. 흠흠, 저기 사..령. 이미 점심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배고프지 않아요? 은나라 음식은 담백해서 무척이나 맛있거든요.
뭐.. 육류를 즐기는 위나라 사람들에 입맛엔 맞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먹어보지."
의외로 순순히 자신의 제의를 허락하는 사령의 말에 고마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은교였다.
'이 인간만 아니었으면.. 내 나라 음식을 내가 먹는데.. 일일이 허락을 맡을일도 없을텐데.. 휴- 지나간일 생각해 뭐하나..
그래도, 이 더러운 성깔에 같이 먹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렇게 음식점에 들어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공주의 신분으로 먹기엔 너무 천한 음식이라며 향비가 절대로
못먹게 하던 '비빔밥'을 주문하고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보던 은교는 순간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얀 망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있어 과연 자신과 눈이 마주친건지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 하얀 면사포 안에 언뜻
비쳐지는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되있는 거 같았다.
'누구지? 그러고보니,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거 같은데..'
비빔밥이 나오고 한동안 찜찜한 기분으로 그 여자를 힐끗힐끗 바라보던 은교는 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발적인 그녀의 행동에 옆에서 비빔밥을 깨작거리고 있던 사령도 덩달에 일어났다.
'아, 맞다. 이 사람이 있었지.'
"무슨일이지?"
"아- 저 잠깐 뒷간엘 좀 다녀오려구요. 설마, 그곳까지 쫒아오지는 않겠죠?"
사령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가 뒷간으로 들어갈 때 까지 그녀를 향한
날카로운 은색 눈동자를 거두지 않았다.
한편, 뒷간이 객점 안에 있는것을 원망하며 은교는 끙끙거리고 있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일어설 때
같이 일어서 이곳까지 따라 들어오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모르는 사람인가? 흠~ 나는 또 하두 빤히 쳐다보길래.. 혹시.. 신유 오라버니가 보낸 사람 중 한명인 줄 알았네.'
뒷간에서 나와 다시 자신과 사령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던 은교는 순간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혀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은교는 당황스런 얼굴로 자신과 부딪힌 하얀 면사포 여인을 바로보았고, 놀란 사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그런것이었다. 분명, 일부로 그녀와 부딪힌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다른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만.."
나직하게 속삭이듯 사과하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은교는 놀라움으로 그 우습게 넘어진 자세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비, 비한이야. 부, 분명히 비한이야. 그, 그가 어떻게..'
비한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령을 보곤 그녀를 일으켜주는 척 하며, 그녀의 손에 꼬깃하게 접은 서찰 한장을 쥐어주었다.
"괜찮은건가?"
"아.. 저는 괜찮아요. 너,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사령이 다가왔을 때, 비한이 이미 발빠르게 음식점을 나간 뒤였다. 은교는 비한이 서찰을 건낸것을 행여나 사령이 눈치챌까
잔뜩 조마조마한 가슴을 움켜진체, 그 서찰을 얼른 주머니에 넣었다.
"흐음.. 방금 너와 부딪쳤던 여인.. 미망인인가 보군."
"미, 미망인이요?"
"그 여인.. 면사포를 두르지 않았던가? 이미, 그 법은 폐쇄됐는데.. 아직은 그 잔여가 남아있나보군."
"그, 그래요. 이만 궁으로 돌아가요."
"아직 두시진이 지나지 않았는데.."
"피, 피곤해요."
은교는 대충 얼버무리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빨리 돌아가서 그의 서찰을 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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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를 친히 난향전까지 데려다 준 사령은 곧 신성전으로 돌아갔고, 거의 뛰다시피 자신의 처소안으로 들어온 은교는
얼른 주위를 물리고 난 후, 비한이 건낸 서찰을 꺼내 읽었다.
그만이 가진 그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글씨체가 눈에 들어오자, 은교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의 글자 한자한자를 마음에 새기 듯 정성스레 읽어내려갔다.
「곧 화향공주가 네 궁녀로 입궁할거야. 하고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글을 길게 쓸 수 없어.
화향공주와 적당히 틈을 노리다가.. 내가 직접 네 처소로 가 너를 빼올거야. 그때까지 절대 황제에게 별다른 기미를
보여서는 않되.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말고, 그가 네게 붙인 호위무사들을 모두 거둬드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
어찌되었든, 최대한 큰 싸움 일으키지 않고, 너를 빼내는 게 최고의 방법이니. 그럼 곧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며..
추신. 이 서찰은 보는 즉시 태워버리도록 해.」
비한의 쪽지를 다 읽고 난 은교는 환희와 걱정이 교차되는 기분으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위험해, 비한.. 그 황제는..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냐."
"허면, 비한은 만만한 사람이구요?"
#16
"허, 헙! 여, 연교언니?!"
"쉬잇!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황궁은 벽에도 귀가 있고, 사방이 뚫려있는 곳입니다. 소리를 낮추시지요, 마마."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얼굴이 많이 상했잖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워 그녀의 마른 얼굴에 작고 하얀 손을 갖다되는 은교를 연교는 웃는낯으로 꼭 안아주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내 김상궁이 저녁수라를 내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연교는 얼른 표정을 고치고 김상궁을 도왔다.
"네가 왜 마마의 방에 있는것이냐? 네 마마께 인사를 올렸느냐?"
"예, 마마님."
황녀가 귀한 은나라 황실에 태어나, 은교 만큼이나 대접받고 사랑받던 언니가 한낯 상궁따위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보자 은교는 김상궁이 들고오는 저 저녁수라를 모두 뒤엎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런 은교의 욱하는 성질을 잘아는 연교는 밥상을 옮기면서 은근히 은교에게 무언의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김상궁, 내 저녁시중은 저 아이가 들었으면 해요."
"송구하옵니다만..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마마."
"왜죠? 전 저 아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마마, 궁에는 지켜야 될 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 아이는 어제 입궁하여 오늘 이곳으로 배정을 받은 아이입니다.
일곱살 적부터 입궁하여 수 많은 법도와 도리들을 깨우쳐도 모자르다고들 하는데, 겨우 어제 입궁한 아이가 마마를
어찌 뫼시겠나이까? 저 아이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잔심부름을 하며 당분간 궁중법도와 예절을 배워야 합니다."
"하, 하지만!"
"마마의 하회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오나.. 소녀 아직 배워야 할것들이 많습니다. 부디, 이 점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결국, 은교는 연교와 포옹한번 한것을 끝으로 그녀를 김상궁과 함께 내보내야 했다. 마음이 무척이나 착찹했다.
'그나저나, 언니가 어떻게 위나라에 있는거지? 입궁은 또 어찌했고? 혼인은 어찌된거야? 주나라 태자와 혼인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한참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녁을 대충 먹고, 상을 치우니
이내 술시(19시~2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은교는 '아! 그 인간이 곧 오겠구나.'하며 언제나처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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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한참, 아침수라를 들고 있던 사령은 화령의 방문에 이내 밥상을 물리고, 원탁위에 차 한잔을 놓고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폐하, 소신 오늘 그만 의국(懿國-화령이 다스리고 있는 위나라의 남쪽지방)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화령의 말에 사령은 한참동안 그를 빤히 응시하였다. 알고싶었다. 형제고 뭐고 다 제쳐두고 남자대 남자로써 그가 은교에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알고싶었다.
"난향비 때문인가?"
사령의 말에 화령은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의 은색 눈동자를 마주보고 확실하게 못박았다.
"그녀는 폐하의 여인이옵고, 소신은 그녀와 지기(知己)가 되고싶은 마음 외에는 남녀사이에 느끼는 그런 감정을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폐하."
"허면, 왜 갑자기 의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냐? 한달정도 더 머물러도 될것을."
"폐하, 소신 의국을 너무 오랫동안 비웠습니다. 게다가.. 술도 다 떨어졌습니다. 황궁의 술들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아서요."
화령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대답에 사령은 결국 그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신성전을 나온 화령은 돌아가기전에 은교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었다. 그녀가 술먹고 졸도해 그가 그녀를 직접 침상에 눞인뒤로
당분간 난향전의 출입을 자제하라는 수의 충고를 받아드려 그 뒤로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화령은 어찌되었든 의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영위에 오기 힘들것이란걸 생각하며 난향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왕전하께서 여긴 어인 발걸음이시옵니까?"
"저번처럼 술을 잔뜩 가지고 와 일을 내진 않을것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마마께 고하여 주시게."
화령을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은교에게 고하는 상궁과는 대조적으로 은교는 무척 기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후원의 경치를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은교가 잔뜩 기대감에 부푼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화령, 오늘은 술을 챙겨오시지 않았나 보네요?"
"푸하하하! 이러다가 공주께서도 저처럼 술꾼이 되시겠습니다. 송구하옵게도 저도 술이 다 떨어져서 미처 챙겨오질 못했습니다.
오늘은 느긋하게 공주와 차 한잔 하고 싶어 들렀습니다."
"차요? 뭐, 그럼 오늘은 제가 차 한잔 대접하죠, 뭐."
옆에 있는 나인보고 차를 내어오라고 시킨 뒤, 화령에게 이것저것 밖의 정세와 언제나 대화 주제로 빠지지 않는사령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은교는 저 멀리서 차를 들고오는 연교의 모습에 반가워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은교의 미소에 그녀가 누굴보고 웃나 궁굼해진 화령은 이내 그녀의 시선을 쫒아 다가오고 있는 궁녀를 보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궁녀가 그들에게 가까워지즈음 그냥 시선을 돌리려던 화령은 이미 선명해진 궁녀의 얼굴에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차를 가지고 오던 연교의 눈길도 화령에게 향했고 화령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던 그녀는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은빛 눈동자에 깜짝놀라 찻잔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다, 당신은!"
#17
지금으로부터 약 삼년 전.
연교의 나이 열 여덟이었고, 은교의 나이 열 다섯이었다. 생긴거완 다르게 늘상 사고를 몰고 다니는 은교때문에
궁안의 모든 시선은 은교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정말 공주처럼 얌전하고 조용한 연교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연교는 은교처럼 궁녀로 변장을 한다거나 하지 않아도 쉽게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날도 은교가 한바탕 사고를 치는 바람에 모든 궁녀들은 뒷수습에 정신이 없었고, 그 틈을 타 연교는 자신을
모시는 나인 하나와 함께 슬그머니 궁을 빠져나왔다.
"마마, 오늘은 비녀를 보러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근처에 새로생긴 비녀집이 있다는데 그 정교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랍니다."
"흐음.. 그럼, 그리할까? 비녀들을 구경한후에 객점에 들러 삼계탕 한그릇 먹고 들어가자구나."
"꺄악! 삼계탕이요?!"
좋아라 날뛰는 나인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며, 연교는 근처에 새로생긴 비녀집으로 향했다.
그 규모가 어찌나 크고, 그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한참을 이것저것 둘러보던 연교는 결국 작은 진주로 장식 된
수수한 은비녀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나인에게도 같은 것으로 하나 선물했다. 물론, 나인은 입이 찢어져라 기뻐하며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연교와 나인은 언제나처럼 그녀들이 즐겨가던 객점에 들어가 삼계탕 요리를 주문한 뒤
느긋하게 이런저런 사람들을 구경했다.
특히, 한쪽 구석에 모여앉아 도박을 하는 이들을 구경하는 것은 그 어떤것보다도 재미있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보시기엔 이번판엔 어떤 사람이 돈을 딸 것 같습니까?"
"으음.. 글쎄다.. 내 생각엔 저기- 저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딸 것 같은데?"
"검은색 비단옷? 에, 에그머니나! 눈동자가 왜 저리 섬뜩하답니까? 저런색의 눈동자는 난생 처음봅니다."
"섬뜩? 그것보다도, 그 눈매가 무척이나 예리하게 생겼구나.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확실히, 저런눈은 보기 드문 눈이지."
"자- 아가씨들. 삼계탕 나왔습니.. 어, 어이쿠!"
한참, 도박판을 구경하느라 삼계탕이 나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연교는 갑자기 치마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국물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생각만큼 뜨겁지는 않았으나 이미 치마 아래쪽이 홀딱 젖어버렸다.
나인은 깜짝 놀라 허둥거렸고, 아까 그녀에게 삼계탕을 쏟은 사내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며 행주를 가지고 와
그녀의 치마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남자는 그녀의 치마에 엎질러진 국물을 닦는게 아니라 그녀의 허벅지를 은밀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이, 이봐요! 어딜 만지는 거에요?!"
잔뜩 놀란 연교가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능글맞게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년의 허벅지가 참으로 곱구나."
"이, 이자가! 가, 감히 그런말을.."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쪽에 씻는곳이 있습니다. 씻고 계시면 제가 얼른 새옷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이거 놓아라! 되었으니 이거 놓으란 말이다!"
"아이고! 제가 죄송해서 그냥은 못보내지요! 자- 어서 이쪽으로 좀 오시래도요!"
"아, 아가씨!! 네 이놈!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어서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훗- 이거 곱게해서 말을 들을 계집이 아니로구만."
남자가 섬뜩하게 웃으며, 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남자 세명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 역시 잔뜩 섬뜩한 표정을 하고서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손에서 섬뜩하게 날이선 면도칼을 꺼내 연교의 얼굴과 나인의 목에다가 들이댔다.
"자~ 아가씨. 그 고운 얼굴에 상쳐내고 싶지 않으니 곱게곱게 따라와."
"꺄아아악! 도와주셔요! 도와주세요!"
잔뜩 겁에 질려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연교를 대신해 나인이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사람들은 그녀들을 외면했다.
심지어, 식당 주인조차도 늘상 있는 일인 듯 혀를 몇번 차고는 이내 그녀들을 외면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인은 결국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연교 앞을 막아섰다.
"내, 내가 대신 따라가겠으니, 우리 아가씨는 좀 보내주세요."
"걱정하지마라. 네년도 함께 데리고 갈 것이니. 흐흐흐..
어이, 아가씨. 끝까지 고집 부리겠다면, 아가씨 얼굴은 물론이거와 이 어린 계집의 목도 따버릴거야. 그러니, 순순히 따라와!"
남자는 잔뜩 욕망어린 웃음을 흘리며, 이미 겁에 질려 거의 혼이 나간것처럼 보이는 연교의 손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은교처럼 천방지축으로 무예 연마하며 자란것도 아닌.. 정말 공주처럼.. 궁에서 곱게만 자란 공주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게다가 날카롭게 날이선 칼로 자기뿐 아니라 올해 열 다섯도 체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위협하니..
결국, 연교는 남자의 요구에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눈에서 눈물이 마구 차올랐고,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렇게 모든걸 체념하고 남자에게 힘없이 끌려가고 있던 그 순간.
"어이- 거기 무뢰한들. 그 손들 놓아라. 그 여자는 나와 혼인을 할 몸이다. 손가락 하나 잘못 움직이는 순간 다들 골로갈 줄 알아."
"뭐야, 이 자식은? 크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다더니. 어디, 간만에 몸이나 풀어볼까?"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운 은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칼까지 들고 덤비는 네 명의 남자들을 힘으로 간단히 제압한 뒤, 그녀와 나인의 손을 잡고 그 객점을 나와 뛰기 시작했다.
"저 놈들의 끄나풀이 꽤 많아서 이왕이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게 좋을껍니다, 낭자."
"지,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18
그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데리고 온곳은 고작 자신이 묵고있다는 은영산 안쪽에 위치한 낡은 집이었다.
"아마, 지금쯤 그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낭자를 찾고 있을거요. 내 생각엔 오늘은 이곳에서 조용히 머무시는게 좋을 듯 싶군요."
"도, 도움은 감사하지만.. 이만, 구.. 아니, 제 집으로 돌아가봐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주었고, 믿을만한 남자라 해도 공주 체면에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낼 순 없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을 그 남자가 다시 잡았다.
"낭자. 혹시, 내가 무슨짓을 할까봐서 그런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이래뵈도 여자에 환장한 놈은 아니니.."
"그, 그런뜻이 아닙니다. 저, 저는!"
"아, 아가씨.. 제 생각엔.. 이분의 말씀을 따르는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집으로 가려면, 아까 그 객점을 지나쳐야 되는데..
그, 그러다가 그놈들을 다시 만나기라도 하면.."
"흠.. 낭자보다는 이 아이가 훨씬 현명하군. 아까는 네명밖에 되지 않아 낭자를 도울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나도
낭자를 제대로 도와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오."
남자의 말에 결국 연교는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평생 처음으로 남자와 한방에 있는것이
영 어색한지 눈동자를 어디에 둘지 몰라 이리저리 굴렸다.
남자는 그런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차를 우려 그녀와 나인 앞에 내밀었다. 어린 나인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손을 벌벌 떨며 찻잔을 들었다가 떨어트렸다.
"죄, 죄송하, 합니다.. 아,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아직 어린 소녀같은데, 꽤 많이 놀랐나보군. 내가 치우겠으니 내버려 두고, 그만 들어가서 쉬는게 좋을 듯 싶구나."
나인은 잔뜩 빨개진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나마, 안정이 좀 되는지 슬슬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화령이라 하오."
"여, 연교라고 합니다. 아- 그러고보니,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도와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하- 뭐 그 정돌 가지고.."
화령은 멋쩍은 듯 웃으며, 방 한켠에 곱게 개켜놓은 옷을 마구잡이로 파해쳤다. 한참을 그렇게 뭔가를 찾는 듯 옷들을 파해치다가
드디어, 예쁘게 하늘하늘거리는 여자들이 입는 비단옷을 들고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낭자가 입고있는 옷은 더 이상 옷 구실을 하지 못할 것 같은데.. 씻고, 이 옷으로 갈아입는게 어떻겠소?"
"저.. 그 옷은.. 기녀(技女)들이 입는옷이 아닙니까?"
"아- 얼마전, 이곳에 왔던 기녀가 벗어놓고 간것이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기녀를 집안으로 불러드린 것을 얘기하며, 깁(비단 중 가장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가슴깨가 심하게
파인옷까지 내미는 화령을 보며, 연교는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며 겨우 입술을 떼었다.
"마,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런옷은 입을 수 없습니다."
"이보시오, 낭자. 뭐- 낭자께서 어느 귀한댁 여식이신 건 알겠는데..지금 이 상황에서도 품위를 따질 여유가 있으시오?
허면, 그 젖고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있을거란 말이오? 내 상각엔 적어도 지금 낭자가 입고 있는 옷보다는 이 옷이 훨씬
품위있다 생각하는데.."
"그, 그건 아니지만.."
"뭐- 그렇게 알아서 속살을 보여주시겠다면 저로썬 감사할 일이지만.. 그대는 그대의 속살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할테니.. 선택은 그대가 하시오.
그리고, 목욕물을 직접 떠다 바칠 수는 없소.
산 기슭을 따라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맑은 계곡이 있으니 그곳에서 알아서 씻으시오. 생각보다 물이 그리 차지는 않으니."
그는 그녀에게 옷을 떠안기듯 넘기고 난 후, 옆에 있는 작은 골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군대군대 찢어진 자신의 비단옷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나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화령이 건낸 그 옷으로 갈아입고,
치렁치렁하게 내렸던 머리를 땋아올렸다.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여인 그것도 공주의 몸으로 도저히 사방이 열린 계곡에서 옷을 홀딱 벗고 목욕할 엄두까지는 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방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연교는 드러난 가슴깨가 계속 신경쓰이는지 자꾸 옷새무새를 매만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술시(19시~2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곧 있으면 황궁문이 닫힐것이다. 지금쯤 갑자기 없어진 그녀를 찾느라 화향궁에는 난리가 났겠지. 그녀는 어린 나인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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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않되겠어요 마마. 제가 황궁에 가 도움을 요청하고 오겠습니다."
"아직도 저들이 저렇게 눈에 불을켜고 우리를 찾고있는데.. 어찌 궁까지 가서 도움을 요청한단 말이냐? 너무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모든걸 사실대로 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네가 무사치 못할것은 자명한 일인데.."
"어휴- 마마, 언제까지 예서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쯤 궁이 뒤집어져도 아주 발칵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이년은 어차피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황녀가 귀한 황실인데.. 마마라도 어서 궁으로 돌아가셔야지요!"
하루만 이곳에서 머물면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화령에게 당한 남자들과 그의 패거리들은 밤낮으로 객점 주위를 서성거리며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찾고 있었다.
벌써 나흘째였다. 황궁에서는 황녀가 사라졌다 난리가 났지만, 황녀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공개적으로 찾아다니지는 못하고
몇몇 병사들이 조용히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들이 이 산속까지 들어올리는 없었다.
"황궁까지 가지 못한다해도 근처에 있는 병사들이나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분명히 우리를 도와 줄 것입니다."
"낭아.. 그냥 기다리자. 분명히, 저들도 곧 지쳐서.."
"그래도 마마보다는 제 얼굴을 더 기억하지 못할것입니다. 이따 해시(21시~23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은밀히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다가.. 낭이 네가 해를 입으면 어찌하려고!"
"걱정하지 마세요. 꼭, 군사들과 함께 돌아올께요."
#19
낭이가 떠난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지만, 낭이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연교는 오늘도 어김없이 잔뜩 초조한 표정으로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낭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였다.
"밤바람이 찹니다, 낭자."
"설마.. 설마.. 낭이에게 무슨일이 생긴것은 아니겠지요? 다.. 다 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야. 그때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눈물고인 눈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연교가 않됐는지 화령은 슬며시 연교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여줬다.
평소 같았으면 '이 나라의 공주가 이게 무슨꼴이야'라고 생각하며 그를 밀어냈겠지만, 오늘만큼은 너무 슬퍼서
그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토해내는 연교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낭자보다는 훨씬 똑똑한 아이이니"
"그렇겠죠? 그럴거야. 분명히.. 집으로 돌아갔을거야.."
"그나저나, 그 옷 언제까지 입고 있을거요? 내 기억으론 그 옷 준지 사흘도 더 된 것 같은데.. 설마.. 사흘동안 그 옷만 입고 있었던거요?"
"아- 그, 그게.."
연교는 잔뜩 벌개진 얼굴로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보니, 벌써 육일동안 한번도 씻지 않았고, 옷도 한번도 갈아입지 않았다. 자신에게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은교라면.. 몸 자체에서 향기가나니.. 나처럼 이리 민망하지는 않을터인데..'
"자- 여기. 저번에 잠깐 시장에 나갔을 때 사왔소. 귀족들이 입는 그리 비싼옷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이 부드러우니 입을만은 할거요.
그러니, 왠만하면 계곡가서 목욕도 하시고, 옷도 좀 갈아입으시오."
그녀를 놀리는듯한 화령의 말에 연교는 얼른 화령에게서 그녀의 옷을 받아들고는 그가 가르쳐준 계곡으로 향했다.
일단은 몸을 좀 씻어야 될 것 같았다.
그의 배려인지 그가 그녀에게 건낸것은 비단 옷뿐만이 아니었다. 수건과 여자들이 목욕할 때 필요한 향료품..
심지어 속옷까지 챙겨져있었다.
화령이 옆에 있는것도 아니건만 괜히 민망해져 다시금 얼굴을 붉히는 연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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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 깨끗하게 씻고 돌아온 연교의 몸에서는 아까의 쿰쿰한 냄새는 사라지고 화령이 건낸 향료품 냄새가 났다.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기에 푸른색이 감도는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어색한지 연신 만지고 있는 연교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여자라면, 기녀에서부터 절세미인 심지어 황녀까지 겪어본 화령도 잠시 당황했을 만큼이나..
바깥의 별을 보며, 한창 술을 마시고 있던 화령은 괜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잔을 건냈다. 평소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했을 그녀도 밤풍경에 취했는지 쾌히 그의 잔을 받아들었다.
"집이 은영에 있소?"
"아.. 아닙니다. 사정이 있어 잠시 숙부님 댁에 머물고 있습니다. 화령님의 본가(本家)는 어디입니까?"
"뭐- 딱히 정해진곳은 없소."
"예? 허면, 부모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날 싫어하셔 집에서 내쫒으셨고, 어머니께서는 내가 다섯살이 되던 해 이유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소.
오늘이.. 어미니 기일이지."
화령의 말에 연교는 미안한 표정으로 화령을 바라보았다.
달 아래 그가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을 휘감는 낯선 감정에 깜짝 놀랐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를..
"자기 싫다는 남자가 뭐 그리 좋다고, 그리 죽을때까지 그 인간만을 찾던지.. 끝내 그 인간은.. 어머니께..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죽던 그 날을 회상하는지, 무심하기만 했던 화령의 얼굴에 짙은 슬픔과 고통이 깃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러워보여.. 연교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슬프면.. 참지말고 울어요."
"하- 울라니.. 사내대장부가 어디 여자앞에서.. 눈물을.. 흘린단 말이오."
"내가 내 어깨 빌려줄께요."
겨우 자신의 어깨에 닿을랑 말랑 하는 키를 가진 작은 여인이 화령보고 자신에게 기대에 울라 한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슬펐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리고 작은 여자의 어깨에 기대어 오열을 했다. 큰 소리로.. 그녀의 옷이 흠뻑 젖을정도로..
그날 밤, 화령은 난생 처음으로 몸과 함께 마음으로 여인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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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연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기절할만큼 놀랐지만, 그에게 자신의 첫 순결을 내어준 일을 결코 후회하진 않았다.
아직도 그녀를 허리를 감싸고 있는 화령의 팔을 치우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화령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귀에 확고한 어조로 속삭였다.
"한달 뒤, 당신에게 청혼할꺼야."
아직 무슨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커다란 눈만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는 연교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화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직 발가벗고 있는 그녀에게 그녀의 옷을 건내며 수줍음이 많은 그녀를 위해 그녀에게서 뒤돌아 그녀가 옷을 다 입을때까지 기다렸다 .
이윽고, 연교가 옷을 다 입고나자 그는 살짝 미소띈 얼굴로 그녀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위(偉)나라 사람이오."
위나라 사람이란 말에 연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아직은 동맹관계에 있지만 위나라와 은나라의 사이가 어떤지는
나랏일에 별 관심없는 그녀도 모르진 않았다.
"무슨일이 있어도 기필코 당신에게 청혼하러 오겠으니, 당신 숙부댁에서 머물며 딱 한달만 기다려 주시오."
#20
낭이가 도움을 청했는지, 아니면 그들도 지쳤는지 그 날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연교는 무사히 정말 자신의 숙부가 사는 집앞에 화령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에게 자신이 은나라의 첫째 공주임을 밝힐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정확히 한달후요. 무슨일이 있어도 꼭 당신에게 청혼하러 오겠으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날 기다려주시오. 그래줄 수 있겠소?"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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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황제는 잔뜩 노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화향공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공주보다 이틀 먼저 돌아온 낭이라는 나인에게 다 듣고난 후였다.
"너는 우리 은나라의 첫째공주고, 네 나이 올해 열 여덟이다! 차라리, 은교가 그런일을 저질렀으며 납득이나 되지!
어찌, 연교 네가 그런일을 저지를 수 있단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이번일은 소녀가 백배천배 잘못한 일이오니, 아바마마께오서 그 어떤 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눈물이라도 줄줄 흘리며 빌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잘못을 비는 연교를 보며, 남해황제는 의아해했다.
한참을 노기어린 눈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남해황제의 머리속에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외간남자와 단 둘이 그 집에 있었다. 어린 나인은 벌벌떨며 그에게 분명 그렇게 고하였다.
남해황제는 그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열었다.
"여, 연교야.. 그 사내와는.. 아..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지?"
"............."
"연교야! 네 어찌 대답을 하지 못하느냐?!"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소녀, 은나라의 공주로써 몸을 더럽혔으니.. 더 이상 황녀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소녀의 직위를 파하시고, 소녀를 옥에 가두신다 하여도.. 소녀 따르겠사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연교 네가 이런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연교는 더 이상 그 어떤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주나라의 충렬이란 태자와 혼담까지 오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연교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그녀는 그런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이 흐르고,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남해황제가 머리에 손을 얹은체로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떤 놈이냐?"
"네?"
"너와 하룻밤을 보낸 그놈이 어떤놈이냔 말이다?! 어떤 신분을 가진 어디사는 누구인지.. 그 정도는 너도 알게 아니냐?!"
남해황제의 말에 연교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될 일이고.. 그는 정확히 한달후에 그녀에게 청혼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위나라에 사는 귀족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지만, 연교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말했다.
"위나라 귀족입니다. 아바마마, 그가 한달 후 청혼을 하러 온다 했습니다. 제 첫 남자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옵.."
'뭐라?! 위나라인이라고?! 정녕! 정녕, 연교 네가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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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교가 화향궁에 갇힌지도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기다렸다. 그가 꼭 올꺼라고 생각하며.. 하루에 몇번씩 숙부님네 사람을 보내 알아봤다. 오늘은 왔을까.. 내일은 올려나..
그러나, 두 달이 지났음에도..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동안, 주나라 충렬태자와 연교의 혼인은 성사되었다. 어쩐지 남해황제는 충열태자가 적통 아닌 후궁의 아들
그것도 비의 아들이 아닌 귀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
"언니.. 내년이면, 혼인할 여인이 꼴이 이게 뭐야.. 제발 한술이라도 떠. 응?"
평소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생 은교가 직접 밥을 떠서 입에 넣어주려 했지만, 연교는 이미 말라비틀어진 얼굴을 흔들며
거부했다. 너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눈은 이미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듯 퀭했다.
"언니, 정말 이럴꺼야?! 이러다가.. 이러다가.. 정말 죽기라도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
"나.. 혼자.. 있고 싶어.. 은교야.."
"밥 먹는 거 보면 갈께. 응? 언니!"
"황제폐하 납시오!"
남해황제의 등장에 연교는 힘없이 축 늘어져있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예를 갖췄다.
남해황제는 그런 연교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은교보고 그만 처소로 돌아가라고 명한 후, 연교와 원탁에 마주앉았다.
"혼례는 내년 가을로 잡았다."
"하, 하오나.. 아바마마! 소녀는.."
"네가 궁밖에 나간동안에 벌어진 일을 아는 사람은 짐과 너, 그리고 그 나인뿐이다. 아니, 그 나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너와 짐뿐이라 해야겠구나."
"그, 그 아이를 죽이셨습니까?!"
"네가 말한 위나라놈은 오지 않았다. 왔어도 절대 허락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놈은 오지도 않았어. 허니, 그만 그놈은 잊어라."
"소녀 차라리 죽겠습니다. 황실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죽여주십시오."
"네가 전에도 짐에게 그런말을 했었지? 황실의 명예를 더럽힌 죄, 죽음이 아닌 주나라와의 동맹강화를 인한 혼례로 갚아라."
"아바마마! 소녀는 이미 몸을 더럽혔는데, 어찌 다른사내의 아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네 너를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면, 네 어미의 명예와 또한 너와 피가섞인 해유의 명예 또한 지킬 수 없다.
어찌하겠느냐? 네 정녕 내 말을 거역하고, 국문을 받을것이냐?!"
남해황제의 말에 연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남해황제가 제대로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결국, 연교는..
"혼인.. 혼인을 하겠습니다. 대신.. 소녀에게도.. 그 사람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삼년후에.. 아바마마께서 맺어주신 그 사람과..
혼인..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