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마재성지를 찾아서
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유교(儒敎)의 변절자,
천주교(天主敎)의 배교자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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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사시절. 1973년 여름방학 숙제로 살고 있는 마을의 보물이나 유적 또는 가보(家寶)를 조사 연구해오라고 하였다.
고3생인 김경희양이 다산 정약용 묘비문을 탁본해 와서 깜짝 놀랐다.
“너 어디서 이것을 가져왔느냐?”
“저의 마을에 있는 비석을 탁본했어요.”
“너의 마을이 어디인데?”
“예,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마재여요.”
이 말을 듣고 주말을 이용하여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양평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처음으로 마재(馬峴)을 찾아갔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강변에 있는 고적한 외딴 마을이었다. 강에는 떠서 흘러온 산인 쪽자섬이 있고 강건너편에는 두물머리와 검단산이 보였다.
그 후 이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 거의 주말마다 마재와 두물머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4형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마재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의 생활터전이자 가족 모두가 순교하여 시복 성지의 영예를 얻게 된 곳이다. 정약종은 천주교의 창립 주역의 으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정하상은 천주교를 재건하는 으뜸 지도자로 위대한 성인(聖人)이 되었다.
1985년 3월. 멀리 호주(濠州)로 유학을 가서도 다산을 연구하였다. 한국의 마지막 남은 선비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선생과 서신으로 한문학문답(漢文學問答)을 하였다. 1989년 9월 귀국후에도 問答은 계속하였는데 다산에 대한 서신 문답은 다음과 같다.
<제49신> 존경하는 松潭선생님께 삼가 드립니다.
-전략-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정조 13년(1789)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면서 규장각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었습니다.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된 후 다시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강진(康津)로 옮겨 순조 18년(1818)까지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연구에 전념하였고, 고양인 양주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하여 총 182책 503권의 저서를 남기었습니다.
묘소 앞에는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옛 모습 그대로 잘 복원되어 있고, 다산기념관 안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 중 목민관의 도리를 발췌하여 동판으로 제작 전시해 놓는 등 진품은 중앙도서관에 있고 이곳에는 복사품만 약간 있을 뿐입니다.
금년에는 다산문화관까지 새로 지어놓고 잘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당인 문도사(文度祠)를 알묘(謁廟)한 후 그리 높지 않는 산을 올랐습니다. 아담한 묘소 앞에 앉아 잠시 머리 숙여 명상에 잠겨보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조선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습니다. 선생의 실학적 세계는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거부하고 경전의 본래 정신과 시대적 변혁의 논리를 끌어내 경학(經學)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습니다. 동시에 민생의 고통을 직시하며 부패하고 잔혹한 봉건적 지배의 질곡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매몰되었던 우리의 역사, 지리, 풍속,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굴하는 것이며 밖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낡은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가는 지성적 모험을 하였습니다.
송담선생님! 다산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다산이 주석(註釋)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말씀하여 주십시오?
1998. 10. 22. 소인 정영기 올림.
鄭 先生님 貴下
보내주신 시집을 오늘 10월 26일 정오에 우체부로부터 전해 받아 한참을 하던 일을 나두고 읽었습니다. 아직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鄭선생님의 시 솜씨가 이렇게 미끄럽고 단수가 높은데 대해 놀랐습니다. 풍부한 시상을 막힘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셨으니 저로서는 감히 논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시의 속에도 세상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이상(理想)과 해박한 역사(歷史)의 지식이 내포됨으로써 더욱 무게가 실린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가끔 그 쪽으로 방향을 돌린데가 많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어떻습니까?
정다산(丁茶山)을 극구 찬양을 하셨는데 이 분은 본시 유학자에서 천주학으로 가버린 유학계(儒學界)의 변절자여서 유학인(儒學人)에게는 찬사보다는 배척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논어(論語) 일부만 파악을 했어도 그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유자(儒者)들의 평론(評論)입니다. 왜냐하면 유자(儒者)의 주장은 친(親)을 친(親)한 뒤에 민(民)에 인(仁)을 베풀고, 민(民)에 인(仁)을 베푼 뒤에 물(物)을 애(愛)한다 하여 덕(德)을 베풀음이 후박(厚薄) 대소(大小) 원근(遠近)의 차등이 있어 도(道)에 질서가 정연(整然)한 것이고, 천주교는 그 차등을 철저히 무시하고 겸애동인(兼愛同人)을 하는 것이니 이는 맹자(孟子)가 무부지교(無父之敎)라고 배척을 했던 묵적(墨翟)의 도(道)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산(茶山)이 해설한 사서(四書)의 주석(註釋)을 보면 철두철미 주자(朱子)의 뜻을 뒤엎기로 용심(用心)을 하여 거의 그대로 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아무리 주자(朱子)가 오석(誤釋)을 한데가 없지 않더라도 그렇게 100% 모조리 틀렸을 리(理)가 있겠습니까? 이는 주자(朱子)를 이기겠다는 사심(私心)에서 나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밀한 내용은 여기서 말할 수 없으니 대충 그렇게만 아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장점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1998년 10월 26일 弟 李栢淳 再拜
1996년 공부하는 자식 둘을 데리고 다산초당(茶山艸堂)을 찾아갔다. 강진(康津)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 김이중(金二中) 장로가 반가워하면서 안내를 하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하여 주었다. 그 때의 기행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실학사상의 산실인 다산초당을 찾느라 비 오듯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파른 산을 힘겹게 올랐다.
이곳은 실학사상의 대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년간(1801~1818)의 유배기간 중 10년 동안을 생활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다산의 유적은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정석(丁石),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천(藥泉),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다조(茶竈), 바닷가의 돌을 주어다 만든 연지석가산(硯池石假山) 등 다산 4경에서 선생의 손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75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그 자리에 목조와가로 중건하였다. 현판에 판각된 ‘茶山艸堂’이라는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을 집자(集字)해서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이 위치한 이곳 도암면 귤동마을 뒷산은 많은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다산(茶山)”이라 불렀는데, 이 산의 이름을 선생의 호로 사용했다고 한다.
‘동암(東菴)’이란 현판에 판각된 정약용의 친필을 볼 수가 있고,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목조건물인 ‘천일각’이 있는데,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형 정약전(丁若銓)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 쪽 다도해까지 한눈에 볼 수가 있다고 한다.
2024년 4월 19일. 봄의 끝자락 곡우절(穀雨節)날 상학학술회 최연장자인 황영목(黃泳睦 92세) 실버 스마트폰강사와 요수(樂水) 노태민(盧泰民) 총무와 셋이서 오랜만에 다산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다산 유적지는 천지개벽이 되어 있다. 능내리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인 비포장 도로였는데, 4차선 직선 도로가 신설되어 있다. 을축년 대홍수 때는 여유당(與猶堂)이 물에 잠겨 다산의 저서가 물에 떠내려갔고, 1973년에는 나와 김경희 학생이 바지를 걷고 쪽자섬에 건너가 마재성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지금은 팔당호로 변하여 넓은 바다와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남한강민물장어집에서 장어구이를 맛있게 먹은 후 정약용 유적지를 방문했다. 먼저 가파른 산소를 올랐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면서 지팡이와 난간을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묘소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일본 전 총리 아베가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에게 준 일본 최고급 술 Dasai23을 獻酒하고, 요수(樂水)가 고유문(告由文)을 지어 낭송하였다.
告由文
維歲次甲辰三月癸卯朔十二日甲寅 後學河東鄭榮基敢昭告于
文度公茶山丁若鏞先生 伏以
天眷我邦(천권아방) 하늘이 이 나라를 돌보시어
先生是降(선생시강) 선생을 탄생케 하시니
才氣泣鬼(재기읍괴) 재주는 귀신을 올리고
學問求實(학문구실) 학문은 실사를 추구하였네
輔弼君王(보필군왕) 군왕을 보필하며
聖寵過分(성총과분) 임금의 총애가 과분하였지만
時代不遇(시대불우) 시대를 만나지 못해
被滅門禍(피멸문화) 멸문의 화를 입어
流於康津(유어강진) 강진으로 유배 되었네
憂國衷情(우국충정) 나라 걱정하는 속마음으로
一表二書(일표이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著述大作(저술대작) 대작을 저술하니
天下經營(천하경영) 천하 경영의 큰 계책이
在此書中(재차서중) 이 책 속에 있었지만
知己已逝(지기이서) 자신을 알아주든 정조는 이미 서거하고
丈夫抱負(장부포부) 장부의 포부는
終乃水泡(종내수포)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네
後世末學(후세말학) 후세의 변변치 못한 사문으로
不禁痛嘆(불금통탄) 통탄을 금치 못하나이다
山高水長(산고수장) 산처럼 높은 품격 강물처럼 긴 유덕을
仰慕何窮(앙모하궁) 앙모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나이까
乃涓吉辰(내연길진) 이에 길일을 택하여
敢以疎詞(감이소사) 감히 성긴 글로써
虔告獻酌(건고헌작) 경건히 고하며 잔을 드리오니
如在英靈(여재영령) 엄연히 계시는 듯한 영령이시여
監此微衷(감차미충) 이 작은 정성 살펴주소서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 앉아서 선비처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에 대하여 토론을 했다. 다산 정약용은 유학자인가 아닌가? 정답을 알려면 정약용선생이 해석한 육경(六經)과 사서해(四書解)를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인인가 아닌가? 정답은 정약용 선생이 쓴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읽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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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쁨을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많은 댓글이 왔다.
* 초당 선생님!
좋은 분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셨군요. 연로하신데도 학자로서의 삶을 견지하고 계시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 다녀온 지 오래 되었는데 저도 마재성지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마지막이라 하지 마시고 언제까지나 건안하시길 바랍니다. (남민옥 시인)
* 조선시대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생가 마재. 솔바람 부는 여유당에서 황선생님과 요수 제자와의 여유로운 담소. 해지는 줄 모르고 웃을 수 있음에 노년을 아름답게 장식하시는 초당 선생님! 세상 부러울 게 없으실 듯합니다. 만수무강 하옵시길 기원드립니다. (이춘희 시인)
* 높은 산을 우러러 보며 큰 길을 따라가시는 선생님의 존현정신을 배워갑니다. 나날이 평안을 빕니다. (노태민 수필가)
* 정영기 선생님의 호 ‘초당’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많은 책을 저술하셨듯이 선생님도 강동 초당에서 많은 책을 저술하셨군요.
지금도 가끔 바람 쐬고 싶은 날에는 두물머리를 찾게 돼요. 정약용선생 유적지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요. 고인이 되신 ‘운파’라는 시인과 함께 정약용선생 묘소에 가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꼭 신춘문예에 당선되게 해주십사고요. 특히 4형제가 천주교인으로 박해를 당하셨는데 저 역시 마재성지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였어요. 또 부산외국어대학 이경만 교수와 함께 유배지인 강진 다산초당과 흑산도에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덕분에 정약용 선생님을 재조명하면서 깊은 학문의 뜻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상림 한국예술인총연합회 편집위원)
*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이신 선생님!
역시 어르신의 글은 명문장입니다. 언제 기회 되면 문학특강 초청 핑계대고 뵙고 싶습니다. 늘 강녕하셔야 합니다. (허형만 카톨릭문인회 이사장)
* 초당선생님! 인생사 지혜롭고 올바르고 최선을 다하시며 살아오신 흔적들 감동입니다. 회장님께서 늙는 것은 개인의 서러움이오, 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오래오래 강녕하옵소서. (김정길 옥천군 향토사학자)
* 三乎 24.06.06.21:59
우선 樂水선생님의 告由文을 관심 있게 읽어 보았습니다. 요즘 세태에 그저 묵념하고 말텐데, 글을 지어 추모하고 참배하기는 보기 드문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송담선생님의 다산에 대한 견해는 이제까지 제가 들어왔던 것과는 다소 의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학문의 다양성 차원에서 그런 시각도 분명 제고해 봐야 되겠지요.
저도 다산선생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2011년과 2016년 다산연구소에서 주최한 두차례 실학기행 행사와 2012년 다산묘제에 참석해서 많이 듣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엔 게을러서 잘 안봐지네요.
선생님! 언제나 건안하시기를 빕니다. (부산에서 공부하는 조봉익)
* 三乎 아우! 松潭선생님의 주장이 정답일세. 茶山선생이 쓴 四書解도 읽어보지 않은 학자들의 주장은 틀린 것일세. 나도 한동안 유명한 漢學者와 茶山에 대하여 크게 토론을 하였네. 이번 작품에 그 토론 내용을 언급하고 싶었으나 그만두었네. 남을 비판하거나 貶毁하는 글은 쓰지 않기 때문일세. (초당)
첫댓글 우선 樂水선생님의 告由文을 관심있게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세태에 그저 묵념하고 말텐데, 글을 지어 추모하고 참배하기는 보기드문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송담선생님의 다산에 대한 견해는 이제까지 제가 들어왔던 것과는 다소 의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학문의 다양성 차원에서 그런 시각도 분명 제고해 봐야돠겠지요.
저도 다산선생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2011년과 16년 다산연구소에서 주최한 두차례 실학기행 행사와, 그리고 2012년 다산묘제에 참석해서 많이 듣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엔 게울러서 잘 안봐지네요...
선생님,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삼호아우! 송담 선생님의 주장이 정답일세. 다산 정약용의 4서해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글은 틀린 것일세. 나도 한동안 유명한 한학자와 정약용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네. 이번 작품에 그 토론을 언급하고 싶었으나 쓰지 않았네. 나는 남을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글은 쓰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일세.
뒷배였던 개혁임금 정조를 잃으니 그만 끈떨어진 연이되어 18년을 귀양살이를 하며 한때의 시절을 보냈으니 그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구태를 벗고 새로운 시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정양용의 실학사상을 이해는 할수 있으나 굳이 기존의 유학평론들을 새롭게 각색하고자 하는 과한 의욕도 보이긴 하지요. 유학의 천명을 천주교의 천주와 연관지어 이해하려는 면도 있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기나긴 귀양살이동안 차를 만들어 즐기고 불자와 교류하며 기존의 유서들의 주석을 살펴 가려적고 주역에도 심취하였던 다산은 그시대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올려주신글 즐감 하였고 송담선생님의 글에도 동조하는 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