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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휴게실 스크랩 상해, 소주여행(12.5.24)
숲길(吉) 추천 0 조회 42 13.03.12 10: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상해, 소주여행(12.5.24)

 

중국은 그동안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지속하여 G2의 반열에 선 국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상해는 중국의 경제를 견인하는 대표적 도시이다.

인구 2천만에 면적은 서울의 10배 가까이가 된다고 한다.

 

포동공항에 착륙하면서 하늘에서 본 상해는 계획 국가의 이미지에 맞게 모든 농지와 대지가 반듯하게 정리되고 그 사이 사이에 하천인지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상해의 중심지는 과거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어 발전되어 지금은 세계의 어느 도시보다도 도시화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102층 짜리 건물도 있고 현재 130층 짜리 건물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건물들이 중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것같았다.

 

포동공항의 시설도 세계 어느 나라 공황시설에 뒤지지 않는 것같았다.

 

우리 숙소는 포동공항 근처에 있는 로얄인터내셔날호텔이었다.

중국은 우리와 달라서 호텔에 숙박하는 모든 외국인의 여권을 복사하여 관할 공안에게 제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자고 일어나서 포동에 있는 우리나라 회사를 방문했는데 마당에 석류꽃이 이쁘게 피어 있었다.

상해는 우리보다 기온이 높으니 꽃도 일찍 필 것이다.

 

지나가다가 장강첨단과학단지를 보았는데 단지규모가 가로, 세로가 몇 키로미터가 된다고 한다.

중국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느낀 점은 중국민들은 차량을 확보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 세금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해에는 수많은 차량이 통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 차량들이 세계 각국의 자동차 전시회에 온 듯이 다양한 차량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 차량이 중국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상해의 교통은 우리에 비하여는 그리 번잡하지 않았다.

시내내부 순환도로, 외곽순환도로가 잘 건설되어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는 고가도로를 건설하여 그 도로를 이용하는데 아주 유용했다.

 

상해에 자동차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경매를 하는데 우리 돈으로 1,20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상해에 등록되지 않는 차량은 출퇴근 시간 등에 시내에 진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해시만 해도 중심부는 21세기를 지향하듯이 번화하지만 외곽은 우리 70년대 사는 듯한 풍경이 눈에 보였다.

 

외곽에도 좋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경비가 철저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국은 생필품의 가격은 아주 저렴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민생활 안정을 아주 중요한 정책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을 다녀보니 중국의 물가도 이제는 싼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중국의 음식은 우리에게 거부감이 없게 다가온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편했다.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 조선족들도 상당수가 중국내로 이주하고 또 젊은 남성들은 중국 여성과 결혼하여 조선족도 명맥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고 중국과의 적정한 협력관계도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고 선택과 집중을 잘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중국과의 경쟁에서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같다.

 

상해도 차가 많아져서 차 넘버를 입찰로 제한된 댓수만 허용한다고 한다.

 

 

외부에서 상해로 진입하는 도로가 주로 고가도로를 이용하게 하고 있었다.

상해도 교통이 혼잡하여 진입하기 전에 우리처럼 정체, 원활, 서행 지역을 안내판에 노랑, 파랑, 빨강 불빛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저녁은 태가촌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공연을 보는 일정이었다.

태가촌식당은 상해로 여행온 사람들의 단골 식당인지 관광버스가 많았고 식당에도 사람들로 혼잡스러웠다.

 

중국은 90%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하여 총 56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살아가고 있는 국가이다. 그 중 태족은 중국 남서부 지방에서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상해에 위치한 태가촌은 태족의 전통공연과 음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식 레스토랑이다.

 

다음 일정은 상하이마시청에서 서커스를 구경하는 일정이었는데 공연장면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촬영장 스케치만 하였는데 구경을 할만 했었다.

 

상하이마시청, 上海??城(상해마호성)

중국 상하이[上海] 푸투어취[普陀區]에 있는 서커스 극장.

면적은 2.25만㎡로, 주로 독특한 공연을 한다. 안에는 서커스장과 훈련장, 동물우리와 오락실이 있다. 서커스 장에는 1,638개 좌석이 있는데 공연 무대가 관중석보다 낮아 맨 뒷줄에 앉아도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볼 수 있다.

 

공연 시에는 22m의 활모양 무대 배경과 관중석 뒤쪽의 원형 무대로 인해 넓은 하늘과 바람, 눈, 비, 불 등 다양한 환경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개장 이후 천여 번에 가까운 공연을 했는데 이중에는 국내 곡예단과 서커스단뿐만 아니라 외국의 우수한 단원들도 포함된다. 이곳의 가장 인기 있는 쇼는 작은 동물들의 공연이다.

 

야경을 구경하고 나서 포동으로 와서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는데 서호도선이란 술이 가격도 적당하고 향과 맛도 괜찮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자전거, 오토바이, 불법 삼륜택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중국사람들이 흥미로웠다.

 

노천 야채시장을 구경했는데 이 포동지역은 원래 농사를 짓던 지역인데 도시화의 진전으로 아파트 등 건물들이 들어선 것같았다.

 

고급 아파트와 어려운 서민들이 같이 사는데 살아가는 방식을 틀린 것같았다.

 

오전에 일을 보고 점심을 먹은다음에 상해박람회 장소를 구경하러 갔다.

박람회가 끝나고 이제는 상설전시회관으로 활용하는 것같았다.

 

버스로 지나가다 보니 상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병따게 모양의 빌딩이 끝은 구름에 살짝 걸치어 있었다.

 

다음 일정은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청사는 구경할 수 있었는데 내부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광복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본거지다. 1919년 4월 11일, 독립운동 대표 29명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졌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임시헌장이 공포됐다. 이어 4월 13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하지만 일본의 계속된 탄압으로 독립투사들은 항저우, 충칭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상하이 내에서도 임시정부는 일본의 눈을 피해 여러 번 이전했는데, 현재 우리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로 알고 있는 이곳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3층짜리 건물이다. 낡고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빨간 벽돌집이 바로 임시정부 청사다. 1층으로 들어서면 조선족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약상과 청사 복원에 관한 내용을 다룬 10분 분량의 비디오를 시청한다.

 

그러고 나서 청사를 견학하는데 2층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동녕 등이 사용했던 집무실이 있고, 3층에는 숙소와 전시관이 있다. 임시정부 청사로 쓰일 당시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 생생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단, 청사 안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시내를 지나가다가 부동산 중개소에 있는 아파트 가격을 보았는데 제일 비싸게 보이는 집은 5,500만 위안으로 우리 돈으로 치면 100억원이 넘는 것이다.

상해는 빈부격차가 극과 극인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중국의 정책 목표속에는 빈부격차 해소가 큰 이슈가 될 것같았다.

 

다음 일정은 신천지에서 상해의 활기를 느껴 보는 것이다.

서울의 명동처럼 수많은 까페, 음식점, 쇼핑을 위한 상점이 밀집되어 있다.

 

신톈디, 新天地(신천지)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쇼핑가(街).

 

북부광장은 면적 3만㎡로, 신톈디의 제1기 재건축 건물들이 집중된 곳이다. 현재 상하이에서 가장 세련된 쇼핑장소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레스토랑과 술집, 바(bar), 커피숍, 테라스 카페, 상점, 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고, 예술가들의 아트숍도 자리하고 있다. 석고문은 아직 상하이의 옛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각의 내부는 현대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고전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부광장에는 고층의 현대적인 건물이 많아 옛 건물과 좁은 길의 북부광장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 상해(上海)시 태창로(太倉路)에 위치한 신천지(新天地)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란 뜻이다. 본래 프랑스 조계지(중국침략근거지)로 개발돼 근대 건축물이 밀집해 있었으나 상하이 시정부가 그동안 공동 주택 단지로 이용되던 옛 조계지를 10여 년 전 상업지구로 변모시켰다.

 

그 결과 중국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스쿠먼(석고문) 형태의 근대 건축물들이 식당·술집·찻집·상점·공연장 등으로 개조돼 운영되어 왔다. 신천지의 세련된 스쿠먼 블록은 2001년 홍콩 재벌이 상하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조성한 거리로 동서 약 300m, 남북 약 500m의 직사각형의 구조로 이뤄졌다.

 

낮에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해가 기울어지면 낭만적인 유럽풍의 경치가 그야말로 상해의 신천지를 이루면서 노천 바와 카페에는 상해의 젊은이들과 외국인들로 활기를 띤다.

 

신천지를 한 바퀴 돌며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상해에서의 추억을 만든 후 근처에 있는 태평교 녹지에 들러 신천지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신천지 문화는 상해에서도 분명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고급 문화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중심부쯤 되는 곳에 작은 분수와 함께 3명의 신선동상이 있었는데 이 분들이 수, 복, 재를 담당하는 신선이라는 것이다.

 

신천지에 갔으니 까페에서 차한잔을 하고 왔는데 까페의 분위기가 서울 명동의 어느 까페 같았다.

 

신천지 옆에는 인공호수 같은 호수도 있었는데 근처는 수입차들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푸동에 있는 족마사지집에서 발 마사지를 했는데 푸동에 있는 이 집들은 아마도 우리 돈 8천원정도를 하는 저렴한 가격에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발마사지하는 아가씨, 아주머니도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사시는 것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아파트 입구에 불법 삼륜택시가 줄 서 있는 것이 신기했다.

 

서민이 사는 동네는 청소도 잘 되어 있지 않고 아침에는 노점에서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사서 먹으며 야채상들이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큰 길 옆에 있는 과일가게 구경도 했는데 과일 배열이나 상점 규모가 상당히 컸다.

중국사람들은 잠옷을 입고 잘 다닌다고 하더니 정말 특이했다.

 

오늘은 소주를 구경하는 날인데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렸는데 휴게소 건물이 ㄱ 자로 되어 있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소주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졸정원을 가 보는 것이다.

 

 

쑤저우 졸정원, 蘇州 拙政園(소주졸정원)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의 고성(古城) 동남쪽에 있는 정원.

 

부지면적 5만 1950㎡이다. 명나라 정덕제(正德帝) 때인 1509년 어사(御史) 벼슬을 지낸 왕헌신(王獻臣)이 낙향하여 다훙사[大弘寺] 고적지를 증축하여 조성하였다. '졸정(拙政)'이라는 명칭은 진(晉)나라 시인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서 따왔다.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이 그림 소재로 삼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허위안[?和園]·청더퍼서산장[承德避暑山莊]·류위안[留園]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힌다.

 

1961년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고, 1997년 쑤저우원림[蘇州園林]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온 개인정원으로서, 고대 강남지방 관료들이 거주하던 주택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정원은 동부·중부·서부의 3부분으로 나뉘며, 호수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동부는 지세가 시원하게 트여 있고, 평평한 언덕 위에 부용사(芙蓉?)·천천정(天泉亭) 등이 산재해 있다.

 

주 건물인 난설당(蘭雪堂)에는 〈졸정원전경도(拙政園全景圖)〉가 진열되어 있고, 그 북쪽의 가산(假山) 꼭대기에는 방안정(放眼亭)이 우뚝 솟아 있다.

 

중부는 졸정원의 정수가 모인 곳으로, 주 건물인 원향당(遠香堂)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의 수기정(?綺亭), 서쪽의 의옥헌(倚玉軒), 북쪽의 연못 등 세련된 정경이 두루마리 화폭처럼 펼쳐진다.

 

호수 중앙의 작은 가산에 대상정(待霜亭)과 설향운울정(雪香雲蔚亭)은 원향당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밖에 하풍사면정(荷風四面亭)·견산루(見山樓)·향주(香洲)·소비홍(小飛虹) 등이 있다.

 

서부는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 뻗은 회랑과 수면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운 누각 등이 수려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주 건물인 삼십육원앙관(三十六鴛鴦館)과 십팔만다라관(十八曼陀羅館)은 합쳐서 네모꼴을 이루고, 네 모퉁이에는 각각 곁채가 한 칸씩 딸려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중국 원림 건축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건물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 사방으로 은은한 여운을 남기며 울려퍼진다. 호수 서쪽에는 유청각(留聽閣)이 있다.

 

호수 바로 옆에 축조한 수헌(水軒)은 뒷산의 삿갓정자와 더불어 부채를 펼쳐놓은 모양을 이룬다. 서북쪽에 조성한 가산 위에는 부취각(浮翠閣)이라는 8각형의 2층 누각이 있는데, 졸정원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연못 북쪽의 도영루(倒影樓)에는 배문읍심지재(拜文揖深之齋)라고 부르는 방이 잇는데, 심주(沈周)·문징명의 신상과 〈왕씨졸원기(王氏拙園記)〉〈보원기(補園記)〉 등의 비석이 진열되어 있다.

 

소주의 졸정원은 중국의 4대정원에 해당되고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수많은 내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었다.

 

동양화에 보면 괴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졸정원에 정말 괴석이 많았다.

괴석은 기암괴석을 보러 명산에 가는 것을 대리만족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웅장한 남성의 상징인지 알 수가 없다.

 

기암괴석과 나무, 그리고 연못이 어울리는 정원, 이 정원이 바로 중국 정원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졸정원에서 차경이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멀리 있는 북사탑을 졸정원의 정원에 가져와서 보는 것이다.

 

쑤저우시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인민로의 북부에 있는 강남 지역에서 제일 높은 76m의 탑이다. 원래 창건한 것은 양(梁)나라 때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남송(南宋)때인 1153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나무와 벽돌로 만든 8각형 9층의 불탑으로 쑤저우시의 심벌이기도 하다. 나무 계단으로 7층까지 올라가면 쑤저우시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이 탑이 있는 북사(北寺)는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쑤저우시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졸정원 속에 분재원도 있었는데 수많은 분재가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고 여기서는 분재원을 분경원이라고 하고 있었다.

 

졸정원을 나오니 각종 기념품 상점과 과일 행상들이 있었다.

 

소주에 한산사도 있어 한산사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쑤저우 한산사, 蘇州 寒山寺(소주한산사)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의 펑차오진[楓橋鎭]에 있는 사찰.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때 창건되었다. 원래 명칭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名塔院)이었으나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선승(禪僧)이자 시명(詩名)이 높았던 한산(寒山)이 주지를 맡았다고 하여 한산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청(淸)나라 광서제(光緖帝)와 선통제(宣統帝)에 걸쳐 대규모 개수사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모두 이때 보수 및 재건된 것이다. 1949년에도 대대적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중요한 사찰이자 명승지로 발전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산문(山門)·대웅보전(大雄寶殿)·장경루(藏經樓)·종루(鐘樓)·비랑(碑廊) 등이 있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있는 나한당(羅漢堂)에는 녹나무로 만들어 도금한 500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한산사에서 가장 진귀한 유물로 꼽힌다. 두 번째로 진귀한 유물은 장경루에 보존된 송(宋)나라 때 제작된 《금강경(金剛經)》 석각이다.

 

비랑에는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악비(岳飛)·당인(唐寅)·문징명(文徽明)·캉유웨이[康有爲] 등의 시문이 새겨진 비석, 양저우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나빙(羅聘)이 그린 습득(拾得)의 화상(畵像)을 새긴 비석 등 진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장계(張繼)가 한산사의 종소리에 나그네의 시름을 담아 묘사한 〈풍교야박(楓橋夜泊)〉은 정경(情景)이 어울리는 고금(古今)의 명시(名詩)로서 민간에도 널리 전하여졌으며, 이로부터 한산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종소리와 고찰(古刹), 객선(客船), 고기잡이배의 등불 등은 관광객이 다투어 감상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때 주조된 거대한 종이 보존되어 있는데, 1979년부터 제야(除夜)에 타종(打鐘)하는 민속행사가 재개되어 고찰의 정취가 더욱 짙어졌다.

 

제일 먼저 본 것은 한산사의 풍교였는데 그 다리 밑으로 보는 풍광도 볼만했고 자세히 보니 풍교의 이름은 강촌교로 붙여져 있었다.

 

한산사의 하이라이트는 진명보탑인 것같았는데 그 위에 올라가서 한산사와 소주의 풍광을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불교에서는 한산과 습득의 고사라는 이야기가 있어 궁금했는데 그 한산이 주지로 있던 한산사에 오게 된 것이다.

여기 한산사에는 한습전이라는 전각이 한산과 습득의 일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산 습득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貞觀: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 간에 천태산 (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이 계셨는데, 세상에서는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이들 세분을 국청삼은(團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 한다.

 

비록 이 세 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이란 이름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嚴)이란 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늘 다 떨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나물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가끔씩 회랑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욕을 하곤 해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작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벽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길렀다고 해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주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주곤 했다.

 

한번은 주지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아래 목장을 지나는데 한산과 습득이 소떼와 더불어 수작하고 있음이 보였다.

 

먼저 한산이 소떼를 향하여 "이 도반들아 소 생활 맛이 어떤가? 시주밥을 먹고 놀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더니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무상법문을 나눌까해서 왔으니 내가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라.

 

첫번째로 동화사 경진율사"하고 호명하니 검은 소 한마리가 ‘음매-에’ 하고 한산 습득의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는 한산이 지적한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천관사 형지법사" 이번에는 누런소가 또 ‘음매-에’ 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번째 소가 간 곳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이렇게 하기를 30여회. 백여마리의 소떼중에 30마리는 스님들의 후신이다.

 

말하자면 시주밥 먹고 공부 않은 과보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모골이 송연하여 쫓기듯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산 습득이 미치광이인줄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이 분명하다"

 

일찌기 여구륜(閒丘亂)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의 자사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원이 모두 소용없는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은 자기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풍간스님이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아팠더냐 싶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시온지 ?" "국청사에서 불 때 주고 그릇 씻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라고 거듭 묻는 말에 대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가 버렸다.

 

이에 자사가 예물을 갖춰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 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깜짝 놀라며 "대관(大官)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한산이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에는 다시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등의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 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은 완전히 닫혀져 버렸다.

 

여구륜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속의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 (詩) 약 300수를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隨集)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오고 있다.

 

나오기 전에 관음봉이라는 괴석이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그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다음 일정은 소주 운하를 구경하는 것이다.

 

하늘엔 천당, 땅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

 

중국 사람들은 산물이 많고 경치가 좋은 항주와 소주를 '지상의 천당'으로 꼽았다. '소주에서 나서 항주에서 살고 광주(廣州) 가서 먹고 류주(柳州) 가서 죽자'는 말도 있다. 부유하고, 놀기 좋고, 음식을 잘하고 먹기 좋고, 관을 잘 만드는 곳을 각각 이르는 말이다.

 

소주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4천 년 전부터 고대 문화가 일어났으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이다. 특히 원(元)나라 때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이곳을 방문해, 자신의 고향 베니스와 매우 닮은 소주를 격찬하여 '동양의 베니스'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실 소주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베니스를 '서양의 소주'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소주는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상해, 서쪽으로는 남경, 남쪽으로 항주에 맞닿아 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었는데, 특히 장강(양자강 揚子江) 이남에 위치한 강남지방에는 호소(湖沼)가 넓게 발달해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 하천이나 운하가 중요한 교통수단을 형성하고 있다. 소주도 이런 운하에 에워싸인 물의 도시이다.

 

소주를 다녀보면 시내 전체가 운하다. 소주는 총 길이 35킬로미터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인공 운하인 외성하(外城河)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이 운하를 통해 물자가 운송되고 있고, 시내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물이 교통과 생활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복개되지 않은 큰 하수도를 연상케 하는 더러운 물?이른 아침 작은 운하 한 켠을 다니는 나룻배 한 척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배는 운하를 다니는 낭만적인 배가 아니라 밤사이 더러워진 운하의 오물을 제거하는 청소선이다?이긴 하지만 이색적인 도시 풍경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주를 물의 도시(水鄕)라 부른다.

 

소주의 형성은 6천 년 전부터 원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나오는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천하를 9개 주(九州)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소주는 옛날 양주(揚州)에 속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소주는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인 오(吳)나라의 도성이 됐으며, 기원전 473년에 월(越)나라에 속하게 되고, 다시 초(楚)나라에 합병된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삼국시대 오나라가 잠시 소주에 도읍을 정하기도 했다. 지금의 소주라는 명칭은 수(隋)나라 때 개칭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후, 소주는 한 나라의 도성이 되지는 못했으나 장강 유역의 주요 교통 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소주는 장강 유역의 풍부한 쌀을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 등지로 직송하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즉, 경제적인 필요성에 따라 운하가 필수적이었다. 수 양제(煬帝)는 605~611년간 운하를 준설했는데, 완공되었을 때 운하는 장장 2천3백 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사실 운하의 준설공사라고 해야 수로를 새로 굴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하천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북쪽의 북경·천진에서 남쪽의 항주에 이르는 큰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강을 넓히고 이어서 운하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운하는 백성들의 생활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거의 황실의 필요에 따라 이용됐다.

 

강남 지방도시의 전형인 소주의 전체적 모습은 남송의 평강성(平江城)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주의 도로와 하천은 북송(北宋)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는데, 소주의 문묘(文廟)에 남송 때의 평강성을 그린 석판(가로 1.4미터, 세로 2미터)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도시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지방지(地方志)》의 기록에 나타나는 평강성은 물의 도시 소주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오군(吳郡)은 옛 도읍을 명명하여 택국(澤國)이라 한다. 진택(震澤)·태호(太湖) 등이 크고 넓으며 나아가 동으로 오호(五湖)에 접하고, 더욱 더 동으로는 평강(平江)의 성문 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종횡으로 교차하고, 주민은 그에 따라 수리의 편리함을 얻고 있다. 배를 젓는 사람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모두가 이에 의해 이쪽저쪽으로 통하기 때문에 교량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평강도(平江圖)〉는 소주의 도시 윤곽·도로·하천·교량 분포 및 건축물의 위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 평강성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으로는 장방형의 성곽이 에워싸고 있다. 주변으로 5곳의 성문이 있는데, 운하를 위한 수문과 보행을 위한 성문이 조합되어 있다.

 

성내의 수로 분포는 상당히 조밀하게 되어있는데, 수문을 열어 물을 성내로 인입할 경우, 지형이 높은 북서쪽으로부터 낮은 동남쪽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신선한 다량의 생활용수를 확보할 수 있으며, 홍수 때에는 문을 닫아 물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성 내부에는 동서 방향의 도로가 많이 발달되어 있으며, T자형으로 교차하는 가로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시 내 이동체계는 대부분 수로와 도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대지의 전면은 가로에 면하고, 후면은 하천에 면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수로가 일용품·연료 및 수공업 원료 등의 운반 통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주의 모습은 동서, 남북의 직교 그리드 위에, 운하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주의 도시 구조는, 송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지도가 그려지기 400여 년 전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소주의 풍경을 "7언 8문 60방 등이… 동서남북으로 다리가 서로 교차되어 있다(七堰八門六十坊… 東西南北橋相望)"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坊)이 주변 4면이 운하나 도로로 둘러싸인 구획을 말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당나라 때 소주의 모습은 60개나 되는 '방'이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배열된 도시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성의 중심이 되는 '부아(府衙)'가 약간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그 안은 6개의 구(區)로 나뉘어져 설청(設廳)·부원(府院)·청사(廳司)·병영(兵營)·주택 등의 건물이 있고, 배면에 화원(花園)이 있다. 〈평강도〉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재도 이 지도를 가지고 소주를 돌아다녀도 될 정도이지만, 권위의 상징인 이 부아(府衙)는 약간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부아의 좌우 부분은 남북 방향으로 실제보다 길게 묘사되어 있고, 아래 윗부분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묘사되어 있다.

 

소주는 시대적으로 서쪽 지역이 더욱 발달했다. 서쪽 지역에 대운하가 있고, 서북쪽의 문인 '창문(?門)'은 소주를 지탱해주는 상업 지역의 핵으로 발달했다. 〈평강도〉가 만들어질 당시, 성의 동부 지역은 농지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도시화가 그다지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 후 저습지대의 농지 개발이 이뤄지고 성외의 동쪽 일대가 쌀의 생산지가 되어 점차 인가가 밀집하게 된다.

 

관공서나 저택·점포가 많은 서쪽에 비해, 동쪽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직물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의 작업장이 많았다. 또한 중국 정원을 대표하는 유명한 졸정원이나 우원 등은 모두 이 지역에 있다. 이러한 풍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옛날 마르코 폴로가 소주를 방문했을 당시를 상상해보면, 가히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연상시켰을 법하다.

 

지금은 성곽 도시 소주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반 이상이 매립됐지만, 성 외곽의 운하(外城河)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잘 남아있다. 외성하 내부에는 대규모 원림이 있으며, 그 동남쪽 한 곁에 19세기 말 미국이 건축한 학교 및 병원 건물을 이용하고 있는 소주대학이 있다. 이러한 소주의 도시 풍경도 시대에 따라 변해, 도시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인민로에는 자동차와 자전거 행렬이 줄을 잇고 경음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소주라 무성한 원림,

예로부터 사방으로 통하는 나루터.

맑고 고운 풍토에다

순한 백성들.

작은 골목에도

열 가구에 주막 세 군데.

잘사는 부자들은

닷새마다 새로 장을 보았다지.

운하 굽이마다

노를 휘젓고,

거리거리엔 밤새도록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네.

4백만 섬 곡식을 공출했다니,

오나라 사람만큼 수탈당한 이 또 있으랴.

 

長洲茂苑古通津 風土淸嘉百姓馴 小巷十家三酒店 豪門五日一嘗新

市河到處堪搖櫓 街巷通宵不絶人 四百萬糧充歲辦 供輪何處似吳民

- 당인(唐寅), 〈고소잡영(姑蘇雜詠)〉 -

 

당인(1470~1523)은 명나라의 시인이자 서화가로, 강소성 소주 사람이며, 시문이 뛰어나 축윤명(祝允明)·문징명(文徵明)·서정경(徐禎卿) 등과 함께 오중4군자(吳中四君子)로 일컬어졌고, 또한 서화에도 뛰어나 심주(沈周)·문징명·구십주(仇十洲) 등과 함께 명4가(明四家)로 일컬어졌다.

 

 

길을 가다보면 길 바로 옆에 소주 운하가 있는데 정말 신기했다.

여기는 물 높이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유람했는데 처음에 만난 다리가 지혜교였다.

운하따라 가다보니 사찰같은 건물, 병원, 호텔, 차루 등의 각종 건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다리 하나 하나도 모양을 모두 다르게 만들어 다리는 보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는 집이 운하에 바로 접하여 있다는 것이 운하가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배들중에는 노를 저어서 가는 배도 있다는 것이다.

 

운하 옆으로 빨래도 널어두고 화분도 놓아두며 담에는 풀들도 자라는 곳도 있었다.

 

우리같으면 효자각인 효절이라는 편액도 보였다.

여기도 우리와 같이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운하 투어를 마치고 차를 타고 가는데 소주의 랜드마크인 호구탑이 보였다.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는 상해의 인사동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강루(태강로)에 있는 티엔즈팡(전자방)를 가보기로 했다.

 

상하이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중국식 발음으로 티엔즈팡이라 불리는 전자방(田子坊)이다. 상하이의 떠오르는 관광 명소로 예술과 식도락의 거리로 잘 알려져 있다. 상하이 도심 태강로(泰康路)에 있는 구역으로 공식 명칭은 '상하이문화산업공원'이다. 건물과 골목이 바둑판처럼 나눠져 있어 각 건물마다 문패처럼 숫자가 걸려 있다.

 

전자방을 거닐다 보면 서울의 인사동과 삼청동이 연상된다. 도심 속 예술의 유통 공간으로 기능할 뿐 아니라 동시에 맛과 분위기가 뛰어난 식당 겸 카페가 즐비하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같이 각종 공예품과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으며 외국인과 중국인 모두가 많이 오는 것같았다.

 

 

다음에 간 곳은 상해의 명동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남경로였다.

 

남경로(南京路/난징루)

상하이 심장부인 인민광장과 황포강이 흐르는 외탄이 동서로 각각 맞닿아 있는 곳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상점부터 최신 유행 상품을 취급하는 대형 쇼핑몰 및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상해의 명동이라 불리며, 관광객이 항상 몰리는 곳이다.

차는 다닐 수 없으며, 대신 꼬마기차가 다니고 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딩타이펑이라는 유명한 딤섬 전문집, 옌윈로우라는 북경오리 전문집, 오월인가면관이라는 면 전문집 등이 있고,

 

대표적인 쇼핑몰로는,

프라다 매장, 헝룽광장, 818광장, 353광장 등이 있습니다

 

남경로 쪽 유명한 호텔로는

JW 메리어트 호텔, 더 포트만 리츠칼튼 호텔, 상하이 르 로열 메르디앙 등이 있으며,

 

관광명소로는,

상하이 상성 서커스 전용 극장, 상하이 미술관, 상하이 현대 미술관, 정안사가 있다.

 

주 상하이 영국 영사관, 주 상하이 핀란드 총 영사관도 난징루에 위치해 있고, 한국의 드림 성형외과도 있다.

 

난징루라 불리는 남경로는 상하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상점 거리로 중국 제일의 쇼핑가다. 총 길이만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백화점·호텔 등이 위치해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상하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인 남경로는 19세기 초부터 다양한 업종의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남경로는 인민공원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남경동로에는 제일백화점이라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화점을 비롯해 여러 백화점들과 패션 상점들이, 남경서로에는 중국 전통 공예품과 차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국의 명동에 비교될 수 있는 이곳은 거리 폭이 명동의 두 배 정도여서 걸어 다니기가 훨씬 편하고 차가 다니지 않는 대신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들을 태우고 다닌다. 또한 거리 곳곳에 쉴 수 있는 넓은 의자가 있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다.

 

이 남경로에는 우리 나라 명동처럼 상해에 있는 젊은이와 외국 관광객은 모두 모이는 곳으로 높은 빌딩이 보이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오늘 멋진 옷을 입은 아가씨 등 젊음을 즐기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황푸강(황포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황푸 강(?浦江)은 타이후(太湖, 태호)에서 발원해서 전체 113km를 흘러간다. 중국 상하이의 중요한 수원으로 장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장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최후의 지류이다.

 

주요 지류는 소주하(?州河), 온조빈(?藻浜), 천양하(川楊河), 정포하(淀浦河), 대치하(大治河), 사탕(斜塘), 오나설경(?泄經)과 대묘항(大?港)을 흘러간다.

 

황푸강 위의 다리 푸동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가려면, 반드시 아래의 다리 중 하나는 지나치게 된다. 보통 루푸대교나 난푸대교 중 하나를 지나치게 된다. 난징루, 와이탄 등 대부분의 상하이의 관광지는 이곳을 넘어 푸시로 가야 하므로, 보통 숙박도 푸시에서 하게 된다.

양푸 대교(楊浦大橋), 난푸대교(南浦大橋), 루푸 대교(盧浦大橋), 수푸 대교(徐浦大橋),펑푸 대교(奉浦大橋)

 

볼거리는 황푸 공원(黃浦公園):상하이 최초의 공원으로 외백도교를 따라 황푸 강변을 나오면 보이는 공원, 와이탄(外灘):황푸 강과 상하이의 고층 빌딩, 유람선 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상하이의 주요 관광 포인트, 뒷편으로는 19세기 이후~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고풍스런 건물들이 있다. 외백도교(外白渡橋), 인민영웅기념비 등 볼거리가 풍부하고, 진마오 빌딩, 동방명주탑이 가장 잘 보인는 포인트다

 

푸동 지역에 있는 468m인 동방명주와 420m인 88층의 끝이 펜촉같이 생긴 금무대하 빌딩, 492m인 101층 상해세계금융센터 빌딩이 보인다.

 

와이탄 거리의 건물이 야경은 볼만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갈대밭 사이로 굽은 골목길만 있었다고 하는데 100년 걸친 도시 계획에 따라 와이탄 일대가 개발되었다. 북쪽 와이바이뚜차오에서 남쪽 진닝동루까지 1.5km 정도 아치형인데, 영국식, 프랑스식, 스페인식, 그리이스식, 르네상스식 건물로 채워졌다. 그 건너편에 있는 반장다다오 거리의 건물들이 설치해놓은 빛과 건물 높이에서 야경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와이탄 거리에 있는 다양한 양식의 석조 건물의 야경도 환상적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 금무대하빌딩과 동방명주가 보이는 곳에서 시작했다.

상해 황포강 유람선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이 모두가 상해시 당국의 정책적 고려라는 것이다.

 

형형색색이 높이에 따라, 건물 형태에 따라 다른 조명을 보여주어 상해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것같았다.

 

그리고 야경을 보려고 운행하는 유람선도 각각이 다른 조명과 광고를 하고 있어 이것도 볼만했다.

 

황포강 야경을 구경하고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하여 포동의 족마사지 집에서 족 마사지를 하고 호텔로 들어갔다.

 

자고 일어나니 그동안의 날씨 중에서는 가장 좋은 날씨였다.

길가다 보니 병뚜껑 건물도 오늘은 비교적 잘 보였다.

 

어제 저녁에 의견을 모아 오늘 당초 일정에 없던 동방명주를 구경하러 갔다.

동방명주도 상해의 상징이라서 구경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국가원수급 귀빈이 온다고 의전까지 해서 혼잡했다.

드디어 동방명주에 올라갔는데 정말 날씨도 좋고 전망이 좋았다.

 

황포강과 고층빌딩들이 잘 어울러져서 대만 101은 밑에 볼 것이 별로 없었음에 비해 너무 볼만했다.

 

바닥이 유리판이 되어 있는 곳도 있었는데 정말 아찔함에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념사진도 담고 그랬다.

 

동방명주 구경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내려와서 박물관이 있어 그곳을 구경했다.

상해의 과거역사와 근대화과정의 역사를 사진과 조형물을 통해 전시하고 있었다.

 

동방명주 구경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예원을 구경하러 갔다.

 

성황묘 부근은 상해에서 가장 번잡한 곳 중 하나이다. 이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에 원림이 있다니, 묘한 느낌이었다. 예원의 삼수당(三穗堂)에 걸려 있는 '도시 속의 산림(城市山林)'이란 말이 거짓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 예원 안에는 정상회의 영향으로 외국인 사절단과 관광객으로 무척 붐볐다.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사진 찍느라 부산했다. 저들은 과연 영국군이 이 원림을 유린했던 역사를 알고 있는지? 청 도광(道光) 22년(1842),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군이 예원을 강점하여 유린했고, 1860년 태평군(太平軍)이 상해로 진군했을 때, 청 정부가 영국과 결탁해 성황묘와 예원을 외국 군대 주둔지로 사용했다.

 

그들은 원림 안에 있던 돌을 캐내 연못을 메우고 서양식 군대 막사를 지었다. 원림의 아담한 면모는 이렇게 파괴됐다. 게다가 근대 이후, 20여 개의 공상행업소(工商行業所)가 나누어 점유하게 되면서부터 이곳은 다방과 술집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956년부터 약 5년 동안 대대적으로 수리해 개방했지만, '중국 동남지방 원림의 으뜸(東南名園冠)'이며, '기이하고 빼어나기가 중국 동남쪽의 최고(奇秀甲於東南)'라는 본래의 명성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예원은 효심이 담긴 고아한 원림이었다.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명나라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 반은(潘恩)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원(豫園)의 '예'는 "평안하고 기쁘다"는 의미이다.

 

반윤단은 일찍이 가정(嘉靖)·만력(萬曆) 연간에 사천포정사(四川布政使)를 역임한 적이 있었는데, 가정 38년(1559) 은퇴하고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의 편안한 노후를 위하여 반가(潘家) 주택이었던 세춘당(世春堂, 지금의 오동로(梧桐路) 소학교 자리)의 서쪽 채소밭에 돌을 모으고 연못을 팠으며, 누정을 지으면서 원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공무에 바빠 원림 조성이 지연되던 차에, 만력 5년(1577)에 관직을 사임한 반윤단은 이후 5년 동안 본격적으로 원림 조성에 전력하여 드디어 20여 년 만에 완성했다

 

예원의 건축물은 매우 다양하다. 당으로는 삼수당(三穗堂)·앙산당(仰山堂)·췌수당(萃秀堂)·점춘당(點春堂)·화후당(和煦堂)·옥화당(玉華堂) 등이 있고, 루(樓)로는 권우루(卷雨樓, 앙산당의 2층)·만화루(萬花樓)·장보루(藏寶樓)·쾌루(快樓)·회경루(會景樓)·득월루(得月樓)·장서루(藏書樓)·관도루(觀濤樓)·환운루(還雲樓) 등이 있으며, 정자로는 고정정(古井亭)·유상정(流觴亭)·호심정(湖心亭)·읍수정(?秀亭)·망강정(望江亭)·용취정(聳翠亭) 등이 있다. 그 외에 희대(戱臺)·헌(軒)·사(?)·랑(廊)·곡교(曲橋)·관(觀)·방(舫)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원은 건축도 유명하지만, 돌이 빚어낸 정원 예술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석가산으로는 대가산(大假山)과 소가산(小假山)이 있다. 대가산은 앙산당과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것은 중국 강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하며 가장 규모가 큰 황석(黃石) 가산이다. 절강성 무강(武康)에서 나는 황석으로 쌓았으며, 명대의 유명한 석장(石匠) 장남양(張南陽)이 설계한 것이다. 석벽(石壁)·비량(飛梁)·평교(平橋)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14미터 가산의 정상에는 읍수정이 있고, 그 서쪽 아래에는 태호석으로 만든 소가산 라사동(螺絲洞)이 있다. 라사동의 남쪽에는 조어대(釣魚臺)가 있으며, 그 정상에는 망강정이 있다. 과거 망강정에서는 황포강(黃浦江)의 정경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가산과 소가산은 황색과 흰색 돌의 대비, 그 사이사이의 초목과 연못의 푸른색이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돌이 만든 경관은 또 있다. 그 하나는 미인요(美人腰)이고, 또 하나는 옥영롱(玉玲瓏)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주랑(走廊)에 미인의 농염한 허리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것이 미인요이고, 인옥동문(引玉洞門)을 지나 눈앞에 당당하게 나타나는 것이 옥영롱이다. 옥영롱은 소주의 서운봉(瑞雲峰)·항주의 추운봉(?雲峰)과 더불어 강남 3대 명봉(名峰)의 하나로 불린다.

 

돌 밑에 향로를 설치하면 구멍마다 연기가 나오고, 정상 꼭대기에서 물을 부으면 구멍마다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송 휘종(徽宗)이 수도 변경(卞京)에 간악(艮岳)이라는 정원을 꾸미기 위하여 전국에서 유명한 꽃과 기이한 돌을 수집해 '화석강(花石岡)'이라 불렀다. 그중 몇 개는 운반 도중 사고로 인해 변경으로 가지 못하고 남게 됐는데, 이를 '간악유석(艮岳遺石)'이라 한다. 옥영롱도 간악유석 중의 하나이다.

 

예원의 또 하나의 경관은 조소와 조각이다. 벽돌에 새겨진 〈신선도(神仙圖)〉, 〈팔선과해(八仙過海)〉 등과, 임포(林逋)의 고사가 서린 〈매처학자(梅妻鶴子)〉와 항아(姮娥)의 전설이 담긴 〈항아분월(姮娥奔月)〉 등이 있다. 점춘당 서쪽 담 위에 거대한 용이 덮고 있다. 이것을 천운용장(穿雲龍墻)이라 한다. 조소로 용의 머리를 만들었고, 기와로 용 비늘을 장식했다. 용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려는 기세이다.

 

아시아 최대의 현대적인 도시, 거대 금융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는 상해의 중심에 중세 사대부의 단아한 정신이 담긴 원림이 있다는 것이, 오늘의 중국을 움직이고 있는 문화적 기반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원은 인구가 많은 상해에 있다보니 관람객이 너무 너무 많았다.

잠간만 정신을 딴데 팔면 일행을 놓치기 십상이다.

 

입구를 찾아 들어가는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근처에 있는 상점도 중국식으로 지어 나름대로 신경은 쓴 것같았다.

 

입구로 해서 들어가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사람에 치이고 길도 연못을 통해 들어갔다.

 

하여간 도심지에 이런 정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예원 구경을 마치고 포동국제공항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왔다.

 

 

 

먼저 상해, 소주여행의 대표적인 사진을 올려본다.

아마도 상해 황포강의 야경을 추천하고 싶다.

 

 

 

 

중국은 그동안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지속하여 G2의 반열에 선 국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상해는 중국의 경제를 견인하는 대표적 도시이다.

인구 2천만에 면적은 서울의 10배 가까이가 된다고 한다.

 

포동공항에 착륙하면서 하늘에서 본 상해는 계획 국가의 이미지에 맞게 모든 농지와 대지가 반듯하게 정리되고 그 사이 사이에 하천인지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상해의 중심지는 과거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어 발전되어 지금은 세계의 어느 도시보다도 도시화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102층 짜리 건물도 있고 현재 130층 짜리 건물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건물들이 중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것같았다.

 

포동공항의 시설도 세계 어느 나라 공황시설에 뒤지지 않는 것같았다.

 

 

 

우리 숙소는 포동공항 근처에 있는 로얄인터내셔날호텔이었다.

중국은 우리와 달라서 호텔에 숙박하는 모든 외국인의 여권을 복사하여 관할 공안에게 제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자고 일어나서 포동에 있는 우리나라 회사를 방문했는데 마당에 석류꽃이 이쁘게 피어 있었다.

상해는 우리보다 기온이 높으니 꽃도 일찍 필 것이다.

 

 

 

지나가다가 장강첨단과학단지를 보았는데 단지규모가 가로, 세로가 몇 키로미터가 된다고 한다.

중국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느낀 점은 중국민들은 차량을 확보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 세금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해에는 수많은 차량이 통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 차량들이 세계 각국의 자동차 전시회에 온 듯이 다양한 차량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 차량이 중국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앞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상해의 교통은 우리에 비하여는 그리 번잡하지 않았다.

시내내부 순환도로, 외곽순환도로가 잘 건설되어 교통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는 고가도로를 건설하여 그 도로를 이용하는데 아주 유용했다.

 

 

 

상해에 자동차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경매를 하는데 우리 돈으로 1,20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상해에 등록되지 않는 차량은 출퇴근 시간 등에 시내에 진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해시만 해도 중심부는 21세기를 지향하듯이 번화하지만 외곽은 우리 70년대 사는 듯한 풍경이 눈에 보였다.

 

외곽에도 좋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경비가 철저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국은 생필품의 가격은 아주 저렴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민생활 안정을 아주 중요한 정책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을 다녀보니 중국의 물가도 이제는 싼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중국의 음식은 우리에게 거부감이 없게 다가온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편했다.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 조선족들도 상당수가 중국내로 이주하고 또 젊은 남성들은 중국 여성과 결혼하여 조선족도 명맥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고 중국과의 적정한 협력관계도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고 선택과 집중을 잘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중국과의 경쟁에서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같다.

 

상해도 차가 많아져서 차 넘버를 입찰로 제한된 댓수만 허용한다고 한다.

 

 

외부에서 상해로 진입하는 도로가 주로 고가도로를 이용하게 하고 있었다.

상해도 교통이 혼잡하여 진입하기 전에 우리처럼 정체, 원활, 서행 지역을 안내판에 노랑, 파랑, 빨강 불빛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저녁은 태가촌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공연을 보는 일정이었다.

 

 

태가촌식당은 상해로 여행온 사람들의 단골 식당인지 관광버스가 많았고 식당에도 사람들로 혼잡스러웠다.

 

 

 

 

 

 

 

중국은 90%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하여 총 56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살아가고 있는 국가이다. 그 중 태족은 중국 남서부 지방에서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상해에 위치한 태가촌은 태족의 전통공연과 음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극장식 레스토랑이다.

 

다음 일정은 상하이마시청에서 서커스를 구경하는 일정이었는데 공연장면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촬영장 스케치만 하였는데 구경을 할만 했었다.

 

 

 

 

 

 

 

 

 

 

 

 

상하이마시청, 上海??城(상해마호성)

중국 상하이[上海] 푸투어취[普陀區]에 있는 서커스 극장.

면적은 2.25만㎡로, 주로 독특한 공연을 한다. 안에는 서커스장과 훈련장, 동물우리와 오락실이 있다. 서커스 장에는 1,638개 좌석이 있는데 공연 무대가 관중석보다 낮아 맨 뒷줄에 앉아도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볼 수 있다.

 

공연 시에는 22m의 활모양 무대 배경과 관중석 뒤쪽의 원형 무대로 인해 넓은 하늘과 바람, 눈, 비, 불 등 다양한 환경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개장 이후 천여 번에 가까운 공연을 했는데 이중에는 국내 곡예단과 서커스단뿐만 아니라 외국의 우수한 단원들도 포함된다. 이곳의 가장 인기 있는 쇼는 작은 동물들의 공연이다.

 

야경을 구경하고 나서 포동으로 와서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는데 서호도선이란 술이 가격도 적당하고 향과 맛도 괜찮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자전거, 오토바이, 불법 삼륜택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중국사람들이 흥미로웠다.

 

 

 

 

 

길가다 보니 생계형 불법삼륜택시가 공안에게 단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노천 야채시장을 구경했는데 이 포동지역은 원래 농사를 짓던 지역인데 도시화의 진전으로 아파트 등 건물들이 들어선 것같았다.

 

 

 

고급 아파트와 어려운 서민들이 같이 사는데 살아가는 방식은 틀린 것같았다.

 

오전에 일을 보고 점심을 먹은다음에 상해박람회 장소를 구경하러 갔다.

박람회가 끝나고 이제는 상설전시회관으로 활용하는 것같았다.

 

 

 

버스로 지나가다 보니 상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병따게 모양의 빌딩이 끝은 구름에 살짝 걸치어 있었다.

 

 

 

다음 일정은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청사는 구경할 수 있었는데 내부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광복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본거지다. 1919년 4월 11일, 독립운동 대표 29명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졌고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임시헌장이 공포됐다. 이어 4월 13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하지만 일본의 계속된 탄압으로 독립투사들은 항저우, 충칭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상하이 내에서도 임시정부는 일본의 눈을 피해 여러 번 이전했는데, 현재 우리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로 알고 있는 이곳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3층짜리 건물이다. 낡고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빨간 벽돌집이 바로 임시정부 청사다. 1층으로 들어서면 조선족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약상과 청사 복원에 관한 내용을 다룬 10분 분량의 비디오를 시청한다.

 

그러고 나서 청사를 견학하는데 2층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동녕 등이 사용했던 집무실이 있고, 3층에는 숙소와 전시관이 있다. 임시정부 청사로 쓰일 당시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 생생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다만, 청사 안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시내를 지나가다가 부동산 중개소에 있는 아파트 가격을 보았는데 제일 비싸게 보이는 집은 5,500만 위안으로 우리 돈으로 치면 100억원이 넘는 것이다.

상해는 빈부격차가 극과 극인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중국의 정책 목표속에는 빈부격차 해소가 큰 이슈가 될 것같았다.

 

 

높은 가격의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한다.

 

 

 

다음 일정은 신천지에서 상해의 활기를 느껴 보는 것이다.

서울의 명동처럼 수많은 까페, 음식점, 쇼핑을 위한 상점이 밀집되어 있다.

 

 

 

 

 

 

 

 

 

 

 

 

 

신톈디, 新天地(신천지)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쇼핑가(街).

 

북부광장은 면적 3만㎡로, 신톈디의 제1기 재건축 건물들이 집중된 곳이다. 현재 상하이에서 가장 세련된 쇼핑장소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레스토랑과 술집, 바(bar), 커피숍, 테라스 카페, 상점, 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고, 예술가들의 아트숍도 자리하고 있다. 석고문은 아직 상하이의 옛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각의 내부는 현대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고전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부광장에는 고층의 현대적인 건물이 많아 옛 건물과 좁은 길의 북부광장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 상해(上海)시 태창로(太倉路)에 위치한 신천지(新天地)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란 뜻이다. 본래 프랑스 조계지(중국침략근거지)로 개발돼 근대 건축물이 밀집해 있었으나 상하이 시정부가 그동안 공동 주택 단지로 이용되던 옛 조계지를 10여 년 전 상업지구로 변모시켰다.

 

그 결과 중국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스쿠먼(석고문) 형태의 근대 건축물들이 식당·술집·찻집·상점·공연장 등으로 개조돼 운영되어 왔다. 신천지의 세련된 스쿠먼 블록은 2001년 홍콩 재벌이 상하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조성한 거리로 동서 약 300m, 남북 약 500m의 직사각형의 구조로 이뤄졌다.

 

낮에는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해가 기울어지면 낭만적인 유럽풍의 경치가 그야말로 상해의 신천지를 이루면서 노천 바와 카페에는 상해의 젊은이들과 외국인들로 활기를 띤다.

 

신천지를 한 바퀴 돌며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상해에서의 추억을 만든 후 근처에 있는 태평교 녹지에 들러 신천지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다. 신천지 문화는 상해에서도 분명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고급 문화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중심부쯤 되는 곳에 작은 분수와 함께 3명의 신선동상이 있었는데 이 분들이 수, 복, 재를 담당하는 신선이라는 것이다.

 

 

 

신천지에 갔으니 까페에서 차한잔을 하고 왔는데 까페의 분위기가 서울 명동의 어느 까페 같았다.

 

 

 

신천지 옆에는 인공호수 같은 호수도 있었는데 근처는 수입차들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푸동에 있는 족마사지집에서 발 마사지를 했는데 푸동에 있는 이 집들은 아마도 우리 돈 8천원정도를 하는 저렴한 가격에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발마사지하는 아가씨, 아주머니도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사시는 것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아파트 입구에 불법 삼륜택시가 줄 서 있는 것이 신기했다.

 

 

 

서민이 사는 동네는 청소도 잘 되어 있지 않고 아침에는 노점에서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사서 먹으며 야채상들이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큰 길 옆에 있는 과일가게 구경도 했는데 과일 배열이나 상점 규모가 상당히 컸다.

 

 

 

중국사람들은 잠옷을 입고 잘 다닌다고 하더니 정말 특이했다.

 

 

 

오늘은 소주를 구경하는 날인데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렸는데 휴게소 건물이 ㄱ 자로 되어 있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소주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졸정원을 가 보는 것이다.

 

 

 

 

 

 

 

쑤저우 졸정원, 蘇州 拙政園(소주졸정원)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의 고성(古城) 동남쪽에 있는 정원.

 

부지면적 5만 1950㎡이다. 명나라 정덕제(正德帝) 때인 1509년 어사(御史) 벼슬을 지낸 왕헌신(王獻臣)이 낙향하여 다훙사[大弘寺] 고적지를 증축하여 조성하였다. '졸정(拙政)'이라는 명칭은 진(晉)나라 시인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서 따왔다.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이 그림 소재로 삼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허위안[?和園]·청더퍼서산장[承德避暑山莊]·류위안[留園]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힌다.

 

1961년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고, 1997년 쑤저우원림[蘇州園林]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온 개인정원으로서, 고대 강남지방 관료들이 거주하던 주택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정원은 동부·중부·서부의 3부분으로 나뉘며, 호수가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동부는 지세가 시원하게 트여 있고, 평평한 언덕 위에 부용사(芙蓉?)·천천정(天泉亭) 등이 산재해 있다.

 

 

 

주 건물인 난설당(蘭雪堂)에는 〈졸정원전경도(拙政園全景圖)〉가 진열되어 있고, 그 북쪽의 가산(假山) 꼭대기에는 방안정(放眼亭)이 우뚝 솟아 있다.

 

 

 

중부는 졸정원의 정수가 모인 곳으로, 주 건물인 원향당(遠香堂)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의 수기정(?綺亭), 서쪽의 의옥헌(倚玉軒), 북쪽의 연못 등 세련된 정경이 두루마리 화폭처럼 펼쳐진다.

 

 

 

호수 중앙의 작은 가산에 대상정(待霜亭)과 설향운울정(雪香雲蔚亭)은 원향당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밖에 하풍사면정(荷風四面亭)·견산루(見山樓)·향주(香洲)·소비홍(小飛虹) 등이 있다.

 

 

 

 

 

서부는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 뻗은 회랑과 수면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운 누각 등이 수려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주 건물인 삼십육원앙관(三十六鴛鴦館)과 십팔만다라관(十八曼陀羅館)은 합쳐서 네모꼴을 이루고, 네 모퉁이에는 각각 곁채가 한 칸씩 딸려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중국 원림 건축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건물 안에서 노래를 부르면 사방으로 은은한 여운을 남기며 울려퍼진다. 호수 서쪽에는 유청각(留聽閣)이 있다.

 

호수 바로 옆에 축조한 수헌(水軒)은 뒷산의 삿갓정자와 더불어 부채를 펼쳐놓은 모양을 이룬다. 서북쪽에 조성한 가산 위에는 부취각(浮翠閣)이라는 8각형의 2층 누각이 있는데, 졸정원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연못 북쪽의 도영루(倒影樓)에는 배문읍심지재(拜文揖深之齋)라고 부르는 방이 잇는데, 심주(沈周)·문징명의 신상과 〈왕씨졸원기(王氏拙園記)〉〈보원기(補園記)〉 등의 비석이 진열되어 있다.

 

소주의 졸정원은 중국의 4대정원에 해당되고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수많은 내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었다.

 

 

동양화에 보면 괴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졸정원에 정말 괴석이 많았다.

괴석은 기암괴석을 보러 명산에 가는 것을 대리만족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웅장한 남성의 상징인지 알 수가 없다.

 

 

 

 

 

기암괴석과 나무, 그리고 연못이 어울리는 정원, 이 정원이 바로 중국 정원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졸정원에서 차경이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멀리 있는 북사탑을 졸정원의 정원에 가져와서 보는 것이다.

 

 

 

 

쑤저우시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인민로의 북부에 있는 강남 지역에서 제일 높은 76m의 탑이다. 원래 창건한 것은 양(梁)나라 때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남송(南宋)때인 1153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나무와 벽돌로 만든 8각형 9층의 불탑으로 쑤저우시의 심벌이기도 하다. 나무 계단으로 7층까지 올라가면 쑤저우시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이 탑이 있는 북사(北寺)는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쑤저우시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졸정원 속에 분재원도 있었는데 수많은 분재가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고 여기서는 분재원을 분경원이라고 하고 있었다.

 

 

 

졸정원을 나오니 각종 기념품 상점과 과일 행상들이 있었다.

 

 

 

 

 

 

소주에 한산사도 있어 한산사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쑤저우 한산사, 蘇州 寒山寺(소주한산사)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시[蘇州市]의 펑차오진[楓橋鎭]에 있는 사찰.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때 창건되었다. 원래 명칭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名塔院)이었으나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선승(禪僧)이자 시명(詩名)이 높았던 한산(寒山)이 주지를 맡았다고 하여 한산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청(淸)나라 광서제(光緖帝)와 선통제(宣統帝)에 걸쳐 대규모 개수사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존하는 건축물들은 모두 이때 보수 및 재건된 것이다. 1949년에도 대대적 복구 작업이 이루어져 중요한 사찰이자 명승지로 발전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산문(山門)·대웅보전(大雄寶殿)·장경루(藏經樓)·종루(鐘樓)·비랑(碑廊) 등이 있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있는 나한당(羅漢堂)에는 녹나무로 만들어 도금한 500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한산사에서 가장 진귀한 유물로 꼽힌다. 두 번째로 진귀한 유물은 장경루에 보존된 송(宋)나라 때 제작된 《금강경(金剛經)》 석각이다.

 

 

 

 

 

비랑에는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악비(岳飛)·당인(唐寅)·문징명(文徽明)·캉유웨이[康有爲] 등의 시문이 새겨진 비석, 양저우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나빙(羅聘)이 그린 습득(拾得)의 화상(畵像)을 새긴 비석 등 진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장계(張繼)가 한산사의 종소리에 나그네의 시름을 담아 묘사한 〈풍교야박(楓橋夜泊)〉은 정경(情景)이 어울리는 고금(古今)의 명시(名詩)로서 민간에도 널리 전하여졌으며, 이로부터 한산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종소리와 고찰(古刹), 객선(客船), 고기잡이배의 등불 등은 관광객이 다투어 감상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때 주조된 거대한 종이 보존되어 있는데, 1979년부터 제야(除夜)에 타종(打鐘)하는 민속행사가 재개되어 고찰의 정취가 더욱 짙어졌다.

 

제일 먼저 본 것은 한산사의 풍교였는데 그 다리 밑으로 보는 풍광도 볼만했고 자세히 보니 풍교의 이름은 강촌교로 붙여져 있었다.

 

 

 

 

 

한산사의 하이라이트는 진명보탑인 것같았는데 그 위에 올라가서 한산사와 소주의 풍광을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불교에서는 한산과 습득의 고사라는 이야기가 있어 궁금했는데 그 한산이 주지로 있던 한산사에 오게 된 것이다.

여기 한산사에는 한습전이라는 전각이 한산과 습득의 일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산 습득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貞觀: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 간에 천태산 (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이 계셨는데, 세상에서는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이들 세분을 국청삼은(團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 한다.

 

비록 이 세 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이란 이름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嚴)이란 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늘 다 떨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나물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가끔씩 회랑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욕을 하곤 해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작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벽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길렀다고 해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주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주곤 했다.

 

한번은 주지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아래 목장을 지나는데 한산과 습득이 소떼와 더불어 수작하고 있음이 보였다.

 

먼저 한산이 소떼를 향하여 "이 도반들아 소 생활 맛이 어떤가? 시주밥을 먹고 놀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더니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무상법문을 나눌까해서 왔으니 내가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라.

 

첫번째로 동화사 경진율사"하고 호명하니 검은 소 한마리가 ‘음매-에’ 하고 한산 습득의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는 한산이 지적한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천관사 형지법사" 이번에는 누런소가 또 ‘음매-에’ 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번째 소가 간 곳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이렇게 하기를 30여회. 백여마리의 소떼중에 30마리는 스님들의 후신이다.

 

말하자면 시주밥 먹고 공부 않은 과보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모골이 송연하여 쫓기듯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산 습득이 미치광이인줄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이 분명하다"

 

일찌기 여구륜(閒丘亂)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의 자사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원이 모두 소용없는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은 자기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풍간스님이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아팠더냐 싶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시온지 ?" "국청사에서 불 때 주고 그릇 씻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라고 거듭 묻는 말에 대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가 버렸다.

 

이에 자사가 예물을 갖춰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 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깜짝 놀라며 "대관(大官)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한산이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에는 다시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등의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 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은 완전히 닫혀져 버렸다.

 

여구륜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속의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 (詩) 약 300수를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隨集)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오고 있다.

 

나오기 전에 관음봉이라는 괴석이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그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다음 일정은 소주 운하를 구경하는 것이다.

 

하늘엔 천당, 땅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

 

중국 사람들은 산물이 많고 경치가 좋은 항주와 소주를 '지상의 천당'으로 꼽았다. '소주에서 나서 항주에서 살고 광주(廣州) 가서 먹고 류주(柳州) 가서 죽자'는 말도 있다. 부유하고, 놀기 좋고, 음식을 잘하고 먹기 좋고, 관을 잘 만드는 곳을 각각 이르는 말이다.

 

소주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4천 년 전부터 고대 문화가 일어났으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이다. 특히 원(元)나라 때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이곳을 방문해, 자신의 고향 베니스와 매우 닮은 소주를 격찬하여 '동양의 베니스'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실 소주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베니스를 '서양의 소주'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소주는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상해, 서쪽으로는 남경, 남쪽으로 항주에 맞닿아 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었는데, 특히 장강(양자강 揚子江) 이남에 위치한 강남지방에는 호소(湖沼)가 넓게 발달해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 하천이나 운하가 중요한 교통수단을 형성하고 있다. 소주도 이런 운하에 에워싸인 물의 도시이다.

 

소주를 다녀보면 시내 전체가 운하다. 소주는 총 길이 35킬로미터에 이르는 직사각형의 인공 운하인 외성하(外城河)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이 운하를 통해 물자가 운송되고 있고, 시내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물이 교통과 생활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복개되지 않은 큰 하수도를 연상케 하는 더러운 물?이른 아침 작은 운하 한 켠을 다니는 나룻배 한 척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배는 운하를 다니는 낭만적인 배가 아니라 밤사이 더러워진 운하의 오물을 제거하는 청소선이다?이긴 하지만 이색적인 도시 풍경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주를 물의 도시(水鄕)라 부른다.

 

소주의 형성은 6천 년 전부터 원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나오는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천하를 9개 주(九州)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소주는 옛날 양주(揚州)에 속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소주는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인 오(吳)나라의 도성이 됐으며, 기원전 473년에 월(越)나라에 속하게 되고, 다시 초(楚)나라에 합병된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삼국시대 오나라가 잠시 소주에 도읍을 정하기도 했다. 지금의 소주라는 명칭은 수(隋)나라 때 개칭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후, 소주는 한 나라의 도성이 되지는 못했으나 장강 유역의 주요 교통 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소주는 장강 유역의 풍부한 쌀을 장안(長安)이나 낙양(洛陽) 등지로 직송하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즉, 경제적인 필요성에 따라 운하가 필수적이었다. 수 양제(煬帝)는 605~611년간 운하를 준설했는데, 완공되었을 때 운하는 장장 2천3백 킬로미터였다고 한다. 사실 운하의 준설공사라고 해야 수로를 새로 굴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하천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북쪽의 북경·천진에서 남쪽의 항주에 이르는 큰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강을 넓히고 이어서 운하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운하는 백성들의 생활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거의 황실의 필요에 따라 이용됐다.

 

강남 지방도시의 전형인 소주의 전체적 모습은 남송의 평강성(平江城)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주의 도로와 하천은 북송(北宋)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는데, 소주의 문묘(文廟)에 남송 때의 평강성을 그린 석판(가로 1.4미터, 세로 2미터)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도시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지방지(地方志)》의 기록에 나타나는 평강성은 물의 도시 소주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오군(吳郡)은 옛 도읍을 명명하여 택국(澤國)이라 한다. 진택(震澤)·태호(太湖) 등이 크고 넓으며 나아가 동으로 오호(五湖)에 접하고, 더욱 더 동으로는 평강(平江)의 성문 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종횡으로 교차하고, 주민은 그에 따라 수리의 편리함을 얻고 있다. 배를 젓는 사람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모두가 이에 의해 이쪽저쪽으로 통하기 때문에 교량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평강도(平江圖)〉는 소주의 도시 윤곽·도로·하천·교량 분포 및 건축물의 위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 평강성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으로는 장방형의 성곽이 에워싸고 있다. 주변으로 5곳의 성문이 있는데, 운하를 위한 수문과 보행을 위한 성문이 조합되어 있다.

 

성내의 수로 분포는 상당히 조밀하게 되어있는데, 수문을 열어 물을 성내로 인입할 경우, 지형이 높은 북서쪽으로부터 낮은 동남쪽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신선한 다량의 생활용수를 확보할 수 있으며, 홍수 때에는 문을 닫아 물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성 내부에는 동서 방향의 도로가 많이 발달되어 있으며, T자형으로 교차하는 가로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도시 내 이동체계는 대부분 수로와 도로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대지의 전면은 가로에 면하고, 후면은 하천에 면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수로가 일용품·연료 및 수공업 원료 등의 운반 통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주의 모습은 동서, 남북의 직교 그리드 위에, 운하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주의 도시 구조는, 송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지도가 그려지기 400여 년 전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소주의 풍경을 "7언 8문 60방 등이… 동서남북으로 다리가 서로 교차되어 있다(七堰八門六十坊… 東西南北橋相望)"고 묘사하고 있는데, 방(坊)이 주변 4면이 운하나 도로로 둘러싸인 구획을 말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당나라 때 소주의 모습은 60개나 되는 '방'이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배열된 도시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성의 중심이 되는 '부아(府衙)'가 약간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그 안은 6개의 구(區)로 나뉘어져 설청(設廳)·부원(府院)·청사(廳司)·병영(兵營)·주택 등의 건물이 있고, 배면에 화원(花園)이 있다. 〈평강도〉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재도 이 지도를 가지고 소주를 돌아다녀도 될 정도이지만, 권위의 상징인 이 부아(府衙)는 약간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부아의 좌우 부분은 남북 방향으로 실제보다 길게 묘사되어 있고, 아래 윗부분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묘사되어 있다.

 

소주는 시대적으로 서쪽 지역이 더욱 발달했다. 서쪽 지역에 대운하가 있고, 서북쪽의 문인 '창문(?門)'은 소주를 지탱해주는 상업 지역의 핵으로 발달했다. 〈평강도〉가 만들어질 당시, 성의 동부 지역은 농지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도시화가 그다지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 후 저습지대의 농지 개발이 이뤄지고 성외의 동쪽 일대가 쌀의 생산지가 되어 점차 인가가 밀집하게 된다.

 

관공서나 저택·점포가 많은 서쪽에 비해, 동쪽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직물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의 작업장이 많았다. 또한 중국 정원을 대표하는 유명한 졸정원이나 우원 등은 모두 이 지역에 있다. 이러한 풍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옛날 마르코 폴로가 소주를 방문했을 당시를 상상해보면, 가히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연상시켰을 법하다.

 

지금은 성곽 도시 소주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반 이상이 매립됐지만, 성 외곽의 운하(外城河)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잘 남아있다. 외성하 내부에는 대규모 원림이 있으며, 그 동남쪽 한 곁에 19세기 말 미국이 건축한 학교 및 병원 건물을 이용하고 있는 소주대학이 있다. 이러한 소주의 도시 풍경도 시대에 따라 변해, 도시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인민로에는 자동차와 자전거 행렬이 줄을 잇고 경음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소주라 무성한 원림,

예로부터 사방으로 통하는 나루터.

맑고 고운 풍토에다

순한 백성들.

작은 골목에도

열 가구에 주막 세 군데.

잘사는 부자들은

닷새마다 새로 장을 보았다지.

운하 굽이마다

노를 휘젓고,

거리거리엔 밤새도록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네.

4백만 섬 곡식을 공출했다니,

오나라 사람만큼 수탈당한 이 또 있으랴.

 

長洲茂苑古通津 風土淸嘉百姓馴 小巷十家三酒店 豪門五日一嘗新

市河到處堪搖櫓 街巷通宵不絶人 四百萬糧充歲辦 供輪何處似吳民

- 당인(唐寅), 〈고소잡영(姑蘇雜詠)〉 -

 

당인(1470~1523)은 명나라의 시인이자 서화가로, 강소성 소주 사람이며, 시문이 뛰어나 축윤명(祝允明)·문징명(文徵明)·서정경(徐禎卿) 등과 함께 오중4군자(吳中四君子)로 일컬어졌고, 또한 서화에도 뛰어나 심주(沈周)·문징명·구십주(仇十洲) 등과 함께 명4가(明四家)로 일컬어졌다.

 

 

길을 가다보면 길 바로 옆에 소주 운하가 있는데 정말 신기했다.

여기는 물 높이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유람했는데 처음에 만난 다리가 지혜교였다.

 

 

 

운하따라 가다보니 사찰같은 건물, 병원, 호텔, 차루 등의 각종 건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다리 하나 하나도 모양을 모두 다르게 만들어 다리는 보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는 집이 운하에 바로 접하여 있다는 것이 운하가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배들중에는 노를 저어서 가는 배도 있다는 것이다.

 

 

 

 

운하 옆으로 빨래도 널어두고 화분도 놓아두며 담에는 풀들도 자라는 곳도 있었다.

 

 

 

 

 

 

우리같으면 효자각인 효절이라는 편액도 보였다.

 

 

 

여기도 우리와 같이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운하 투어를 마치고 차를 타고 가는데 소주의 랜드마크인 호구탑이 보였다.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는 상해의 인사동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강루(태강로)에 있는 티엔즈팡(전자방)를 가보기로 했다.

 

 

 

 

 

상하이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중국식 발음으로 티엔즈팡이라 불리는 전자방(田子坊)이다. 상하이의 떠오르는 관광 명소로 예술과 식도락의 거리로 잘 알려져 있다. 상하이 도심 태강로(泰康路)에 있는 구역으로 공식 명칭은 '상하이문화산업공원'이다. 건물과 골목이 바둑판처럼 나눠져 있어 각 건물마다 문패처럼 숫자가 걸려 있다.

 

전자방을 거닐다 보면 서울의 인사동과 삼청동이 연상된다. 도심 속 예술의 유통 공간으로 기능할 뿐 아니라 동시에 맛과 분위기가 뛰어난 식당 겸 카페가 즐비하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같이 각종 공예품과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으며 외국인과 중국인 모두가 많이 오는 것같았다.

 

 

 

 

 

 

 

 

다음에 간 곳은 상해의 명동거리라고 할 수 있는 남경로였다.

 

 

 

남경로(南京路/난징루)

상하이 심장부인 인민광장과 황포강이 흐르는 외탄이 동서로 각각 맞닿아 있는 곳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상점부터 최신 유행 상품을 취급하는 대형 쇼핑몰 및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상해의 명동이라 불리며, 관광객이 항상 몰리는 곳이다.

차는 다닐 수 없으며, 대신 꼬마기차가 다니고 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딩타이펑이라는 유명한 딤섬 전문집, 옌윈로우라는 북경오리 전문집, 오월인가면관이라는 면 전문집 등이 있고,

 

대표적인 쇼핑몰로는,

프라다 매장, 헝룽광장, 818광장, 353광장 등이 있습니다

 

남경로 쪽 유명한 호텔로는

JW 메리어트 호텔, 더 포트만 리츠칼튼 호텔, 상하이 르 로열 메르디앙 등이 있으며,

 

관광명소로는,

상하이 상성 서커스 전용 극장, 상하이 미술관, 상하이 현대 미술관, 정안사가 있다.

 

주 상하이 영국 영사관, 주 상하이 핀란드 총 영사관도 난징루에 위치해 있고, 한국의 드림 성형외과도 있다.

 

난징루라 불리는 남경로는 상하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상점 거리로 중국 제일의 쇼핑가다. 총 길이만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백화점·호텔 등이 위치해 주말이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상하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로인 남경로는 19세기 초부터 다양한 업종의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남경로는 인민공원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남경동로에는 제일백화점이라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백화점을 비롯해 여러 백화점들과 패션 상점들이, 남경서로에는 중국 전통 공예품과 차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국의 명동에 비교될 수 있는 이곳은 거리 폭이 명동의 두 배 정도여서 걸어 다니기가 훨씬 편하고 차가 다니지 않는 대신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들을 태우고 다닌다. 또한 거리 곳곳에 쉴 수 있는 넓은 의자가 있어 지친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다.

 

 

 

 

이 남경로에는 우리 나라 명동처럼 상해에 있는 젊은이와 외국 관광객은 모두 모이는 곳으로 높은 빌딩이 보이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오늘 멋진 옷을 입은 아가씨 등 젊음을 즐기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황푸강(황포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황푸 강(?浦江)은 타이후(太湖, 태호)에서 발원해서 전체 113km를 흘러간다. 중국 상하이의 중요한 수원으로 장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장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최후의 지류이다.

 

주요 지류는 소주하(?州河), 온조빈(?藻浜), 천양하(川楊河), 정포하(淀浦河), 대치하(大治河), 사탕(斜塘), 오나설경(?泄經)과 대묘항(大?港)을 흘러간다.

 

황푸강 위의 다리 푸동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가려면, 반드시 아래의 다리 중 하나는 지나치게 된다. 보통 루푸대교나 난푸대교 중 하나를 지나치게 된다. 난징루, 와이탄 등 대부분의 상하이의 관광지는 이곳을 넘어 푸시로 가야 하므로, 보통 숙박도 푸시에서 하게 된다.

양푸 대교(楊浦大橋), 난푸대교(南浦大橋), 루푸 대교(盧浦大橋), 수푸 대교(徐浦大橋),펑푸 대교(奉浦大橋)

 

볼거리는 황푸 공원(黃浦公園):상하이 최초의 공원으로 외백도교를 따라 황푸 강변을 나오면 보이는 공원, 와이탄(外灘):황푸 강과 상하이의 고층 빌딩, 유람선 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상하이의 주요 관광 포인트, 뒷편으로는 19세기 이후~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고풍스런 건물들이 있다. 외백도교(外白渡橋), 인민영웅기념비 등 볼거리가 풍부하고, 진마오 빌딩, 동방명주탑이 가장 잘 보인는 포인트다

 

푸동 지역에 있는 468m인 동방명주와 420m인 88층의 끝이 펜촉같이 생긴 금무대하 빌딩, 492m인 101층 상해세계금융센터 빌딩이 보인다.

 

와이탄 거리의 건물이 야경은 볼만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갈대밭 사이로 굽은 골목길만 있었다고 하는데 100년 걸친 도시 계획에 따라 와이탄 일대가 개발되었다. 북쪽 와이바이뚜차오에서 남쪽 진닝동루까지 1.5km 정도 아치형인데, 영국식, 프랑스식, 스페인식, 그리이스식, 르네상스식 건물로 채워졌다. 그 건너편에 있는 반장다다오 거리의 건물들이 설치해놓은 빛과 건물 높이에서 야경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와이탄 거리에 있는 다양한 양식의 석조 건물의 야경도 환상적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 금무대하빌딩과 동방명주가 보이는 곳에서 시작했다.

상해 황포강 유람선 야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이 모두가 상해시 당국의 정책적 고려라는 것이다.

 

 

 

 

 

 

 

 

 

 

 

형형색색이 높이에 따라, 건물 형태에 따라 다른 조명을 보여주어 상해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것같았다.

 

 

그리고 야경을 보려고 운행하는 유람선도 각각이 다른 조명과 광고를 하고 있어 이것도 볼만했다.

 

 

   

황포강 야경을 구경하고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하여 포동의 족마사지 집에서 족 마사지를 하고 호텔로 들어갔다.

 

 

자고 일어나니 그동안의 날씨 중에서는 가장 좋은 날씨였다.

길가다 보니 병뚜껑 건물도 오늘은 비교적 잘 보였다.

 

 

 

어제 저녁에 의견을 모아 오늘 당초 일정에 없던 동방명주를 구경하러 갔다.

동방명주도 상해의 상징이라서 구경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국가원수급 귀빈이 온다고 의전까지 해서 혼잡했다.

 

 

 

드디어 동방명주에 올라갔는데 정말 날씨도 좋고 전망이 좋았다.

 

 

 

 

 

 

 

 

 

 

 

 

 

 

 

 

 

 

 

황포강과 고층빌딩들이 잘 어울러져서 대만 101은 밑에 볼 것이 별로 없었음에 비해 너무 볼만했다.

 

바닥이 유리판이 되어 있는 곳도 있었는데 정말 아찔함에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념사진도 담고 그랬다.

 

 

 

 

 

동방명주 구경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내려와서 박물관이 있어 그곳을 구경했다.

상해의 과거역사와 근대화과정의 역사를 사진과 조형물을 통해 전시하고 있었다.

 

 

 

 

 

 

 

 

 

동방명주 구경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예원을 구경하러 갔다.

 

 

성황묘 부근은 상해에서 가장 번잡한 곳 중 하나이다. 이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에 원림이 있다니, 묘한 느낌이었다. 예원의 삼수당(三穗堂)에 걸려 있는 '도시 속의 산림(城市山林)'이란 말이 거짓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 예원 안에는 정상회의 영향으로 외국인 사절단과 관광객으로 무척 붐볐다.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사진 찍느라 부산했다. 저들은 과연 영국군이 이 원림을 유린했던 역사를 알고 있는지? 청 도광(道光) 22년(1842),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영국군이 예원을 강점하여 유린했고, 1860년 태평군(太平軍)이 상해로 진군했을 때, 청 정부가 영국과 결탁해 성황묘와 예원을 외국 군대 주둔지로 사용했다.

 

그들은 원림 안에 있던 돌을 캐내 연못을 메우고 서양식 군대 막사를 지었다. 원림의 아담한 면모는 이렇게 파괴됐다. 게다가 근대 이후, 20여 개의 공상행업소(工商行業所)가 나누어 점유하게 되면서부터 이곳은 다방과 술집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956년부터 약 5년 동안 대대적으로 수리해 개방했지만, '중국 동남지방 원림의 으뜸(東南名園冠)'이며, '기이하고 빼어나기가 중국 동남쪽의 최고(奇秀甲於東南)'라는 본래의 명성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예원은 효심이 담긴 고아한 원림이었다.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명나라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 반은(潘恩)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원(豫園)의 '예'는 "평안하고 기쁘다"는 의미이다.

 

반윤단은 일찍이 가정(嘉靖)·만력(萬曆) 연간에 사천포정사(四川布政使)를 역임한 적이 있었는데, 가정 38년(1559) 은퇴하고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의 편안한 노후를 위하여 반가(潘家) 주택이었던 세춘당(世春堂, 지금의 오동로(梧桐路) 소학교 자리)의 서쪽 채소밭에 돌을 모으고 연못을 팠으며, 누정을 지으면서 원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공무에 바빠 원림 조성이 지연되던 차에, 만력 5년(1577)에 관직을 사임한 반윤단은 이후 5년 동안 본격적으로 원림 조성에 전력하여 드디어 20여 년 만에 완성했다

 

예원의 건축물은 매우 다양하다. 당으로는 삼수당(三穗堂)·앙산당(仰山堂)·췌수당(萃秀堂)·점춘당(點春堂)·화후당(和煦堂)·옥화당(玉華堂) 등이 있고, 루(樓)로는 권우루(卷雨樓, 앙산당의 2층)·만화루(萬花樓)·장보루(藏寶樓)·쾌루(快樓)·회경루(會景樓)·득월루(得月樓)·장서루(藏書樓)·관도루(觀濤樓)·환운루(還雲樓) 등이 있으며, 정자로는 고정정(古井亭)·유상정(流觴亭)·호심정(湖心亭)·읍수정(?秀亭)·망강정(望江亭)·용취정(聳翠亭) 등이 있다. 그 외에 희대(戱臺)·헌(軒)·사(?)·랑(廊)·곡교(曲橋)·관(觀)·방(舫)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원은 건축도 유명하지만, 돌이 빚어낸 정원 예술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석가산으로는 대가산(大假山)과 소가산(小假山)이 있다. 대가산은 앙산당과 연못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것은 중국 강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하며 가장 규모가 큰 황석(黃石) 가산이다. 절강성 무강(武康)에서 나는 황석으로 쌓았으며, 명대의 유명한 석장(石匠) 장남양(張南陽)이 설계한 것이다. 석벽(石壁)·비량(飛梁)·평교(平橋)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14미터 가산의 정상에는 읍수정이 있고, 그 서쪽 아래에는 태호석으로 만든 소가산 라사동(螺絲洞)이 있다. 라사동의 남쪽에는 조어대(釣魚臺)가 있으며, 그 정상에는 망강정이 있다. 과거 망강정에서는 황포강(黃浦江)의 정경을 관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가산과 소가산은 황색과 흰색 돌의 대비, 그 사이사이의 초목과 연못의 푸른색이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돌이 만든 경관은 또 있다. 그 하나는 미인요(美人腰)이고, 또 하나는 옥영롱(玉玲瓏)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주랑(走廊)에 미인의 농염한 허리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것이 미인요이고, 인옥동문(引玉洞門)을 지나 눈앞에 당당하게 나타나는 것이 옥영롱이다. 옥영롱은 소주의 서운봉(瑞雲峰)·항주의 추운봉(?雲峰)과 더불어 강남 3대 명봉(名峰)의 하나로 불린다.

 

돌 밑에 향로를 설치하면 구멍마다 연기가 나오고, 정상 꼭대기에서 물을 부으면 구멍마다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송 휘종(徽宗)이 수도 변경(卞京)에 간악(艮岳)이라는 정원을 꾸미기 위하여 전국에서 유명한 꽃과 기이한 돌을 수집해 '화석강(花石岡)'이라 불렀다. 그중 몇 개는 운반 도중 사고로 인해 변경으로 가지 못하고 남게 됐는데, 이를 '간악유석(艮岳遺石)'이라 한다. 옥영롱도 간악유석 중의 하나이다.

 

예원의 또 하나의 경관은 조소와 조각이다. 벽돌에 새겨진 〈신선도(神仙圖)〉, 〈팔선과해(八仙過海)〉 등과, 임포(林逋)의 고사가 서린 〈매처학자(梅妻鶴子)〉와 항아(姮娥)의 전설이 담긴 〈항아분월(姮娥奔月)〉 등이 있다. 점춘당 서쪽 담 위에 거대한 용이 덮고 있다. 이것을 천운용장(穿雲龍墻)이라 한다. 조소로 용의 머리를 만들었고, 기와로 용 비늘을 장식했다. 용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려는 기세이다.

 

 

 

 

 

아시아 최대의 현대적인 도시, 거대 금융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는 상해의 중심에 중세 사대부의 단아한 정신이 담긴 원림이 있다는 것이, 오늘의 중국을 움직이고 있는 문화적 기반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원은 인구가 많은 상해에 있다보니 관람객이 너무 너무 많았다.

 

 

 

잠간만 정신을 딴데 팔면 일행을 놓치기 십상이다.

 

 

 

입구를 찾아 들어가는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근처에 있는 상점도 중국식으로 지어 나름대로 신경은 쓴 것같았다.

 

 

 

입구로 해서 들어가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사람에 치이고 길도 연못을 통해 들어갔다.

 

 

 

 

 

 

하여간 도심지에 이런 정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예원 구경을 마치고 포동국제공항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보니 하늘에 특이한 구름이 있었다.

 

 

인천공항에 오니 석양이 지고 있었는데 색감이 특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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