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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5주년을 맞은 2013년, 18집 후 10년 만에 새 음반 19집 <헬로>를 빅히트시킨 조용필은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는 가왕임을 입증했다. 이 19집 음반으로 60대에 ‘국민가수’ 타이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조용필의 저력은 음악을 향한 구도자적 열정에 있다. 어느 한 순가에도 머물지 않고 끝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작은 거인이 내뿜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연령과 계층을 불문하고 모두를 매료시킨다. 창에서부터 동요에 이르기까지 조용필의 음악 장르가 워낙 넓고 다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선 아리랑>, <오빠 생각>, <돌아와요 부산항에>, <단발머리>, <창밖의 여자>, <일편단심 민들레야>, <허공>, <미워 미워 미워>, <비련>, <잊기로 했네>, <뜻밖의 이별> 등의 노래들은 절창이다. 그가 아니면 들어볼 수 없는 명가요가 아닌가.
가요의 전설로 우뚝 서기까지 조용필도 숱한 운명과 부딪히며 시련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그가 맨 처음에 작곡을 하고 불렀던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창밖의 여자>는 그의 인생에 행운의 여신이었다.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
돌아서 눈 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 되어 거리에 서면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릅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당시 <동아방송>이 자랑하던 드라마 연출가 안평선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1979년 가을. <동아방송>의 연속극 모집에 배명숙의 <창밖의 여자>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우선 제목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여자가 왜 창밖에 있나? 뭣 땜에...’
안평선은 대학생 때부터 이름을 떨치던 연출계의 베테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놓고 주제가 작사에서부터 작곡, 그리고 노래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기획을 했다. 다행히 주제가 노래시는 큰 호응을 얻었다. 사랑의 방황 끝에 체험한 진실은 놀라웠다. 신인 여류작가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훌륭해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작곡은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지만, 가수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조용필이 그해 12월 6일자로 방송 활동 금지가 풀렸지요. 그래서 조용필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의 노래를 나는 아주 좋아 했으니까요.”
조용필은 의사가 되라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3 때인 1968년 가출해 동네 친구 3명과 록그룹 애트킨스를 결성하지만 몇 개월 못가 팀은 해체된다. 이후 미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며 R&B, 로큰롤, 소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한 조용필은 1976년 트로트 록 음반에 수록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오르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가수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남산 지하 취조실에서 고초를 겪 다가 이듬해인 1977년 가수 은퇴 선언을 한 뒤 방황한다. 그러다가 <한오백년>을 듣고 감명 받아 내장산, 속리산 등지를 돌며 재기를 꿈꾸던 조용필은 1979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려 막 부활의 기지개를 펴던 시절이었다.
안평선은 긴 방황에서 돌아온 조용필에게 전화를 한다. “작곡은 누가 했으면 한다”는 뜻도 전했다. 그런데 조용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자신이 직접 작곡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그리고 눈도 많이 내렸다. 주제가 취입일은 일요일을 택했다. 경기도 벽제에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녹음실. 스튜디오 시설은 최신 다채널 녹음기였다. 조용필은 간단히 목을 풀고 연습 녹음에 들어갔다.
조용필의 작곡은 그의 노래 못지않게 전율을 느끼게 했다. 특히 후렴에서 찌르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의 이 되풀이 반복 부분은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필이 작곡을 하는 줄 가요계에선 모르고 있었다.
<창밖의 여자>는 30회 연속극이었다. 1980년 1월 첫 방송부터 주제가에 대한 호응도가 컸다. 여기저기서 방송국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안평선은 주제가를 복사하여 음악프로에 집중적으로 배정했다. 방송국 직원들도 노래를 좋아해 따라 부르곤 했다. 조용필의 작곡 재능과 함께 뛰어난 가창력에 탄복하면서.
이렇게 해서 <창밖의 여자>는 공전의 히트를 한다. 부활을 알린 조용필의 득음은 어디서 시작 됐는가가 세인의 관심거리였다. 경상남도 삼천포 사람들은 그가 바닷가에서 득음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남일대 해수욕장의 코끼리 바위는 호젓한 바다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행인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1960년대 전반기는 TV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갓 개국한 민간 라디오 방송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문화방송>, <동양방송>, <동아방송>의 삼국지였다. 연속 방송극은 당시 라디오시대의 꽃이었다.
임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해가 뜨면 달이 가고 낙엽 지니 눈보라 치네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편단심 민들레야
가시밭길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찾아 왔소
이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 또한 조용필이 작곡하여 직접 부른 곡이다. 얼마나 좋은 노래인가. 조용필은 이밖에도 <단발머리> 등 많은 작곡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용필 노래에는 향기가 난다. 우리 삶의 질곡에서 뿜어내는 듯 한 사람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다. 특히 2003년 심장마비로 떠난 사랑하는 아내 안진현 씨와의 사별 이후, 그의 노래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 애틋한 정한을 안겨준다. 아내와 사별 후 조용필은 수년 간 매주 거르지 않고 아내의 산소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 뜨겁고 순수한 사랑은 노래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 그대 알 수가 없네
나 그대 믿을 수 없네
좋았다가 싫어하니 나는
싫어하다 좋아하니 나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믿나
나 이제는 단념 할 거야
1980년에 조용필이 부른 정두수 작사, 김영광 작곡의 <잊기로 했네>이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어이 없으랴
푸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땐
열구비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 보리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울던 때도 있었건만
나는 새로 눈 위에 발자욱을 남기고 날아가면서
남아 일생을 어이타 연기처럼 헛되이 보내오리까
이 몸이 죽어서 세상을 떠날지라도
이름만은 남겨 놓으리라
조용필은 남인수가 부른 김초향 작사, 이봉룡 작곡의 <해 같은 내 마음>을 <사나이 결심>으로 개사해 다시 부른다. 혼이 깃든 듯 한 절창, 그야말로 조용필의 가창력이 돋보이는 노래다.
남인수가 리메이크해서 불렀던 민족가요 <황성옛터>는 초창기 우리 가요사의 최고 명곡이다. 남인수가 그랬듯 조용필도 이 노래를 불러주길 바라는 건 우리 모두의 소망이리라.
-노래따라 삼천리에서-