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편지에 관한 시모음 2)
봄아 봄아 봄날을 위한 편지 /이도연
소박한 풀꽃을 사랑하는 친구야
너는 축복의 땅 시골이라는 신의 성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니
인간이 만들어 놓은 땅인 도시라는 곳에 풍요는
보이지 않는 치열함과 경쟁이 낳은 산물이라는 걸
누런 지퍼같이 펼쳐진 도시 길가에 피는 꽃은 힘겨운 신음으로 꽃을 피운단다
시골살이
조금은 불편해도 봄에 실루엣이 상앗빛으로 스미던 날
흙을 가꾸며 들꽃 속에서 박꽃같이 행복한 미소를 짓던 아름다운 친구야
지금은 잊힌 동토의 계절
들판은 황량하고 능선의 나무는 썰렁한 바람 둘러업고 일없이 흔들리며 사금파리 뾰족한 결핍의 계절일지라도
친구야
함박눈 오는 날이면 백옥같이 고운 빛 들판은 얼마나
아름답더냐
눈 덥힌 산하 상고대 눈꽃 나무는 또 얼마나 장엄하고 듬직하지 않더냐
은둔의 계절인 겨울에도 흙 속에 잠자는 씨앗의 숨결을
너는 들었을 테지
잠자는 대지의 호흡을 말이야
오감을 동원해도 회색빛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는 전설이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련이라는 자양분 없이 잉태하지
않는다더니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 추위는 꿔다 가도 한다는 속담을
증명하듯 찬바람이 날을 세우더라
추위 속에서도 친구가 사는 남도의 향기로운 봄소식은 어여쁘다
눈 속에 설중매나 붉은빛 동백이 피어나는 소식이 있던 날은 얼마나 찬 바람이 불던지
결핍의 계절을 건너온 꽃망울이 귀하고 사랑스럽다
봄 햇볕에 그을린 친구의 황톳빛 손아귀에
우직하게 걸려 있는 호미 끝에서 봄이 송알송알 솟아나겠지
친구의 겨울 봄꽃이
어서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까만 밤 하얗게 지새워 봄바람에 향기를 띄운다.
봄날 띄우는 편지 1 /김두환
그 텃밭 양지바른 데는
장다리꽃 곱게 피었죠
그이 가슴팍도 물올라 감들어
산수유꽃들 올려 겨루고 있겠네요
그 집에 가까운 강 가엔
피라미들 톡톡 봄물 입질하겠네요
그이 오지랖도 실긋실긋 설레겠지만
봄기운 아지랑일 오착(誤捉)하진 않겠죠
그 집에서 쳐다뵈는 산자락엔 오래 산
텃새들 봄맘 푸느라 휙휙 뒤넘기치겠죠
그대 속정도 그런 정경에 취해서
보글보글 석어 향기 뒤발하겠네요
뒷감당에 벌겋게 쏴 돌리는
눈총기 여기 꽂히는가 썩 뜨겁네요
물과 땅은 서로 드티지 않게 또한
무너지지 않게 도모하고 점수해서
많은 생물들 키워내듯이 언젠가 날아든
그이 먼빛 지성을 조심조심 키워서
지금껏 화운(和韻) 맞수로 삼고 있네요
가끔 한밤 탄금가 불려 선(禪)에 드네요
만만한 그 더늠 진지하기야 휘어잡네요
봄에 쓰는 편지 /이해원
얘들아
냉이를 밟으며 뛰어 다니지 마라
호미날로 흙을 놀라게 하지 말고 실뿌리도 다치지 않게 살살 뽑아라
산들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듯 흙을 만져보고
바닥에 떨어진 새소리도 바구니에 넘치도록 담아보고 싶구나
찔레순처럼 훌쩍 키만 커버린 아파트에서 잔고가 쌓여도 마음은 적자였다
미아방지용 목걸이를 걸고 걸음마를 배우고
방과 후 목에 걸린 열쇠로 빈집 현관문을 열던
그 허전한 추억을 기억하느냐
정이 없는 아스팔트에서 자라 흙길을 모르는 너희는
작은 풀꽃도 친구가 되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들아, 딸아
나는 이 푹신한 침대보다 군불 지핀 아랫목이 더 좋다
계산된 식판의 음식보다 쌉싸래한 햇나물에 비빈 봄을 떠먹고 싶다
링거액보다 계곡의 물소리를 내 몸에 들이고 싶다
한 움큼의 알약보다 귀로 먹는 새소리가 약이 되는 것을,
장미꽃보다 찔레꽃을 좋아하는 나에게
에어컨도 산바람 강바람만 하겠느냐
목련꽃 누런 딱지는 떨어진지 오래인데 내 상처는 왜 이리 아물지 않느냐
봄, 본제입납 /허영숙
- 어느 실직자의 편지
봄은 땅을 지펴 온 산에 꽃을 한 솥밥 해 놓았는데 빈 숟가락 들고 허공만 자꾸 퍼대고 있는 계절입니다
라고 쓰고 나니 아직 쓰지 않은 행간이 젖는다
벚꽃 잎처럼 쌓이는 이력서
골목을 열 번이나 돌고 올라오는 옥탑방에도
드문드문 봄이 기웃거리는지,
오래 꽃 핀 적 없는 화분 사이
그 가혹한 틈으로 핀 민들레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봄볕과 일가를 이루고 있다
꽃들이 지고 명함 한 장 손에 쥐는 다음 계절에는 빈 손 말고
작약 한 꾸러미 안고 찾아 뵙겠습니다 라는 말은
빈 약속 같아 차마 쓰지 못하고
선자의 눈빛만으로도 당락의 갈피를 읽는 눈치만 무럭무럭 자라 빈한의 담을 넘어간다 라고도 차마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다 그치는 봄날의 사랑 말고 생선 살점 발라 밥숟갈 위에 얹어 주던
오래 지긋한 사랑이 그립다 쓰고
방점을 무수히 찍는다. 연두가 짙고서야 봄이 왔다 갔음을 아는
햇빛만 부유한 이 계절에,
* 본제입납(本第入納) :
자기 집에 편지할 때에 겉봉 표면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쓰는 말
땅끝에서 온 편지 /풀피리 최영복
산 넘고 물 건너 땅끝 동네에서
동무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많이 보고 싶다는
담장 밖 함께 심었던 과수원에는 복사꽃이 피고
살구나무는 볼그스레 달아 오른 꽃망울이
마음을 점점 설레게 한답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매일 오르던 뒷산 연분홍 진달래꽃이
어서오라 부르는 메아리 소리와 졸졸졸 흐르는
맑은 계곡 물소리를 함께 봉하였으니
올 봄은 꽃구경도 같이 하고
은은한 보름달 하나 소주병에 담아내어
그동안 말못하고 꼭 묶어놓은 사람 사는 이야기
밤새 풀어가며 한번 마셔보자 합니다
삶이 무겁고 지쳐서
무언가 너무나 간절할 때 채워주고 비워주는 게 고향이니 버릴 것이 있다면 버리고
유년의 맑고 깨끗한 마음만 담아 가라 합니다
봄에 붙이는 편지 /풍요 임금옥
작은 창
새어나는 불빛을 따라
골목을 휘어 도는 연둣빛 향기
아직은 이른 새벽
안개에 잠겨
여명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데
바람은
차창 곁을 스쳐 지나고
봄 아침 기대어선 나는 창에다
부치지 못할 편지
써 내려 간다
햇살이
미소 띠면 사라진대도
봄소식 편지 /신성호
봄이 왔다고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다가
카톡으로 전할까
메세지로 보낼까
아니면 0.5미리 볼펜으로
곱게 써서 편지로 보낼까
어떻게 보내든 봄내음 가득담아
내마음까지 보낼 수 있다면 좋지
훈풍이 불고
봄비가 내리고
홍매화가 곱게 핀 사진도 첨부해서
없던 용기도 주고
새로운 희망도 보여주어
새롭게 신나게
그리고 멋지게 한해를 시작하자고
내 친한 친구에게
허물없이 그냥 전해주고 싶다
진정 답장은 안해줘도
나는 기뻐할 수 밖에........
어느 봄날의 편지 /김귀녀
연둣빛 나뭇잎들이 몸을 털어내는
어느 봄날
학처럼 맑고 선비처럼 곧은
지인의 편지를 받았다
친필로 쓴 편지
지금 시대에서 볼 수 없는 살 냄새나는 편지
남편 시집 선물로 드렸더니
꼼꼼히 챙겨 읽고
감동받으셨다는 그 편지
그 분이 살았던 푸른 숲길이 보였다
그 숲에서 햇빛과 공기
알맞은 비 그리고 바람이
신선하게 불어왔다
투명하게 살아온 그 분의 눈빛이 보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곧은 삶이 보였다
오늘처럼 따뜻한 봄날
봄볕이 들어오는 창을 통해서
봄눈으로 다시 피어났다
내 몸이 연둣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봄 편지 /황영순
나는 꽃씨입니다
아름다운 호미질을 기다려 온
흙 속의 꽃씨입니다.
추운 들녘에서
얼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결심으로 혈서를 쓰면서
긴 눈물로 왔읍니다.
슬픈 내 피 늦게야 이곳
이곳으로 와서
지녁마다 금빛 도리깨로
곤한 잠 깨우고
어두움을 털어내고 있읍니다.
오늘은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기침으로 올 것 같은
향그러운 새날입니다.
꿈길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밀려 오는
풍란처럼
풍란처럼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나는 꽃씨입니다.
봄 편지 /김덕성
봄 햇살이 제법 따스하게
시리도록 쏟아지는 날
나무 가지에 비둘기 두세 마리가
눈으로 주고받는 사랑의 교신을 보며
사랑으로 늘 품어 주시며
희망을 주시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날 내게 주신 사랑의 글월
한 송이 사랑의 꽃으로
내 몸에서 아름답게 피워졌고
구구절절 마음 깊이 새기며
얻은 귀한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진한 분홍빛 마음을 열어
드리고 싶은 말
그 한 마디
감히 마음을 열어 편지를 씁니다
진정 당신만을 사랑하노라고
영영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봄 편지 /조충생
잔설이 흩어지는 길가에
외롭게 불 밝히며 홀로 서있는
가로등 불빛은 희미한데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은 선명하고
발자국 흔적따라 세월은
허공에 공전하듯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새벽 동녘 창에
그대에게 띄운 봄 편지는
내용은 간절한데 전할수 없어
허공에 머물고
때 이른 훈훈한 바람은
그대의 두터운 옷고름 풀기에
충분하다
차가운 별 빛에
빛 한줌 담아 방황할 적에
그대향한 사랑의 불 밝히면
사랑 식은
그대 차가운 가슴에
내 사랑으로 봄 꽃처럼
아름답게 수 놓고 싶다.
봄 편지 /우당 김지향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 4. 6 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 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봄 편지 /임계자
봄이 되면 땅은
몹시 바빠집니다
깊숙이 숨겨둔
온갖 보물들을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겨울의 먼 길을 걸어나와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에게
안부 편지를 띄웁니다.
춥다고 움추려 신음하는
꽃잎들에게
따사한 봄 햇살로
눈 속에 묻어 두었던 이들과
이별도 해야 합니다.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꽃 잎 속에 피어나는
봄의 향기를
편지로 전해 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