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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徒信經
Apostles’ Creed / Symbolum Apostolorum / Σύμβολο της Πίστεως
Πιστεύω εἰς θεò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οιητὴν οὐρανοῦ καὶ γῆς.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나는 全能하신 아버지 하나님, 天地의 創造主를 믿습니다.
全能하사 天地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믿음이란 일정 기간 동안의 지성적이고 감성적이며 긍정적인 경험을 토대로 관계적으로 형성된다. 비록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미리 경험해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향후에도 지속성을 가지고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에 맞게 나 자신도 상대에게 호의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나의 긍정적인 경험과 예측과는 달리 부정적으로 나오게 되면 상대가 나의 믿음과 기대와 신뢰를 저버렸다고 하며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한번 더 신뢰 회복의 기회를 주거나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반면에 상대방이 믿을만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내가 상대방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응하게 되면 나는 실제로는 상대를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성과 감성 외에 영적인 경험이 수반된다. 영적인 경험이란 환상이나 기적처럼 어떤 신비한 현상뿐만 아니라, 지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사람으로부터 기인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믿음을 사람의 영에 심어놓으심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 영적인 믿음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이들에게만 심으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들 각자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해 부모를 통해 임신되는 순간에 심어놓으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의 영에 심으신 믿음의 씨앗이 언제 가시적으로 발현되는지는 아브라함이나 사도 바울 정도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이 거의 불가하다. 어쨌건 사람의 영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이 발현되기 전까지의 삶의 모든 순간들과 경험들과 환경들은 믿음의 씨앗을 발현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단계라고 볼 수 있으며 이 기간 동안에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겨자씨만한 믿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람의 영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은 사전 준비단계를 거친다 하더라도 씨앗 스스로 싹을 틔울 수가 없다. 이 믿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신데, 성령께서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고 성자와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에 완전충만히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우신다. 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택하신 성도의 영으로 보내심을 받으셔서 성도의 영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을 싹 틔우시는 것이다. 믿음의 씨앗 자체에 싹을 틔우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발아 후에도 스스로 자라날 능력이 없으므로 성령께서는 싹만 틔우시고 다시 복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발아된 믿음의 씨앗을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서 성도의 일생 동안 그의 영에 거하신다. 성도는 성령께서 믿음의 씨앗을 싹틔우신 후에야 비로소 지금까지 들어왔던 복음에 기반한 하나님께서 자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육신의 감각이나 지성의 판단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영적인 체험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의 씨앗에서 시작된 하나님에 대한 희미하고 유약한 인식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감각과 사고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한동안은 이 인식이 너무나 희미해서 긴가민가 싶기도 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좀 더 분명해지게 되면 그제서야 나의 의지를 가지고 나의 입술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어 순종하게 되는 성도의 의지는 물론 성도 자신의 내재적인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심에 기인한 것이다. 사람의 의지는 혼의 정신활동인데 자신의 영과의 은밀한 교류를 통해서 영으로부터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받고 판단하여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의지는 성령께서 영에 심긴 믿음의 씨앗을 틔우실 때 동시에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어 자신의 영으로부터 희미한 믿음의 정보를 받아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겨 그 믿음의 분량만큼 고백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의 믿음과 혼의 의지와 육의 순종은 나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져서 성도의 신앙 전체를 일궈나가게 된다. 영의 믿음은 혼의 의지에 영향을 주고, 혼의 의지는 육신을 지시하여 순종하게 함과 동시에, 육신이 복음에 대해 경험하는 것은 혼의 정신에 전달되고, 정신이 전달받은 복음의 정보는 영의 믿음을 장성하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이러한 영과 혼과 육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성도의 신앙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성도의 의지와 행위가 수반된 믿음과는 달리, 성도 부부의 어려서 죽은 자녀들이나 정신지체 자녀인 경우에는 그 믿음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믿음을 고백해야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해서 어려서 죽은 성도 부부의 자녀들이나 정신지체 자녀들을 구원에서 배제해버린다면 너무나 가혹한 처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성도 부부의 어린 자녀에게는 유아세례를 시행함으로써 자녀가 자신들의 의지대로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 전에 죽게 된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구원신앙을 전가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믿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믿음이 아닌 거짓 믿음들이 있다. 성경을 단지 신학적 학문적 지식적으로만 많이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정작 행하려 하지 않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성경을 많이 알고 깨닫는 것은 분명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단지 지적인 희열에만 만족해서는 안되고 성경을 알아갈수록 그만큼 신앙의 의무가 늘어간다는 경건한 부담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경에 대한 지혜와 지식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교회 모임과 활동에만 전념하는 거짓 믿음이 있다. 자기의 가치관이나 자기가 종사하는 전문분야를 토대로 성경을 재단하는 것은 매우 교묘한 거짓 믿음이다. 정치 및 경제이념주의를 성경보다 앞세우는 자들과, 진화론이나 동성애를 성경보다 앞세우는 자들이 이러한 위신자들이다. 생활이 평온하여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에는 성경공부도 잘하고 교회생활도 잘하며 자기 생활에서도 성경대로 실천하다가도 금전적인 문제나 건강상의 문제 등 육적으로 직접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식에만 의존하는 자들도 위신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